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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선비들의 유산 목적
지자요수(智者樂水) 인자요산(仁者樂山)이라 했던가. 옛 사람들이 산에 오르는 것은 세상에 대한 욕심을 잊으려는 한 방편이었고, 자기 수양이요, 도를 배우는 과정이었다. 그래서 ‘멀리 가는 것은 반드시 가까이에서 시작하고 높이 오르는 것은 반드시 낮은 데서 시작한다’는 중용의 말을 실감하고, 저마다 ‘마음의 때’를 닦을 산 하나를 찜 해두고 틈만 나면 산을 찾았다.
조선 중기의 유학자 남명 조식은 지리산을 오르면서 남긴 산행기에서 ‘산을 보고 물을 보고, 인간을 보고 세상을 보기(看山看水 看人看世)’ 위해 산을 찾는다고 적었다. 이처럼 옛사람들이 산을 오르는 행위는 하나의 정신적 실천의 행위였으며, 구도(求道)의 행위이기도 했다.
근대 이전의 우리나라 유람행위를 이해하기 위하여, 문헌자료인 ‘산수유람록’에 나타난 선인들의 유람행위와 양상은 구체적으로 어떠했는지를,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기록인 ‘지리산 유람록’에서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현재 국문으로 번역되어 출간된 총 9편의 지리산 유람록을 대상으로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누렸던 산수 유람현상의 일면을 알아보기 위해, 먼저 ‘산수유람록’에서 확인 가능한 ‘일시, 나이·신분, 동기, 성격, 동행인, 이동 수단, 여정, 숙식, 경비, 준비물, 유흥, 난관, 주객 관계, 유람자의 의식’이라는 세부 항목으로 나누어 만든 뒤, 항목별로 개별 유람록을 분석하여 필요한 정보를 추출한 후, 그 양상을 구체적으로 고찰해보면,
① 일시 ― 시기: 음력 3월 말∼4월 말, 8월 중순∼10월 중순/ 계절: 봄, 가을/ 기간: 5~17일, 관직에 있는 경우는 9일을 넘지 않음
② 나이, 신분 ― 나이: 26∼71세(나이와 유람기간과의 상관관계는 없음)/ 신분: 사대부
③ 동기 ― 강요되지 않은 자발적 유람/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기 위해/ 울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속세를 벗어나 은일(隱逸)의 뜻을 펴기 위해
④ 성격 ― 사적인 여가행위/ 관직에 있으면서 임의로 유람/ 대부분 관직이나 사대부의 지위 활용/ 유람 시 공사(公私)의 구분을 엄격히 하지 않음/ 재방문인 경우도 많음/ 은거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지리산을 찾음
⑤ 동행인 ― 지인의 권유와 상호 약속으로 팀을 구성/ 아전, 종자(從者), 요리사, 짐꾼, 기생, 악공, 승려 동행/ 30~40여 명이 넘는 인원이 유람행렬을 이룸
⑥ 이동 수단 ― 도보, 말, 노새, 배, 남여(藍輿, 가마)/ 승려의 등에 업혀/ 허리에 끈을 묶고 승려에게 끌려/ 하루 평균 20~50리의 산길을 이동
⑦ 여정(旅程) ― 대부분 인근 지역(근거리)에서 접근하여 산에 오름/ 선유(仙遊)를 희구하거나 은둔의 뜻이 있는 자 외에는 모두 천왕봉에 오름
⑧ 숙식 ― 지리산 밖의 왕로(往路)·귀로(歸路)에서는 민가·현창(縣倉)·역관(驛館)·관사에서 숙식/ 산중에서는 절·암자·사당·움막에서 숙식/ 가을 산에서 다래·배·홍시를 먹음
⑨ 경비 ― 자비가 기본/ 돈이나 식량을 얼마간씩 추렴하였을 것으로 추정/ 숙식을 제공한 곳에 쌀을 남기기도 했으나, 대부분은 유람 도중 현지 선비·백성·지인·승려·수령들로부터 쌀·술·음식·노자 등을 제공 받음
⑩ 준비물, 장비 ―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 『수친서(壽親書)』를 보고 필요한 도구를 준비/ 짚신, 미투리, 행전(行纏), 대지팡이, 도롱이, 삿갓, / 옷, 솜옷, 갖옷/ 피리, 시집, 문방사우/ 이불, 베개, 방석/ 쌀가루
⑪ 유흥(遊興) ― 종이나 악공들의 악기(생황, 피리, 태평소, 비파, 북) 연주/ 기녀의 창/ 음주가무/ 시작(詩作)
⑫ 난관(難關) ― 구토, 설사, 감기/ 양식과 말 먹이가 모자람/ 갈증/ 추위
⑬ 주객(主客) 관계 ― 손님: 사대부/ 주인: 백성, 승려/ 승려의 역할: 유람 안내, 문화자원 해설, 숙식 제공, 남여(藍輿)를 멤/ 손님은 관직이나 사대부의 지위를 직·간접적으로 활용/ 승려는 세금과 부역을 감면 받기 위해 사대부에게 편의를 제공/ 대규모의 유람행렬은 현지 백성과 승려들에게 접대의 부담을 주고 폐를 끼침/ 관직에 있는 자는 유람을 하면서 현지 백성들의 이목에 신경을 씀
⑭ 유람자의 인식, 의식 ― 은일의식(隱逸意識)/ 유자(儒者)의 본분을 강조한 선유(仙遊)/ 유교적 현실주의에 입각한 불교와 무속의 허탄함 비판/ 애민의식(愛民意識)/ 지리산을 관광의 대상뿐 아니라 생활과 은거의 공간으로 인식/ 자아성찰(自我省察)과 심성수양(心性修養) 의식 등으로 조선 사대부들의 산수유람 행태를 알 수 있다.
