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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운산 소나무를 떠올리며 사물의 무상함을 느끼다
심원열은 울산 지역의 군수로 부임해 있었다. 울산 서지란 곳에 섬이 있고, 연꽃이 좋다는 소리를 듣고 유람하러 갔으나 연못은 온데간데없었다. 그 지역 사람에게 물으니 과거에는 연꽃이 매우 번성해서 꽃이 피면 향기가 가득하고, 고을 태수를 비롯하여 사람들이 술을 들고 와 마시는 사람이 끊이질 않았다고 한다.
계축년에 흉년이 들었을 때 고을 사람들이 모두 연꽃 뿌리를 채취해서 삶아 먹고 떡을 해 먹고 하기 위해서 날마다 날마다 캐어가더니, 그 후로 수가 점점 줄고 결국엔 오늘날처럼 만발한 연꽃을 감상할 수 없게 되었노라 하였다.
심원열은 그 이야기를 듣고는 울산의 대운산 생각이 났다. 대운산은 소나무가 우거져 함부로 나무를 채취하지 못하도록 나라에서 금한 봉산 중 하나였다. 수목이 하늘을 찌를 듯하고 아름드리나무도 많아서 충청도의 안면도 못지않은 곳으로 유명하였다. 그런데 이곳 역시 병신년에 흉년이 들자 이웃 몇몇 고을의 백성들이 날마다 산으로 들어가 소나무 껍질을 벗겨 먹으며 목숨을 연명하였다.
이때부터 소나무들이 시름시름 말라죽어서는 현재는 남은 나무가 하나도 없게 되었다. 이 때문에 경상좌수영에서 서리를 보내어 소나무를 해치는 자들을 감독하게 하였지만, 모두 한낱 문구에 지나지 않아 실제로 시행되지 않았다. 민둥산이 되었음에도 봉산 지기란 자리는 여전히 남아 이름만 지키고 있었다.
사물의 영화로움과 쇠퇴함이 이처럼 순식간이며 부질없는 것이다. 서지의 연꽃이나 대운산의 소나무 모두 흉년이 빌미가 된 것이다. 이것은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이다. 심원열은 서지에 드문드문 남아있는 볼품없는 몇 송이 연꽃을 바라보며 이러한 생각에 잠겼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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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 :
서지하화기(西池荷花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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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심원열(沈遠悅)
주제 : 명승유람
시기 : ( 미상 )
장소 : 울산광역시
일기분류 : 유산일기
인물 : 심원열
참고자료링크 : (참고자료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 소나무 봉산으로 유명하였던 대운산
이 이야기는 심원열이 서지란 곳의 연꽃과 대운산의 소나무가 없어진 이유를 떠올린 장면이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대운산은 울산에 위치한 산으로 현재 행정구역상으로 울산광역시 울주군의 온양읍 운화리와 경상남도 양산시 서창동에 걸쳐 있는데, 높이는 약 742미터에 이른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울산군 항목에는 대운산의 명칭이 불광산으로 나와 있어, "불광산(佛光山)은 고을 남쪽 45리에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읍지에도 같은 내용을 수록하고 있다. 『조선지형도』 에는 대운산(大雲山)으로, 『조선지지자료』에도 대운산(大云山)이 외광동(外光洞)에 있는 것을 각각 기록하고 있다. 원래 이름인 불광산은 불(佛)이 부처를 뜻하는 불(佛)이 아니라 도시를 뜻하는 '불'로서 벌(伐), 불(弗), 불[火], 부리(夫里) 등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따라서 불광산은 '밝은 성읍터의 산'으로 해석하고 있다. 불광산을 한자화하는 과정에서 대운산으로 변하였는데, '운(雲)' 자 또한 높고 큰 산에 붙이는 이름이므로 밝은 산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해동지도』의 울산 지역에는 대운사(大雲寺)가, 『영남지도』의 울산 지역에는 대운봉산(大雲封山)을 각각 묘사하고 있다. 『영남읍지』에서는 "대운산은 온양면에 있는데 둘레가 61리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산의 능선에서부터 정상까지 철쭉군락지를 이루고 있어 대운산 철쭉제를 매년 개최하고 있다.
