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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꾼의 산신제 풍습과 산신령
사냥꾼들은 산을 신성한 성지로 여긴다. 속되고 더러운 인간 세상과 달리, 산은 깨끗하고 신령스럽다는 것이다. 또 산에는 주인인 산신이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의 허락을 얻어야 짐승을 잡으며, 그가 보호해 주어야 아무 탈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산에 들어가면 먼저 산신의 허락을 얻기 위한 고사(山祭)를 올린다. 백두산 정계비를 세우러 가던 일행도 백두산에 들어가면서 산신제를 지내고 올라간 기록이 있다. 짐승을 잡은 뒤에도 반드시 감사의 의례를 지냈다. 위기를 넘긴 뒤에 감사의 제사를 올린 이 일기의 기록 또한 이러한 풍습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여진다. 20세기 초까지도 사냥꾼이 호랑이를 잡으면 그 고을의 산신령을 잡았다는 죄목으로 수령이 형식적인 볼기를 세 차례 때리는 것이 관례였다. 예컨대 형식적이 태형(笞刑)으로 세 차례의 매를 맞고 나서, 호랑이의 크기에 따라 닷 냥에서 2,30냥의 상금을 받았다. 일반에서도 맹수의 왕인 호랑이야말로 산에 사는 신령(神靈)이라고 믿었으며, 이들의 탄생지라고 일컬어지는 백두산을 영산(靈山)으로 여겼다. 무신도의 하나인 산신도(山神圖)에 산신이 호랑이를 심부름꾼으로 거느린 모습으로 등장하는 까닭도 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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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비석을 발견하다 테마스토리 이동

