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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을 맞아 안동에서 일어난 의병들
안동을 중심으로 활약한 의병장 김해(金垓, 1555~1593)는 『향병일기(鄕兵日記)』를 남겼다. 이 기록을 통해 당시 안동에서 이루어졌던 의병 활동이 지금까지 전한다. 안동에서 임진왜란을 맞아 의병이 조직되기 시작한 시점은 1592년 6월부터이다. 안동 출신의 김성일(金誠一)은 초유사에 제수되어 전쟁 상황을 살피기 위해 5월에 경상우도로 내려갔다. 그는 함양에 이르러 나라를 염려하는 마음을 담아 격문을 써서 여러 지방으로 보냈으며, 이에 감동한 여러 사람들이 의병을 일으키게 되었다.
예안에 거주하던 김해가 의병을 일으킨 것도 이와 같은 경위에서였다. 먼저 조목(趙穆)이 의병 조직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였고, 조목이 김해에게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미를 조달하는 일을 전담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6월 1일에는 안동에서 배용길(裵龍吉)을 비롯한 여러 사족들이 퇴계에 모여 각 지역에서 책임지고 군대를 모집하기로 하였다. 보름 뒤에는 여러 고을의 대표들이 모여 김해를 안동 열읍(列邑) 향병(鄕兵) 대장(大將)으로 추대하였다.
안동 열읍향병은 안동 인근의 여러 고을들의 연합체의 구심점이 되었고, 같은 해 8월 20일에는 안동, 예안, 의성, 의흥, 군위 등의 고을 의병들이 안동 일직(一直)에 모여 연합하기로 다짐하였다. 이 연합체의 대장 역시 김해가 되었다. 본진은 안동이었으며, 대장 김해 아래로 좌부장, 우부장, 정제장(整齊將), 조전장(助戰將)과 군량도총(軍糧都總) 등의 지휘관과 군량미 수집을 담당하는 여러 직책을 두어 조직화하였다. 군량도총 아래에도 전향유사(典餉有司)가 있어 군량 조달의 실무를 담당하였다. 의병으로 직접 나서지 않은 여러 사족들도 군량을 대는 둥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안동 열읍의 의병들은 9월 2일에 운산역(雲山驛 : 안동시 일직면 운산리 소재)에 모여 행군을 시작하였다. 행군시에는 의병들의 기강을 잡기 위해 민간인의 재산에 피해를 끼치지 않도록 군율을 세웠다. 당시 왜군은 경상도 상주의 당교(唐橋)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장기전을 대비하기 위해 목책을 축조하는 중이었다. 이들은 당교를 거점으로 하여 인근 지방을 공격하고 약탈하였다. 안동 의병은 당교에 주둔한 왜군을 상대하기 위하여 10월 22일에 풍산(豐山)에 집결, 다음날에는 예천군을 거쳐 10월 25일에는 용궁에 이르렀다.
10월 27일에는 복병장수 이선충(李選忠)과 조전장수 박호인(朴好仁)이 당교 근처의 반암으로 군사를 이끌고 갔으며, 11월 24일에는 복병장수 김사권(金嗣權) 역시 당교가 있는 함창으로 가서 동태를 살피며 주둔하였다. 이들과 함께 김해가 이끄는 총 본진이 왜군을 협공하기 위한 작전을 짜고 있었는데, 이는 왜군과 전력 차이가 컸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왜군이 경유할 지점에 매복을 심어 놓고 한밤중에 왜군 진영을 급습하였다. 이 때 진천뢰(震天雷)와 같은 화약무기를 사용하였다. 이것은 관군의 지원을 받아 얻은 것이었다. 그리하여 안동 의병은 출진 후 첫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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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적과 맞서 싸울 향병을 조직하다 테마스토리 이동

며칠 전에 물러갔다고 했던 왜적이 사방에서 다시 모인다는 위협적인 소식이 들려왔다. 금난수는 이렇게 앉아서 몸을 피하고 당할 수만은 없다고 여겼는지 박석(博石)마을에서 김해(金垓)를, 백운지에서 금응협을 만나 근처 동네 사람을 모두 불러 모으게 하였다. 그리하여 8월 12일에는 녹음대(綠陰臺)에서 근처에 거주하는 사족들이 모두 모여 향병을 모을 일에 대한 논의를 하였다. 이날 금난수는 큰아들 금경과 셋째 아들 금개도 대동하였다. 모두 왜적의 행보에 대해 두려워하면서도 나라를 자력으로 지키는 것이 사족이자 백성의 도리라며 비분강개하였다.

사실 안동지역에서는 6월부터 김성일(金誠一)이 발송한 격문에 의해 의병이 일어나고 있었다. 김성일의 격문에 자극받은 금난수의 처남 조목 역시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미를 마련하는 일을 후원하였다. 조목의 후원을 받은 것은 김해였다. 김해는 김성일의 격문에 답하길, “섬 오랑캐가 창궐(猖獗)하여 임금이 피난가자 신민(臣民)들이 매우 애통하여 살아도 죽는 것보다 못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돌아보건대, 여기 궁벽한 고장에는 필묵(筆墨)만 일삼고 궁마(弓馬)는 익히지 못하여 빈주먹만 불끈 쥐고 있으니, 자신을 구제하기에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충의(忠義)의 근성으로 복수의 뜻이 간절하여 천지에 맹세하고 왜적을 토벌하는 의리를 펼치려고 합니다.” 라고 하고 의병을 일으키기를 다짐하였다. 금난수의 사촌 여동생의 아들인 배용길(裵龍吉)은 김해를 도와 여러 고을별로 대표자를 두고 군대를 모집하게 하는 등의 실질적인 업무를 처리하였다.

김해는 안동 여러 고을의 향병 대장으로 추대되었고, 8월 20일에는 안동‧예안‧의성‧의흥‧군위 등에서 모인 의병들이 안동 일직(一直)에서 모여 연합하기로 하였다. 이 연합 의병의 이름은 안동 열읍향병이라 하게 되었다. 대장 김해의 아래로는 좌우부장, 정제장(整齊將), 조전장(助戰將)과 군량도총(軍糧都總) 등 여러 직을 두어 체계화하고 군량을 조달하도록 하였다. 금난수의 큰아들 금경은 군량유사(軍糧有司)가 되었다. 이렇게 조직화된 안동 의병은 9월 2일부터 운산역(雲山驛)에 모여 행군을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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