◆
원문 이미지
◆ 원문 번역
내가 학성鶴城에 있던 그 이듬해 병진년 봄에 객과 더불어 태화강에 배를 띄우고 유람하다가 저물녘에 돌아왔다. 이른바 ‘서지西池’를 보았는데 그 폭이 상당했고 그 길이도 매우 길어서 경성 백문白門 밖 반송지盤松池나 남대문 밖의 큰 연못도 모두 그 다음이었다.
서지에는 섬이 있고 섬에는 나무가 있었는데 못은 물이 말라 한 줄기의 연꽃도 없었다. 나는 괴이하여 주민들에게 묻기를 “이 곳은 관개灌漑를 위해 축조한 제방입니까? 못인 듯한데 연꽃은 없고 연꽃은 없는데 연못이라 함은 어째서입니까?” 하였다. 주민이 말하기를 “이곳은 제방이 아니고 못입니다. 이 전에는 연꽃이 매우 번성해서 그 꽃이 막 피어나면 연꽃이 못을 가득 메워 연꽃의 향기가 사람들에게 물씬 풍겼습니다. 그래서 우리 고을 태수가 여가 있는 날에 술잔을 들고 꽃을 감상했고 오가는 사람들이나 장사하는 이들까지 와서 술 마시지 않은 이가 없었습니다. 소인묵객騷人墨客 또한 여기에 이르러 시를 읊조리지 않은 이 없었으니 연못의 명성이 어찌 ‘태화루’ 다음이었겠습니까! 계축년 흉년이 들었을 때 고을의 남녀노소가 연근을 채취해서 삶아 먹고 쪄서 떡으로 해 먹고자 사람들이 캐어 가서 날마다 점점 줄어들더니 연꽃이 드디어 뿌리 채 없어져 사람들이 예전처럼 만발한 연꽃을 감상할 수 없게 되었고 옛날의 번화로움을 어찌하고 지금 홀연 이렇게 쓸쓸하게 된 것입니다.”고 하였다.
내가 그 말을 듣고 탄식하기를 “대개 사물의 흥하고 쇠함은 모든 사물의 이치이다.” 내 고향 혜음령惠陰嶺의 점포 서쪽 초입에 큰 탄막炭幕이 있었는데 좌우에 점포가 나열해 30호에 가까웠다. 주막에는 고기를 구워서 맛을 내고 연당蓮堂에는 자리를 마련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마주해 술 마시고 휴식할 수 있도록 하였으니 점포가 자못 풍요롭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수 십 년 이래로 점포가 점점 줄어들고 점포의 영업이 이루어지지 않아 마치 사람이 병이 점점 깊어져 치유할 수 없는 어려운 지경에 이른 것 같이 되었다. 지금 이 고개를 지나가 보면 남아 있는 점포가 두세 집에 불과했다. 사물의 성쇠가 어찌 유독 연꽃뿐이겠는가. 점포가 지어졌다 걷어치우는 무상함 또한 이와 같다.
내가 또 일찍이 들으니 대운산大雲山은 봉산封山인데 수목이 하늘을 찌를 듯하고 아름드리 많아 호서의 안민도安民島 보다 못하지 않았다. 병신년에 흉년이 들어 이웃 몇몇 고을의 굶주린 백성들이 날마다 산으로 들어가 소나무 껍질을 벗겨 그 껍질을 먹고서 위태로운 목숨을 연장하였다. 이로부터 소나무가 드디어 말라 죽어 반질반질하여 남은 나무가 없어 곧 하나의 민둥산이 되었다. 그래서 수영水營에서 교리를 보내어 간범한 자를 적발하여 본부에서 문서로 보고하였지만 모두 문구文具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봉산의 감독은 봉산의 지기[直]인데 또한 그 이름만 있었으니 사물의 영화로움과 쇠함이 어찌 다만 연꽃뿐이겠는가! 소나무의 어리고 크게 자람도 이와 같은 것이다. 혜음령의 점포가 드디어 비게 된 것은 요역의 무거움 때문이고, 서지의 연꽃이 끊어져 드물게 된 것은 흉년의 재앙 때문이고, 봉산의 소나무가 껍질이 모두 벗겨진 것은 흉년이 빌미가 된 것이다. 이 세 가지는 모두 연유한 바가 있으니 성하고 쇠함의 한 이치에 불과하다. 금곡金谷의 부유함도 이미 당시에 방탕하여 무너진 것을 보았고, 평천平泉의 별장도 후세에 전해져 지켜지지 못했으니 어찌 사람의 힘으로 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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