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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점과 점쟁이
예로부터 무당을 궐 안에 두고 나라의 길흉을 예언케 하였으나 점쟁이는 예언자로 전문적 직업인으로 민간에 생겼다. 점을 치는 종류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생사의 존망을 점치는 사주점과 앞으로 닥칠 일을 점치는 운수점, 한 해의 운이 좋고 나쁨을 점치는 신수점, 단시점(斷時占), 멸액점(滅厄占), 절초점(折草占)따위가 있다. 또한 점을 치는 것으로는 태주가 하는 신점(神占)과 주로 여자 점쟁이가 쌀을 뿌려 점치는 쌀점, 동전을 던져서 점치는 돈점, 새가 물어온 점괘로 점치는 새점, 산통점(算筒占), 역점(易占), 오행점(五行占), 육효점(六爻占), 팔괘(八卦占), 구궁점(九宮)따위가 있다.
옛날 점치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맹인들은 골목을 돌아다니며 “문복(問卜, 점쟁이에게 길흉을 물음)이요!” 하면서 점을 치고자 하는 사람을 찾아다녔고 자기 집에 ‘점’ 또는 ‘점집’이라 쓴 깃발을 달아놓기도 하였다. 이들은 주역(周易)을 바탕으로 이름 짓기와 관상, 이름, 감정 따위를 보았으며 때때로 액운을 막기 위한 부적을 쓰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중기(中期) 때 민간에 보급된 대표적인 토정비결(土亭秘訣, 이지함 저술)은 생년월일시를 숫자로 풀이해서 그 해의 운수를 달마다 보는 정초의 풍습이 되었다.

◆ 조선시대 맹인의 교육과 활동
고려시대부터 맹인들의 점을 치는 기술이나 방법이나 불경을 암송하는 등의 일을 전문적으로 국가에서 교육시켰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더욱 성행하였고 맹인들이 복술(卜術)과 독경(讀經)으로 양재기복(禳災祈福, 신에게 빌어서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비는 것)하는 일까지 겸하게 되었다.
《경국대전》에는 이들의 복술은 당나라 때 원천강(袁天綱)의 육임과(六壬課, 골패 등을 가지고 길흉을 점치는 방법)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점술법에 의거했던 것으로 전해지며, 고려 이후의 명경수(明鏡數)를 최고로 일컬어 왔다고 여겨지나 실제로는 산통(산가지를 넣는 통)을 차고 다니며 청하는 집에 들어가 산가지(옛날에 수효를 셈할 때 쓰던 물건. 가는 대나 뼈 따위로 젓가락처럼 만듦.)로 괘를 만들어 길흉을 말해 주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조선시대에는 태종이래로 맹인의 독경·주축을 관할하는 국가 관서로서 명통시(明通寺) 두고 이곳에 맹인을 불러 모아 기우(비 오기를 빔)행사를 집행시키고, 자주 사미(賜米, 나라에서 내리는 쌀)의 은전이 베풀어졌다. 명통시에서는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5부(部)의 맹인들이 모여 한 차례씩 독경축수하는 행사가 거행되는데, 위계질서가 엄격하여 지위가 높은 자는 채청에 올라가고 낮은 자는 문을 지키며, 여러 겹의 문에 창을 든 수위자를 세워 다른 사람이 들어갈 수 없도록 하였다. 명통시는 지금의 남산기슭 신당동 근처에 위치해 있었으며, 그 뒤 맹청(盲廳)으로 이름을 바꿨다.
명통시의 맹인은 처음에는 삭발을 해서 맹승(盲僧) 또는 선사(禪師)로 불리었으나 불승과는 다르고 불교·도교·민간 신앙을 혼유한 존재였으므로 가뭄이 들면 기우하고 질병이 들면 기양(祈禳)하게 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결국 우리나라에는 도교의 교단이나 도사가 없는 대신 맹인들이 잡술 행사의 집행을 담당해 내려 왔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맹인에게 점복교육을 실시하고, 교육을 이수한 이들에게는 점복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하였던 것은 우리 선조들의 천명사상을 믿었고, 맹인에게 독경, 예언, 치병의 능력이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관련이야기 소재

