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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들이 가장 선호한 조선의 인삼
인삼은 5~6세기부터 고구려와 백제의 주요 수출품이었고, 고려시대에는 송나라에 사신이 방문할 때 가져간 인삼이 1,000근이나 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더욱 중요한 수출품이 되었다. 명나라 초기에 조선은 금과 은 등을 조공으로 바쳐야 했으나, 세종대에 금과 은의 조공을 중단하고 그 대신 인삼을 조공하기도 했다. 명 말기부터 중국인들의 인삼수요는 더욱 커졌다. 조선은 사신단의 조공품목 뿐만 아니라 무역품목으로도 인삼을 가지고 갔는데, 경비가 떨어지면 인삼을 팔아서 비용을 마련하기도 했다. 그만큼 당시 조선의 인삼은 귀한 물품이었고, 명나라 사행단이 지나가는 곳의 중국 관리들은 의례히 예단을 받았는데 요동 도사 왕소훈이 예단을 돌려보낸 이유를 인삼이 없어서 서운해 한 것이라고 짐작할 만큼 중국에선 조선의 인삼을 선호했다.
중국에서 인삼의 수요가 또 다시 급증한 것은 청조 말기인데, 당시 아편중독에 인삼이 효과가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1841년 조선에서 수입하는 홍삼의 수출량은 2만 근이었는데, 1847년엔 2배인 4만 근까지 급증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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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삼이 없다고 예단을 받지 않은 요동 도사 테마스토리 이동

1620년 5월 10일, 황중윤은 아침 일찍부터 요동을 떠날 준비를 하면서 도사 왕소훈(王紹勳)에게 인정으로 바칠 예단을 챙겼다.
쌀 3가마, 흰 명주 4필, 황모필(黃毛筆) 10자루, 먹을 받치는 그릇 10접시, 비옷 5벌, 활 2자루, 기름 먹인 부채 10자루, 흰 부채 10자루, 초도(鞘刀=칼집이 있는 작은 칼) 10자루, 평양에서 생산되는 은현도(隱現刀) 5자루, 꽃모양이 새겨진 벼루 2개, 화문석(花文席) 3장, 백지(白紙) 5묶음, 말린 노루 포 1마리로 예단을 챙겨 바쳤다. 그런데 왕 도사가 받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인삼이 없어서 서운해하는 듯하였다.
그렇게 시간을 지체하고 황중윤은 사하포를 향해 길을 나서는데, 군사들이 사청(射廳)에서 전차로 진법을 익히는 모습을 보았다. 진의 형세가 원형이나 방형을 만들어 철통과 흡사하였다. 창과 조총을 든 병사를 전차 안에 흩어서 세우니, 비록 철기병이 치고 들어오더라도 쉽지 않아서, 적을 막는 데 상책인 듯하다. 지난날 우리나라도 전차 십여 대를 처음 만들어 모화관(慕華館)에서 진법을 익혔는데, 제도가 맞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진법을 익히는 모습이 참으로 어린애 장난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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