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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픔에 처자식을 길에 버리다
1593년 7월 15일, 오희문은 일가를 데리고 전라도로 피난을 가는 길이었다. 오늘은 고부군 앞을 지나는데, 문득 길가의 좌우를 둘러보니 밭과 들이 모두 절반이나 황폐해져 있었다. 비록 땅을 일구고 씨를 뿌린 곳도 간간이 있었으나 모두 곡식이 제대로 여물지 않을 것으로 보였다. 어떤 땅에는 호미로 김매기를 한 흔적도 있었으나, 이미 7월 중순인데도 자란 것이 겨우 두어 치 높이에 불과하였다. 호남은 예부터 넓은 들판으로 조선 제일의 곡식 생산지였는데, 이제 천리나 되는 기름진 들판이 거친 풀로만 덮여 있는 것을 보니, 올해와 내년 굶주린 백성들이 어떻게 지탱할지 벌써부터 큰 걱정이었다. 아마 내년이 오기 전에 시체들이 구덩이를 가득 메울 것을 생각하니 식은땀이 흘렀다.

이런 걱정으로 길을 재촉하고 있는데, 문득 길가에 7-8세가량 된 아이가 큰 소리로 통곡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옆에 여인도 한 명 있었는데, 그 역시 길가에 앉아 얼굴을 가리고 슬피 울고 있었다. 괴이하게 여겨 까닭을 물어보니, 여인의 말이 남편이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고 우리 모자를 버리고 갔다는 것이다. 그리곤 우리 모자는 장차 굶어죽게 되었다며 슬픈 목소리로 통곡하는 것이 아닌가! 이 말을 들으니 슬프고 불쌍한 마음을 이길 수가 없었다.

아버지와 아들은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요, 부부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이로 비록 짐승이라 하더라도 서로 사랑하고 아끼며 불쌍히 여기는 것인데, 심지어 사람의 탈을 쓰고 처자식을 길에 버리고 돌아보지 않다니! 그 배고픔이 얼마나 컸으면 어찌 이런 지극히 괴이한 일이 벌어졌겠는가! 정녕 조선의 백성들이 모두 이러한 배고픔으로 모두 없어질 지경에 이를 것인가! 오희문은 울고 있는 모자를 쳐다보며 거듭 탄식이 배어 나오는 것을 숨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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