조카 상진의 병세가 위중해지다 테마스토리 이동

1755년 7월 27일. 둘째 아우의 아들인 상진이 지난달부터 병을 앓더니, 요사이 그 병세가 급격히 악화하였다. 얼마 전에는 설사가 마치 고름과 같이 나와 온 집안 식구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계속되는 병세에 강 의원을 집으로 불렀다. 강 의원은 상진의 증세를 진단하더니 보중익기탕을 처방해 주고는 밤 해시 무렵 복용하라 일렀다.
이 해시란 말에 최흥원은 지난번 본 점괘가 떠올랐다. 상진의 병이 오래 낫지 않자 아는 사람에게 점을 쳤더니 췌괘가 곤괘로 바뀌는 점괘가 나오면서, 해일(亥日)에 의원이 집에 들어올 것이라 예언하였다. 그런데 오늘 날짜를 따져보니 마침 해일이 아닌가! 게다가 의원이 약을 처방해서 꼭 해시(亥時)에 먹이라고 하니, 해(亥) 간지가 상진의 병을 다스리는데 특별한 효험이 있는 듯하였다.
사실 점이란 것을 그다지 믿지 않는 최흥원이었으나, 점괘나 점쟁이의 말, 의원의 말이 모두 절묘하게 일치하니 일말의 기대가 생기는 것도 사실이었다. 어쩌면 의원의 처방이 정말로 효험이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최흥원은 병에 지친 상진과 그 아비인 둘째 아우를 생각하며 그 점괘가 틀림없기를 마음속으로 기원하였다.

용한 맹인 점쟁이 심군 테마스토리 이동

1763년 1월 6일. 신미년 새해가 된 지도 며칠이 지났다. 어제는 인근에 사는 김용여가 일부러 사람을 보내어 편지를 전하였는데, 새해가 되었으니 신년 운수를 보지 않겠냐는 내용이었다. 그의 편지에는 맹인 점장이 심옥의 이야기가 적혀 있었는데, 평소 그가 아주 영험하고 뛰어나단 소문이 인근에 자자하다고 한다. 엊그제 김용여가 사는 마을에 왔길래 자신도 점을 한 번 쳐보았는데 맞추지 못하는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데려다가 점을 한 번 쳐볼 만하니 최흥원에게도 한 번 권한다는 내용이었다. 최흥원은 이 편지를 보고는 둘째 아우를 보내어 그 심옥이란 점쟁이를 데려오게 했다.
오늘 그가 점을 쳐보니, 점괘가 아주 불길하게 나왔다. 심옥은 이것저것을 물어보더니 대뜸 아내 묘소의 이장을 권하는 것이었다. 최흥원은 예전에도 아내 묘의 풍수가 좋지 못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라 심옥의 이야기를 그냥 넘겨들을 수가 없었다. 또 그에게 아픈 아이의 사주를 적어주고 앞으로의 운명을 물어보았더니, 그는 매우 길한 점괘가 나왔다고 알려주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최흥원은 내친김에 심옥에게 집안사람들의 운명을 두루두루 물어보았다. 매년 새해가 되면 운수를 점치기는 하나, 정확하게 들어맞은 적은 없었다. 막상 심옥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 역시 특별히 용하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자뿐 아니라 모두가 아내의 이장을 권하니, 그것은 한 번 고려해 볼 만한 것 같았다.

