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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양온 두 명의 관리, 평생의 소원인 백두산에 함께 오르다
1766년(영조 42) 5월 21일 영조는
서명응
에게 특교를 내려 홍문관록을 주관하라고 하였다. 홍문관 부제학이었던 서명응은 마땅히 이 일을 주관해야 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두 번째 명도 어기고 나아가지 않았다. 영조가 유지를 내려 “만약 행하지 않는다면 신하로서 갖추어야 할 절조가 없는 것이니 무엇을 애석히 여기겠는가?”라고 질책했다. 세 번째 명을 내렸지만 서명응은 역시 응하지 않았다. 결국 서명응은 갑산부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영조는
조엄(趙曮)
을 대신 부제학으로 삼았다. 그러나 조엄도 나가지 않았다. 영조는 조엄을 삼수부에 귀양보내도록 명하였다. 귀양가던 날 두 사람이 동문 밖에 나왔다. 전송하는 사람들은 서로 바라볼 뿐 이별을 나눌 수 없었다. 땡볕 더위에 빨리 달려 누원(樓院)에서 상봉하였다. 여기서부터 갈 때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였지만, 잘 때는 반드시 이웃하였다. 대략 13일 만에 유배지에 도착하였다.
서명응은 조엄(趙曮)과 함께 평생 소원인 백두산에 오르기로 했다. 6월 10일 서명응, 조엄, 갑산부사, 산수부사 외에 수행원을 포함한 1백 여명은 갑산부를 출발하여 운총진(雲寵鎭), 보다산(寶多山), 서수라덕령을 넘어 심포(深浦)에 도착했다. 지세가 매우 험하고 가파를뿐 아니라 숲이 울창해 도끼로 나무를 베어 넘어뜨리면서 갔지만 말도 사람도 모두 지나기 힘들었다. 12일 심포를 출발해 자포령을 넘고 어수참(魚水站)에 도착했다.
13일 삼수와 갑산의 척추이자 백두산과 소백산의 출입문인 허항령, 무지봉에 도착하니 백두산이 눈앞에 보였다. 서명응과 조엄은 안내자의 말을 듣지 않고 길을 재촉하다가 되돌아왔는데, 동행한 수행인의 말에 따라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14일 백두산에 오르는 길에
백두산정계비
를 보니 당시 박권과 이선부의 실책으로 잃은 두만강 인근 700리땅을 생각하니 인해 탄식이 절로 나왔다.
날씨가 쾌청하여 백두산 정상의 장엄한 주변경관을 모두 볼 수 있었다. 연못과 주변 봉우리들에 마땅한 이름이 없기 때문에 이름을 짓기로 했다. 연못은 태일택(太一澤)이라고 하고, 연못가에 솟아 있는 봉우리를 황중봉이라고 하였다. 4계절의 방위를 활용하여 황중봉을 중심으로 인(寅, 북동) 방향에 있는 것은 옛적부터 대각봉(大角峯)이라고 한 것을 그대로 붙이기로 하였다. 묘(卯, 정동) 방향에 있는 봉우리는 청양봉(靑陽峰), 진(辰, 동남동) 방향에 있는 봉우리는 포덕봉(布德峯), 사(巳, 동남) 방향에 있는 봉우리는 예악봉(禮樂峰), 오(午, 정남) 방향의 봉우리는 주명봉(朱明峰), 미(未, 남서남) 방향에 있는 봉우리는 황종봉(黃鐘峰), 신(申, 서남서) 방향의 봉우리는 실침봉(實沈峰), 유(酉, 정서) 방향은 총장봉(總章峯)이라고 하였다. 술(戌, 서북서) 방향에 있는 봉우리는 신창봉(神倉峯), 해(亥, 북북서) 방향의 것은 일성봉(日星峯), 자(子, 정북) 방향에 있는 것을 현명봉(玄冥峯), 축(丑, 북북동) 방향에 있는 것은 오갈봉(鳥碣峯)이라 이름지었다. 그리고 12봉 이외에 연지봉이라 불리우던 봉우리를 자각봉(紫閣峯)이라 고쳤다.
