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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께 인사하고 서울을 출발하다
1662년 7월 26일,
정태화(鄭太和)
는 진하 겸 진주사로 선정되어 청나라에 가게 되었다. 오늘은 대궐에 들어가 임금께 하직 인사를 드리러 갔다. 부사인 허적과 함께 대궐에 들어갔는데, 서장관은 함께 갈 수 없었다.
임금은 초피(豹皮)․단목(丹木)․납약(臘藥)․선자(扇子) 등의 물건을 하사하시면서 이번 사행의 임무를 잘 수행해 달라 당부하였다. 정태화와 허적은 임금 앞에서 사례하며 절을 올리니, 임금이 먼 길의 고생을 미리 위로하고 전송하였다.
청나라에 보낼 문서를 받아 확인을 마친 후 본격적인 여정이 시작되었다. 임금이 친히 내린 술을 받아 마신 이후 길을 떠나는데, 동생인 호조판서와 경기감사가 친히 나왔고, 부사의 아우인 허질 역시 전송하는 자리에 참석하였다. 사현 고갯길을 넘으니 시장의 사람들이 끼리끼리 옆에 모여서 절하고 서로 이별하였는데, 이런 광경은 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좌의정 원두표와 우의정 정유성을 비롯한 여러 고관대작들이 홍제원에 모여서 떠나는 사행길을 위로해주기 위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과 전별의 시간을 가진 이후 길을 재촉하여 창릉의 냇가까지 이르렀다. 그리곤 함께 동행했던 정태화와 허적의 동생을 비롯하여 여러 전송인들과 마지막으로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다만 동생인 경기감사 정재숭은 벽제역까지 따라와 하루를 함께 묵었다가 이튿날 작별하였다. 무장들부터 호위군관, 그리고 어영청의 군관들과 각 관서의 하인들까지 나와 보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광경이 성대하여 사행을 떠나는 정태화의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나라의 가장 높은 관료인 영의정이 친히 사행을 가는 길이라 벌어진 일일 것이다. 정태화는 자신이 늙은 몸으로 사행의 고된 길을 잘 감당하고, 임무를 무사히 마칠 수 있을지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사행의 첫날밤을 고양 땅에서 묵었다.
개요
배경이야기
원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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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이야기
출전 :
임인음빙록(壬寅飮氷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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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정태화(鄭太和)
주제 : 사행의 출발
시기 : 1662-07-26 ~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경기도 고양시
일기분류 : 사행일기
인물 : 정태화, 정재승, 허적, 허질
참고자료링크 :
승정원일기
웹진 담談 13호
조선왕조실록
◆ 어지러운 조정의 중심 역할을 했던 정치가 정태화
이 이야기는 정태화가 환갑의 나이에 청나라로 사행을 가는 장면을 재구성한 것이다. 이야기의 주인공 정태화(1602~1673)는 본관이 동래(東萊)이고 자는 유춘(囿春), 호는 양파(陽坡)이다. 중종대 영의정을 역임한 정광필(鄭光弼)의 5대 손이며, 정유길(鄭惟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창연(鄭昌衍), 아버지는 형조판서 정광성(鄭廣成)이다. 어머니는 황근중(黃謹中)의 딸이다. 동생인 정치화(鄭致和)와 정만화(鄭萬和)인데 이들 역시 모두 좌의정과 예조참판을 역임한 고관이었다. 1624년 23세의 나이로 진사가 되었고, 4년 후인 1628년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관료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후 홍문간과 사헌부, 사간원, 예조, 이조, 의정부 등 주요 관서에서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황해도 여러 산성에서 패잔병들을 규합하여 청나라에 항전하기도 하였다. 