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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청정에 대하여
탁청정(濯淸亭)은 이 이야기에 주로 내성 재종숙이라고 호칭하는 계암 김령(金坽)의 조부(祖父) 김유(金綏 1491~1555)의 정자이자 당호(堂號)이다. 원래는 낙동강에 인접한 오천리(烏川里:외내)에 있었으나 안동댐 수몰로 인해 1974년 현재의 오천유적지로 옮겨졌다. 일기를 쓰던 당시는 안음형이라고도 호칭한 사수(士修) 김광도(金光道)의 집으로, 김유의 사당이 있었다.

김유는 광산김씨 예안 입향조인 농수 김효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일찍이 종고모부인 김만균(金萬鈞)에게 양육되는 과정에서 청렴하면서도 강직한 인품을 형성하였다. 이 때문에 김유는 거지와 같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성의를 다해 대했지만 옳지 못한 사람을 보면 고개를 숙이고 말을 하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올곧았다.

김유는 1525년(중종 20)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성품이 호방하고 의협심이 강해 무예에 흥미를 보여 무과에까지 응시하였으나 급제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형인 김연(金緣 1487~1544)은 중앙정계에서 우승지, 관찰사 등의 종2품 관직을 맡거나 강원도관찰사, 경주부윤 등을 맡으며 고향을 떠나 있는 기간이 많았다.

과거를 포기한 김유는 1544년(중종39) 집 근처에 탁청정을 짓고 살면서 지극한 효성으로 부모를 기쁘게 해드리는 일에 정성을 다했고, 예안 고을을 지나는 나그네를 정중하게 대접하였다고 한다. 퇴계 이황(李滉)이 쓴 김유의 비문에는 “아! 공이 낳을 때부터 자질(資質)이 뛰어났네. 이미 시(詩)와 서(書)를 익혔고 또한 육도삼략(六韜三略)도 배웠도다. 문(文)은 소과(小科)에 합격했으나 무(武)는 뜻을 이루지 못 하였네. 시골에서 그대로 늙으니 남들이 애석히 여겼네. 출세에 뜻은 못 폈으나 일신(一身)은 자족(自足)하여 좋은 곳 오천(烏川)에 밭도 있고 집도 있네. 주방(廚房)에는 진미가 쌓여있고 독 속에는 술이 항상 넘치도다. 제사(祭祀)하며 봉양(奉養)하고 잔치로써 즐겼네. 생전에 즐거운 일은 자리위의 아름다운 손님이요, 하늘에서 내린 자손은 뜰 앞의 난옥(蘭玉) 일세. 용감한 무신(武臣)이여 아름다운 문사(文士)로다. 불어나는 좋은 경사(慶事) 고문(高門)에 걸렸네. 어쩌다가 대단찮은 병세로 갑자기 돌아가니 금할 수 없는 것은 슬픔이요 남은 것은 복이로다. 아름답다 현부인(賢婦人)을 동광(同壙)하라 유언했네. 무덤 앞에 돌 새기니 천추(千秋)를 지내어도 다함이 없으리”라고 하였다.

고향에서 부모를 지극정성으로 모시고, 찾아오는 여러 친족들에게 좋은 음식을 대접하던 일이 많아지자 김유는 음식을 만드는 일에 큰 관심을 갖게 되었고, 조리서 『수운잡방(需雲雜方)』을 저술하였다. 이 수운잡방은 이후 그의 손자인 김령에 의해 완성된다.

중요민속자료 제226호(1991.8.22)인 이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누각 건물이다. 오른쪽에 4칸 규모로 3면이 트인 마루가 있고, 왼쪽에 2칸의 온돌방이 있다. 정자 건물로 공포에서 고급의 수법을 사용하고 있는데, 공포구성은 오래된 수법이다.

매우 튼튼한 재료를 사용하여 당당하면서도 입체구성의 비례가 잘 잡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정사각형에 가깝다. 영남지방에서 개인의 정자로는 그 구도가 가장 웅장하고 우아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건축 당시에는 단청이 있었다.

탁청정은 그 규모가 웅장하고 모양이 화려하여 오랫동안 인근에서 이름을 떨쳤다. 그래서 낙성연에 초대된 퇴계 이황이 강 건너에서 정자의 모양을 보고는 ‘선비의 집이 너무 호사스럽다.’고 하여 오르기를 꺼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는 탁청정의 웅장하고 화려한 규모에서 빚어진 설화로 생각된다. 탁청정의 현판은 당대의 명필인 석봉 한호의 글씨이다. 이 현판은 획과 점들이 듬직한 가운데 한 글자 한 글자가 생동감을 준다.