15일 삼지도(三池島)를 유람하고 자포를 거쳐 16일 서수라덕령에 도착하니 서명응과 조엄이 유배에서 풀렸다는 소식이 도착했다. 유배지에 도착한 이후 19일만에 서울에 되돌아가게 되었고 그 중 8일간은 백두산을 기행했다. 주위 사람들이 모두 두 사람이 유배된 것은 백두산을 견문하게 하려는 하늘의 뜻이라며 부러워했다.
개요
배경이야기
원문정보
멀티미디어
관련이야기
출전 :
유백두산기(東遊山水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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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서명응(徐命膺)
주제 : 놀이와 유람, 명산 유람
시기 : 1766-05-21 ~ 1766-06-16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함경남도 갑산군
일기분류 : 유산일기
인물 : 서명응, 조엄
참고자료링크 :
문화원형
승정원일기
조선왕조실록
◆ 조선시대의 귀양
서명응은 북학파(北學派)의 비조로 일컬어진다. 이용후생(利用厚生)이 그의 학문정신인 만큼 힘겹고 위험천만한 백두산 산행길을 단순한 유람을 위한 수단으로 삼지 않고 도리어 죄악시 하면서 천문을 관측하는 기회로 삼기도 한다.
청나라 오라총관 목극등이 백두산 경계조사를 나왔을 당시 접반사로 참가했던 박권이 집필한 『북정일기』에는 박권과 이선부가 정계비 설치과정에 참여하지 않고 대기 중이었던 정황에 대해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에 비해 서명응의 『유백두산기』 에는 당시 목극등의 강압적이고 고압적인 분위기 아래 조선측 관리들의 미온적인 대응상황을 상세히 전해주고 있어 흥미롭다.
그 외 비록 유배지에 온 죄인의 몸이지만 고관대작인 서명응과 조엄, 그리고 갑산과 산수의 두 부사들이 험난한 백두산에 말을 타고 오르기 위한 행장을 꾸리고 길을 닦아야했던 백성들의 고단함, 행장 규모 등 요즘 산행세태와는 사뭇 다른 점이 주목을 끈다.
귀양살이로 표현되는 유형은 정치적 이유로 중앙 무대에서 격리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일반 범죄인들 중에서도 사형에 버금가는 죄를 범한 경우 유배형을 내리는 때가 많았다. 사형수를 많이 배출하지 않아야 성군으로 표현되기 때문에 이에 근거하여 은전은 베푸는 경우가 허다했다.
조선시기 형벌제도 중 하나인 귀양살이는 정치적인 이유나 무거운 범법자들에게 내려지는 형벌이었다. 특히 정치인들은 중앙의 정치무대와 격리시키기 위한 목적이 컸다. 정적을 죽이지 않고도 권력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세종은 유배지의 거리를 600리, 750리, 900리 밖으로 정했다. 보통 과천, 시흥, 양천에서부터 함경도 경흥 고을, 제주도 등이 유배지였다. 그중 제주도에 귀양간 사람들이 제일 무거운 죄를 지었다고 판결된 자들이다. 남해, 진도, 거제도, 흑산도 등이 절도 유배지의 대표적인 곳이다.
보통 유배지로 떠날때는 압송관이 따르기 마련이지만 정치적 이유로 유배를 당하는 고관대작들은 각기 출발하여 도중에 만나기도 했다. 이들이 이동하는 비용은 모두 국가가 부담하였다. 게다가 마음만 먹으면 조선의 산천을 충분히 유람할 수 있는 조건이었다. 도피할 우려도 거의 없고 전직 고위관리에 대한 예우차원이었다. 가는 길은 쉬엄쉬엄 가고 고을마다 성대한 접대를 받기도 했다. 경유지의 관리들은 유배형을 받은 고위관리들에게 넉넉한 용돈과 물품을 제공하기도 했다.
