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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랑캐와 화약을 맺었단 소식을 듣다
1627년 2월 21일,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다. 김령은 조정의 소식을 들었다. 드디어, 오랑캐와 화약을 맺기로 결정하고, 국서를 보냈다고 한다. 국서는 장유가 지은 것이었다. 면포 1만 5천 필, 명주 150필, 흰모시 500필, 호피 20장, 표범가죽 30장, 왜도 8자루, 안장을 얹은 말 1필을 예물로 함께 바쳤다고 한다. 종친인 원창부령 이구를 원창군으로 삼아 국왕의 아우라고 일컫고는 사신으로 오랑캐 진영에 보냈다. 이홍망이 부사가 되어 원창군을 따라갔다.
오랑캐 차사 유해가 강홍립과 조선으로 왔다가 다시 저들 진영으로 돌아간 후, 다시 돌아와서 맹약을 맺었다. 국서에는 명나라의 연호인
천계(天啓)
를 써서 보냈는데, 오랑캐들이 반발하여 문제가 되었는데, 결국 저들이 원하는 대로
천총(天聰)
연호를 쓰게 될 듯하다. 명나라를 섬겨온 것이 200년이 넘었는데, 이제 저들 오랑캐의 연호를 쓰게 되니 원통하기가 비할 데 없었으나, 한탄한들 이제 어찌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비록 강화협상이 시작되었지만, 전장의 장수들에 대한 논공과 처벌은 계속 이루어졌다. 평안 감사 윤환은 성을 버렸기 때문에 참수에 처해졌다고 한다. 함경도의 병사 변흡과 윤숙이 평안도와 황해도 양쪽 길 사이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후금의 병사들과 일전을 치르려 하였으나 조정에서 화의가 시작되었으므로 허락하지 않았다 한다. 사간 윤황은 “명분은 비록 화의이지만 실제로는 항복이다” 라고 이야기하자 주상이 크게 분노하였다고 한다.
윤황을 삭탈관직하라 명하였다가, 승정원의 만류로 체직시키는데 그쳤다 한다. 화의의 내용을 보아하니 윤황의 말이 틀린 것이 아니었다. 다만 주상 역시 뼈저리게 알고 있을 이야기를 굳이 꺼내어 화를 자초한 것은 옳은 행동은 아닌 듯하였다.
개요
배경이야기
원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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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이야기
출전 :
계암일록(溪巖日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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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령(金坽)
주제 : 조정의 동향
시기 : 1627-02-21 ~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경상북도 안동시
일기분류 : 생활일기
인물 : 김령, 변흡, 윤숙, 윤황
참고자료링크 :
승정원일기
조선왕조실록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김령
◆ 정묘호란의 수습 과정과 정묘약조
이 이야기는 오랑캐에게 화약을 요청하였단 소식을 김령이 전해 들은 내용이다. 정묘호란은 발발한 지 한 달만에 강화협상이 시작되었다. 후금군은 평양을 지나 황주에 이르러서 조선에 서신을 보내 7가지 죄를 열거하며 침입의 이유를 들었다. 그리고 강화의 조건으로 첫째, 후금에 조선땅 일부를 할양할 것, 둘째 가도에 주둔하고 있는 모문룡(毛文龍)을 잡아 보낼 것, 셋째 앞으로 있을 후금의 명나라의 토벌에 조선도 군사 1만 명을 보내 도울 것 등을 제시하고 이를 강요하였다. 그리고 2월 9일 후금의 부장(副將) 유해(劉海)와 후금에 항복한 강홍립(姜弘立) 등을 강화도에 보내 화의를 교섭하게 하였다. 후금이 강화도 가까이에 이르자, 조야(朝野)가 모두 위험을 느꼈으나 감히 강화를 주장하지 못했는데, 참판 최명길(崔鳴吉)의 주장으로 주화론(主和論)이 채택되었다. 화약을 맺을 때 후금은 명나라 연호인 천계(天啓)를 쓰지 말 것과 왕자를 인질로 할 것 등을 추가로 요구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이를 꺼려, 당시 왕자는 나이가 어려 인질로 갈 수 없다는 구실을 들어 종실 원창부령(元昌副令) 구(玖)를 왕의 동생이라 칭하고 후금 진영에 보내 화의에 응하게 하였다. 이에 후금측에서는 유해 등을 재차 강화도로 보내고, 조선측에서는 병조판서 이정구(李廷龜), 이조판서 장유(張維) 등을 보내 교섭을 진행하였다. 조선이 내건 화의 조건은 다음과 같다. 첫째 후금군은 평산(平山)을 넘어서지 않을 것, 둘째 맹약 후 후금군은 즉시 철병할 것, 셋째 후금군은 철병 후에 다시 압록강을 넘어서지 말 것, 넷째 양국은 형제국으로 칭할 것, ⑤다섯째 조선은 후금과 맹약을 맺되 명나라에 적대(敵對)하지 않을 것 등이었다. 이와 같은 내용을 후금이 받아들이면서 양국 간의 화약이 성립되었고, 후금 군대는 곧 철수하였다. 이 화약은 우리 입장에서 보면 패전국으로서 후금과 명나라 사이에서 엄정 중립을 지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후금측에서 보면, 명나라와의 관계상 군사를 조선에만 묶어둘 수도 없어 조속히 전쟁을 종결짓고자 하는 일시적인 방편에 불과한 것이었다. 화약에 따라 3월 3일 강화부 성문 밖에 단(壇)과 희생(犧牲)을 마련해 제천(祭天)하고 서로 맹약을 지키기로 하였다. 이 조약을 맺은 다음 4월에 조정은 강화도로부터 환도하였다.
◆
원문 이미지
◆ 원문 번역
정묘년(1627, 인조 5) 2월 21일 비가 내렸다. 오후에 큰아이가 돌아왔다. 오랑캐에 답한 국서는 장유張維가 지은 것이다. 보낸 물품은 면포 1만 5천 필, 명주 150필, 흰모시 5백 필, 호피 20장, 표범가죽 30장, 왜도倭刀 8자루, 안구마鞍具馬 1필이었다. 종친 원창부령原昌副令 이구李玖를 원창군原昌君으로 삼아 왕의 아우라고 칭하고, 이홍망李弘望을 부사副使로 삼아 오랑캐 진영에 사신으로 보냈다. 오랑캐 차사 유해劉海 등이 강홍립姜弘立과 함께 이미 갔다가 다시 와서 맹약을 거듭 맺었고, 천계天啓·천총天聰에 대한 분쟁이 큰 절목節目이 되었기 때문에 장차 오랑캐의 요청을 따를 형편이라고 한다. 한탄한들 어찌 하겠는가. 윤훤尹暄은 평안 감사로서 성을 버렸기 때문에 참수에 처해졌다. 이때 함경남도 병사 변흡邊潝과 함경북도 병사 윤숙尹璛이 평안도와 황해도의 양쪽 길 사이에서 군사를 주둔시켜 성원하려 했고, 또한 일전을 치르려고 했으나 조정에서 화의 때문에 허락하지 않았다. 사간 윤황尹煌이 상소하여 “명분은 비록 화의이지만 실제로는 항복입니다.”고 말하자, 주상이 성을 내어 하교하기를, “윤황의 상소는 말이 아주 흉악하고 참혹하다.”고 하고는 승정원에 명하여 문계問啓하라고 하였는데, 승정원에서 간하기를 두 번에 이르러 주상이 관직을 삭탈하라는 명을 거두어들이고, 다만 체직시키라고만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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