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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배들의 뼈를 서늘하게 한 윤선도의 상소
1617년 1월 9일,
유학(幼學)
원이곤(元以坤)
이 상소하여, 이이첨(李爾瞻)이 과거시험에서 사사로운 농간을 부려 오로지 자기 당(堂) 사람만을 뽑았다고 하자, 이이첨과 그 일당들은 일제히 변명하였고, 오히려 상소한 원이곤만
형신(刑訊)
을 당하였다. 정국이 이러하자 당시 서른 살이었던
진사
윤선도(尹善道)
가 상소를 올렸다. 그는 상소에서 이이첨의 무리 때문에 나라일이 날로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강력히 주장하고, 이이첨이 권력을 쥐고 함부로 하는 것을 보고도 임금께 아뢰어 조정을 바로잡지 못한 것을 통탄하였다. 이 소가 올라가자 이이첨의 무리들은 크게 놀랐다. 승정원과
양사(兩司)
뿐 아니라 성균관
사학
(四學)의 무리들도 윤선도를 죄주어야 한다고 청하며 이이첨을 칭찬하기를 끝없이 하였다. 이이첨을 필두로 한 대북파의 위세와 권력의 융성함이 대단함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공론을 속일 수는 없는 일이다. 윤선도의 말은 하늘과 땅의 사람과 귀신이 모두 알만한 바로써, 가깝고 먼 곳에서 이 말을 듣고 통쾌해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 강직한 기상은 틀림없이 간신배들의 뼈를 서늘하게 하였을 것이다. 주상이 윤선도의 일을 대신들과 의논하라고 명하니, 영의정
기자헌(奇自獻)
은 병을 핑계대고 나가지 않았고, 우의정
한효순(韓孝純)
은 ‘언로(言路)보다 더 큰일은 없으니 감히 가볍게 의견을 말씀드리지 못한다.’고 하였다. 기자헌이라는 자는 음침하고 간휼하기 짝이 없는 자였다. 윤선도는 상소에서, 이이첨이 과거시험문제를 미리 유출하는 부정행위를 했다는 내용을 자세히 밝혔는데, 이 때 기자헌은 이이첨과 같이 일을 꾸며 아들을 장원급제시킨 자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 일을 논하라 하니, 그 부끄러움은 과연 어떠하였을까. 그가
수의(收議)
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윤선도의 상소에 힘입어, 이이첨의 권력 독점과 국정 농단을 논박하는 상소가 올라왔으나, 대북파에서도 역시 다투어 상소하여 윤선도를 죄주기를 청하였다. 결국 윤선도는 아주 먼 변방에 안치되었고, 이이첨의 잘못을 고한 자들은 차례로 보복을 당하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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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이야기
출전 :
계암일록(溪巖日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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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령(金坽)
주제 : 상소, 권신
시기 : 1617-01-09 ~ 1617-01-16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일기분류 : 생활일기
인물 : 윤선도, 원이곤, 이이첨, 기자헌, 승정원 관원들, 양사 관원들, 성균관 사학의 무리들, 한효순
참고자료링크 :
조선왕조실록
◆ 고산 윤선도의 일생
윤선도(1587(선조 20)∼1671(현종 12))는 조선 중기의 문신·문인이다. 본관은 해남(海南),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해옹(海翁). 아버지는 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을 지낸 유심(唯深)이다. 강원도관찰사를 지낸 숙부 유기(唯幾)에게 입양됐다.
당시 금서(禁書)였던 『소학(小學)』을 보고 감명을 받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18세에 진사초시(進士初試)에 합격하고, 20세에 승보시(陞補試: 성균관 유생에게 시행하던 시험)에 1등을 했으며 향시(鄕試)와 진사시(進士試)에 연이어 합격했다.
1616년(광해군 8) 성균관 유생으로서 이이첨(李爾瞻) · 박승종(朴承宗) · 유희분(柳希奮) 등을 격렬하게 규탄하는 「병진소(丙辰疏)」를 올렸다. 이로 인해 이이첨 일파의 모함을 받아 함경도 경원(慶源)으로 유배됐다. 그곳에서 「견회요(遣懷謠)」 5수와 「우후요(雨後謠)」 1수 등 시조 6수를 지었다.
1년 뒤인 1617년(광해군 9) 경상남도 기장(機張)으로 유배지를 옮겼다가,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이이첨 일파가 처형된 뒤 풀려나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로 제수됐으나 3개월 만에 사직하고 해남(海南)으로 내려갔다. 그 뒤 찰방(察訪) 등에 임명됐으나 모두 사양했다.
