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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구의 사람됨을 논하다
1631년 10월 7일, 안동에 황호가 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김령은 6년 전 조정의 사건을 떠올리다가 생각이 이성구에 미쳤다. 그 때 22세 황호가 이름을 얻게 된 계기가 바로 이성구를 비롯한 대신들의 공격에 당돌한 상소로 반박한 사건이었다. 당시 주서였던 황호에 비해 이성구는 대사간이었으니 관직으로 말하자면 하늘과 땅 차이였다. 다시 생각해도 황호란 젊은이는 참으로 대단한 인물이었다.
이성구란 사람의 아버지는 바로 그 유명한 이수광이었다. 이수광은 글에 능할 뿐 아니라 인품이 고결하여 명망 있는 사람이었다. 이성구의 동생인 이민구는 과거에 장원 급제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이성구 본인은 지난 광해군 때 사헌부 지평으로 있으면서 대비를 폐하자는 여론에 당당히 맞서 사람들이 모두 인재로 꼽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본래 이들 이수광 3부자는 남인에 있던 사람들이었다. 지금 주상이 반정을 일으키자 모두 변심하여 서인이 되었고, 곧 조정의 고위직에 올랐다. 서인으로 변심한 이후 남인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던 인성군을 정치적으로 공격하고, 또 인성군을 비호한 목성선, 류석 등을 공격하였던 것이다. 4년간의 끈질긴 공격 끝에 인성군의 옥사가 이루어지자, 이성구는 심문하기를 매우 혹독하게 하여 사람들이 모두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한번은 광해군의 후궁이었던 임숙원이 잡혀왔는데, 이성구가 임숙원에게 형을 가할 것을 주장하였다. 아무리 광해군대의 후궁이라지만 엄연히 후궁의 신분이며, 게다가 여자가 아닌가. 조정 대신들은 모두 난색을 표했는데도 이성구는 팔을 걷어 부치고 기세를 부리며 곤장을 치도록 하였다. 임숙원이 “오늘 국청에 있는 여러 재상치고 누가 광해군대 벼슬하지 않은 자가 있는가!”라며 소리치자, 신흠 등 다른 대신들은 모두 혀를 차며 서로를 돌아보았는데, 오직 이성구만 더욱 노하며 곤장을 치도록 다그쳤다고 한다. 숙원은 이때부터 다시는 입을 열지 않았고, 머리털이 얼굴에 흩어지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세 차례 형신을 받고는 죽었다고 한다.
올해 봄에도 승평부원군 김류가 좌상으로 있을 때 역모 사건이 터져 이성구도 위관이 되었다. 당시 역모 사건의 진상 파악 과정에서 김류가 억울한 사람들을 구한 것이 한둘이 아니었는데, 오직 이성구만은 역모 다스리기가 느슨하다며 비판하였다고 한다. 하루는 사적으로 죄수를 끌어내어 몰래 심문하고는 무고하게 죄를 얽어매려 하다가 김류에게 발각당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이런 일들을 들어보니 사람이 처음에 명성이 있었다고 반드시 그 마지막까지 처음과 같으리라는 보장은 없는 것이었다. 참으로 믿지 못할 것이 이성구의 명성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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