집터의 길흉을 점치다 테마스토리 이동

1764년 2월 14일. 맑은 날이었다. 어머니는 환후가 심해지지 않았으나, 최근 들어 부쩍 음식 드시기를 싫어하시니, 애가 타고 두려운 마음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어제는 송도관이 최흥원을 찾아왔는데, 이 사람은 평소 점을 잘 치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오늘 아침에는 송도관이 최흥원을 위하여 집터의 길흉을 점쳤는데, 관괘에서 비괘로 바뀌는 점괘를 얻었다. 이 점괘는 대단히 불길한 것으로, 그간 집안에 많았던 좋지 않은 일이 집터로 인해 일어난 것 같았다. 최흥원은 집터가 매우 불길하다는 말을 듣고는 거처를 옮겨야 하나 하는 고민까지 생기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동구에 있는 새 집터에 대한 점도 쳐 보았는데, 이 터에는 복괘가 진괘로 바뀌는 점괘였다. 꽤 길한 점괘라고 할 수 있었다. 본래 이곳에는 항진이가 새로 집을 지어 거처할 계획이었는데, 집터가 좋다고 하니 정말 다행이었다. 항진이는 얼마 전 진사시에도 합격하였는데, 아마 집터의 좋은 기운을 받으면 대과에도 급제할지 모를 일이었다.
아내의 묘도 불길하다고 하여 이장을 하였는데, 이제 집터마저 기운이 좋지 않다고 하니 최흥원은 어찌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아내, 형제, 아들……. 귀중한 혈육들이 이 집에서 몇 명이나 죽어 나갔는지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하고 싶은 생각이었다. 그러나 큰일을 쉽게 결정할 수는 없는 법이고, 그럴만한 경제적인 여유도 없었다. 최흥원은 송도원의 점괘를 앞에 두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목숨을 구한 황노인의 점괘 테마스토리 이동

1592년 8월 2일. 어제 들으니 선산부의 왜적들이 기필코 정경달을 찾아내 죽이고자 하여 대대적인 수색을 다시 개시한다고 하였다. 어제 그 소식을 들은 정경달은 거처를 바꾸고 왜적의 포위망을 피해 달아났다. 그리고 오늘 격서를 지어 왜적의 죄상을 하나하나 들어 엄히 꾸짖었는데, 이로 인하여 왜적의 진중을 왕래하던 자들이 선산부 왜적들에게 아예 투항했다고 한다.
오늘 아침에 황노인의 집에서 밥을 먹는데, 문득 정경달은 황노인의 운명을 점쳐보았다. 그런데 대단히 흉조가 나오는 것이 아닌가! 필시 이 점괘는 왜적에게 잡혀 죽을 운명이었다. 정경달은 점괘를 보자마자 말을 타고 재빨리 달아날 채비를 하였다. 영문을 모른 황노인은 “어찌하여 달아나신단 말입니까?”라며 물었다. 정경달이 대답하기를 “오늘 왜적이 필시 대거 몰려와 이 집에 불을 놓을 것이니, 영감은 모름지기 나를 따라서 멀리 피해야 하겠소.”라고 대답하며 점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황노인이 그 이야기를 듣더니, 보문산 골짜기 쪽으로 도망하자고 하였다. 그러나 황노인의 집에 오기 전 정경달이 머문 곳이 보문산이었다. 보문산에서의 점괘가 역시 흉하게 나와 황노인의 집으로 옮긴 것인데, 다시 보문산으로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하여 우선은 서리 방향으로 길을 잡고 한시바삐 도망하기로 하였다.
서리 방향으로 한참 길을 달리다가 잠깐 머리를 돌려 지나온 곳을 돌아보았는데, 개령에서 넘어온 왜적들이 이미 산야에 가득하였다. 그리고 연기가 하늘로 치솟고 있었는데, 황노인의 집이 이미 불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황노인은 정경달을 쳐다보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과거를 꿰뚫어보는 맹인 점술가 ‘김여추’ 테마스토리 이동

1584년 3월, 권문해는 추운 겨울을 지나 어서 봄을 만나고 싶었다. 그러나 3월 9일, 바라본 소백산에는 겨울처럼 눈이 내려온 산이 다 하얗게 되었다. 더욱이 연일 서리가 내려 초목의 싹이 대부분 시들어 죽어가는 걸 보니 마음까지도 메마르는 듯하였다. 그러던 중 예천군 성주 류세무와 경상북도 선산부백(善山府伯) 류덕수(柳德粹)가 경상북도 의성군의 대곡사(大谷寺)에 만나기를 청하였다. 3월 14일, 권문해는 집을 나서 대곡사로 향했고 그곳에서 3일을 머무르며 류세무와 류덕수와 이야기를 나누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3월 15일, 이야기 중 경상북도 선산군의 부백 류덕수에게 자신의 고을에 맹인 점쟁이 김여추(金汝秋)에 대해서 듣게 된다. 앞을 못 보는 맹인이지만 그 누굴 만나도 그가 살아온 과거를 귀신같이 맞춘다는 것이다. 권문해와 류세무는 명경수(明鏡數) 김여추의 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김여추의 이야기를 한참 듣던 류세무는 율시 한 수를 쓰는데, 화와 복은 다 이미 정해진 것 禍福皆前定 꽃 피고 시드는 것은 각기 때가 있다네 榮枯各有時 정원의 꽃은 일찍 떨어져 버리지만 花落園中早 산골짝 옆 소나무는 오래도록 산다네 松生澗畔遲 현묘한 이치 원래 수가 있는 것이니 玄機元有數 조물주가 어찌 사사로움을 용납하리오 造物豈容私 모름지기 반계(磻溪) 늙은이를 알아야 할거니 須識磻溪叟 끝내 임금의 스승이 되었네 終爲帝者師 대곡사에 모인 권문해와 류세무, 류덕수는 앞 못 보는 맹인 점쟁이 이야기를 통해 세상의 이치를 논하는 이야기로 밤새는 줄 몰랐다.

