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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으로 훈련을 빠졌다가 잡혀가 곤장을 맞다
1606년 1월
박계숙(朴繼叔)
은
회령도호부(會寧都護府)
의
보을하진(甫乙下鎭)
에서 전방 근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올해 정월 드디어 근무지인 회령에 도착하였다. 집을 떠나온 지 거의 100일 만이었다. 회령에 도착하여 상관을 만나보고 난 후 보을하진 근무를 명받았다. 보을하진은 회령부 관아에서 몇 십리 떨어진 곳에 설치된 군진이었다.
그런데 올해 초부터 건강이 심상치 않았다. 설날에는 데리고 왔던 사내종이 병에 걸렸는데, 다음날에는 박계숙(朴繼叔) 역시 한 사발 가량 피를 토하였다. 날은 차고 바람은 강한데 숨이 급하여 걷기가 매우 힘들 정도였다. 병든 사내종과 더불어 회령으로 길을 재촉하였는데, 말 한 마리를 서로 번갈아 타며 겨우겨우 회령에 도착하였다. 회령에 도착하여서도 2-3일에 한 번씩 피를 토하는 증세가 계속되었다. 급기야 지난달 보름에는 이틀 동안이나 편히 누워 쉬어야 했다.
박계숙(朴繼叔)도 병든 몸으로 군무를 보느라 심신이 지쳤지만, 사내종 역시 주인의 근무를 보좌하느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엊그제 1월 말일에는 각 군관들의 사내종들이 군관들의 말을 먹일 풀을 관청에서 가져왔는데, 이 일을 첨사가 알고 크게 노하였다. 군관들의 사내종들을 모두 잡아다가 곤장을 20대씩 쳤다. 주인을 따라 변방까지 와서 추위와 배고픔에 고달파하던 종들이 매를 맞고 분한 눈물을 마구 흘렸다.
그리고 오늘은 박계숙(朴繼叔)이 봉변을 당하였다. 한 달째 몸이 좋지 않아 정기적인
습진(習陣)
훈련에 빠진 것이 화근이었다. 첨사는 습진할 때 군관들을 점고하고 박계숙(朴繼叔)이 빠진 것을 알자 잡아다가 곤장 3대를 때렸다. 몸은 병들어 힘든데, 훈련 빠진 것을 가지고 곤장을 치니 박계숙(朴繼叔)은 부아가 치밀었다. 아픈 것도 아픈 것이지만, 이 망신을 어찌해야 할지, 여간 민망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박계숙(朴繼叔)은 2-3일간 병을 칭하고 출근하지 않았다.
곤장을 친 첨사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지 사람을 보내 문안하고 또 음식을 보내왔다. 변방에 도착하자마자 병도 얻고 곤장도 맞은 박계숙(朴繼叔)은 심란한 마음을 어찌하지 못했다.
