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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양온 두 명의 관리, 평생의 소원인 백두산에 함께 오르다
1766년(영조 42) 5월 21일 영조는 서명응에게 특교를 내려 홍문관록을 주관하라고 하였다. 홍문관 부제학이었던 서명응은 마땅히 이 일을 주관해야 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두 번째 명도 어기고 나아가지 않았다. 영조가 유지를 내려 “만약 행하지 않는다면 신하로서 갖추어야 할 절조가 없는 것이니 무엇을 애석히 여기겠는가?”라고 질책했다. 세 번째 명을 내렸지만 서명응은 역시 응하지 않았다. 결국 서명응은 갑산부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영조는 조엄(趙曮)을 대신 부제학으로 삼았다. 그러나 조엄도 나가지 않았다. 영조는 조엄을 삼수부에 귀양보내도록 명하였다. 귀양가던 날 두 사람이 동문 밖에 나왔다. 전송하는 사람들은 서로 바라볼 뿐 이별을 나눌 수 없었다. 땡볕 더위에 빨리 달려 누원(樓院)에서 상봉하였다. 여기서부터 갈 때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였지만, 잘 때는 반드시 이웃하였다. 대략 13일 만에 유배지에 도착하였다.
서명응은 조엄(趙曮)과 함께 평생 소원인 백두산에 오르기로 했다. 6월 10일 서명응, 조엄, 갑산부사, 산수부사 외에 수행원을 포함한 1백 여명은 갑산부를 출발하여 운총진(雲寵鎭), 보다산(寶多山), 서수라덕령을 넘어 심포(深浦)에 도착했다. 지세가 매우 험하고 가파를뿐 아니라 숲이 울창해 도끼로 나무를 베어 넘어뜨리면서 갔지만 말도 사람도 모두 지나기 힘들었다. 12일 심포를 출발해 자포령을 넘고 어수참(魚水站)에 도착했다.
13일 삼수와 갑산의 척추이자 백두산과 소백산의 출입문인 허항령, 무지봉에 도착하니 백두산이 눈앞에 보였다. 서명응과 조엄은 안내자의 말을 듣지 않고 길을 재촉하다가 되돌아왔는데, 동행한 수행인의 말에 따라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14일 백두산에 오르는 길에 백두산정계비를 보니 당시 박권과 이선부의 실책으로 잃은 두만강 인근 700리땅을 생각하니 인해 탄식이 절로 나왔다.
날씨가 쾌청하여 백두산 정상의 장엄한 주변경관을 모두 볼 수 있었다. 연못과 주변 봉우리들에 마땅한 이름이 없기 때문에 이름을 짓기로 했다. 연못은 태일택(太一澤)이라고 하고, 연못가에 솟아 있는 봉우리를 황중봉이라고 하였다. 4계절의 방위를 활용하여 황중봉을 중심으로 인(寅, 북동) 방향에 있는 것은 옛적부터 대각봉(大角峯)이라고 한 것을 그대로 붙이기로 하였다. 묘(卯, 정동) 방향에 있는 봉우리는 청양봉(靑陽峰), 진(辰, 동남동) 방향에 있는 봉우리는 포덕봉(布德峯), 사(巳, 동남) 방향에 있는 봉우리는 예악봉(禮樂峰), 오(午, 정남) 방향의 봉우리는 주명봉(朱明峰), 미(未, 남서남) 방향에 있는 봉우리는 황종봉(黃鐘峰), 신(申, 서남서) 방향의 봉우리는 실침봉(實沈峰), 유(酉, 정서) 방향은 총장봉(總章峯)이라고 하였다. 술(戌, 서북서) 방향에 있는 봉우리는 신창봉(神倉峯), 해(亥, 북북서) 방향의 것은 일성봉(日星峯), 자(子, 정북) 방향에 있는 것을 현명봉(玄冥峯), 축(丑, 북북동) 방향에 있는 것은 오갈봉(鳥碣峯)이라 이름지었다. 그리고 12봉 이외에 연지봉이라 불리우던 봉우리를 자각봉(紫閣峯)이라 고쳤다.
15일 삼지도(三池島)를 유람하고 자포를 거쳐 16일 서수라덕령에 도착하니 서명응과 조엄이 유배에서 풀렸다는 소식이 도착했다. 유배지에 도착한 이후 19일만에 서울에 되돌아가게 되었고 그 중 8일간은 백두산을 기행했다. 주위 사람들이 모두 두 사람이 유배된 것은 백두산을 견문하게 하려는 하늘의 뜻이라며 부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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