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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기생 보금을 연주하다
1519년 2월 4일, 황사우는 밀양의 수산현과 금동역을 거쳐
밀성(密城)
에 들어갔다. 집무를 마친 황사우는 저녁에 기녀를 불러 거문고를 연주하게 하고 회포를 풀었다.
7월 8일, 아침 일찍 양산군을 출발하여 밀양에 이르렀다. 춘추 포폄 때문에 감사가 좌수사와 우수사와 함께 집무를 보았다. 황사우는 이들을 뵙고 저녁 식사를 함께 하였다. 그리고 이날 황사우는 밀양에 처음 왔을 때 만났던 기녀를 다시 불렀다. 그녀를 보자 황사우의 가슴이 뛰었다. 그녀의 이름은 보금(寶琴). 보배로운 거문고라는 뜻이었다.
7월 9일, 밀양. 감사와 좌수사, 우수사가 누각에서 집무를 하고, 여러 사람들이 모두 머물렀다. 여러 훈도를 고강하였다. 황사우는 저물 무렵 방으로 내려와 밀양현감과 전 고령현감과 잠깐 술자리를 하고 잤다. 좌수사와 우수사가 감사에게 고기를 먹고 술 마시기를 권하여 밤중까지 이르렀다. 황사우는 그 자리에 끼지 않았는데, 내심 다행으로 여겼다. 칠원현감과 영산현감에게
대전(大典)
을 고강했다. 이날도 황사우는 보금을 몰래 연주하였다.
개요
배경이야기
원문정보
멀티미디어
관련이야기
출전 :
재영남일기(在嶺南日記)
전체이야기보기
저자 :
황사우(黃士祐)
주제 : ( 미분류 )
시기 : 1519-02-04 ~ 1519-07-09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경상남도 밀양시
일기분류 : 생활일기
인물 : 황사우, 보배
참고자료링크 :
조선왕조실록
◆ 조선시대 여기
조선시대 여기(女妓)는 궁중의례 및 연향에서 가무를 담당하는 집단으로 공식적으로 ‘여악(女樂)’이라 불리운 특수기능직 종사자였다. 이들은 장악원(掌樂院, 조선시대 궁중에서 연주하는 음악과 무용에 관한 일을 담당한 관청)의 중앙 관아 소속의 경기(京妓)와 지방 교방 소속의 외방기(外方妓)로 나뉘었다.
서울 장악원과 지방 교방 소속의 악가무를 전업으로 하는 여기 외에도 여악은 필요에 따라 궁중의 의료기관인 내의원과 혜민서 소속의 의녀(醫女)와 궁중 의복 및 군인의 의복을 담당하는 공조·상방 소속의 침선비(針線婢, 상의원(尙衣院)과 공조에 소속되어 의복을 재봉하는 임무를 담당한 궁중 소속의 관비)들을 포함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여악은 여공인(女工人)·여령(女伶)·기악(妓樂)·여기(女妓)·기생(妓生)·기(妓·)창기(娼妓)·관기(官妓) 등으로 불렸는데, 여기에서 창기와 기생은 여악이라는 표면적 직함과 겹쳐 있는 당시 기녀들의 성적 봉사의 기능을 암시한다.
조선시대 공식적 담론에서 경기(京妓)의 활동은 공식적인 궁중 연향과 왕실의 소소한 모임에 참여하고, 임금이 신하에게 내려주는 잔치인 사악(賜樂)의 경우나, 중궁진하, 양잠을 권장하는 친잠의식, 교방가요를 바치는 것들로 설명되지만, 실질적으로 서울기들은 비공식적으로 베풀어지는 상층 양반들의 사적 모임에 참석하면서 연향 이후의 성적 봉사의 수행을 요구받게 된다.
외방여기들 역시, 사신 접대를 위한 연향, 변방군사를 위로하기 위한 악가무 연향과 빨래·바느질 등의 봉사, 지방관아에서의 연향 참여 등을 표면적 임무로 떠맡았지만, 실질적으로 방기(房妓), 수청기(守廳妓)라 하여 지방 관리나 군인 및 사신들을 위한 성적 봉사가 또 다른 중요한 임무로 주어지게 된다.
