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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을 가르치지 않는 풍습을 개탄하다
1912년 11월 10일, 밤에 눈이 종이처럼 얇게 내렸는데, 아침에 햇살을 보자 바로 녹아 없어졌다. 이제 다시 만주의 길고 긴 겨울이 시작될 참이었다.
오늘 문득 김대락은 조선의 교육 풍습을 생각해 보았다. 집안의 여자들이 한문을 배우지 않은 까닭은 인재를 얻기 어렵다란 생각에서였다. 즉 두 가지를 다 잘 할 수는 없으니, 여자들에게는 진서가 아닌 다른 것을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비록 남녀가 유별하다고는 하지만, 어찌 두 가지에 모두 능한지, 그리고 문자를 아는 지로 구별을 하겠는가.
특히 조선은 교육에서 여성을 배제하는 것이 더욱 심하여 끝내 조상의 이름자도 한자로 구별할 줄 모르는 여자들이 태반이었다. 김대락은 이를 두고두고 개탄해 마지않던 사람이었다.
생각이 이에 미치자, 김대락은 집안의 손녀가 떠올랐다. 그리하여 손녀를 앉혀놓고는 긴요한 글자 천 자를 써서 손녀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런데 손녀가 제법 재주가 있어서인지 알려준 글자들을 꽤 영리하게 기억하는 것이 아닌가? 한문이란 것이 글자를 안다고 문장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 문장 이해까지는 바라지 않지만 그래도 낫 놓고 정(丁) 자도 모르는 꽉 막힌 지경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었다. 바뀐 세상에 한자가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나, 어리석음을 깨우치는 데에는 크게 도움이 될 듯싶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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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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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이야기
출전 :
백하일기(白下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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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대락(金大洛)
주제 : 교육
시기 : 1912-11-10 ~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중국
일기분류 : 망명일기
인물 : 김대락
참고자료링크 :
웹진 담談 92호
◆ 조선시대 여성들의 문자 생활
이 이야기는 김대락이 여성들에게 한문을 가르치지 않는 조선의 풍습을 개탄하면서 손녀에게 한자를 가르쳤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이야기는 김대락의 두 가지 면모를 보여주는데, 하나는 남성과 여성이 평등하게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진보적 측면이고, 또 하나는 교육의 대상이 되는 지식이 바로 한문(漢文)이라는 보수적 측면이다. 이러한 두 가지 측면은 유학적 지식을 기반으로 하여 서양 지식을 받아들이고 곧 공화정치를 주창하는 그의 사상적 이력을 함축적으로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한편 그가 개탄하였듯이 조선시대 여성들은 거의 대부분 철저하게 교육에서 배제되었다. 이것은 상류층 여성들도 마찬가지여서, 대부분의 여성들은 언문(諺文), 즉 한글만 겨우 이해하는 수준이었다. 상류층 여성들이 한문 사용에 익숙하지 못하였다는 사실은 가장 상류층인 왕실 여성들의 기록을 보아도 나오는데, 실제로 왕실 여성들도 한문을 해독하지 못하여 교서 등을 내릴 때도 언문으로 작성한 예가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또한 자신의 일기 등도 언문으로 기록한 경우가 많았다. 왕실의 여성들이 이러하니, 대부분의 양반가 여성들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여성들에 대한 한문 교육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남자들이 읽는 <논어>, <맹자>와 대비되어 여자들이 읽는 <여사서(女四書)>와 같은 책들을 교육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무래도 교육을 통해 엘리트 관료로 진출하는 남성들에 비하여 성취동기가 약할 수밖애 없었고, 또한 여성들의 지나친 학식도 꺼려하는 사회 분위기로 인하여 여성들의 교육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역사 속에서 한문 구사를 능하게 했던 여성들이 종종 등장하는데, 대표적으로 성종의 어머니였던 인수대비 한씨를 들 수 있다. 그녀는 왕실 여성들이 지켜야 할 덕목을 적은 『내훈』이란 책을 직접 저술할 만큼 한문에 조예가 깊었다. 또 잘 알려진 대로 황진이 같은 기생들은 당대 사대부들 이상으로 뛰어난 시문을 지을 만큼 문장력이 탁월한 것으로 알려졌다.
◆
원문 이미지
◆ 원문 정보
十日 夜雪如紙薄 見晛卽消 女子之不學眞書 亶由於才難 而不能兼治之俗弊所使也 雖男女有別 而焉能並與文字而別之乎 東俗尤甚 終不識父祖諱啣 余竊慨然 玆以片楮先書緊要字一千 課授女孫 頗有才苗 雖未嘗期擬文章 而不歸於全然茅塞 則此亦不害爲發蒙之一階級也
◆ 원문 번역
11월 10일. 밤에 눈이 종이처럼 얇게 왔는데 햇살을 보자 바로 녹아 없어졌다.
여식들이 진서眞書를 배우지 않은 것은 오로지 재난才難 재난才難 : 인재를 얻기 어렵다는 말이다. ??논어?? 「태백泰伯」에 “공자가 이르기를, ‘인재 얻기가 어렵다는 것이 옳은 말이 아니겠는가. 당우 시대만 해도 주나라보다 성하였다. 그러나 주나라도 부인이 끼었으니 아홉 사람일 뿐이다[子曰 才難 不其然乎 唐虞之際 於斯爲盛 有婦人焉 九人而已]”한 데서 온 말이다.
때문이니, 두 가지를 다 잘 할 수는 없다는 속습 때문에 그리 된 것이다. 비록 남녀가 유별하다지만 어찌 두 가지에 모두 능한지, 그리고 문자를 아는지로 분별하겠는가? 조선의 풍속은 더욱 심하여 끝내 조상의 이름자도 알지 못하게 된 것을 나는 속으로 개탄하였다. 이에 작은 종이에 먼저 긴요한 글자 천 자를 써서 손녀에게 가르쳐 주었더니 제법 재주가 있었다. 비록 문장 이해까지는 바라지 않지만, 아주 꽉 막힌 지경은 되지 않으리니, 이 또한 어리석음을 깨우치는 순서에 방해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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