개요
배경이야기
원문정보
멀티미디어
관련이야기
출전 :
부북일기(赴北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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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박계숙(朴繼叔)
주제 : 전방근무의 고단함
시기 : 1606-01-01 ~ 1606-02-02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함경북도 회령군
일기분류 : 생활일기
인물 : 박계숙, 민열도
참고자료링크 :
조선왕조실록
◆ 조선시대 군법과 집행
박계숙이 변방 근무지에 도착하자마자 고초를 겪는 이야기이다. 박계숙은 회령에 거의 도착한 1월 초부터 토혈을 하는 증세를 보이는데 거의 한 달 이상 동일한 증상으로 고생하였다. 토혈과 숨이 차는 것으로 보아 호흡기 증세로 보이는데, 다만 박계숙은 이후 70살 넘게 살아 꽤 장수하였으므로 심각한 질환은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사내종도 함께 병에 걸려 교대로 말을 타고 길을 재촉하였다고 하는데, 아픈 종을 위해 본인이 타던 말을 내어주는 것은 일상적인 상황에서는 거의 없는 일로, 아마 타향에서 함께 고생하면서 신분을 떠나 인간적인 유대감을 느낀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또한 보을하진에서 근무하는 중에 사내종들이 관가의 풀을 가져다 말을 먹여 문제가 되었다. 구체적인 정황은 나와 있지 않으나, 관가에서 국가의 말을 먹이기 위하여 비축한 풀을 군관 개인 소유의 말을 먹이기 위하여 종들이 가져다 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정황상으로는 종들의 잘못이 분명하나, 사실 조선시대에는 관아의 물건을 관아 소속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유용하는 일들이 만연되어 있었기 때문에 관례에 비추어보면 그다지 이상한 행동은 아니었다. 아마 보을하진의 첨사는 꽤 엄격한 원칙주의자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또한 박계숙 역시 엄격한 첨사에게 봉변을 당하게 되었는데, 다름 아닌 습진 때 병으로 참석하지 못한 것이었다. 습진은 조선에서 정기적으로 시행하도록 되어 있는 군사훈련이었다. 박계숙은 병으로 습진에 참석하지 못하였지만, 아마 사전에 상관인 첨사에게 보고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이에 따라 첨사는 법대로 곤장을 집행하였는데, 사실 이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본래 조선에서 양반에게는 직접적인 신체 형벌을 가하지 않았다. 군법의 경우 곤장을 칠 수 있는 제도는 마련되어 있었으나, 그래도 양반 군관의 경우 직접 매를 때리는 종류의 형벌은 가급적 시행하지 않았다. 원칙주의자인 첨사가 이제 막 근무에 투입된 박계숙과 그의 동료들을 경계하는 의미에서 아마 이례적인 군법을 집행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박계숙이 이에 대한 반감을 가지게 된 것도 당시 관례에 비추어보면 수긍이 갈 만 하다.
◆ 원문 번역
병오년(선조 39년, 1606년) 1월 1일 또 머물렀다. 사내종이 병이 들어 통증으로 누워있어 답답하고도 답답하도다. 2일 출발하였다. 45리를 가서 수성역(輸城驛)에 도착하였다. 이날도 사내종의 병이 다름이 없어 뒤떨어져서 오지 못했다. 중간에서 가다릴 때 나또한 토혈(吐血)을 하였다. 한참 뒤에 사내종이 도착해서 나와 종이 번갈아 말을 타고 갔다. 날은 차고 바람은 세어 숨이 급하여 걷기가 어려웠다. 간신히 목적지에 도달하니 그 고통을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3일 사내종의 병이 차도가 없어 뒤쳐질까 근심스러웠다. 움직이길 강권해서 노비를 타는 말에 태우고 도보로 걸어갔다. 