아내의 운명을 점치다 테마스토리 이동

1596년 4월 22일, 오희문은 집사람의 건강이 걱정이었다. 전란 이후 거의 매일 학질을 앓아오다가 겨우 얼마 전 건강을 회복하였다. 그런데 어제부터 다시금 집사람이 앓기 시작하더니 증세가 자못 심해졌다. 오희문은 이번엔 정말로 집사람에게 큰일이 닥치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되어, 사람을 점쟁이 이복령에게 보내어 아내의 운명을 점치도록 하였다.

오후에 사람이 돌아와서 이복령의 점괘를 들려주었다. ‘출생한 달의 간지가 무인이고, 운수가 임신에 이르렀기 때문에 인(寅)과 신(申)이 상충하여 건강을 상하고 병을 얻은 것이니, 이치와 형세가 불가피한 것이다. 또 금년의 간지가 병신(丙申)이니, 이는 곧 병으로 신음할 때이다. 그러나 본래 타고난 명은 반드시 경오(庚午)에 이를 것이요, 그 안에는 끝내 다른 큰 병을 앓지 않을 것이니 근심할 것이 없다.’ 이복령이 말하는 경오년까지 아내가 산다면 곧 76세이다. 이복령의 말만 들으면 지금 아내의 병은 그다지 걱정할 것이 없는 셈이었다.

그런데 이것만으로도 다소 불안한 생각이 들어 돈을 던져서 점을 치게 했더니, ‘귀신과 뱀이 함께 움직이니 크게 길하고 흉한 것이 없는 조짐이다. 하물며 자손이 복덕의 신이 되어 움직이니, 끝내 길하고 흉한 것이 없으니 전혀 근심하지 말라. 오는 신유일이면 반드시 회복될 것이다’ 라는 점괘가 나왔다. 신유일이라면 앞으로 3-4일 정도 남았으니, 지켜보면 점괘가 맞는지 알 수 있을 것이었다.

오희문은 두 점괘 모두 아내에게 흉한 것이 없다고 나오자 다소나마 안심이 되었다. 그러나 정말 점괘대로 아내가 장수하고, 또 길할지는 두고 볼 일이었다. 비록 평소 점을 잘 믿지 않는 오희문이었지만, 아내의 일은 점괘가 들어맞기를 은근히 기대하였다.