지방관이나 권세가 있는 사람들은 산수를 유람할 때 동행도 많았고 가마꾼의 도움을 받거나 노새·암말을 타고 갔으며, 산 밑에 이르러서는 젊은 승려들이 메는 남여에 올라 산허리까지 이르렀다. 숙소로는 사대부들의 경우 관현의 숙소를 이용하거나 촌민의 집을 빌렸지만, 방랑자 김시습(金時習)처럼 가난한 선비들의 경우는 종자만 데리고 가거나 노숙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유몽인의 『두류산유람록』을 보면 동행한 사람들은 각자 대나무 지팡이를 짚고 짚신을 신고 새끼로 동여매고 길을 갔다. 또 『수친서(壽親書)』,『양로서(養老書)』와 같은 여행지침서를 참고하여 여행준비물을 갖추었다.
대개, 여행 준비물로는 짚신·나막신·도롱이·삿갓·베로 만든 행전·솜옷·지팡이·쌀·김치·간장·말린 꿩고기·미숫가루·홍시·꿀·다래·베개·방석·종이·벼루·붓·먹·시집 등이다. 눈에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짚신을 신었었다. 또한 옷·이불·베개·방석 등을 기본으로 하였으며, 이미 그 지역을 여행한 사람이 작성한 유람록과 지도, 그리고 독서할 서적을 챙겼다. 바랑은 오늘의 냅색의 근원이요, 지팡이는 피켈, 행전은 스패츠이었다. 정구(鄭逑)는 1579년 9월 10일 가야산 유람을 떠나면서 쌀 한 말, 술 한 통, 반찬 한 합, 과일 한 바구니와 책 몇 권을 꾸려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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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리 불고 비파 켜는 아이들을 대동하여 유람하다 테마스토리 이동

1618년 윤4월 19일 정축 맑음. 남도 유람 중이던 양경우가 장차 월출산(月出山)을 찾아가려 하니 고을 수령이 또한 함께 도갑사(道甲寺)에 가고자 하였다. 말에 안장을 올리고 출발하려 할 때 관에 일이 있어서 그는 그만두었다. 양경우는 작은 아이 두 명을 대동하였는데, 나이가 15, 6세 정도 되었다. 한 동자는 피리를 불고 한 동자는 비파를 탔다. 모두 노비이다. 드디어 명하여 따라오라 하였는데, 그들을 대동하여 자신의 구경을 더 호화롭게 하기 위해서다.
함께 골짜기 입구에 도달하니 절문까지는 7, 8리가 남았다. 맑은 시내와 푸른 골짜기가 좌우에 비추니 이에 두 아이를 시켜 즉시 음을 골라 연주하고 노래하게 하였다. 천천하게 걸어가니 절문에 도달하기 몇 백 보 앞에 두 기둥의 붉은 문이 나무 꼭대기 위로 솟아 있다. 앞에 다가가서 보니 판액에 내원당(內願堂)이란 세 글자가 있다. 고을의 학정에 승려들이 견디지 못하고, 이에 세력에 의탁하는 행동을 하여 절문에 이런 루를 끼친 것이 심하다. 마침내 선당(禪堂)에 들어가 유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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