1628년(인조 6) 별시문과(別試文科) 초시에 장원으로 합격해 봉림대군(鳳林大君)·인평대군(麟坪大君)의 스승이 됐다. 그 당시 법률로 왕의 사부(師傅)는 관직을 겸할 수 없음에도 특명으로 공조좌랑(工曹佐郞)·형조정랑(刑曹正郞)·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 등을 5년간 역임했다. 1633년(인조 1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뒤 예조정랑(禮曹正郞)·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등을 지냈다. 그러나 1634년(인조 12) 강석기(姜碩期)의 모함으로 성산(星山)의 현감(縣監)으로 좌천된 뒤, 이듬해 파직됐다.
그 뒤 해남에서 병자호란으로 왕이 항복했다는 소식에 접하자 이를 부끄럽게 생각하고 제주도로 가던 중 보길도(甫吉島)의 아름다운 경치에 이끌려 그곳에 정착한다. 정착한 그 일대를 ‘부용동(芙蓉洞)’이라 이름하고 격자봉(格紫峰) 아래 집을 지어 낙서재(樂書齋)라 했다. 그는 조상이 물려준 막대한 재산으로 십이정각(十二亭閣) · 세연정(洗然亭) · 회수당(回水堂) · 석실(石室) 등을 지어 놓고 마음껏 풍류를 즐겼다.
난이 평정된 뒤 서울에 돌아와서도 왕에게 인사를 드리지 않았다는 죄로 1638년(인조 16) 다시 경상북도 영덕(盈德)으로 귀양갔다가 이듬해에 풀려났다.
이로부터 10년 동안 정치와는 관계없이 보길도의 부용동과 새로 발견한 금쇄동(金鎖洞)의 자연 속에서 한가한 생활을 즐겼다. 이때 금쇄동을 배경으로 「산중신곡(山中新曲)」 · 「산중속신곡(山中續新曲)」 · 「고금영(古今詠)」 · 「증반금(贈伴琴)」 등을 지었다. 그 뒤 1651년(효종 2)에는 정신적 안정 속에서 보길도를 배경으로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를 지었다.
다음해 효종(孝宗)의 부름을 받아 예조참의(禮曹參議)가 됐으나 서인의 모략으로 사직하고 경기도 양주의 고산(孤山)에 은거했다. 마지막 작품인 「몽천요(夢天謠)」는 이곳에서 지은 것이다.
1657년(효종 8) 71세에 다시 벼슬길에 올라 동부승지에 이르렀으나 송시열(宋時烈)과 맞서다 관직에서 쫓겨났다. 이 무렵 「시무팔조소(時務八條疏)」와 「논원두표소(論元斗杓疏)」를 올려 왕권의 확립을 강력히 주장했다. 1659년 효종이 죽자 예론문제(禮論問題)로 서인과 맞서다가 삼수에 유배됐다. 1667년(현종 8) 풀려나 부용동에서 살다가 그곳 낙서재에서 85세로 죽었다.
정치적으로 열세에 있던 남인의 가문에 태어나 집권 세력인 서인에 강력하게 맞서 왕권 강화를 주장하다가, 20여 년의 유배 생활과 19년의 은거생활을 했다. 그러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으로 화려한 은거 생활을 누릴 수 있었고, 그의 탁월한 문학적 역량은 이러한 생활 속에서 표출됐다. 자연을 문학의 제재로 채택한 시조 작가 가운데 가장 탁월한 역량을 나타낸 것으로 평가받는다.
문학적 특징은 자연을 제재로 하되 그것을 사회의 공통적 언어 관습과 결부시켜 나타내기도 하고, 혹은 개성적 판단에 의한 어떤 관념을 표현하기 위해 그것을 임의로 선택하기도 한 데에 있다.
또, 대부분의 경우 자연은 엄격히 유교의 세계관과 긴밀한 관련을 맺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 자연과 직접적인 대결을 보인다든가 생활 현장으로서의 생동하는 자연은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그가 자연이 주는 시련이나 고통을 전혀 체험하지 못하고 조상이 물려준 유산을 토대로 풍족한 삶만을 누렸기 때문이다.
정철(鄭澈)·박인로(朴仁老)와 함께 조선시대 3대 가인(歌人)으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이들과는 달리 가사(歌辭)는 없고 단가와 시조만 75수나 창작한 점이 특이하다.
