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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병에는 사찰 피접
전염병은 흉년이 들면 자주 발생했다. 그것은 곧 먹고 사는 것과 전염병이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반대로 풍년이 들면 전염병은 잘 발생하지 않았다. 흉년이 들면 으레 곡물이 부족해지므로 체력에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한번 전염병이 돌기 시작하면 체력과 면역력이 약한 아이들이나 노인들이 먼저 발병하게 된다. 흉년은 한 지역만이 아니라 전국에서 거의 동시에 발생하게 되므로, 전염병이 발생하면 전국으로 퍼지는 것은 대개 시간문제였다.
전염병이 돌면 대처 방법으로 부적을 쓰거나 민간요법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은 피접(避接), 즉 피해서 도망가는 것이었다. 피접은 대개 전염병이 아직 돌지 않은 청정 지역으로 옮기기도 하였으나 대개는 산으로 피했다. 산에 거주할 수 있는 공간은 사찰밖에 없었으므로, 전염병이 발생하면 으레 사찰로 피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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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어머니를 모시고 집으로 돌아오다 테마스토리 이동

1752년 5월 11일. 아침에 흐리다가 오후에 맑게 갠 날이었다. 오늘 어머니께선 아침부터 매우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셨다. 기운이 위로 치밀어 오르는 증세가 심하게 나타났다. 어머니는 지난달 손가락에 종기가 나서 여전히 낫지 않고 있었는데, 오늘 이 증세까지 더해지자 견디기가 무척 힘드신 상황이었다.
문제는 어머니께서 지내고 계시는 집의 이웃에도 환자가 있다는 것이었다. 요사이 계속 전염병이 도는 상황이라 이웃의 앓는 소리를 듣고 불편한 어머니를 계속 그 집에 모셔 둘 수가 없었다. 고민 끝에 최흥원은 어머니를 모시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아프신 어머니를 겨우 말에 모시고 길을 나섰다.
해안 마을쯤 당도하였는데, 기운이 위로 치밀어 오르는 증세가 더욱 심해지시고, 거기에 어지러운 증세까지 더해지셨는지 어머니께서 몹시 힘들어하셨다. 그리하여 부득이 길가의 정자 아래에 잠시 멈추었다. 시간이 좀 지나면 나아지시려나 생각하였는데, 좀처럼 치밀어 오른 기운이 시원하게 잦아들지가 않았다. 이러다가는 오늘 내에 집에 당도하지 못할 듯하여 어머니께 말씀을 올리고 다시 길을 나섰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하여 어머니 증세는 더욱 심해지는 것이 아닌가. 다행히 인근에 최흥원과 잘 아는 사이인 경주댁이 있어서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를 눕힐 수 있었다. 그렇게 얼마간 조리하고 다시 길을 나서서 천신만고 끝에 집에 당도할 수 있었다. 이미 사방은 어두워졌고, 집안 식구들은 갑작스러운 어머니의 당도에 한동안 시끌벅적해졌다. 집에 오는 길 내내 고생하신 어머니께선 겨우 자리에 누워 편하게 쉬실 수 있었다.

이웃에 전염병에 걸린 이가 있어서 옥연 모임을 미루다 테마스토리 이동

1617년 3월 13일, 하루해가 다 지나가고 있는데 김령 재종숙이 집 앞까지 와서 들어오진 않고 밖으로 잠시 나오라고 전했다. 김광계가 바로 나가 보았더니 김령 은 길가에 앉아 김광계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처가인 내성(奈城)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다. 김령은 김광계에게 15일 날 하회 옥연정사에서 다들 모이기로 했으니 함께 가자는 얘기를 하려고 온 것이다.

이 모임은 김영조(金榮祖)류진(柳袗) 등 안동의 친구들이 만나자고 한 모임인데, 김령과 김평 그리고 김광계를 부른 것이라고 했다. 김광계는 당연히 가겠다고 했고, 다음날 다시 만나 일정을 논의하기로 했다.

