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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도 대첩의 승전보를 전해 듣다
1592년 7월 26일, 요사이 전해 듣는 왜적의 정세가 심상치 않다. 안음에서 들려온 소식에 의하면 대구, 군위, 영천, 안동 등을 점령했던 적들이 이달 초 7일 이후로 서로 붙들고 통곡하다가 밤을 타서 내려갔고, 왜장의 관 세 개에 각각 명정을 세우고 역시 이미 동래로 내려갔다고 한다. 또 금산군 훈도의 말에 의하면 그곳의 왜적들도 서로 귓속말로 소식을 주고받더니 통곡하고는 김해, 밀양 지역의 백성들을 남녀 불문하고 200명이나 다 죽인 뒤에 머물던 집에 불을 놓고는 내려갔다고 한다. 이들이 가버리자 강에 가득하던 배들이 하루아침에 모두 없어지고 다만 두 세척의 배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고 한다.

전라좌도의 전황도 호전되어 지금은 곳곳에서 의병이 봉기하여 구름처럼 몰려들고 있다고 하며, 좌병사는 지금 청송부에 있으니 바야흐로 적을 소탕할 시기가 왔다고 벼르고 있었다. 한편 경상우수사 원균과 전라좌수사 이순신, 전라우수사 이억기 등이 이달 초 8일에 함께 왜적과 맞붙어 적선 80여 척을 사로잡았다고 한다. 싸움 과정에서 벤 왜적의 수가 칠백여 명이나 되고 그 이틀 후에는 또 적선을 만나서 80여 척을 사로잡았다고 한다. 여기에 물에 빠져 죽은 자, 불에 타 죽은 자, 여러 고을의 군인과 백성들에게 화살을 맞고 죽은 자 등등을 모두 하면 몇 천명인지 모른다고 한다. 왜적 5명을 생포하였는데 그중 나이가 젊고 거짓스러운 자는 즉시 베어버렸고, 15, 16세 된 어린 자는 하동현의 감옥에 가두었다고 한다.

비록 육지에서는 연일 패전하고 있을지 몰라도 바다에서만큼은 항상 승전보를 전해오니 기쁜 노릇이었다. 수군들이 이 기세를 몰아 동래에 정박한 왜적들을 모두 물리친다면 이 전란을 끝낼 수 있을 터인데... 오희문은 기쁨과 동시에 조급한 마음이 드는 것을 참기가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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