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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탐가로 변신한 선비와 의병의 활약 - 왕세자에게 전국에 퍼져있는 적세를 아뢰다
1592년 8월 6일, 성천으로 간 왕세자와 그 일행(이들을 분리된 조정, 즉 분조(分朝)라 한다)들은 각 지방의 적세를 정탐하기 시작하였다. 이 정탐 가운데서는 그 지역에 있는 사람들이 분조(分朝)가 있는 성천으로 직접 와 알려주는 경우도 많았다.
우선 평양에 있는 적들은 일부가 중화(中和)로 물러 나와 있었다. 하지만 평양성에 남아 있는 적들은 성의 안팎을 무수히 방화하고 있었고, 또 강동(江東) 근처의 민가들을 계속 해서 약탈하고 노략질하였다. 평양의 적들은 평양성을 근거로 그 주위를 마음대로 활개치고 있는 것이었다. 이를 막음과 동시에 평양성을 탈환하기 위해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이 강동을 거쳐 곧장 평양으로 가 이빈(李蘋)과 평양성을 협공을 하려 하였으나, 만약 적들이 우리가 평양성을 공격하여 병력을 빼는 순간 이틈을 이용하여 강동으로 올까하여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였다.
강원도의 사정도 그다지 여의치 않았다. 안변(安邊)의 유생(儒生) 김경정(金景禎)과 덕원(德原)의 유생 박기령(朴期齡) 등은 멀리서 직접 분조까지 걸어서 와 강원도 해안을 따라 함경도로 진출한 적들의 사정을 자세히 말하였다. 아울러 그들은 적의 수급까지 바쳤다. 그러면서 그들은 “백성들과 사대부들이 서로 단결하여 적들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 고을의 장수와 수령들이 없어 각자가 그렇게 할 따름입니다. 수령을 파견해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라고 말하였다. 이는 적들이 휩쓸고 간 지역에 장수나 수령 등이 없어 왜적들을 공격하는 데 구심점이 없다는 것이었다. 왕세자는 백성들의 요청에 따라 수령을 파견하려 하였는데, 덕원부사(德原府使)와 영흥판관(永興判官) 정도만을 겨우 파견하였다. 덕원부사의 경우 행차와 자신의 수하인 신경리(申景褵)까지 보내었으니, 다른 곳의 수령들은 사정상 파견하지도 못하였다.
경기도의 사정은 강원도보다 나은 편이었으나 마찬가지였다. 고양(高陽)에서 피란을 온 진사 이로(李櫓)는 변란의 초기부터 왜적들을 죽이고 여러 차례 수급을 바쳤다. 그리고 자신의 동지인 이봉춘(李逢春), 장응남(張應男), 안륵(安玏) 등을 이끌고 와 경기도의 적세를 소상히 아뢰었다. 경기도 역시 강원도와 마찬가지로 전란으로 수령이 비어 있는 곳이 많았다. 이에 이봉춘(李逢春), 장응남(張應男) 에 대해서는 장수 이일(李鎰)에게 보내 평양성 공격을 돕도록 하였고, 이로와 안륵은 각기 자신이 살던 고을의 수령으로 임명하였다. 그 밖의 고을들도 계속 그 지역에서 공을 세운 사람이나 관찰사 등이 추천하는 사람으로 임명하여 지역의 방어를 튼실히 하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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