관련이야기 소재

탁청정에 모여 술을 마시다 테마스토리 이동

1603년 5월 5일, 이틀 전엔 능동 재사에 다녀오고, 전날엔 거인(居仁)에 가서 배소(拜掃)를 한 후 이틀 만에 집으로 돌아온 김광계는 피곤함에 잠시 누워 있다가 그만 잠이 들어버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지만 단잠을 자다 깨어난 김광계는 방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왔는데 제법 뜨거운 햇볕에 눈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냥 툇마루에 앉아 잠시 있다 보니 친족 한명이 찾아왔다. 동네의 여러 친족들이 탁청정(濯淸亭)에서 모여 술을 마시기로 했는데 왜 오지 않고 있냐며 재촉을 했다. 김광계는 얼른 일어나 탁청정으로 건너갔다. 이틀 뒤에는 동네의 여러 친족들과 침류정(枕流亭)에 함께 모여 물고기를 잡았다. 그리고 며칠 뒤에도 김광계는 재종숙 김령(金坽)을 비롯해 여러 명의 일족 형제들과 물고기를 잡아 와서 침류정에 모여 회를 쳐서 먹었다. 이 날은 다른 날보다 물고기가 많이 잡혀서 모두들 즐거워하며 큰 소리로 웃고 큰 목소리로 술을 권하기도 하며 해가 질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고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김광계도 그동안 계획만 세우고 하지 못하던 일이 있어 내일은 산재(山齋)에 올라가기로 해서 바로 잠을 청했다. 다음 날인 11일 아침 일찍 김광계는 산재(山齋)에 올랐다. 선친에 대한 기사(記事)를 쓰고자 마음을 먹었기 때문이다.

큰 비로 탁청정 연못이 무너지다 테마스토리 이동

1614년 6월 10일, 장마가 시작되어 비가 자주오더니 어젯밤부터는 비가 크게 쏟아지며 그치지 않더니 오후가 되자 비오는 기세가 더욱 거세져서 동이로 물을 쏟아 붓는 것 같았다. 게다가 대낮인데도 밤처럼 어두워져서 사람들이 두려워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개울물이 크게 불어나서 온 동네가 난리가 났다고 했다. 많은 인가가 물에 떠내려가고, 논이 모두 물에 휩쓸려갔다며 통곡하는 마을 사람들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

다음날 김광계는 밥을 먹자마자 둘째 아우 광보와 함께 마을의 피해를 살펴보러 개울가로 가서보니 그 지경이 실로 놀랍고 기가 막힐 뿐이었다. 샘물이 끓어올라 언덕과 골짜기가 바뀐 것이 이때보다 더 심한 적은 없었다. 마을과 사람들의 광경이 너무 참혹해 말은 안 나왔다.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다가 재종제인 광재와 광업 형제를 만나게 되었는데, 탁청정(濯淸亭)이 다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 가보는 중이라고 했다. 김광계는 깜짝 놀라 급히 따라 나섰다. 탁청정에 가보니 다행히 탁청정이 무너지진 않았지만, 정자 앞의 연못 기슭이 모두 무너져 있었다. 연못은 모래와 돌이 모두 뒤덮여 있고, 연못가의 수양버들들은 모두 뿌리째 뽑혀 떠내려가 버렸다. 탁청정도 무너지진 않았지만 주춧돌이 거의 뽑힐 지경이었다.

김광계는 광재·광업 형제와 함께 먼저 재종숙 김호를 찾아뵈었다. 탁청정은 김호 재종숙의 조부이자 김광계의 고조부인 김연(金緣, 1487~1544)의 아우 김유(金綏, 1491~1555)가 지은 정자인데, 매우 화려하고 아름다워 많은 이들이 사랑하는 정자였다. 그래서 이들은 탁청정을 지은 김유의 장손자인 김호 재종숙을 만나러 간 것이다. 그러나 팔순의 재종숙이 너무 상심할까봐 김광계와 다른 이들은 크게 걱정할 정도가 아니라고 말씀드린 후, 다시 김호 재종숙의 둘째 아들인 김광적을 만나러 갔다. 가던 길에 서재종조부 김부생의 둘째 아들 김참을 만나 그도 함께 갔다. 다들 모였지만 별다른 수는 없었다. 한숨만 쉬며 비가 그친 후에 일손을 보태기로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후 늦게 김광계는 강기슭에 다시 가 보았다. 광적 형, 김참 그리고 둘째 아우 광보와 함께 갔다. 물이 불어 대단한 기세로 흐르는 강물을 보다가 김광계와 광보는 먼저 들어왔다. 그런데 광적 형과 김참은 조금 더 있다가 들어가겠다고 하더니 잠시 후에 물고기를 잡아 왔다. 기왕 잡아 온 물고기라서 먹긴 해야겠는데, 회로 먹는 건 안심이 안 되어 삶아서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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