고위직 인사들이 유배지에 도착하면 그 지역 백성의 집에 들어가 모든 편의를 제공받는다. 음식, 잠자리는 물론 노비들까지 제공되었다. 특히 그 고을 관리들은 유배온 전직 고위관료들을 잘 대접했다. 언제 중앙정치 무대로 복귀할지 모르는 그들을 소홀히 대접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중죄인을 배소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집 주변에 가시울타리를 만들고 그 안에 가두는 위리안치(圍籬安置)와는 상당히 다르다. 마치 안식년을 받아 휴가를 떠나는 모습이 오버랩되기조차 한다. 서명응이 갑산의 관리들과 함께 수행원 1백 여명을 거느리고 백두산에 가는 모습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다.
◆ 원문 번역
1766년(병술년, 영조 42) 5월 21일 임금이 특교를 내려 홍문관록을 주관하라고 하였다. 나는 홍문관 부제학으로 마땅히 이 일을 주관해야 했다. 그러나 두 번째 부름을 어기고 나아가지 않았다. 임금이 유지를 내려 질책하기를, "만약 행하지 않는다면 신하로서 갖추어야 할 절조가 없는 것이니 무엇을 애석히 여기겠는가?" 라고 하였다. 세 번째 부름을 받았지만 또 나아가지 않았다. 임금이 노하여 갑산부로 귀양보낼 것을 명하였다. 조엄(趙曮)을 대신 부제학으로 삼았다. 그러나 조엄도 나가지 않았다. 임금이 또 삼수부에 귀양보내도록 명하였다. 귀양가던 날 두 사람이 동문 밖에 나왔다. 전송하는 사람들은 서로 바라볼 뿐 이별을 나눌 수 없었다. 땡볕 더위에 빨리 달려 누원(樓院)에서 상봉하였다. 여기서부터 갈 때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였지만, 잘 때는 반드시 이웃하였다. 대략 13일 만에 유배지에 도착하였다. 도중에 진령(榛苓)의 시를 읊어 임금의 덕망을 위로하였다. 틈만 나면 고금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시사(時事)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하루는 내가 말하기를, "나는 자식들 혼인을 모두 마쳤으니 할 일은 대충 마쳤다. 그러나 아직 못한 일이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주역》을 읽지 못한 것이고, 둘째는 백두산을 유람하지 못한 것이며, 셋째는 금강산에 가보지 못한 것이다. 지금 유배지가 백두산 아래에 있으니 하늘이 혹시 나로 하여금 백두산 유람을 시키려는 것이 아니겠는가?" 라고 하였다. 조엄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내가 북쪽에 온 것은 두 번째고, 그대는 세 번째인데 한 번도 백두산에 오르지 못했다니 부끄러운 일이다. 그대도 유람을 못하였고 나 또한 유람을 못했으니, 우리 둘이 같이 가는 것이 좋겠다." 라고 하였다. 귀양지에 도착한 지 3, 4일 되는 날, 나와 조엄은 서신으로 6월 10일 백두산으로 떠나기로 하였다. 갑산 부사 중연(仲淵) 민원(閔源)과 삼수 부사 사진(士振) 조한기(趙漢紀)는 산수 유람을 좋아하는 자들로 동행하기를 희망하였다. 