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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시험장의 부정행위 천태만상 (2) 문제 유출, 수험생과 답안지 대조 채점
1616년 9월 2일, 김령은 서울에서 돌아온 벗
이신승(李愼承)
을 만났다. 김령은 저녁까지 이어진 대화에서 그에게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알성시의
표제(表題)
는 원래 시험장에서 시험 당일 발표하는 것인데, 이를 시험 전에 미리 출제하였다는 것이다. 시험 당일 새벽에 문밖에 모인 선비들은 모두 “오늘 틀림없이 이러저러한 문제가 나올 것이다.”라고 말하였다고 했다. 과연 표제는 예상대로 발표되었고, 시험 감독관과 당색이 다른 사람은 모두들 손을 쓸 수가 없었다고 하였다. 이이첨이 혼자 합격자의 답안지를 8장을 집었고, 3장을 더해 모두 11인이었는데, 합격한 이들은 다 그와 같은 당색인(黨色人)이었다고 한다.
기자헌(奇自獻)
도 그 패거리로서, 아들을 장원급제시켰고, 조카도 높은 점수로 급제시켰다.
시권에 성적을 매길 때에도 여러 유생들이 그 곁을 에워싸고 모였고, 어떤 이는 자신이 지은 글의 서두를 부채에다 써서 시험 감독관에게 펼쳐 보여주니, 감독관도 ‘아무개가 지은 것이로구나.’하며 반색했다고 하였다.
김령은 통탄하고 통탄하였다. 이러한 폐단을 누가 구중궁궐에 아뢸 수 있단 말인가.
개요
배경이야기
원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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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이야기
출전 :
계암일록(溪巖日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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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령(金坽)
주제 : 과거시험, 부정채점, 문제유출
시기 : 1616-09-02 ~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일기분류 : 생활일기
인물 : 김령, 이신승, 이이첨, 기자헌
참고자료링크 :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김령
◆ 조선시대 과거 부정
국가사회를 이끌어 나갈 인재를 등용하는 시험인 과거를 공정하게 운영한다는 것은 국가기강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조선왕조도 국초부터 과거의 부정을 엄격히 단속하여 과거를 비교적 공정히 운영하여 나갔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국가의 기강이 해이해지면서 과거의 운영도 엄격, 공정하지 못하여,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폐단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1) 수종(隨從)의 폐
시험장에는 잡인의 접근을 엄금하고, 만약 함부로 들어오는 자가 있으면 붙잡아 수군(水軍)으로 삼았는데, 임진왜란 이후 시험장의 단속이 소홀해지자 서울의 권세 있는 양반자제들이 시험지를 베끼는 사람, 또는 서책을 가진 사람 등의 수종인을 데리고 들어갔다. 그리하여 조선 후기의 각종 과거에는 수험생들이 많은 수종인들을 데리고 들어갔기 때문에, 입문자의 수가 많아서 큰 혼란이 일어나 밟혀 죽거나 다치는 등의 사고가 잇따랐다. 이에 수종인을 붙잡으면 데리고 온 유생과 함께 형조에 보내어 수군으로 삼는 등의 엄벌에 처하기도 하였으나 큰 효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2) 조정(早呈)의 폐
응시자 수의 증가로 시관들이 시간에 쫓겨 허두 몇 줄만 읽거나 또는 일찍 낸 시험지만을 과차(科次)하는 폐풍이 생겼다. 이것은 수험생들로 하여금 시험지를 서로 먼저 내려고 다투게 하는 폐풍을 낳았다.
이리하여 혹은 글 잘 짓는 사람 4, 5인을 데리고 들어가 상·하단을 나누어 제술하게 하여 합쳐서 빨리 냈고, 심지어는 수권소의 군졸을 매수하여 자기의 시험지를 빨리 낸 시험지책 속에 넣게 하는 폐풍까지도 나타났다.
이에 영조 때는 수권관이 허락하기 전까지는 시험지를 내지 못하게 하였고, 정조 때는 제술의 시한을 시험 문제 출제 후 3시간까지로 정하는 등의 시정책을 강구하기도 하였다.
(3) 협서(挾書)
시험장 안에서 책이나 문서를 가진 자가 발견되면 2식년 동안 과거응시의 제한을 받게 되어 있었으나, 효종 이후 이 금지조항도 해이해져서 수험생들이 공공연히 책을 가지고 들어가 보고 쓰는 경우가 생겼다.