세자시강원의 보덕을 맡아 당시 청나라로 인질을 갔던 소현세자를 따라 심양에서 생활하기도 하였다. 귀국이후에는 충청도관찰사로 발탁되면서 당상관이 되었다. 그 이후 고속승진을 거듭하여 1649년에는 48세의 나이로 우의정에 오르게 되었다. 우의정에 오른 이후 효종의 즉위를 알리기 위하여 사은사로 연경에 다녀왔고, 귀국 이후에는 좌의정에 올랐다. 이후 1651년에 영의정에 올랐고, 이후 사임할 때까지 몇 차례나 영의정을 역임하면서 조선의 국정운영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를 비롯한 그의 집안사람들은 특정 당색에 소속되는 것을 거부하였고, 때문에 조정에서 처신하기 어려운 입장에 놓인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반면 이러한 그를 비롯한 그의 집안사람들의 특성으로 인하여 당파 이해관계에서 자유로운 중재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그의 동생들 역시 뛰어난 능력으로 고위직까지 올랐으므로, 당시 사람들은 ‘이 나라를 모두 정가들이 움직인다.’ 라고 할 만큼 신망을 받고 있었다. 그의 이런 중재역할로 인하여 두 차례 벌어진 예송 논쟁은 과거의 사화와 같은 비극적인 정치 참화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는 내치 뿐 아니라 청나라와의 관계에서도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청나라의 고위 관원들과도 적절한 교유관계를 유지하여 조선이 외교적 곤란 상황에 놓일 때에도 그의 외교수완으로 무사히 넘어간 것이 많았다. 이야기 소재의 자료인 『임인음빙록(壬寅飮氷錄)』을 작성한 사행에서도 조선 정부의 곤란한 일을 주청하는 임무를 맡고 가서 쓴 일기이다. 그는 1673년 다섯 번째의 영의정 자리에서 물러난 지 6개월이 되던 달에 나이 72세로 사망하였다. 그 뒤 현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익헌(翼憲)인데 후에 충익(忠翼)으로 바꾸었다. 저서로 시·문을 모아 엮은 『양파유고』와, 1656년까지의 일기인 『양파연기』 가 있다.
◆ 원문 번역
1662년 7월 26일 진하(進賀) 겸 진주사(陳奏使)로서 연경(燕京)으로 가게 되어 대궐로 가서 임금님께 인사하였다. 대궐로 들어오라는 명이 있었으므로 부사(副使)와 함께 등대(登對)하였는데, 서장관(書狀官)은 함께 등대할 수 없었다. 주상께서 초피(豹皮)․단목(丹木)․납약(臘藥)․선자(扇子) 등의 물건을 하사하였으므로 탑전(榻前)에서 사례하며 절을 올리니 주상께서 위로하고 전송하였다. 며칠 전에 미리 명하여 도성에서 출발하는 날 선온(宣醞)을 내린다고 하였는데, 사신의 자제로서 재직하고 있는 자들도 나란히 참여하라고 말씀하셨다. 표문(表文)을 받았을 때에는 보슬비가 내렸는데, 모화관(慕華館)에 도착했을 때에는 날씨가 청명하였다. 문서의 사대(査對)를 마치자 중사(中使) 최대립(崔大立)이 와서 선온을 전달하였다. 사제(舍弟)인 호조 판서(戶曹判書) 정재대(鄭載岱)와 경기 감사(慶尙監司) 정재숭(鄭載嵩) 및 부사의 아우 허질(許秩)이 나란히 들어와 자리에 참여하였다. 사현(沙峴)을 넘으니 각 시장의 사람들이 끼리끼리 길옆에 서로 모여서 절하면서 이별하였으니, 이러한 일은 실로 전에는 없던 일이었다. 좌상(左相) 원두표(元斗杓)과 우상(右相) 정유성(鄭維城) 이하 여러 경재(卿宰)들이 홍제원(弘濟院)에 모였다. 호조판서(戶曹判書),경상 감사(慶尙 監司), 병조참판(兵曹參判) 유혁연(柳赫然) 및 당제(堂弟)인 우윤(右尹) 정예경(鄭禮卿),우윤(左尹) 홍전(洪瑑)이 나란히 와서 창릉(昌陵)의 냇가에서 전별하였다. 경기 감사(京畿監司)와 집안의 자식들과 조카들이 모두 벽제(碧蹄)까지 따라와서 함께 묵었다가 작별하였다. 무장들과 호위군관(扈衛軍官), 그리고 어영장관(御營將官)과 각 사(司)의 하인들도 나와 보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므로 그 광경이 너무도 성대하여 마음에 매우 편치 않았다. 이날 고양(高陽)에서 묵었다. 고양 군수(高陽郡守)는 윤후익(尹後益)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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