내 손님 최우흥(崔遇興)과 홍이복(洪履福), 조엄의 손님 이민수(李民秀)와 민원의 아들 무숙(武叔) 민정항(閔廷恒)까지 모두 동행하였다. 백두산 길 안내는 갑산 선비 조현규(趙顯奎)와 군교 원상태(元尙泰)가 담당하였다. 가는 데 4일, 돌아오는 데 4일이 걸렸다. 빼어난 산택(山澤), 시원스럽게 보이는 조망, 궁경과 관방(關防)의 형세를 한눈에 볼 수 있었으니, 평생에 바라던 쾌거였다. 산에서 돌아오자 용서한다는 임금님의 명령이 내려와 있었다. 아! 두 사람이 임금님께 죄를 얻어 이곳에 온 것은 하늘이 백두산에 오랫동안 갖고 있던 묵은 빚을 갚게 하고자 함이었다. 두 사람의 행적이 여기에서 그쳤으니 이 또한 기이한 일이다. 집에 돌아와 각각 한 본(本)씩 기록하였다. 관직 생활을 마치고 야인으로 돌아가 한가로이 지내면서 소일거리로 삼으려고 한다. 또한 후일에도 금일의 수고로움을 잊지 않을 뿐이다. 6월 14일 연지봉 밑에서 출발하여 백두산 위에 오르다. 이날은 일찍 일어났다. 하늘은 한 점 구름도 없고 솟은 해가 빛났다. 일행은 가마를 타기도 하고, 말을 타기도 하며, 걸어서 서서히 산에 올랐다. 산은 모두가 백색이고 나무는 없었으며, 가끔 녹색 잡초가 이름없는 풀과 꽃으로 덮여 있어 붉기도 하고, 노랗기도 하였다. 계독 사이에 층층의 얼음이 녹지 않아서 멀리서 보면 조각 눈이 있는 듯했다. 이리저리 돌아서 위로 올라가니 깎아지른 바위가 있고 20리를 가니 백산(白山) 세 봉우리가 면전에 깎아지른 듯했다. 역시 연지봉(臙脂峯) 밑에서 본 것과 같다. 동남쪽 언덕 위에 나란히 목책을 세웠는데 길이가 수십 보였다. 자빠지고 떨어져서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었다. 몇 자의 조그만 비가 깎지도 다듬지도 않았는데, 위에 새기기를 '대청(大淸)'이라 하고 밑에는 다음과 같았다. "오라 총관(烏刺摠管) 목극등(穆克登)이 황지(皇旨)를 받들고 변경 조사를 위하여 이곳에 이르러 살펴보니 서로는 압록이요 동으로는 토문이다. 그러므로 물이 나뉘는 고개 위에 돌을 새겨 기록하노라. 강희(康熙) 51년 5월 15일 필첩식(筆帖式) 소이창(蘇爾昌), 통관(通官) 이가(二哥), 조선 군관(朝鮮軍官) 이의복(李義復), 조태상(趙台相), 차사관(差使官) 허량(許樑), 박도상(朴道常), 통관(通官) 김응현(金應瀗), 김경문(金慶門) 운운(云云)." 여러 사람이 본 다음에 형세를 둘러보았다. 비의 뒤쪽 수보 쯤에 이전의 장마비가 흘러 내려가 움푹 파여 골짜기가 되었다. 그런데 깊이는 몇 척에 불과하였다. 지금은 한 방울의 물도 없고 또 전에 돌아서 언덕 위의 비석 앞으로 나온 흔적도 없다. 백두산 한 줄기가 서남쪽으로 가서 떨어져 연지봉이 되었다. 그런데 겹겹이 막혀서 소위 압록강은 보지 못하였다. 그런데 고개의 이름을 ‘분수(分水)’라고 하는 것은 왜 그런가? 또 양국의 사신이 함께 경계를 강정할 때 한 나라의 사신은 비에 이름을 실었는데, 다른 한 나라의 사신은 그렇지 않으니 부끄러워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두려워서 그런 것인가? 여러 사람이 서로 돌아보며 당혹하여서 원상태에게 물어보니, 원상태가 말하기를, "저의 형 상필(尙弼)이 혜산 토병 김애순(金愛順), 운총진의 백성 송태선(宋太先)과 함께 길잡이로 뽑혔는데, 상필은 병이 나서 돌아오고, 태선과 애순이 따라가서 정계의 시말을 자세히 상필에게 전하였습니다. 