(4) 차술(借述)
시험장에서 남의 제술을 빌리는 차술이나 남을 위하여 제술해 주는 대술(代述)은 엄히 금해서 이를 어기는 자는 장(杖) 100에 도(徒) 3년의 형을 주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 시험장의 단속이 허술해지자 서울의 권세 있는 양반자제들이 글 잘하는 사람 4, 5인을 시험장에 데리고 들어가 각각 제술하게 하여 잘 된 것을 골라 제출하거나, 혹은 글 잘하는 사람이 시험장 밖에서 제술하여 시험장의 서리나 군졸의 손을 빌려 수험생에게 전하게 하였으며, 또 수험생이 시험장을 빠져 나가 집에서 제술하여 오는 경우도 많았다.
이에 영조 때 면시법(面試法)을 실시하여 발표 다음날 대과와 소과의 합격자를 발표 다음날 전정에 모아 각기 지은 글귀를 암송시켜, 암송하지 못하면 차술한 것으로 간주하여 합격취소를 시켰다. 그리고 차술·대술의 형벌을 강화하여 조정의 관료나 생원·진사이면 변방에 충군(充軍)하고, 유학이면 수군으로 삼았다.
(5) 혁제(赫蹄)
시관과 수험생이 짜고 부정 합격을 꾀하는 것으로서, 그 방법도 시관이 수험생에게 시험 문제를 미리 가르쳐 주어 집에서 지어 오게 하는 방법, 몇 개의 글자를 암표(暗標)로 정하여 수험생으로 하여금 시험지에 암표를 쓰게 하는 방법, 수험생이 자기가 제출한 답안에 허두의 문구를 적어서 시험장 안의 서리나 하인의 손을 빌려 시관에게 전하는 방법, 봉미관(封彌官)의 서리를 매수하여 답안지의 자호(字號)를 알아 내어 시관에게 알리는 방법 등이 있었다.
(6) 역서용간(易書用奸)
세도가의 자제들이 자기가 잘 아는 서리를 등록관(謄錄官)이나 봉미관의 서리로 보내어 역서할 때 그들로 하여금 자기의 시험지를 잘 고치게 하는 방법이다.
(7) 절과(竊科)
과거의 부정 중에서 가장 악질적인 것으로 봉미관 및 서리를 매수하여 감합(勘合:채점시 시권은 수험생과 4조의 이름 등을 적은 피봉과 제술한 답안지를 분할하였는데, 채점이 끝나면 합격한 답안지와 그 답안지의 피봉을 골라내어 붙이는 것)할 때 자기의 피봉을 합격 답안지에 붙이게 하여 합격을 꾀한 것이다. 이처럼 남의 합격을 도둑질하는 것이었기에 이를 절과라 하였으며, 또한 적과(賊科)라고도 하였다.
이상과 같은 과거의 병폐는 쌓이고 쌓여서 숙종 때 두 차례의 큰 과옥(科獄)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리고 향시에서의 부정은 더욱 커져 심할 경우 수험생들이 작당하여 시험장을 습격하고 시관을 구타하는 등의 난동이 일어나는 경우도 자주 있었다.
◆
원문 이미지
◆ 원문 번역
병진년(1616, 광해군8) 9월 2일 맑음. 이신승(李愼承)이 보러왔다. 지난달 스무날 후에 서울에서 돌아왔기 때문이다. 대화가 저녁까지 이어졌고 술을 여러 잔 기울였다. 그에게서 다음과 같이 들었다. 알성시 표제(表題)를 기일 전에 미리 출제하였는데 당일 새벽이 되자 문 밖에 모인 사자(士子)들이 모두 “오늘 틀림없이 아무 문제가 나올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한다. 이날 과장에 들어가니 과연 그러하였으니 고관(考官)과 당색이 다른 사람은 모두들 손을 쓸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이첨이 혼자 8장을 집었는데 3장을 더해서 모두 11인 이었는데 다 그와 같은 당색인(黨色人)이었다고 한다. 병판 박 공이 한정국(韓正國)을 억지로 축출하였을 때, 과거유생들의 시권(試券)을 온통 지워서 남은 것이 없었는데 요행히 한 장이 완전하게 남아 있었다고 한다. 어찌 된 연유인지 물어 볼 것도 없이 뽑아서 충원하였으니 바로 호남 유학 강취무(姜就武) 였다고 한다. 지극한 요행이라 하겠다. 기자헌(奇自獻)도 그들과 한 패가 되어 그 아들을 장원급제 시켰고 조카도 높은 점수로 급제하였다고 하니 유영경(柳永慶)이 하지 못한 바를 기자헌이 한 것이다. 또한 시권을 매길 때도 여러 유생들이 그 곁에 에워싸고 모였고, 어떤 이는 자신이 지은 글의 서두를 부채에다 써서 고관에게 펼쳐 보여주니 고관도 ‘아무개가 지은 것이로구나.’ 라고 하였다 한다. 이와 같은 폐단을 누가 구중궁궐에다 아뢸 수 있겠는가. 통탄하고 통탄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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