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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산소 관리
송추(松楸), 즉 무덤 둘레에 심는 나무들을 동네 사람들이 많이 베어 가서 보상받는 대목이다.
본래 조상의 무덤 주변의 나무와 야채 등은 본래 근처에 사는 자손들이나 문중에서 정한 규칙에 따라 경제적 이익을 취해갔다.
선산을 보호하기 위해 송계(松契)·금송계(禁松契) 등을 만들어 종중의 성원들에게만 낙엽·마른가지·풀 등을 채취할 수 있게 하는 한편, 나무 채취량과 시기를 정해놓아 무단 벌채를 막고 선산을 보호했다. 이렇게 조직적인 운영을 통해 종중재산을 관리하고 증식시켜 나갔다.
제사비용과 묘지관리비는 주로 종중재산인 산에서 나오는 수익으로 지출되었으나, 간혹 산림에서 나오는 수익으로 충당되는 경우도 있었다.〈출처 : 민족문화대백과사전〉

관련이야기 소재

조상의 무덤가 소나무를 베어간 자, 엄벌에 처하라 테마스토리 이동

1858년 10월 16일, 이천에 있는 서찬규 선영의 송추(松楸)를 동민들이 몰래 많이 베어 갔으므로, 이날 가서 잡아다 모아놓고 치죄(治罪)하였다. 10월 20일, 이천의 송추 문제로 구암서원에 모였다. 10월 24일, 이천 소나무에 대한 속전(贖錢)으로 127냥(兩)을 종중에 와서 납부했다.

류상일이 잃어버린 산소를 찾다 테마스토리 이동

1739년 8월 7일, 오늘은 하회 일족인 류상일 군이 광촌에서 최흥원 집의 산지기인 시망의 뒤를 따라 왔다. 꽤 오랜만에 만나보는 것이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서로 안부를 물었다. 그리곤 최흥원 집에 방문한 까닭을 물었더니 류상일이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저의 7대조 할아버지 산소를 자손들이 잃어버려 통한으로 여기고 있었는데, 마침 광촌 마을의 늙은 사람을 만나 옛날 수호하던 일을 설명하니, 그가 7대조 할아버지의 산소 위치를 알려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산소의 위치가 공의 숙부님 산소 동쪽 좌청룡 기슭에 있습니다. 7대조 할아버지의 산소를 찾았으니 나무를 베고 묘역을 가꾸어 관리해야겠는데, 공의 숙부님 산소 경내에 있어 미리 허락을 얻으러 찾아왔습니다. 귀댁의 산지기와 함께 온 것은 저희 집에서 묘역을 가꾸는 것을 금하지 못하도록, 산지기에게 말씀해 주시길 바래서입니다”
이야기를 들은 최흥원은 바로 허락하였다. 최흥원은 하회 일족과 사귄지 오래고 또 혼인도 여러 차례 맺은바 있었다. 게다가 류상일은 평소 교분도 두터운데다가 사람됨 역시 훌륭하니, 꺼릴 이유가 없었다. 그는 기쁜 낯으로 7대조의 묘소를 찾은 것을 축하하고, 아울러 묘역을 정비하는데 아무런 불편함이 없도록 조치하겠다고 일렀다. 그리곤 일어서서 가는 그를 붙잡아 하루 묵어가도록 청하였다.

묘소의 잡목을 베다 테마스토리 이동

춥지만 맑은 겨울 아침, 이우석(李愚錫)은 그간 머물던 승가사를 떠나 아들과 함께 북한산성으로 향했다. 산길은 험하고 위험한 돌비탈이 많았다. 오전에는 북한산성에서 산천을 두루 구경하고 북한산성 행궁과 중흥사의 여러 암자를 둘러보면서 경치를 완상하였다. 발걸음을 재촉하여 둘러보았는데도 구경을 마치고 서문(西門)에 나오니 신시(申時, 오후 3~5시)가 지난 시각이었다.
이우석 부자는 곧바로 도성 바깥 서북쪽에 위치한 이말산(莉茉山)에 있는 묘소에 도착해서 소나무를 베었다. 이곳은 이른바 성저십리(城底十里)라고 하여 도성 10리 밖에 있는 산이어서 이우석 가문 외에도 다른 집안에서도 묘를 쓴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베어야 할 나무는 4~5백 그루에 달하였다. 이우석 부자는 나무를 벤 후 묘지기인 이희지 집에서 자려고 했지만, 깜빡 잊고 있던 볼 일이 늦게서야 생각나는 바람에 발길을 돌려 석리(石里)로 향했다. 전석현(磚石峴)에서 볼 일을 마친 이우석 부자는 주점에 묵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길을 나서서 관현(館峴) 묘소에 당도한 이우석 부자는 소나무와 잡목 5백 그루를 베었다. 아들 산흥이 직접 베었다. 이곳을 맡고 있던 전 묘지기 문윤수가 집터를 장생에게 팔았었는데 근자에 오화춘이라는 사람이 사들였다고 한다. 오화춘이 이곳을 매입한 이후로는 이곳을 잘 돌보지 않아 잡초와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버렸다. 오늘 이우석 부자가 와서 손 보지 않았더라면 상태가 더 심각해질 뻔했다. 이우석 부자는 오전에 벌목을 마치고 오후에 다시 도성으로 돌아갔다.

집안 선산에 들러 참배하다 테마스토리 이동

1707년 2월 26일. 엄경수는 아침 일찍 누이의 집을 방문하였다. 누이의 병이 심하여 병문안 목적으로 방문한 것이었다. 이후 엄경수는 집안의 선산으로 발길을 향했다.
엄경수 집안의 선산은 이천의 도오촌 비탈에 자리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선산에 들러보니, 총제 부인의 묘 앞에 있는 비석은 글자가 깎이고 떨어져 나갔고, 참의 선조 묘 앞에 있는 석비는 그나마 조금 글자를 식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앞면 외에 좌우 옆에도 글자를 새긴 것 같은데 비석의 결이 거칠게 갈라지고 조각조각 떨어져 나가 한 글자도 식별할 수가 없었다.
선산을 찾은 엄경수는 이참에 9대조의 묘소를 찾아보고 절을 올리고 싶었다. 그간 조상의 묘소를 찾을 때마다 9대조 묘소를 참배한 기억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리하여 선산을 관리하는 일가 친척에게 문의하였는데, 집안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9대조께서는 요절하여 묘소를 알 수 없다.”라고 하였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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