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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승려들의 양반 시중
위화도 회군 후 이성계 일파의 급진 세력이 힘을 갖게 되면서, 조선의 선비들은 삶의 근본 문제를 설명할 수 있는 유교의 종교화를 도모하였다. 그들은 조상(祖上)을 신으로 공경할 수 있도록 의례를 정비하고, 유교식으로 가묘(家廟)를 세우고, 상례와 제례를 거행하도록 만들어, 조상에 대한 숭배가 생활 속에서 종교적 행위로 뿌리 내릴 수 있도록 하였다. 그들은 종교적 기반이 확대되자 기존에 승려집단이 수행해오던 사제로서의 역할을 자신들이 대신하여 수행하려고 하였다. 정도전의 『불씨잡변(佛氏雜辨)』에서 볼 수 있듯이, 불교에서 말하는 전세나 내세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불교의 논리를 허황하고 망령된 것으로 비난하고 공격하였다. 또한 정치적 힘을 이용하여 승려집단을 탄압하고 불교세력을 약화시켰다. 고려시대부터 승려를 선발해 오던 승과제도를 폐지하고, 국사, 왕사 등의 승관제도도 폐지하고, 승려가 되기 위해 국가로부터 허가를 받아야 하는 도첩제도를 대폭적으로 강화하였다.
조선 선비들이 불교를 탄압하는데 성공을 거두자, 승려집단의 사회적 지위는 무속집단과 같은 천인으로 격하되었고, 그들이 수행하는 사회적 역할도 크게 변화하였다. 그들은 기복(祈福), 기원(祈願), 치병(治病) 등의 방식으로 유가(儒家)를 보조하는 주변적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그들이 수행해 오던 종교적 역할의 많은 부분이 무속과 습합하여 민간 신앙의 형태로 변형되었다. 따라서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에 볼 수 있었던 지배층과 연관한 귀족적 불교문화의 많은 부분이 단절을 피할 수 없었다.
조선 선비들이 승려집단을 제압하고, 사제적 역할까지 담당하게 되자 삼국시대에 불교가 도입된 이후 계속되어 온 주도세력의 이원적 성격, 즉 정치적 지도자와 종교적 지도자의 이원적 구조가 무너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 제정일치가 행해지던 고대사회에서 볼 수 있었던 정치와 종교의 일원적 형태가 조선시대에 다시 나타나게 되었다.
이런 강력한 선비집단으로 인하여, 조선시대 불교는 가히 굴욕의 시대나 다름없었다. 우리가 아는 것 이상으로 승려들이 천시 당했다. 승려들은 천민과 같은 취급을 받았고 사찰들은 선비들의 유람 숙소로 제공됐다. 즉 오늘날 산장 역할을 하며 유생들의 꽃놀이(등산)를 위한 베이스 캠프와 같은 구실을 하였다. 승려들은 가마꾼을 자청하며, 관리나 선비들을 극진히 대접하였다. 예를 들어, 남명 조식 선생의 지리산 등정기인 ‘유두류록’을 보면, 여러 선비들이 기생과 노비 등을 거느리고, 지리산 일대의 사찰에 머물며 승려들의 시중을 받았고, 산행가이드를 한 승려들이 등장하여 산행하는 선비 일행들에게 ‘네네’ 거리는 기록이 보인다.
그리고 새롭게 축성하거나 무너진 성의 복구 작업에는 의례히 승려들이 강제 동원되어 상당한 사상자를 내었으며, 유명한 사찰을 제외한 여타 사찰은 거의 폐사되고 사찰 소유의 토지는 지방 토호들에게 분할 점유되었다. 물론 전란 시는 승병이라는 이름으로 전쟁터에 동원되는 일도 허다했다.