문집 『고산선생유고(孤山先生遺稿)』에 한시문(漢詩文)이 실려 있으며, 별집(別集)에도 한시문과 35수의 시조, 40수의 단가(어부사시사)가 실려 있다. 또, 친필로 된 가첩(歌帖)으로 『산중신곡』, 『금쇄동집고(金鎖洞集古)』 2책이 전한다.
1675년(숙종 1) 남인의 집권으로 신원(伸寃)되어 이조판서가 추증되었다.
◆
원문 이미지
◆ 원문 번역
정사년(1617, 광해군9) 1월 9일 맑음. 계상(溪上)의 이 형(李兄)과 이실이 들렀다. 누운 자리로 맞아 들여 서울 소식을 들었는데 다음과 같다. 지난달에 유학(幼學) 원이곤(元以坤)이 상소하여, 이이첨(李爾瞻)이 과거(科擧)에서 사사롭게 농간을 부려 오로지 자기 당 사람만 뽑았다고 하자, 이이첨이 차(箚)을 올려 발명하였고, 홍문관에서 이리저리 장주(章奏)하여 죄를 청하였다. 마침내 임금이 명을 내려 원이곤을 형신(刑訊)하게 하였다. 충주사람 민준(閔濬)은 이이첨의 무리인지라, 상소하여 원이곤을 공격하는데 매우 힘을 썼고, 원이곤의 친구인 이극건(李克健)은 상소하여 스스로 ‘원이곤의 소를 올릴 때 자신도 논의에 참여하였으니 죄를 받기를 청한다.’고 하였다. 그 뒤에 진사 윤선도(尹善道)가 상소하여 이이첨이 위복(威福)을 농단하여 나라 일이 날로 잘못됨을 강력히 주장하고, 또 류희분(柳希奮)과 박승종(朴承宗)은 나라와 기쁨도 슬픔도 같이 해야 하는 대신으로서 이이첨이 권력을 쥐고 함부로 하는 것을 보고도 임금께 아뢰어 조정을 바로 잡지 못하였음을 논핵하였다. 소(疏)가 올라가자 이이첨의 무리들은 크게 놀라, 승정원과 양사(兩司)와 옥당에서는 윤선도를 죄주어야 한다고 청하며 이이첨을 칭찬하기를 끝없이 하였다. 성균관과 사학(四學)의 무리들도 그렇게 하였다고 하니, 그 위세와 권력의 융성함이 지극하였다. 그렇다고 해도 원이곤을 죽일 수 있어도 공론(公論)은 속일 수가 없는 일이다. 더구나 윤선도의 말은 참으로 천지간에 귀신과 사람이 모두 분격(奮激)하는 바로써, 멀리서나 가까이서나 이 말을 듣고 통쾌해 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그 강직한 기상은 틀림없이 권간(權奸)들의 뼈를 서늘하게 하였을 것이다. 가상하고도 가상하도다.
정사년(1617, 광해군9) 1월 16일 새벽에 판사 형이 와서 평보 형 등 여러 사람과 할머니 기제사를 지냈다. 나는 병으로 참례하지 못했으니 마음이 아주 편지 않았다. 밥을 먹은 뒤에 이실도 왔다. 윤선도의 소초(疏草)를 비로소 직접 보았다. 우리나라에 이런 사람이 있어 한 줄기 원기가 이 사람에 힘입어 부지되는 것이리라. 이이첨이 또 차를 올려 발명하였다니, 그 꾀는 임금을 속일만하고 말은 잘못을 꾸며 댈 만하다. 그렇다고 해도 그가 행한 실상은 가릴 수 없는 것이 있으니, 어찌 손가락 하나로 태산을 가리려는 것과 다르겠는가? 임금을 속인 죄는 위로 하늘에 통하는 것이거늘, 이루 말로 다 할 수 있겠는가? 승정원과 옥당, 그리고 양사의 계차(啓箚)도 모두 전달 받아 보았다. 정원에서는 한찬남(韓纉男)과 임취정(任就正) 무리들, 양사에서는 대사헌 남근(南瑾), 집의(執義) 김질간(金質幹), 장령(掌令) 정도(鄭道)․임건(林健), 지평 홍요검(洪堯儉)․남궁경(南宮擏)과, 대사간 정조(鄭造), 사간 오여은(吳汝檼), 헌납 류여각(柳汝恪), 정언 한희(韓暿), 옥당 교리 강련(姜繗)․오여발(吳汝橃), 부교리 임성지(任性之)․정준(鄭遵), 수찬 류화(柳鞾), 부수찬 황덕부(黃德符), 정자(正字) 남명우(南溟羽)․조유선(趙裕善) 같은 무리들인데, ‘역적을 성토하였다[討逆]’ ‘역적을 비호하였다[護逆]’ 는 말로 이이첨을 포양(襃揚)하고 다른 사람을 죄주는 제목으로 삼으며, 충효청빈(忠孝淸貧) 조행절의(操行節義)라고 하는 말로 이이첨을 칭송하고 완평군(完平君) 이원익(李元翼)을 배척하였다. 