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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에도 개화의 바람이 불어오다
1897년 2월, 박주대는 오랜만에 평화로운 일상을 맞이하고 있었다. 작년 병신년 의병이 봉기하고 이를 토벌하기 위해 관군과 일본군이 횡행하였으나, 이제 의병들은 해산하고 이들을 잡기 위한 군대들도 모두 물러갔다. 그리고 조정에서는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하였던 주상께서 드디어 궁궐로 환어하셨다고 한다. 근 몇 년간 조정도 마을도 모두 시끄러웠던 때에는 요즘과 같은 평화로운 일상이 다시 찾아오리라 생각지 못하였다. 이제 불운이 물러가고 태평한 운수가 오기를 기원해 보는 박주대였다.

그런데 근래 들어 예천 고을에도 개화의 바람이 불어오는 듯하였다. 안동이나 예안 일대에는 소매통이 넓은 옛 두루마기를 입는 사람이 많았다. 박주대 역시 옛 두루마기를 만들어 나들이옷으로 삼았다. 그런데 나라에서 소매통이 넓은 옷을 입지 말라고 금지하였을 때에는 모두가 이 조치를 원망하였는데, 막상 의복은 입기 편한 대로 하라는 훈령이 떨어진 뒤로는 거의가 좁은 소매에 새털로 짠 옷을 입고 다니는 자들이 많아졌다. 그리하여 박주대가 입은 넓은 소매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어졌다. 심지어 양반 집안이라 하는 사람들 중에도 그런 옷을 입고 다니는 자들이 심심치 않으니 괴이한 노릇이었다.

그리고 향교의 제사에 대한 관찰사의 훈령이 도착하였는데, 문묘에 올리는 석전제도 신식으로 올리란 것이었다. 아울러 비용도 2백 냥으로 줄이라고 하였다. 요즘 물가가 얼마인데 2백 냥으로 문묘에 제사를 지내라니! 터무니없는 말이었다. 문묘뿐 아니라 해마다 고을에서 거행하는 여제와 사직제에도 이 규정을 적용하라고 한다. 복장뿐 아니라 제사도 신식으로 바꾸라 하는데, 정작 고을의 양반들의 반응은 이전처럼 격하게 반대하지 않으니, 이 또한 괴이한 노릇이었다. 아! 과거 찬란한 문물제도가 이렇듯 조금씩 바뀌어 가는 것인가! 박주대는 한켠의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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