부역에 시달린 승려들이 어찌나 고달펐던지, 범어사엔 승려의 부역을 없앤 낭백스님의 전설이 내려온다. 금정산성(사적 제215호)은 임진왜란 때 동래부가 쑥대밭이 된 후, 1703년 인근 범어사·국청사·해월사의 승려와 부민을 동원해 다시 쌓아올렸다. 이를 몸소 겪은 조선 중엽 범어사 낭백스님은 ‘스님이 수도에 정진하도록 고급관리로 환생해 일절 부역을 타파하겠다’고 선언했다. 증거로 일주문 전 어산교에서 말에서 내려 스스로 봉한 선방의 문을 열겠다고 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순상국이란 중앙관리가 범어사에 와 어산교 앞에서 말에서 내린 뒤 낭백스님 방의 문을 열고 스님들의 부역을 없앴다고 한다. 낭백 스님이 환생하였던 것이다. 범어사 입구엔 이를 기리는 비석이 있다.
양반 사대부들이 승려를 동원하여 가마를 들게 하고, 자신은 부채 하나 들고 앉아서 산행을 했다는 점, 악공이나 기생까지 동원하여 호화로운 산행을 하는 등 신분사회 특유의 불합리도 많았으나, 그들은 생계나 교통을 위해서가 아니라 경치를 감상하며 풍류를 누리려고, 또는 심신을 쉬게 하고 호연지기를 기르기 위해, 즉, ‘알피니즘’이라는 개념을 분명히 갖고서 산행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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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려의 가마를 타고 깊은 산 속 사찰 기행을 떠나다 테마스토리 이동

1712년 8월 26일, 호조정랑으로 계시던 아버지께서 신묘년(1711년, 숙종 37년) 겨울에 개녕 현감(開寧縣監)을 임명받아, 해를 넘기고 이듬해인 임진년(1712년, 숙종 38년) 정월에 부임했는데, 유척기는 딸이 병을 앓아 따라가지 못했다. 4월에야 비로소 개녕에 가서 뵈옵고, 연휴당(燕休堂) 서쪽 방에서 머물렀다.
6월에 종숙부 감역공(監役公)이 돌아가셔서 아버지는 휴가를 내어 상경하기를 청했다. 7월에 돌아오시면서 큰종형을 데리고 왔다. 유척기는 큰종형과 한방을 썼고, 아침저녁으로 사이좋게 지내면서 서로 매우 즐거워했다.
우리 두 사람은 일찍이 쌍계(雙溪) 해인사(海印寺) 경치가 영남에서 최고라는 말을 들었는데, 마침 이웃 고을에 왔으니 한번 구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님께 말씀드리고 8월 26일 일찍 아침밥을 먹고 함께 출발했다. 아침에 비가 조금 내리다 그쳤다.
옥산촌(玉山村)에 이르러 고방사(敲方寺) 석휘(碩輝) 승려를 만났다. 며칠 전 고방사에 갔을 때 얼굴을 익혔었다. 길에서 만나 이야기를 조금 나누고는 미곡촌(美谷村)에서 점심을 먹었다.
미곡촌에 도착하기 1리쯤 전에 시냇가에 펑퍼짐하게 펼쳐진 커다란 너럭바위가 있다. 너럭바위 위로 흘러가는 물이 보기에 매우 좋아 말에서 내려 발을 담갔다. 종에게 피리 한 곡조를 부르게 했다. 피리 소리가 물소리와 어울려 맑게 울리니 꽉 막힌 마음이 확 틔어 마음과 흥취가 유연해지는 것 같다.