딸아이의 병세로 급히 점을 치다 테마스토리 이동

1596년 9월 25일, 며칠 전부터 딸아이 단아가 극심한 두통을 호소하고, 구토 증세를 보였다. 고열에 시달리며 헛소리를 하기도 하였는데, 며칠이 지나니 말을 하고 싶어도 뜻과 같이 안되고 밤새 괴로움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로 인해서 오희문 부부는 교대로 딸아이의 병상을 지키며 역시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오늘 아침에도 어제와 같이 인사불성으로 깨어나지 못하여 청심환과 소합원을 개어 먹이니 한참만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며칠간 이토록 극심한 병세를 앓자, 불안해진 오희문은 아들 인아로 하여금 이복령에게 가서 딸의 운명을 점쳐보도록 하였다.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데, 아들이 돌아와 점괘를 전해 주었다. 점괘에는 ‘괘효가 순수하게 길하여 흉한 징조가 조금도 없으니, 7-8일 지나면 차도가 있을 것인즉 염려할 것이 없다’ 라고 씌여 있었다. 이를 본 오희문은 살짝 안도가 되었다.
그러나 병세가 이와 같이 위급하니 답답한 마음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아픈 딸이 깨어나 석류가 먹고 싶다고 찾는데, 구할 길이 막막하였다. 말더듬는 여종을 이웃에 보내어 구하게 했더니 저녁 무렵 이별좌가 석류 4개를 보내어 주었다. 아픈 딸이 석류를 보더니 매우 기뻐하며, 즉석에서 반개를 먹었다. 아무것도 입에 대지 못하여 걱정이었는데, 석류를 맛있게 먹는 딸을 보니 오희문도 다소 마음이 놓였다.

자신의 수명을 점쳤던 점괘가 생각나다 테마스토리 이동

1593년 3월, 해가 바뀌자마자 100여 일을 앓았던 오희문은 최근에야 밥을 먹고, 지팡이에 의지하여 운신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사이 사람들 사이에서는 오희문이 병으로 죽었단 소문도 돌았고, 이로 인해 아들에게는 위문편지가 날아오기도 하였다. 병이 너무나 심하여 오희문 스스로도 이제 곧 죽는구나 생각했던 순간들이 많았는데, 이제 이렇게 다시 살 수 있게 되니 감회가 새로웠다.

문득 15년 전의 일이 생각났다. 그때 오희문은 양지현 농촌에 머물고 있었는데, 죽산에 사는 맹인 김자순이란 자가 점을 잘 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리하여 그를 불러다가 자신의 운명을 점치게 하였는데, 그때 김자순이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나이 54세, 그러니까 임진년에 큰 횡액이 있고, 이것을 지나면 70살 넘게 살 수 있다” 그때 오희문은 재미 삼아 친 점이라 특별히 신뢰하지 않고 있었는데, 과연 임진년에 난리가 터져 거의 죽을 뻔하게 되었다. 비록 몸의 병은 해를 넘겨 생겼지만, 김자순이란 자가 이야기한 점괘와 신기하게 맞아떨어진 것이 아닌가! 오희문은 새삼 점쟁이 맹인의 신통함에 감탄하였다.

막내아우의 병이 위중하다 테마스토리 이동

1740년 윤6월 14일, 흐리고 비가 올 것 같은 날씨였다. 어제 최흥원의 집에 하곡 마을의 심부름꾼이 갑자기 들이닥쳤다. 그리곤 하는 말이 막내 아우가 설사를 하고 곽란을 앓고 있어 상황이 매우 위중하다는 것이었다. 소식을 들은 최흥원은 깜짝 놀라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곧바로 둘째 아우를 보내 밤새 달려가도록 하였다. 불과 2달 전에 아내를 떠나보냈는데, 막내아우마저 세상을 떠날까 싶어 가슴이 조마조마하였다.
오늘도 아우의 병 때문에 애가 타고 답답하여 직접 하곡 마을로 가볼까 생각도 해보았다. 그러나 비가 올 조짐이 있어 당도하지 못할까 하여 그만두었다. 하루 종일 아우에 대한 걱정을 하고 있는데, 저물녘에 둘째 아우가 편지를 보내어 왔다. 어젯밤 한밤중에 도달하여 아우의 병을 살펴보니 다행스럽게도 살아날 길이 좀 있어 보인다고 하였다.
최흥원은 둘째 아우의 편지를 보고 크게 한숨을 쉬었다. 아마도 위험한 고비는 넘긴 모양이었다. 마음이 좀 든든해진 최흥원은 점을 칠 줄 아는 자를 불러다가 막내 아우의 운명을 점쳐 보았다. 다행히 운수가 길하므로 곧 쾌차하리란 점괘를 얻었다. 최흥원은 점괘를 듣고는 크게 안심하였다.

