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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험한 벼랑이 다퉈선 곳, 무당의 장구 소리와 부채춤이 밤낮없이 이어지다
1586년 9월 6일, 양대박 일행이 지리산 유람을 하고 있는데 그 형세가 준험한 벼랑이 다투듯 서 있고, 웅장한 수석(水石)이 아름다워 어제 본 것과 백중세를 이루었다. 또 산길로 10여 리를 가서 백문당(白門堂) [혹 백무당(百巫堂)이라고도 한다.]에 이르니 집은 길 옆의 숲 속에 있는데, 잡신들이 모셔져 있고 무당들이 모이는 곳으로 장구를 치는 것이 밤낮없이 이어졌고, 사시사철 부채를 들고 춤을 춘다. 사당 안에는 초상이 걸려 있었는데 기이하여 더 말할 것이 없었다. 이곳은 오래 머무를 수없는 곳이어서 밥을 재촉해 먹고 신을 신고서 돌아보지 않고 출발하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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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이야기
출전 :
두류산기행록(頭流山紀行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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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양대박(梁大樸)
주제 : 놀이와 유람, 유람과 감상
시기 : 1586-09-06 ~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경상남도
일기분류 : 유산일기
인물 : 양대박, 오적, 양길보, 애춘, 생이, 수개, 양광조
참고자료링크 : (참고자료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 지리산과 샤머니즘
지리산은 수천 년의 세월을 두고 우리 민족과 애환을 함께 하여 왔으며 무속 신앙의 발원지로 알려져 왔다. 지리산신(地異山神)은 여신(女神)이라고 하며 지리산신은 여러 설에 의해 제기 되어 왔는데 그 첫번째가 마고할미(마고성모)가 지리산신이 되었다는 설이다.
옛적에 천신의 딸인 마고할미가 지리산에 내려와 반야를 만나 결혼하여 살다가 도를 구하러 떠난 남편 반야를 기다리다가 죽어 지리산신이 되었으며, 지리산신으로 천왕봉 성모사에 모셔져 있었던 성모석상의 주인공은 바로 마고할미(‘천왕할매’라고도 함)라는 설이다.
또 한가지 설로서는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의 어머니인 위숙황후가 성모석상의 주인공이라는 주장으로 그 근거로는 이승휴의 ‘제왕운기’에서 “성모명선사(聖母命銑師)의 주에 지금 지리천왕(地異天王)은 고려 태조의 비 위숙왕후를 말하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으며 위숙황후는 원래 지리산신이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불교계에서는 석가여래의 어머니인 마야부인이 지리산신으로 내려온 것이라도 주장하고 있는 등 지리산신에 대한 여러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위에서 말한 분들 중에 어떤 분이 지리산신이였던 간에 우리 민족은 천왕봉 성모사에 모셔져 있던 성모석상을 지리산신으로 받들고 추앙하여왔으며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천왕봉 성모사에 있던 성모석상은 여러 기록에 나타나고 있는데 김종직의 두류록, 김일손이 지은 속유두류록에도 그 기록이 나타난다, 또 여지승람(與地勝覽) 진주목(晉州牧) 사묘조(祀廟條)에 의하면, “성모사는 지리산 천왕봉 마루턱에 있는데 사당 안에는 성모상이 있고, 성모상 이마에는 칼에 맞은 흔적이 있다. 