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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귀와 김류가 관직임명을 두고 갈등하다
1625년 7월 27일, 아침에 부슬부슬 비가 내렸다. 식사 때쯤 그치더니, 이 비로 냇물이 불었다. 저녁에는 김시익이 찾아와 같이 보리밥으로 저녁을 먹었다. 저녁 식사 시간에 김령은 조정의 인사발령 소식을 전해 들었다. 이번에 남이공이 대사헌이 되었다고 하던데, 이것은 전적으로 김류를 통해서인 듯하였다. 박정, 유백중, 나만갑 등은 모두 이귀와 친한 이들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외직을 제수받았다. 이를 전해 듣고 이귀가 크게 화를 내었다고 한다.
이 일로 이귀가 주상전하의 면전에서 김류를 욕하자, 주상전하가 하교하여 ‘이귀가 공을 빙자하여 교만하고 방자하며 조정을 업신여겼으니, 먼저 파직시키고 나중에 추고하라’ 고 명하시고는 또 ‘박정 등의 일은 훈신들이 서로 화합하지 못하여 조정이 불안한 것인데 죄과가 가볍지 않으므로 모두 멀리 유배를 보내도록 하라’ 라고 하교하셨다고 한다. 우의정 신흠 등이 차자를 올려 겨우 주상전하의 분노를 진정시키고 유배의 명을 취소시킬 수 있었다.
이 일로 김류 역시 사퇴하여 갈리고 오윤겸이란 이가 이조 판서가 되었다고 한다. 또 경상도의 군적 어사도 뽑았는데, 경상좌도는 이경여이고, 우도는 김시양이란 이가 뽑혔다. 영의정 자리는 이미 봄부터 비어있었는데 여태껏 대신할 사람을 선출하지 않았다고 한다. 나라의 정승자리는 비어 있고, 또 반정의 공신들 사이는 저렇듯 반목이 심하니 장차 조선의 앞날이 어찌 될지 심히 걱정이 되는 소식이었다.
개요
배경이야기
원문정보
멀티미디어
관련이야기
출전 :
계암일록(溪巖日錄)
전체이야기보기
저자 :
김령(金坽)
주제 : 조정의 동향
시기 : 1625-07-27 ~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경상북도 안동시
일기분류 : 생활일기
인물 : 김령, 김시익, 김류, 박정, 유백중, 나만갑, 조정, 오윤겸, 김시양
참고자료링크 :
승정원일기
조선왕조실록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김령
◆ 서인의 반정 후에도 조정에 참여한 북인계 관료 남이공
이 이야기는 김령이 조정에서 행해진 인사발령으로 인하여 김류와 이귀가 반목하였단 것을 전해들은 내용이다. 박정, 유백중, 나만갑 등은 이귀와 관계가 깊은 인물들로 모두 외직에 보임되었고, 남이공은 김류의 추천으로 대사헌에 오른 것이 이귀의 불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야기에 나오는 남이공은 본래 반정을 함께 주도한 서인은 아니었고, 오히려 광해군대 국정운영에 참여하였던 북인 중 일부였다. 그런 그가 서인의 반정 이후에도 계속하여 관직을 역임할 수 있었던 것은 공신 김류와의 관계가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남이공은 본관이 의령(宜寧)이며 초명은 이경(以敬)이었다. 자는 자안(子安), 호는 설사(雪蓑)라고 하였다. 할아버지는 이조참판을 역임한 남응운(南應雲)이고, 아버지는 남호(南琥), 어머니는 신사헌(愼思獻)의 딸이다. 그의 형은 참판을 지낸 남이신이었다. 1590년 증광문과시에서 장원급제하여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1593년 세자시강원의 직책을 맡아 광해군의 교육을 담당하였고, 이후 평안도 암행어사와 대간직을 거쳤다. 1597년 일본이 재차 조선을 침입한 정유재란이 발생하자 체찰사 이원익의 종사관이 되었고, 이후 이조의 좌랑과 전랑을 거쳤다. 1598년에는 이발, 정인홍 등과 함께 영의정 유성룡이 전란의 책임이 있고, 또 일본과 화의를 주장했다고 하여 탄핵하는데 참여하기도 하였다. 