상필이 또 저에게 전하였는데, 당시의 접반사 박권과 관찰사 이선부가 목극등과 만나 먼저 황제의 건강을 물으니 목극등이 크게 꾸짖기를 '너는 외국 사신이다. 어찌 감히 황제의 건강을 묻는가? 나를 따라 경계까지 좆아오지 말라'고 하니, 박권과 이선부가 크게 놀라서 검천, 허항령을 지나 무산으로 돌아와서 나아가지를 못하였습니다. 목극등이 우리 나라 통역관, 길잡이와 함께 백두산에 이르러 산골짜기가 갈라진 곳의 빗물이 지나갔던 곳을 가리키며 갑자기 말하기를 '이곳이 토문강의 근원이고 이곳이 압록강의 근원이다'고 하였습니다. 태선과 애순이 다투어 말하기를, '토문의 상류는 토문강으로 흘러 들어가지 않고 압록의 상류이니 당연히 서쪽으로 가서 의주에 이릅니다. 지금 서쪽으로 가지 않고 남쪽으로 가니 둘 다 모두 틀렸습니다. 토문강 외에 두만강이 있는데, 옛날부터 우리 나라의 경계로 삼았습니다. 또 지금 말하는 압록강의 상류 바깥에 보은수(保恩水)가 있어서 백두산의 서쪽에서 나가서 서쪽으로 흘러 서대산(西臺山)을 지나니 이른바 압록강 상류라는 것이 합해져서 의주의 압록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이것이 실로 압록강 상류다'라고 하니, 목극등이 꾸짖어 말하기를, '빨리 칼을 가져오라. 두 사람의 눈을 빼겠다'고 하므로, 두 사람이 두려워하여 감히 말을 하지 못하였다. 이에 목극등이 그 언덕을 강제로 '분수령'이라 하고 밑에 비를 세우고 우리 나라 두 사신의 이름을 넣지를 않았다." 라고 하였다. 조엄이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어사로 무산에 있었다. 선비 윤명삼(尹命三)은 당시 향임(鄕任)의 아들로서 나이가 18세였다. 그는 아비를 따라 정계하는 곳에 갔다. 서로 힐난하는 말은 원상태가 전하는 것과 같지만 자세한 것은 차이가 있다. 또 강막종(姜莫從)도 무산인으로 나이가 80세였다. 어려서부터 두루 북방의 산수를 돌아다녀서 익히 물의 원류를 알고 있다. 그의 말에 의하면 토문강은 백두산 동남쪽 30리밖 천평(天坪) 두평처(頭平處)에서 나와 북쪽으로 흑룡강에 흘러 들어간다. 따라서 그것을 토문이라고 하고, 장항해탄(獐項害灘)을 지나 유원(柔遠)에 이르러 두만강과 합한다는 것은 잘못이다. 유원의 물은 회령성변(會寧城邊)의 긴장수(緊長水)에서 나온다. 대개 온성의 서남쪽 1백 리에 분계강(分界江)이 있어서 선춘령(先春嶺) 밑에 고려 시중 윤관의 정계비가 있다. 강의 이름과 비로 추정하건대 이 곳이 우리나라의 경계임이 틀림없다. 하물며 분계강은 윤이후(尹伊厚)의 우가토강(件加土江)과 합류하여 두만강으로 들어가고 두만강은 또 백두산의 동쪽에서 솟아나오니, 그 원류를 찾아서 한 번만 보면 결정할 수 있다. 그런데 7백 리의 땅을 하루 아침에 두 손을 들고 잃어버렸으니, 아! 아깝다." 라고 하였다. 이에 내가 가슴을 치며 탄식하기를, "목극등은 오랑캐 사람으로 오히려 그 나라를 위하여 그 땅을 더했는데, 박권과 이선부는 홀로 마음에 부끄럽지 않다는 말인가? 