속설에 의하면, 이 칼자국은 왜구가 우리 이 태조에게 패한 뒤 천왕이 자기들을 돕지 않았다 여겨 그 이마를 칼로 치고 갔다고 한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성모상이 우리 민족의 정신적 절대자로 추앙받아온 사실은 이와 같이 옛 사료에서도 입증되고 있으며, 이중환의 “택리지”에서는 천왕봉 정상의 성모사에 치성을 드리는 사람들을 “풍기문란“과 ”실농위기”를 맞을 만큼 극성스러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택리지”에 의하면 남도의 농민들이 늦봄부터 초가을까지 6·7개월 동안 천왕봉 성모사에 모여 기도를 하는 등 치성을 드리고 있는데 고산의 기후가 시시각각으로 변하면서 추위를 견디기 위해 남녀가 바위틈에서 부둥켜안고 있을 정도로 풍기문제가 말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보다 더 큰일은 농사철에 농사는 돌보지 않고 치성 드리는 데만 정신이 팔려 실농을 면치 못해 조정에서는 관찰사의 보고를 받고 이를 금지시키려 했으나 별다른 효력이 없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성모사의 성모석상은 그 앞을 지나가려고 하면 반드시 기도를 했어야 했으며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화를 입었다고 하는데 정홍명(鄭弘溟)의 ‘일수옹만필(日垂翁漫筆)’에 의하면 천연(天然)은 남쪽 지방의 중으로 신장이 8척인데다가 담력 또한 뛰어났다. 한번은 그가 지리산 성모사를 지나게 되었는데, 천왕봉 음사가 신령스럽다는 말이 퍼졌기 때문에 그 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기도를 하지 않으면 몇 걸음 못 가서 인마(人馬)가 모두 죽는다고 하여 나그네들은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천연은 이를 괴이하고 망령되다 하여 팔을 걷어 올리고 그대로 지나갔다. 과연 얼마 못 가서 타고 가던 말이 엎어져 죽었다. 천연이 대노(大怒)하여 곧 죽은 말을 사당 안에 끌고 가 말의 피를 사당의 벽에 바른 다음, 주먹을 불끈 쥐고 신상(神像)을 격파하고 불태워 벼렸다. 이후부터 괴이한 일이 없어졌고 상인들도 무사히 왕래했다고 한다.
또 유몽인(柳夢寅)의 “어우야담(於于野談)”에 의하면, 천연선사(天然禪師)는 의기가 많아 사대부들과 자주 접촉하였다. 그는 지리산 천왕봉에 있는 성모상을 천황신이라 칭하여 원근의 무당들이 모두 존봉(尊奉)하며 백성들도 생업을 모두 폐기하고 이 석상을 떠받든다는 말을 들었다. 천연은 이모든 것이 성모상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단독으로 그 상을 파괴해 버렸다. 이후 한동안은 많은 무당들이 기에 눌려 제대로 활동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성모석상을 찾는 행렬이 오죽 많았으면 이 같은 문제가 기록으로까지 전해져 오고 있을까하는 생각이 드는데 지리산이 우리 민족의 샤머니즘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말하고 있는 대목이다. 지리산 천왕봉에 있던 성모석상은 푸른빛을 띠는 석상으로 만들어져 성모사에 오랫동안 모셔져 왔으나, 1960년대 어느 날 분실되었다가 20여년이 지난 후 천왕사 혜범스님의 선몽에 의해 다시 찾아져 지금은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에 있는 천왕사 큰 바위 위에 모셔져 있다. 성모석상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그 동안에 수난을 입어 완전한 상태가 아니고 석상의 일부가 손상됐는데 이 석상을 보기 위해여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절을 찾아온다고 한다.
◆
원문 이미지
◆ 원문 번역
준험한 벼랑이 다투듯 서 있고, 웅장한 수석(水石)이 아름다워 어제 본 것과 백중세를 이루었다. 또 산길로 10여 리를 가서 백문당(白門堂) [혹 백무당(百巫堂)이라고도 한다.]에 이르니 집은 길 옆의 숲 속에 있는데, 잡신들이 모셔져 있고 무당들이 모이는 곳으로 장구를 치는 것이 밤낮없이 이어졌고, 사시사철 부채를 들고 춤을 춘다. 사당 안에는 초상이 걸려 있었는데 기이하여 더 말할 것이 없었다. 이곳은 오래 머무를 수없는 곳이어서 밥을 재촉해 먹고 신을 신고서 돌아보지 않고 출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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