1885년 10월 18~19일, 동쪽 봉우리 셋째 산기슭을 따라 계곡을 지나니 땅이 조금 평평해지며 양쪽으로 커다란 계곡이 나누어 펼쳐진다. 서쪽은 바로 압록강의 근원이고, 동쪽은 곧 토문강의 근원이니, 참으로 분수령이다.
그 분수령 가운데에 조그마한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앞면 위에는 가로로 ‘대청(大淸)’이라는 두 글자가 씌어 있고, 그 아래 기문(記文)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었다.
“오라 총관 목극등이 천자의 명을 받들어 변경의 경계를 조사하고자 이곳에 도착하였다. 살펴보니 서쪽은 압록(鴨綠)이고 동쪽은 토문(土門)이다. 그러므로 분수령 위에 돌을 새겨 기록한다.
강희(康熙) 51년(1712) 5월 15일 필첩식(筆帖式) 소이창(蘇爾昌), 통관(通官) 이가(二哥), 조선 군관 이의복(李義復), 조태상(趙台相), 차사관 허량(허량), 박도상(박도상), 통관 김응헌(金應瀗), 김경문(金慶門).”
비석의 동쪽 가에는 골짜기를 따라 인공 둔덕이 설치되어 있는데, 혹은 돌이나 흙으로 쌓아서 삼포(杉浦) 90리에 이르기까지 끊어지지 않는다. 옛 사람들의 힘쓴 것을 생각해보니 그 매우 크다. 비석의 표면에는 얼음 파편이 엉겨 붙어 있어서 깎아내도 떨어지지 않아 불을 피워 녹인 뒤, 3장을 인출(印出)하여 그 중 한 장은 장영에게 주고, 나머지 두 장은 품속에 넣었다.
이 때 음산한 바람이 더욱 심해지고, 눈꽃이 어지럽게 흩날렸다. 잠시도 머물지 못하고 서둘러 일어나 길을 되돌려 오는데, 겨우 수 십 보를 가자 길이 흐릿해져 찾을 수가 없었다.
가차을봉(可次乙峯)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니 어두컴컴하고 망망하여 큰 바다 한가운데 있는 것 같아서 그 끝을 볼 수가 없었다. 길을 가리키는 여러 사람들이 그 논의가 일치하지 않았다. 각자 길을 찾아 갔는데, 그 행렬을 멀리 바라다보니 어부가 새벽에 포구에 드는 것 같아 사람들로 하여금 걱정스럽게 하였다. 혹은 남쪽으로 몇 리를 가서 낭떠러지와 골짜기로 막혀서 망연히 되돌아오고, 혹은 동쪽으로 몇 리에 이르러 등성이와 언덕이 아득히 넓어 두려워 되돌아 왔다. 한갓 보이는 것이라곤 운무만 자욱하고, 눈보라가 얼굴을 때리므로 상하 간에 어두워 어디로 가야할지를 몰랐다.
하늘빛은 어느덧 점차 어두워 일행의 인마가 하루 낮 밤을 굶주리고 피로한 나머지 더욱 마음이 두려워지고 얼굴은 사람의 얼굴색이 아니었다. 청나라 관원 가원계도 또한 두려워 떨면서 손에 나침반을 들고, 단지 통사 권흥조를 부르며 말하기를,
“어느 쪽이 동남쪽인가?”
라고 하며, 그치질 않는다. 통사 또한 입과 입술이 바짝 말라 중군 최두형을 향해 말하기를,
“영감, 영감, 내가 어찌해야 합니까?”
라고 하였다. 허다한 인부들이 단지 통사가 앞에 가는 것만 믿고 따라가는데, 통사는 걸음걸음마다 고심하며 능히 방향을 분별하지 못하였다. 이 때 여러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길을 찾는 것은 굳이 바라지 않고, 단지 바라는 것은 수목이 있는 속을 찾아서 불을 피우며 밤을 지새우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눈을 씻고 사방을 바라보아도 나무 하나 보이지 않으니, 바로 막다른 오지였던 것이다.
각자가 하늘을 찾고 아버지를 부를 따름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동남쪽에서 하늘빛이 잠깐 열리며 여러 개의 봉우리들이 반쯤 드러났다. 길을 잃고 하루의 반이 지난 동안에 비로소 산의 모습을 보니 사람들이 모두 환호하며 서로를 향해 축하하기를,
“하늘이 나를 살렸는가? 산신령이 나를 살렸는가?”
하면서 말끝마다 칭송할 뿐이었다. 비로소 생기가 돌아 통사로 하여금 어디로 가야할 지를 분간하도록 하니, 곧 말하기를,
“이제는 어디로 가야할 지 알 수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마침내 수봉(竪峯)을 향하여 내려갔다. 눈이 깊어 거의 무릎 위까지 찼으나, 살길을 찾았기 때문에 고생스러운지를 몰랐다. 이리저리 찾아 수봉의 막사에 이르렀는데, 날은 아직도 저물지 않았다.
이 날 모두 백여 리를 갔는데, 사람과 말이 모두 굶주리면서도 모두 온전히 돌아올 수 있었으니, 어찌 인력으로 가능한 일이겠는가? 곧 왕령(王靈)이 지켜주신 것이리라. 이중하가 시 한 수를 지었다.

雪滿空江月滿天(설만공강월만천) 눈 내려 빈 강에 가득하고 달은 하늘에 가득한데
飄然立馬白山嶺(표연입마백산령) 표연히 백두산 봉우리에서 말을 세웠네.
殆非人力能來此(태비인력능래차) 사람의 힘으로 여기에 올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全仗王靈直向前(전장왕령직향전) 온전히 임금님의 영험이 앞으로 인도함이었네.
拓地于今無李牧(척지우금무이목) 땅을 개척하려 한들 이제는 이목 같은 이가 없고
窮源從古說張騫(궁원종고설장건) 근원을 찾는 데는 예로부터 장건을 말하였네.
玉樓是夜寒何似(옥루시야한하사) 궁궐은 이 밤에 얼마나 차거우실까
回首觚稜杳一邊(회수호릉묘일변) 머리 돌려 궁궐을 바라보니 한 곳이 아득하여라.

또 시 한 수를 지어 신령의 도움에 감사를 드렸다.

密霧陰雲鎖萬重(밀무음운쇄만중) 짙은 안개 음산한 구름 만 겹이나 잠겼으니
深山日暮失歸踪(심산일모실귀종) 깊은 산에 날 저물어 돌아갈 길 잃었어라.
天門忽闢東南角(천문홀벽동남각) 하늘 문이 갑자기 동남쪽에서 열리더니
指路分明露數峯(지로분명노수봉) 여러 봉우리 드러나서 길이 환히 밝도다.

막사가 매우 좁고 추워서 노천이나 다름이 없었다. 불을 피우고 밤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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