새해 운수를 점치다 테마스토리 이동

1745년 1월 17일, 을축년 새해가 밝은지도 벌서 보름이 지났다. 몇 년째 어머니 환후는 나아지지 않았고, 작년에도 집안에 크고 작은 환자들이 생겨났다. 물론 작년에는 집안 아이들 중 몇 명이 혼인을 하였고, 관례를 치르고 어른이 되었다. 올해는 부디 집안에 환자가 줄고, 어머니의 환후가 좋아져야 할 텐데...... 또 혼인한 자제들은 하루빨리 자식을 봐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에 어제 도동 마을에 사는 김생이 최흥원을 찾아왔다. 이 김생이란 자는 본래 점을 잘 치기로 근방에 이름이 난 사람이었다. 일을 마친 김생이 돌아가려는 것을 최흥원이 억지로 붙잡아 하루 묵어가도록 청하였다. 동생들과 더불어 집안의 일년 운수를 점쳐보고 싶은 욕심에서였다.
오늘 새벽 김생이 점괘를 뽑아보았는데, 최흥원과 둘째 아우 모두 좋은 괘가 나왔다. 김생이 말하기를 금년에 어머님을 모시는 일은 아주 평온하고 걱정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참으로 위안이 되는 말이었다. 최흥원은 비록 점괘가 신뢰할 만한 것은 아니어도, 올해 운수가 길하다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무척 좋아졌다.

점괘에 따라 급히 이사하다 테마스토리 이동

노상추는 이사를 결심하였다. 여러 차례 불이 난 그을음 있는 집 대신 새집을 지어서 번듯하게 살고 싶었다. 비록 사나운 찬 바람이 부는 겨울이었지만 노상추는 우곡(愚谷)의 신기(新基) 월평(越坪)으로 이사를 할 마음을 먹고 집터를 보러 지사(地師)와 함께 이리저리 다녔다. 완전히 빈 터에다가 집을 짓기보다는 그래도 이웃에 집이 좀 있었으면 했는데, 마침 괜찮은 터와 집이 눈에 띄었다. 매물로 나와 있는 집은 두 채로 이루어진 일곱 칸짜리인데 이 근처에 새집을 더 지으면 좋을 것 같았다. 노상추는 바로 매매계약을 체결하고 뿌듯한 마음으로 언 흙을 밟으며 돌아왔다.
집 자리를 정했으니 다음으로 정해야 할 것은 집 근처에서 농사를 지을 땅이었다. 이 근처 땅이 어디가 좋은지 잘 모르니, 모를 때는 그저 여기저기 물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노상추는 종 만의(萬儀)를 데리고 도개(桃開) 법화(法華)에 사는 산지기 세귀(世貴)를 만났다. 이 사람은 동네에 오래 살아서 어느 논이 좋고 나쁜지를 자세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산지기에게 정보를 얻은 노상추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개령(開寧)의 40마지기 논을 처분하여 류택수(柳宅洙) 생원이 가진 목화밭 30마지기를 사기로 마음먹었다. 류택수는 목화밭을 총 85냥이라는 헐값에 팔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역시 목화만 가지고는 먹고살기가 어렵기에, 다음날 노상추는 문동(文洞)에서 목화밭 15마지기와 논 12마지기를 추가로 샀다. 도합 139냥밖에 안 되는 가격이었기에, 노상추는 기분 좋게 매매문기를 작성하였다.
갈아먹고 살 땅까지 모두 마련한 노상추는 이사를 서둘렀다. 아직 새집을 짓기 전이지만 점쟁이 말로는 올해를 넘기기 전에 이사해야 운수가 길하다고 했다. 그래서 작은 집에서 곧장 필요한 약간의 세간만 가지고서는 일부 식구만 데리고 집을 옮겼다. 동생 노억과 조카 노용엽도 이사를 도와주러 왔고, 종 덕돌(德乭)과 여종 원단(元丹)도 세간을 옮긴 뒤 이사한 집에 머무르며 세간을 정리했다. 이제 새해까지도 사흘 남았다. 새집에서 맞을 새해가 기대되었다.

