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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기우제
예로부터 우리나라에서는 농업을 기본으로 삼아왔다. 농업에는 물이 필요하며, 그것은 곧 비를 의미하였다. 특히, 벼농사에는 적절한 강우량이 필요하나 우리나라에서는 장마철에만 집중적으로 비가 내리고 그 전후에는 가뭄이 계속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따라서 수리시설이 부족했던 옛날일수록 기우제는 많을 수밖에 없었고, 그것은 전국적으로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농민의 생사를 좌우하는 것이 농사이고, 그 농사를 좌우하는 것이 바로 비였기 때문에 기우제에는 가능한 모든 방법이 동원되어 왔다. 조선시대에도 기우제는 잦았다. ≪조선왕조실록≫을 찾아보면 기우제가 음력으로 4월에서 7월 사이의 연중행사였음을 알 수 있다. 한 예로 태종 재위 18년간, 기우제에 관한 기록이 없는 것은 1403년(태종 3) 한 해뿐이다. 이 한 해를 제외한 17년 동안은 해마다 2∼3회씩, 16년 한 해 동안에는 9회의 기우제 기록이 보였다. 또, 반대로 이 18년 동안 6회의 기청제(祈晴祭) 기록도 보이는데, 이는 장마철인 6∼7월 사이에 행해졌다. 이렇게 나라에서 지내던 기우제 중에는 국행기우제(國行祈雨祭)의 12제차가 있어서 각 명산·대천·종묘·사직·북교의 용신들에게 지내는 복잡한 절차가 있었다. 12제차는 가뭄의 정도에 따라서 5월에 1차, 6월에 2차를 지내기도 하고, 5월에 5차까지, 6월에 8차까지 하기도 하고, 심하면 4월에 10차까지 하고 5월에 12차까지 다 끝내는 때도 있었다. 이러한 국행기우제에는 대신들을 제관으로 파견하였다. 그 밖의 기우제로 고려시대 이래의 취무도우도 많았고, 승려나 장님들을 절에 모아서 비를 빈 기록들도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 대백과> 이 시나리오는 가뭄 뒤에 내린 안동 지역의 단비를 ‘태수우’라고 부르는 이야기를 담았다. 조선시대에는 일반적으로 가뭄과 같은 자연재해를 부덕한 정치에 기인한 것으로 여겼다. 부덕한 정치로 인한 백성들의 고통에 대해 하늘이 벌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에 기초한 이러한 인식들은 곧 현실 정치에 대한 백성들의 생각이라고도 볼 수 있다. 김회연의 경우, 1806년 승지(承旨)에 있다가 안동부사로 내려와 어진 정치를 베풀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록 정치적으로는 노론의 당색을 가지고 있었지만, 어진 정치를 펼쳤기 때문에 안동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받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풍산 류씨인 일우(逸愚) 류상조(柳相祚)와도 가까웠다는 점에서 그는 안동의 유림들로부터도 인정을 받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큰 가뭄이 들었던 안동 지역에 단비가 내리자 백성들은 이것을 태백산에서 기우제를 지낸 안동부사의 공덕으로 돌렸고, 이 비를 ‘태수우’라고 칭송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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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6년 5월 26일, 온 마을의 백성들이 임천서당에 모여서 한가롭게 웃고 즐겼다. 이날 화제가 된 것은 큰 가뭄 뒤에 단비가 내리는 것이었다. 모두들 단비가 내리게 된 이유로 당시 안동부사 김회연(金會淵)이 태백산에 가서 정성을 다해 기우제를 지냈기 때문이라고들 말하였다. 안동부사의 덕으로 인해 단비가 내리는 것이라고 칭송하면서 그 공을 김회연에게 돌렸다. 그리고 이 단비를 안동부사의 정성으로 내린 비라는 의미로 ‘태수우(太守雨)’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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