한음(漢陰)과 일송(一松)을 사특한 무리라고 하였고, 윤선도에게 중죄를 줄 것을 청하였다. 그 밖의 다른 무리들은 말할 것도 없으나. 경허(景虛)도 이런 지경에 이르러 자신이 이미 돌아갈 곳을 결정하였으니, 탄식할 일이다. 주상이 윤선도의 일을 대신들과 의논하라고 명하니, 영의정 기자헌(奇自獻)은 병을 핑계대고 나가지 않았고, 우의정 한효순(韓孝純)은 ‘언로(言路)보다 더 큰일은 없으니 감히 가볍게 의견을 말씀드리지 못한다.’고 하였다. 저 기자헌이란 위인은 음침하고 간휼하기가 비루한 사람 중에서도 더욱 심한 자이다. 지난 가을 알성시(謁聖試)에서 그의 아들과 조카가 미리 시제(試題)을 알고 엮어 가서 두 사람이 나란히 급제하였다. 자신이 시관이 되어 이이첨과 같이 일을 꾸며 뽑은 것이다. 윤선도의 소문(疏文)에 이이첨이 과거에서 사사로이 부정한 짓을 한 정상을 낱낱이 거론하였는데, 그가 알성시에서 예제(預題)한 일은 더욱 자세히 밝혔으니, 기자헌의 부끄러움이 어떠하였겠는가? 그가 수의(收議)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한효순이 이조판서가 되었을 때 권신(權臣)에게 명령을 받고 사나운 아내에게 통제를 받았으니, 행실이 이미 비루하여 어느 하나 말할 만 한 게 없다. 그러나 이번에 의론을 올린 것은 비록 윤선도의 충정(忠正)을 명확하게 말하지는 못하였지만, 그를 죄 주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 말 밖에 포함되어 있었으니 이 또한 기뻐할 만하다. 이로 인해 승정원과 양사(兩司)의 논박을 입은 것은 그에게는 영광이다. 풍기(豊基)의 남자신(南自新)과 영천(榮川)의 이광계(李光啓) 등이 다투어 상소하여 윤선도를 죄주기를 청하였으나, 서울 사람 이형(李泂)이 또 상소하여 이이첨이 권력을 독점하고 국정을 농단함을 논박하였다. 종실인 금산군(錦山君)과 귀천군(龜川君) 이하 19인이 또 상소하여 이이첨이 권력을 쥐고 간사하게 함부로 설치는 것을 극력 논박하였는데, 왕이 비답(批答)을 내리기를, ‘종실의 여러 친척들은 조정에 간섭하지 않는 것이 사체(事體)인데, 누구의 사주(使嗾)를 받아서 이런 소를 올렸는가? 하늘에 해가 있으니 바로 가리켜 대답하라.’고 하였다. 도승지 한찬남(韓纉男)도 이형의 소에서 논척을 받았는데, 차자를 올려 발명하였으니, 매우 가소로운 일이다. 윤선도는 아주 먼 변방에 안치(安置)되었고, 귀천군을 죄주기를 청하는 일로 대간이 논계(論啓)를 그치지 않았다. 남자신이란 자는 눈으로 글자도 모르는 아주 어리석고 거칠며 더러운 자라서 사람의 대열에 끼워줄 것도 없는 서신(徐兟)과 같은 물건이다. 처음에 기자헌에게 붙었다가 다시 이이첨에게 아첨하여 청송 훈도(靑松訓導)가 되었다. 세전(歲前)에 대비를 폐하는 일로 소(疏)을 품고 서울에 갔는데, 그가 도착하자 그의 동류(同類)들 중에 말리는 자가 있어서 마침 올리지 못하다가 이때에 올렸으니, 이 소가 바로 대비를 폐하자는 소로 영천(榮川 : 영주의 옛 이름)의 김여욱(金汝煜)이 지은 것이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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