새해 벽두에 어머니의 운수를 점치다 테마스토리 이동

1739년 1월 3일, 새해 첫날부터 어머니의 병환이 심상치 않아 최흥원의 집안은 한바탕 난리를 치르고 있었다. 어제 약재를 구하러 대구부에 들어갔던 둘째 아우는 오늘 새벽에 돌아왔는데, 아우는 대구부의 서덕린에게 어머니 건강에 대한 점괘를 뽑아보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아우가 하는 말이 ‘진괘에서 박괘로 변하는 괘’를 얻었는데, 서덕린이 풀이하기로 음력 2월쯤에는 차도가 있을 것이라 하였단 것이다.
이야기를 들을 때 마침 류상일 군이 방문하였길래 그와 더불어 점괘를 논하였는데, 류상일이 말하기를 ‘마음의 화기가 빌미가 된 듯합니다.’ 라고 이야기했다. 또 어머니의 올해 신수를 논하였는데, 류상일이 답하기를 ‘길합니다.’ 라고 하였다. 서덕린과 류상일 모두 점괘가 길하다고 말하니 최흥원은 그제서야 긴장된 마음이 조금 풀리는 듯하였다.
조금 긴장이 풀린 최흥원은 류상일에게 본인의 신수에 대해서도 물어 보았는데, 답하기를 ‘순전히 길하지는 않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듣는 순간에는 불길한 마음이 들었으나, 어디 사람의 운수가 순수히 길한 경우가 쉽겠는가. 그나마 어머니의 운수가 길하다는 말을 들었으니 그만해도 다행이었다. 최흥원은 류상일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어 굳이 붙잡아 하루 묵어 가기를 청하였다.

빈 사당 안에 머무는 조상신들 테마스토리 이동

새해 정초부터 종손 종옥이 멋대로 문동의 큰집을 버리고 금곡으로 이사 간다고 한다. 노씨 집안 종손이 이사한다는 소식을 듣고서 와서 보는 이가 매우 많았다고 한다. 노상추가 보기에 이들은 모두 걸왕을 돕는 부류이니, 한탄스러웠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노상추는 장남 익엽을 데리고 사당의 신주를 받들어 종옥보다 한발 앞서 금곡으로 출발했다.
노상추가 금곡의 새 큰집 사당에 신주를 봉안하고 한참을 기다리자 종옥의 어미 및 처와 딸이 어스름에 도착했다. 그리고 종옥은 달이 진 뒤에 제 아비인 정엽의 우주를 모시고 왔다. 그리고 짐바리를 지는 사람들을 모두 데리고 왔는데, 면에 사는 주민들에게 짐을 지게하고 날이 저문 뒤에 밤새 걷게 하여 새집으로 들어온 것이라고 한다. 이게 또 무슨 괴이한 짓인지.
날이 밝은 뒤 노상추는 새 사당에 모신 신주에 참배하였다. 그런데 종옥은 방에 틀어박힌 채 나와 보지도 않았다. 이게 어찌 사람의 도리인지. 노상추는 다시 문동의 옛 큰집으로 가서 가묘를 청소했다. 비록 빈 집이라 하지만 어찌 가묘를 비워두겠는가. 삼대의 허위를 다시 설치하여 참배하고 나오니 마음이 비통했다.
그렇게 4개월이 흘러 5월이 되었다. 노상추의 서자 승엽이 병에 걸린 지도 보름이 넘었다. 갖은 약을 써도 호전과 악화를 거듭하면서 시간이 흘렀다. 승엽의 어미는 애가 타서 여자 점쟁이에게 찾아갔다. 그러고 돌아와서는 노상추에게 말하기를, “점쟁이가 말하길 ‘가묘가 옮겨져서 신주들은 지금 다른 곳으로 멀리 갔지만 조상신의 영령은 모두 가묘 안에 있으니 정성스럽게 제사를 지내면 매우 좋을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영감의 의중을 몰라서 이것을 미리 알리지 못했습니다.”라고 하였다.
평소 괴력난신을 싫어하는 노상추였지만 이번만은 점쟁이의 말이 매우 옳다고 여겨졌다. 조상님들이 해괴한 짓만 일삼는 종손을 따라가셨을 리가 없지! 노상추는 바로 큰집으로 가서 둘째 질부에게 사당의 무성한 풀을 뽑아버리고 깨끗이 정돈하여 단오 제사의 거행에 대비하라고 일렀다. 조상신이 굽어살피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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