조선시대 기녀를 연구한 서지영은 “중세적 체제에서 제도적으로 생산되고 관리된 기녀는 매춘과 에로티시즘, 낭만적 사랑의 모호한 경계에서 관능의 기술과 사랑을 파는 직업적 연행꾼이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
원문 이미지
◆ 원문 번역
1519년 2월 4일. 날씨 맑음. 아침에 향교에서 대성전(大聖殿)을 배알하고, 성(城)을 돌아서 관부(官府)로 돌아왔다. 식사 후 일행(一行)은 수사(水使)와 헤어졌다. 늦게 출발하여, 밀양(密陽) 수산현(水山縣)에 이르러 배로 앞 냇물을 건넌 뒤 점심을 먹었다. 소촌찰방(召村察訪)은 자여도(自如道)의 말을 몰고 하직 인사를 하고 돌아가고, 성현찰방(省峴察訪) 이철배(李鐵培)가 맞이하여 인사를 하였다. 금동역(金同驛)에 이르니 비를 뿌렸다. 오리정(五里亭)에 이르자 훈도(訓導) 황종(黃鐘)이 왕명을 맞이하는데, 실례를 하였다. 비를 무릅쓰고 밀성(密城)으로 들어갔다. 막 방에 들어가니, 겸임(兼任) 양산군수(梁山郡守) 김진경(金震卿)이 방에 들어와 쉬면서 이야기하였다. 사촌(四寸) 간이다. 동헌(東軒)에서 집무를 시작하자, 찰방(察訪)과 교수(敎授)가 예(禮)를 행하였다. 옛 친구 생원(生員) 김시필(金時弼) 국이(國耳)와 이궤(李軌) 공도(公度)가 찾아 들어왔다. 국이(國耳)는 함께 잤다. 저녁에 기녀(妓女)로 하여금 거문고를 연주하게 하고 회포를 풀었다. 이때 새로 임명된 현감(縣監) 황숙공(黃叔貢)은 아직 부임하지 않았다. 1519년 7월 8일. 날씨 맑음. 일찍 출발하였다. 감사(監司)와 수사(水使) 두 분이 출발하여 황산강(黃山江)에 이르러 배를 타고 물길을 거슬러 올라 밀양(密陽) 지경(地境)에 이르렀다. 황산찰방(黃山察訪)은 뒤에 쳐졌다. 밀양(密陽) 영남루(嶺南樓) 앞에 이르러 육지에 내렸다가 다시 배를 타고 물을 건넜다. 현감(縣監) 황효헌(黃孝獻) 숙공(叔貢) 공과 【급제(及第) 동년(同年)이다.】 훈도(訓導) 황종(黃鐘) 공(公)·창원부사(昌原府使) 채소권(蔡紹權) 공(公)과 훈도(訓導) 서감원(徐坎元)·칠원현감(漆原縣監) 조계단(曺繼殷) <훈도(訓導)는 없음> ·함안훈도(咸安訓導) 유여필(兪汝弼)·영산현감(靈山縣監) 이인수(李麟壽) <훈도는 없음> ·성현찰방(省峴察訪) 이철경(李鐵境) 등이 객관(客館)에서 왕명을 맞이하였다. 예(禮)를 마치고 감사(監司)가 영남루(嶺南樓)에 도착하였다. 이때 우병사(右兵使) 김극성(金克成)이 먼저 들어와 북쪽 별실(別室)로 내려갔고, 좌수사(左水使)는 나와 함께 뒤편 북쪽 별실(別室)로 내려갔다. 모두 관리들의 춘추(春秋) 포폄(褒貶)에 대한 의논을 하려고 해서였다. 감사(監司)는 망호당(望湖堂)으로 내려가고, 나는 작은 누각(樓閣)으로 내려갔다. 감사(監司), 좌수사(左水使), 우병사(右兵使) 세 분이 누각(樓閣)에서 집무를 함에, 나와 여러 사람들이 모두 뵙기를 청하고 나왔다. 나를 불러 들어오게 하여 술잔을 돌렸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창원부사(昌原府使)와 현감(縣監)이 방에 들어와 이야기하였다. 동년(同年) 손태필(孫台弼)이 내방하여 잤다. 나는 가슴이 뛰는 정회(情懷)를 가졌으니, 그의 이름은 보금(寶琴)이라 하였다. 1519년 7월 9일. 날씨 맑음. 밀성(密城)에 머물렀다. ◎ 아침에 감사(監司)·좌수사(左水使)·우병사(右兵使) 세 분이 누각(樓閣)에서 집무를 하고, 여러 분들이 모두 머물렀다. 정오에 병사(兵使)와 수사(水使) 두 분은 활쏘기를 하여 술을 마셨다. 창원부사(昌原府使)와 밀양현감(密陽縣監)도 들어와 술잔을 돌렸다. 영산현감(靈山縣監)과 칠원현감(漆原縣監)에게 대전(大典)을 고강(考講)하였다. 여러 훈도(訓導)를 고강(考講)하고, 창원훈도(昌原訓導)는 고강(考講)하지 않았다. 저물 무렵 나는 방으로 내려와서 밀양현감(密陽縣監)과 전 고령현감(高靈縣監) 김시보(金時輔)와 잠깐 술자리를 하고 잤다. 어영하(魚泳河)와 양담(梁澹)이 내방하였다. 내가 여가가 없어서 그들과 조용히 만나 이야기하지 못하자 돌아갔다. 감사(監司)는 글로 문장령(文掌令)의 초상을 조문(弔問)하고 복제(服制)를 행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좌수사(左水使)와 우병사(右兵使) 두 분이 고기를 먹고 술 마시기를 권하여 밤중까지 이르렀다. 나는 참여하지 않았으니, 다행이었다. 칠원현감(漆原縣監)과 영산현감(靈山縣監)에게 대전(大典)을 고강(考講)하였다. 보금(寶琴)을 몰래 연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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