저절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저녁에 75리를 가서 부령(富寧)에 도착하여 성내 사가에서 숙박하였다. 4일 쇄마하지 못하였고 노비의 병도 더욱 심해져 머물렀다. 또한 나도 한잔정도의 피를 토하였다. 5일 집주인이 제사를 지낸 후에 성대한 주찬을 보내왔다. 이른 아침 출발하였다. 무산령(武山嶺)을 넘어 60리를 가서 고풍역(古風驛)에 도착한 즉 사람이 거의 없었고 오직 겨우 무릎을 넣을 수 있을 정도의 흙집 5·6채 뿐이었다. 가히 거처할 만한 곳이 없어 추운 빈 관사에서 어렵게 숙식하였다. 6일 60리를 가서 회령(會寧)에 도착하여 성내 사가에서 숙박하였다. 오는 도중에 피를 한 사발 정도 토하였다. 7일 수령이 말씀을 보내오길 “근래 영적(零賊)이 극심하여 필히 고령진(高嶺鎭)이나 보을하진(甫乙下鎭)에서 분방할 것이다. 물건을 실어 가고 옴에 폐단이 있고, 쇄마를 함에 또한 폐단이 있다. 만약 다른 곳에서 분방하게 되면 내가 마땅히 추후에 운송해 주리라.” 그 말을 듣고 짐들을 주인집에 맡겨 두었다. 40리를 가서 행영(行營)에 도착해 성 밖 사가에서 숙박하였다. 집주인이 주찬을 많이 보내왔다. 매우 감사하다. 8일 5리를 가서 행영에 도착한 즉 북병사는 산행을 가고 없었다. 북평사가 장차 경성(鏡城)으로 떠나고자 할 즈음에 병조정랑 민주경의 서찰을 전하면서 뵈니 쌀, 콩, 죽 각 1두씩을 지급해주었다. 9일 아침에 점고를 했다. 2식정 정도 떨어진 보을하진에 분방하는 것으로 되었다. 즉시 머물 집을 구하고자 먼저 사내종을 보냈다. 머물렀다. 또 피를 한 사발 가량 토하였다. 10일 또 머물렀다. 쥘손을 고쳤다. 정희현(鄭希賢)을 만났다. 낮에 병사가 청하여 들어가서 술대접을 받고 쌀과 반찬을 받았다. 감사하였다. 11일 사내종이 돌아왔다. 북병사 앞에 하직하니 큰 주발에 술을 한잔 주었다. 곧 출발하여 5리 가량을 가서 전에 묵었던 촌가에서 숙박하였다. 12일 회령에 도착하였다. 부사를 뵙고 술대접을 받은 후 즉시 보을하진으로 가서 보을하진첨사 민열도(閔閱道)를 뵈었다. 김충金忠이라는 사람 집에서 묵었다. 13일 첨사가 활쏘기를 했다. 같이 온 여러 친구들 또한 모두 함께 활쏘기시합을 하였다. 나는 활과 화살을 회령에 두고 가져오지 않아 쏘지 못하였다. 14일 체부군관(體府軍官) 민항(閔沆)이 도착하였다. 방어하는 군사와 기계(器械) 및 성첩(城牒)을 점검하였다. 이날 저녁 회령에 맡겨두었던 짐들이 마침내 도착하였다. 보내준 집주인에게 매우 감사하다. 15일 체부군관이 성터와 기계, 무기, 군병(軍兵), 분방한 신구장사 등을 점검한 후 회령과 고령을 점검하기 위해 출발하였다. 16일, 17일 종일 편히 누워 지냈다. 18일 보을하진에 살고 있는 회령부의 별감(別監) 강성필(姜成弼)이 청하여 술을 많이 마셨다. 19일 병방(兵房)의 임무를 맡았다. 20일 보을하진에 사는 동갑내기 이언홍(李彦弘)의 집에서 술을 많이 마셨다. 또 피를 한 사발 가량 토하였다. 21일, 22일, 23일, 24일, 25일 활쏘기를 하였다. 26일 최기문(崔淇文), 김응택(金應澤), 김대기(金大器), 배응춘(裵應春), 김팔개(金八凱), 정언상(丁彦祥), 나 7인이 함께 먼저 도착해서 있던 일당백장사 출신인 간성(杆城)의 정언몽(鄭彦夢), 홍천(洪川)의 최흥건(崔興健), 박종언(朴終彦), 춘천(春川)의 이적(李積), 부평(富平)의 염희(廉熙), 숙천(肅川)의 김언윤(金彦倫)·장계종(張繼宗) 등 7인과 활쏘기 시합을 했다. 이덕붕(李德鵬)과 김협(金冾)은 본래 활쏘는 재주가 없어 쏘지 않았다. 우리 편이 크게 이겼다. 27일, 28일, 29일 활쏘기를 했다. 연일 승리를 하였고 저쪽 편은 이기지 못하여 부끄러워했다. 30일 같이 온 사람들이 각각 노마를 보냈다. 관청의 마초(馬草)를 실어 온 일로 첨사가 크게 노하여 각 사내종 등에게 곤장을 20대씩 때렸다. 변방의 굶주리고 고달픈 종은 분한 눈물을 마구 흘렸다. 2월 1일 병을 칭하여 나가지 않았다. 2일 습진(習陣)때 역시 병을 칭하며 나가지 않았다. 잡혀가서 곤장 3대를 맞았다. 더욱 분통이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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