선조대 후반 북인들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집권 이후 북인은 정인홍을 중심으로 한 대북인과 유영경, 남이공을 중심으로 한 소북인으로 분화되었다. 그는 유영경과 소북을 영도하는 위치에 있었으나 유영경과도 다소 입장이 달라 소북 내에서도 남인을 따른 남당의 지도자가 되었고, 유영경을 따르는 자들은 유당이라고 불리었다. 선조 말년 광해군의 즉위 과정에서 소북인들이 대거 파직 당하였는데, 그 역시 이때 파직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곧 조정에 복귀하였다. 광해군대에는 형조참의와 대사간을 비롯하여 도승지 등 주요 당상관직을 역임하였다. 1615년에는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폐출하는 일에 반대하였다가 유배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때의 그의 처신은 이후 북인들이 모두 정권에서 축출될 때에도 계속적으로 관직생활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 직후 파직되었다가, 다시 관향사의 직책을 받아 관직에 복귀하였다. 이후 대사간, 대사헌, 함경도관찰사 등의 직책을 역임하였다. 1627년 가도(椵島)에 주둔한 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의 접반사가 되었다. 이 때 화폐의 편리함을 깨닫고 주전(鑄錢)을 건의하였다. 1637년 절친한 사이인 좌의정 최명길의 천거로 이조판서에 올랐고, 이듬해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를 겸했다. 1639년 다시 대사헌을 거쳐 공조판서가 되었으나, 앞서 청나라에 인질로 보낸 왕제(王弟)와 대신을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보낸 사건으로 파직되었다가 1640년 죽음과 함께 복직되었다. 그는 사람됨이 권모술수에 능하고 담론을 좋아했다고 평가받기도 하였다. 그의 문집으로는 『설사집』이 있다.
◆
원문 이미지
◆ 원문 번역
을축년(1625, 인조 3) 7월 27일 아침에 또 비가 내리다가 밥 먹을 때쯤 그쳤다. 해가 뜨고 냇물이 불었다. 김시익金時翼이 와서 같이 보리밥으로 저녁을 먹었다. 요형이 돌아왔다. 비 때문에 길이 막혀 이제야 이르렀다. 남이공南以恭이 대사헌이 된 것은 진실로 이조 판서 김류金瑬를 통해서이고 박정·유백증·나만갑 등은 모두 이귀李貴의 당류이다. 이귀가 박정 등을 외직에 보임하자 크게 화를 냈다. 이귀가 지난번에 탑전에서 김류를 욕하자 주상이 하교하여 “이귀가 공功을 빙자하여 교만하고 방자하며 조정을 업신여겼으니, 먼저 파직시키고 나중에 추고推考하여 공신들의 방자한 습성을 징계하도록 하라.”고 하고, 또 하교하여 “박정 등의 일은 훈신들이 화합하지 못하여 조정이 불안한 것이니 죄과가 가볍지 않으므로 함께 원찬遠竄토록 하라.”고 하자, 우의정 신흠申欽이 차자를 올려 구원하였는데, 윤허를 얻은 것이 이달 12일의 일이었다. 김류도 사퇴하여 갈리고 오윤겸吳允謙이 다시 이조 판서가 되었다. 양계兩界(평안도와 함경도) 및 해서海西(황해도) 등의 군적 어사軍籍御史를 이미 뽑았는데, 경상좌도는 이경여李敬輿이고 경상우도는 김시양金時讓이었다. 영의정이 봄에 이미 체직되었지만 여태껏 대신할 사람을 선출하지 않았다.
이미지
묵재(默齋) 이귀(李貴)...
오윤겸 선생 묘역 전경
오윤겸 선생 묘 전경
오윤겸 선생 묘 정면
오윤겸 선생 묘 후면
오윤겸 선생 묘비
오윤겸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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