다음날 오후가 되어 김광계는 김령, 김평 재종숙을 냇가에서 만나 다음날 옥연정사에 가는 일을 상의했다. 그러나 김평 재종숙은 사정이 있어 갈 수 없다고 하여 결국 김령과 김광계만 가기로 약속했다. 덕여(德輿)·덕회(德會) 형제 그리고 김확(金確)이 이들이 냇가에 있다는 것을 알고 찾아와 함께 풀밭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가 날이 저물어서 헤어졌다.

3월 15일, 아침 일찍 김광계는 이웃집에 전염병에 걸린 사람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김령에게 서신을 써 보냈다. 전염병에 걸린 사람을 반드시 찾아내서 마을에서 내보낸 후에야 하회에 갈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편지를 받은 김령도 결국 하회에 가는 걸 포기하고 오후쯤에 술이나 하자고 전했다.

오후가 되어 김광계는 김령, 김평 재종숙과 반석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김설(金渫)이 우연히 왔고, 김확(金確)도 왔다. 가지고 온 술통을 열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보니 어느새 밤은 깊어지고, 달이 높이 떴다. 흥이 난 김령 재종숙이 갑자기 시를 한수 지어 읊었다.

溪上盃行松影斜 시냇가에서 술잔 돌리니 소나무 그림자 비꼈는데
和花淡淡滿村花 꽃과 어우러져 담담하니 온 마을에 꽃일세
興來莫怕春宵短 흥이 나면 봄밤이 짧을까 두려워 말게
乘月須尋有酒家 달빛 아래 술 있는 집 찾으면 되지

눈을 감고 감상하니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잠시 후에 김평 재종숙이 먼저 돌아간다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다들 일어나 흩어졌다. 김령은 김술, 김확을 데리고 김평 재종숙의 뒤를 따라간다고 했지만, 김광계는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 달빛을 맞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여전히 여운이 남았다.

전염병으로 절이 북적북적하다 테마스토리 이동

1755년 12월 24일, 전염병이 심상치 않다. 올해는 지극한 흉년이라 그런지 민심이 흉흉했다. 추수를 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먹을 것이 없어 떠도는 백성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한 사정은 권상일이 거주하고 있는 고향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담을 사이로 두고 있는 이웃이 전염병이 의심스러운 조짐을 보이면 지레 겁을 먹을 수밖에 없는 것이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들으니, 도처에 전염병이 수그러든 곳이 한 곳도 없다고 한다.
동네 사람인 이응(二應)이 오랫동안 대승사(大乘寺) 청심전(淸心殿)에 거처하다가 비로소 돌아왔다. 그는 권상일에게 대승사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전염병이 좀체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자, 대승사로 거지는 물론, 양반과 상놈까지 모조리 모여들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절에서는 이들을 모두 내칠 수 없었다고 한다. 대승사 중들이 두세 동이의 죽을 끓여서 각각 한 국자씩만 주었는데도 턱없이 부족하다고 했다.
권상일의 손자 또한 어제부터 두통이 생겼는데, 두통조차 전염병으로 의심스럽다는 생각에 손자를 이웃에 보낼 수밖에 없었다. 권상일도 또한 이웃으로 옮겨서 거처했다. 결국 권상일이 사는 마을에 전염병으로 크게 혼란이 발생하고 말았다.

피를 흘리는 막내아들 테마스토리 이동

처남 조목이 나라에서 내려온 명을 받으러 안동에 갔다가 봉화현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이 들렸다. 금난수는 금난수의 아내를 만나러 왔던 조목의 아내를 봉화로 다시 데려다줄 겸 동행하여 봉화현 관아로 갔다. 그날부터 사흘간 봉화현 관아에 머물렀는데, 갑자기 막내아들 금각이 아프다는 급한 전갈이 날아들었다. 금난수는 다음날 바로 집에 돌아왔는데, 과연 병세가 매우 위중해 보였다.

서얼 사촌형제 금몽수의 아내도 앓아누웠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금난수는 혹시나 전염병이 아닌가 싶어 불안해졌다. 그래서 막내아들의 병세가 조금 덜할 때를 기다려 바로 온 식구가 함께 가화음 산소에 있는 재사(齋舍)로 옮겨갔다. 인적이 없는 산중이니 적어도 전염병 걱정은 덜할 것이었다. 곧 서얼 아우인 금무생도 병에 걸렸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전염병이 확실하다는 생각에 마음이 놓이지 않았지만 금난수는 일단 눈앞에 닥친 기제사를 지내야만 했기 때문에 백운 산소의 재사에서 머물렀다.