목극등이 그 나라에 보고하는 글에 '백두산에 올라 지수(池水)를 보니 동으로는 토문이요, 서로는 압록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산 위의 못 물이 동서로 흘러가 두 강이 되었는데, 비를 세우면서 명확히 못 물을 말하지 않고 범연히 두 강이라고 칭하였다. 아마도 다른 사람이 이곳에 와서 상고하여 무너뜨릴 수 있으니 그 말이 근거가 없음을 알겠다. 박권과 이선부가 산에 올라 죽음을 무릅쓰고 다투었다면 목극등이 어떻게 하였을까? 두 사람은 자기 몸만을 돌보고, 국토를 가볍게 보았으며, 그 국토가 크게 줄어듦을 아깝게 여기지 않아, 백 년 사이에 땔나무를 하고 삼을 캐는 백성이 국경을 범하여 죽은 사람이 손으로 꼽을 수 없을 정도다. 아! 일을 한 번 성실하게 하지 않으면 그 피해가 이와 같다. 남의 신하된 자가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일행은 비의 우측을 돌아서 언덕 위에 가서 굽어 돌아 우러르며 약 10리를 올랐다. 그 위에 오르니 사방의 여러 산이 모두 자리 밑에 있어서 시야가 하늘 끝까지 다 들어왔다. 멀리 볼 수 없는 시력을 한탄할 뿐이다. 그러나 추측컨대 북쪽은 영고탑, 오라, 길림이고, 서쪽은 요양, 심양이며, 서남은 혜산, 인차, 가파, 폐사군이다. 동은 무산, 회령, 종성, 온성인데, 동남쪽 한 줄기가 소백산, 침봉, 허항령을 지나서 보다산이 되고, 마등령이 되며 덕은봉이 된다. 완항령, 설령, 참두령, 원봉, 황토령(黃土嶺), 후치령, 통파령(通坡嶺), 부전령(赴戰嶺), 죽령(竹嶺), 상하검산(上下黔山)이 되니 모두 한양(漢陽) 산의 정맥(正脈)이다. 봉우리들을 내려다보니 혹은 높고 혹은 낮으며 혹은 뾰족하고 혹은 둥근 것이 마치 파도가 치는 것과 같다. 구름이 넓고 푸르러 만리에 걸쳐 서로 이끌며 받드는 것 같다. 몸을 돌려 두 봉우리 사이에 서니 봉우리 밑에 5, 6백 장 정도 거리에 텅 비고 평평한 곳에 큰 못이 있다. 둘레가 40리인데 물이 매우 푸르러서 하늘빛과 위아래가 한색이다. 못의 동남 언덕에 정황석산(正黃石山) 세 봉우리가 있다. 높이는 같고 그 바깥 봉우리 셋이 있어 사람의 혀가 입 속에 있는 것과 같다. 뒤의 사면은 열두 봉우리가 둘러 있는데 못을 성처럼 둘러쳤다. 선인(仙人)이 쟁반을 이고 있는 것, 큰 붕새가 부리를 들고 있는 것, 기둥으로 떠받드는 것, 솟아서 빼어난 놈 같은 것들인데 안쪽은 모두 깎아지른 절벽에 붉고 누런 분을 발라 찬란하게 빛나서 잘 짜진 포목으로 둘러친 것과 같다. 바깥쪽은 비스듬히 창백하여 혼연히 하나의 큰 수포석이 응결하였다. 발걸음을 여러 봉우리로 옮기니, 큰 못은 둥글기도 하고 네모지기도 하여 그 보이는 모양이 각각 다르다. 사방이 조금 평평한 봉우리에 앉으니 봉우리에 오석(烏石)이 많다. 작은 것은 주먹만 하고 큰 것은 말〔斗〕만 하였다. 뒷면에 검푸른 모래 같은 점이 박혀 있다. 갑산 사람들은 이것을 갈아서 갓끈 장식으로 사용하였다. 큰 못을 아래로 내려다보니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였고 한쪽만 열려 있다. 그쪽으로 물인 넘쳐 흘러 흑룡강이 되고 곧바로 영고탑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그러므로 압록강과 토문강이 큰 못으로부터 발원한다는 것은 잘못된 말이다. 