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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당교육을 폐하고 신식교육을 하자는 목소리가 높다
1906년 6월, 근래 상주에는 면마다 촌마다 학교가 들어섰다고 한다. 상주군수 길영수란 사람이 학교 설립을 담당하는 관리를 현지에 며칠씩이나 유숙시키면서 학교시설을 독촉하였는데, 사람들이 응하지 않아 성사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승지 벼슬을 지낸 정하묵이란 이는 스스로 중학교를 설립한다 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상주의 유약소에다가 소위 보조금이란 것을 냈다고 하는데, 그 금액이 수만금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상주의 유약소에서는 이를 거부하자는 통문을 돌리어 마침내 정하묵의 기도가 중단되었다고 한다. 이 정하묵이란 자는 ‘나는 지금까지 공맹의 학문에 속아왔는데, 이제야 크게 깨달았다’ 고 했다는 것이다. 그도 왕년에는 유학자로 자처했던 인물이었다.

사실 올해 들어 향교나 서당의 교육이 위태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지난 3월 각 읍마다 교육회를 설치한다는 칙령이 내렸는데, 앞으로는 모든 서원이나 서당의 교육은 교육회의 지휘감독을 받는다는 것이 내용이었다. 대구시내에서는 구식 서당 선생을 내쫓았는데, 이후부터는 학당에서 글을 읽는 자가 없다고 한다. 또 안동향회에서는 이 새로운 교육령을 따르지 않을 것을 결의하기도 하였다 한다.

이 칙령이 내려지고 얼마 후에 경상도에 교육사업자금이 내려왔는데, 약 1천 원 규모였다. 그런데 예천 고을에는 겨우 60냥만이 배정되었다고 하는데, 그나마 관찰사가 약 300냥을 더 부쳐왔다고 한다. 만일 이 돈으로 교육 사업을 시행하게 된다면, 또 애꿎은 백성들에게 징수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하였다. 그러나 돈은 쥐꼬리만큼 보내 주고 나서 교육회를 설치하라는 훈령은 성화하듯 계속 내려온다고 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조정 관료들 중에는 공맹의 유교교육을 장려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꽤 있다는 점이다. 지금 재상인 민경호는 유교교육을 장려해야 한다고 주청하였고, 채홍구, 유준영도 공맹정주의 유학으로서 교육해야 한다고 주청하였다고 한다. 나라를 힘없이 빼앗길 때만 해도 죽일 듯이 미웠던 신료들인데, 그나마 공맹의 도를 지켜야 한다는 건의를 하였다 하니, 마냥 미워할 수만도 없는 노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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