쌍계사 승려에게 미리 사람을 보내 소식을 전하고 앞으로 나아갔다. 산 입구에 이르기도 전에 벌써 날이 저물어 기천리(歧川里)에서 잤다. 마을에서 이굉(李浤)이라는 늙은 유생을 만나 볼만한 산중 경치에 대해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튿날은 날씨가 맑았다. 아침에 이굉의 아들 이동로(李東老)가 찾아왔다. 이른 아침밥을 먹고 입암(立巖)으로 갔다. 바위는 산 입구에 있는데, 여기서 쌍계사까지는 10여 리 남짓이다. 한 봉우리가 땅에서 솟아 곧게 섰고, 큰 시내가 산 가운데서 나와 그 아래를 지나 굽이돌면서 맑은 못을 이루었다. 큰 바위들이 펼쳐 있어 굽이마다 앉아 쉴 수 있다. 바위벽에는 관찰사(觀察使) 홍만조(洪萬朝), 이의현(李宜顯), 찰방(察訪) 김계환(金啓煥) 등 여러 사람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쌍계사에서 가마꾼 승려가 마중 나와서 말을 놓아두고 작은 가마를 탔다. 저녁에 절에 도착했다. 우아한 경치는 많지 않으나 산세가 분명하고 깨끗하며 크고 장대하여 거인이 자리를 펼쳐 놓은 듯, 대장이 군막에 이른 듯했다. 소나무와 잣나무는 없지만 향나무, 회나무, 느릅나무, 재나무 등이 실로 엮어 놓은 듯 빽빽이 들어섰다.
새로 내린 비로 물이 크게 불어, 마치 만 마리 말이 서로 다투어 내달리는 듯 요란한 소리에 귀가 시끄럽다. 골짜기 입구의 문은 마치 읍(揖)하는 모습 같다. 거기서부터 10여 리까지 탁 틔어서, 평평한 땅에 막힘이 없다.
절문 밖 냇가에 서 있는 큰 바위에 어느 감사가 청심대(淸心臺)라고 이름을 붙였다. 다리는 제승(濟勝), 절문은 자하(紫霞), 종루는 범종(泛鍾)이라 한다. 누각 아래 사천왕상을 빚어 놓았는데, 매우 기이하고 커서 놀랄 만하다.
대웅전에는 회랑이 두 개 있는데, 동쪽 회랑을 탐진(探眞), 서쪽 회랑을 궁현(窮玄)이라 한다. 밖에 있는 집은 보림(寶林)과 양성(養性)이고, 뒤에 향적주(香積廚)가 있고, 휴간(休侃) 승려가 지은 시가 있는데, 그는 더불어 이야기를 나눌 만한 사람이다.
절에서 7, 8리쯤 떨어진 곳에 있는 무흘서당(武屹書堂)은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젊은 날 독서하던 곳으로, 그가 읽던 고서가 여러 상자 쌓여 있다. 지금은 승려들이 단체로 지낸다.
청암(淸菴)은 무흘에서 더욱 가까운데도 맑고 궁벽스러워서, 사람으로 하여금 더러운 생각이 정제되어 일어나지 못하게 한다. 여기 사는 의눌(義訥) 승려는 말랐으나 청초해 보인다.
이튿날은 28일은 기묘일로 날씨가 맑았다. 아침밥을 먹고 20여 리를 갔다. 산길 옆으로 두 골짜기가 깊고 으슥하여 그 안에 기이한 경치를 쌓아 놓은 듯하다. 절벽을 따라 넝쿨과 등나무를 잡고 들어갔다. 물이 산골짜기 사이로 평평하고 완만하게 흘러내려오다 수백 걸음 지난 뒤에 비로소 물길을 돌려 이리저리 돌아나가면서 세 번 물굽이를 만들고는 너럭바위를 만나 폭포가 되어 떨어진다. 폭포 길이가 몇 길이나 되는데, 두 벽을 묶어 놓은 듯해 그 안에서 자라고 있는 단풍나무와 녹나무가 영향을 받아 기거나 절룩거리는 듯 자라 물줄기 있는 곳에 이르러 머문다.
석벽에 이름을 새겼다. 승려가 ‘옛날에는 아는 사람이 없었는데, 김씨 성을 가진 안찰사(按察使)가 처음으로 알았다 해서 ‘김공 폭포〔金公瀑〕’라는 이름이 붙었다 합니다.’라고 말했다.
황점(黃店)을 지났다. 이곳은 유황을 캐던 곳이다. 다시 큰 고개 두 개를 넘으니 해인사 승려들이 남여를 가지고 와서 기다리고 있다. 그때 비가 조금 내리다 그쳤다. 여기서 쌍계사 승려들에게 고맙다고 사례하고 돌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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