사슴들이 무리지어 있는데, 물을 마시기도 하고, 걸어다니기도 하며, 누워있거나 느릿느릿 달리기도 하였다. 검은 곰 두세 마리가 벽을 따라 오르내리고, 신기한 새 한 쌍이 물에 점을 찍듯 오락가락 날아다녔다. 마치 그림 가운데 장관을 보는 듯했다. 이때 일행은 약 1백여 명이었다. 봉우리에 둘러서서 경치를 바라보면 산수의 정취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순간 다리가 앞으로 나가며 몸이 기울어졌다. 나와 조엄은 밑으로 떨어질까 걱정되어 이를 금지시켰으나 어쩔 수 없었다. 조현규에게 붓과 벼루로 그 경치를 그리게 하고, 지남침으로 그 봉우리들의 위치를 알아냈다. 대개 반나절을 자유롭게 유람했지만, 아무도 돌아갈 줄을 몰랐다. 갑산 사람 중 여러 번 산행길에 동행한 자들이 모두 말하기를, "옛부터 이 산에 들어오는 자는 여러 날 목욕재계하고 수행원들을 부리는 것도 금지하였다. 그럼에도 운무가 갑자기 일어나고 바람과 우레가 번갈아 일어나서, 기쁘게 모든 것을 볼 수 없었다. 그런데 이번 행차처럼 마음대로 방랑하며 구경을 흔쾌히 한 일은 아직 없었다" 라고 하였다. 6월 15일 천수를 출발하여 자포에 이르다. 처음 나와 조엄은 삼지를 지나면서 그 경치가 맑고 운치있는 것에 감탄하였다. 다만 백두산을 아직 보지 못했으므로 그 곳에 계속 머무르면서 구경할 수가 없었다. 이날은 여러 사람과 함께 삼지도(三池島)를 유람하기로 하였다. 앞에서 해금과 피리를 불게 하고 천천히 나아가 중지(中池)에 도착하였다. 왼쪽 언덕의 주위를 돌아 오른쪽 모래 사장에 앉았다. 물을 건너 섬으로 들어가고 싶어도 종자들이 물의 깊이를 알지 못하여 두려워 건너지 못하였다. 6월 16일 자포를 출발하여 운총에 이르다. 자포에서 자고 아침 일찍 출발하여 서수라덕령에 도착하였다. 순찰사가 파발을 보내 나와 조엄이 유배에서 풀렸다는 관문을 보냈다. 그런데 관문과 집에서 보낸 편지가 같이 도착하였다. 두 사람이 말에서 내려 수풀에 앉아 공문을 보았다. 임금님의 기체는 편안하고 건강은 평상시와 같으며 6월 8일에 진전(眞殿)과 원묘(原廟)를 배알했다고 한다. 두 사람은 서로 돌아보면서 기뻐하였다. 다음으로 관문을 보니 임금님의 말씀이 간절하고 선조까지 언급하고는 특명으로 두 사람의 유배를 석방한다고 하였다. 두 사람은 또 서로를 돌아보며 눈물을 머금고 임금님의 은혜에 감격하면서 집으로 돌아갈 것을 약속하였다. 그 다음으로 집에서 보내온 편지를 읽은 후에 길을 출발하여 검천에서 점심을 먹었다. 5리를 가니 혜산 첨사 유언신, 운총 만호 윤득위가 길에 나와서 맞이하였다. 길 옆 풀섶에 앉아 천천히 몇 마디 말을 주고받고는 또 출발하여 운총에 도착하여 유숙하였다. 다음 날 나와 갑산 부사는 갑산으로 돌아가고 조엄과 삼수 부사는 삼수로 돌아갔다. 6월 22일 서울로 출발하기로 약속하였다. 대개 유배지에 도착하여 서울로 돌아갈 때까지 모두 19일이고, 백두산에 갔다 온 것은 8일이다. 사람들이 모두, "서명응과 조엄이 죄를 지어 이곳으로 유배된 것은 하늘이 두 사람에게 백두산을 견문토록 함이었다." 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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