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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카 상진의 병세가 위중해지다
1755년 7월 27일. 둘째 아우의 아들인 상진이 지난달부터 병을 앓더니, 요사이 그 병세가 급격히 악화하였다. 얼마 전에는 설사가 마치 고름과 같이 나와 온 집안 식구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계속되는 병세에 강 의원을 집으로 불렀다. 강 의원은 상진의 증세를 진단하더니 보중익기탕을 처방해 주고는 밤 해시 무렵 복용하라 일렀다.
이 해시란 말에 최흥원은 지난번 본 점괘가 떠올랐다. 상진의 병이 오래 낫지 않자 아는 사람에게 점을 쳤더니 췌괘가 곤괘로 바뀌는 점괘가 나오면서, 해일(亥日)에 의원이 집에 들어올 것이라 예언하였다. 그런데 오늘 날짜를 따져보니 마침 해일이 아닌가! 게다가 의원이 약을 처방해서 꼭 해시(亥時)에 먹이라고 하니, 해(亥) 간지가 상진의 병을 다스리는데 특별한 효험이 있는 듯하였다.
사실 점이란 것을 그다지 믿지 않는 최흥원이었으나, 점괘나 점쟁이의 말, 의원의 말이 모두 절묘하게 일치하니 일말의 기대가 생기는 것도 사실이었다. 어쩌면 의원의 처방이 정말로 효험이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최흥원은 병에 지친 상진과 그 아비인 둘째 아우를 생각하며 그 점괘가 틀림없기를 마음속으로 기원하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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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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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이야기
출전 :
역중일기(曆中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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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최흥원(崔興遠)
주제 : ( 미분류 )
시기 : 1755-07-27 ~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대구광역시
일기분류 : 생활일기
인물 : 최흥원
참고자료링크 :
웹진 담談 113호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최흥원
◆ 조선시대 점과 점쟁이
예로부터 무당을 궐 안에 두고 나라의 길흉을 예언케 하였으나 점쟁이는 예언자로 전문적 직업인으로 민간에 생겼다. 점을 치는 종류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생사의 존망을 점치는 사주점과 앞으로 닥칠 일을 점치는 운수점, 한 해의 운이 좋고 나쁨을 점치는 신수점, 단시점(斷時占), 멸액점(滅厄占), 절초점(折草占)따위가 있다. 또한 점을 치는 것으로는 태주가 하는 신점(神占)과 주로 여자 점쟁이가 쌀을 뿌려 점치는 쌀점, 동전을 던져서 점치는 돈점, 새가 물어온 점괘로 점치는 새점, 산통점(算筒占), 역점(易占), 오행점(五行占), 육효점(六爻占), 팔괘(八卦占), 구궁점(九宮)따위가 있다.
옛날 점치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맹인들은 골목을 돌아다니며 “문복(問卜, 점쟁이에게 길흉을 물음)이요!” 하면서 점을 치고자 하는 사람을 찾아다녔고 자기 집에 ‘점’ 또는 ‘점집’이라 쓴 깃발을 달아놓기도 하였다. 이들은 주역(周易)을 바탕으로 이름 짓기와 관상, 이름, 감정 따위를 보았으며 때때로 액운을 막기 위한 부적을 쓰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중기(中期) 때 민간에 보급된 대표적인 토정비결(土亭秘訣, 이지함 저술)은 생년월일시를 숫자로 풀이해서 그 해의 운수를 달마다 보는 정초의 풍습이 되었다.
◆ 조선시대 맹인의 교육과 활동
고려시대부터 맹인들의 점을 치는 기술이나 방법이나 불경을 암송하는 등의 일을 전문적으로 국가에서 교육시켰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더욱 성행하였고 맹인들이 복술(卜術)과 독경(讀經)으로 양재기복(禳災祈福, 신에게 빌어서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비는 것)하는 일까지 겸하게 되었다.
《경국대전》에는 이들의 복술은 당나라 때 원천강(袁天綱)의 육임과(六壬課, 골패 등을 가지고 길흉을 점치는 방법)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점술법에 의거했던 것으로 전해지며, 고려 이후의 명경수(明鏡數)를 최고로 일컬어 왔다고 여겨지나 실제로는 산통(산가지를 넣는 통)을 차고 다니며 청하는 집에 들어가 산가지(옛날에 수효를 셈할 때 쓰던 물건. 가는 대나 뼈 따위로 젓가락처럼 만듦.)로 괘를 만들어 길흉을 말해 주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조선시대에는 태종이래로 맹인의 독경·주축을 관할하는 국가 관서로서 명통시(明通寺) 두고 이곳에 맹인을 불러 모아 기우(비 오기를 빔)행사를 집행시키고, 자주 사미(賜米, 나라에서 내리는 쌀)의 은전이 베풀어졌다. 명통시에서는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5부(部)의 맹인들이 모여 한 차례씩 독경축수하는 행사가 거행되는데, 위계질서가 엄격하여 지위가 높은 자는 채청에 올라가고 낮은 자는 문을 지키며, 여러 겹의 문에 창을 든 수위자를 세워 다른 사람이 들어갈 수 없도록 하였다. 명통시는 지금의 남산기슭 신당동 근처에 위치해 있었으며, 그 뒤 맹청(盲廳)으로 이름을 바꿨다.
명통시의 맹인은 처음에는 삭발을 해서 맹승(盲僧) 또는 선사(禪師)로 불리었으나 불승과는 다르고 불교·도교·민간 신앙을 혼유한 존재였으므로 가뭄이 들면 기우하고 질병이 들면 기양(祈禳)하게 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결국 우리나라에는 도교의 교단이나 도사가 없는 대신 맹인들이 잡술 행사의 집행을 담당해 내려 왔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맹인에게 점복교육을 실시하고, 교육을 이수한 이들에게는 점복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하였던 것은 우리 선조들의 천명사상을 믿었고, 맹인에게 독경, 예언, 치병의 능력이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
원문 이미지
◆ 원문 번역
7월 27일 흐렸으나 비는 내리지 않았다. 어머니의 환후는 어제와 마찬가지다. 아이 상진의 설사가 더욱 두렵다. 강 의원이 상진의 증세를 진단하고 보중익기탕補中益氣湯을 처방하면서 해시(밤 9시~11시)에 복용해보라고 하였다. 지난번에 아플 때 점을 쳤더니 췌괘萃卦가 곤괘困卦로 바뀌는 점괘가 나오고, 해일亥日에 의원이 집안에 들어올 것이라고 하였다. 오늘 이 의원이 마침 해일亥日에 와서 진찰하고 또 “해시에 맞추어 약을 복용하는 것이 절묘할 것이다.”고 말하니, 혹시 효험을 볼지 모르겠다. 삼가 일족 어른이 의원을 보러왔다. 중 쾌선快善이 와서 인사를 하였다. 밤에 비가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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