제사를 지내고 백운 재사에서 머무르고 있는 금난수에게 둘째 아들 금업과 셋째 아들 금개, 그리고 큰아들 금경이 차례로 찾아왔다. 금경이 말하길, 막내의 병이 심해져서 피를 몇 되나 흘렸다고 하였다. 금난수는 귀여운 아들이 피를 흘렸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나 심란했지만, 다행히 다음날 금각의 병이 덜하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마음을 놓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예안 일대를 휩쓸고 있는 전염병은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었다.

양반 딸은 살고, 노비 딸은 죽다 테마스토리 이동

지난 연말부터 기승을 부리던 전염병은 해가 바뀌어도 그 기세가 수그러들질 않고 있었다. 금난수의 집안에서도 막내아들 금각이 아픈 것으로 시작하여 병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이미 전염병을 피해 집에서 나와 가화음 재사에서 지내고 있는 터라 새해의 희망과 기쁨을 느끼기에는 마음도 몸도 불편하였다. 온 가족이 모여 화목한 시간을 보내야 하는 새해 첫날에는 여종 석금(石今)과 옥섬(玉蟾)이 앓아누웠다.

병이 옮을까 싶어 병에 걸리지 않은 첫째, 둘째, 셋째 아들은 잇손(㗡孫)의 집으로 나와 거처하였다. 금난수 자신은 고산에 있는 서재로 올라가 거처하였다. 막내아들과 다른 가족들은 그대로 가화음 재사에 머물러 있었다. 가족이 뿔뿔이 흩어진 셈이다. 금난수는 병자들을 격리하기 위해 병든 여종 석금과 옥섬을 비워두었던 집으로 들여보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병이 낫지 않고 있는 막내아들은 끝동(唜同)의 집으로 옮겨 거처하게 하였다. 아들의 외삼촌이자 금난수의 처남인 조목이 사람을 보내 금각의 병세를 물었지만 여전하다는 말 밖에는 전할 말이 없었다.

병자를 격리하려 노력한 데에도 불구하고 금난수의 딸 계종(季從)이 다음날 앓아누웠다. 금난수의 아내는 딸을 데리고 전날 석금과 옥섬이 돌아간 집으로 들어갔다. 금난수는 아직 병이 나지 않은 며느리를 데리고 전천금이(全千金伊)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하지만 다음날 가족들의 거처는 다시 옮겨졌다. 둘째 아들 금업은 자신의 어머니를 모시고 집에서 나올 계획을 세웠으며, 큰아들 금경은 전천금이의 집에 있던 자신의 아내를 데리고 수비(守非)의 집으로 거처를 옮겨갔다.

금업은 자신의 어머니와 여동생 종향(從香)을 데리고 권희(權希) 집으로 갔는데, 고산 서재에 있던 금난수를 찾아와 종향이 아프기 시작했으며 어머니가 자신에게는 몸을 피하라고 하여 이쪽으로 오게 되었다고 말하였다. 다행히 다음날 종향은 위중하지 않고 음식을 먹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하지만 금난수의 집에서는 손동(孫同)의 처 금이(今伊)와 여종 수비(守非)가 죽었다고 알리는 사람이 왔다.

금난수의 딸들은 병세가 좋아졌다 나빠졌다를 반복하였다. 딸들을 돌보는 여종 영지(英之)는 병에 옮았다. 그리고 옥섬의 병 역시 더욱 심해져만 갔다. 금난수와 그의 아내도 거처를 계속 옮겨가며 병에 옮지 않으려 노력하였다. 하지만 금난수의 집안은 그나마 피접을 다닐 곳이라도 있어서 다행이었다. 영양상태가 좋지 않고 돌보아 주는 사람이 없는 노비들과 농민들은 질병에 더 취약하였기 때문에 사망자는 대부분 이들 중 발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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