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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묘와 차례
성묘는 묘를 살펴서 손질하는 것으로, 전묘(展墓)·배분(拜墳)·배소례(拜掃禮) 또는 상묘의 (上墓儀)라고도 부른다. 주자의 ≪가례≫에 의하면 성묘는 묘제(墓祭)의 한 부분으로 되어 있으나, 본래는 성묘에 제례의 절차가 합쳐져 나중에 묘제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의 경우 일찍부터 이 배소례가 있었던 것 같다.
이언적(李彦迪)의 ≪봉선잡의 奉先雜儀≫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정초·한식·단오·추석에 묘에 가서 배소를 해왔으니, 어떻게 폐할 수가 없다. 따라서 이 날 아침 일찍 사당에서 천식(薦食)을 하고 묘에 가서 상을 차려 배례하는 것이 좋다. 만약에 묘가 멀면 2, 3일 전에 묘소에 가서 재계하여 상을 차리고 배례한다.”고 하였다.
또한 송인(宋寅)은 “시제는 국법에 얽매여 증조까지만 지내는데, 묘제와 기제는 모두 고조까지 지내는 것이 옳으며, 5세조(五世祖)는 한식과 추석에, 6세조 이상은 단지 한식에 지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정구(鄭逑)의 ≪한강집 寒岡集≫에 따르면, 명절의 묘제는 우리나라에서 가묘(家廟)를 세우기 전에 행해오던 것으로서, 가묘를 세운 다음에는 ≪가례≫에 따라 지내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이(李珥)는 ≪격몽요결 擊蒙要訣≫에서, 한식과 추석에는 ≪가례≫에 의해 묘제를 지내고, 정조와 단오에는 간단히 지내는 것이 좋다고 말하고 있다. 반면에 조호익(曺好益)은 ≪지산집 芝山集≫에서, 명절의 묘제는 예가 아니나, 옛날부터 내려오던 것으로 주자나 이황(李滉)도 역시 종래의 풍속을 따라 없애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러한 기록들로 미루어보아 성묘는 대체로 16세기 중반까지는 묘제와 관계없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그 뒤에는 묘제의 형식으로 발전 또는 변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렇게 성묘가 묘제의 형식으로 변하게 된 데에는 ≪가례≫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반면에 당시에는 옛날부터 행해오던 관습인 성묘와 ≪가례≫의 묘제가 함께 행해졌거나, 이를 절충하려는 노력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때에는 예학자들의 학설이나 해석에 따라 가문이나 지방에 의해 성묘나 묘제의 시기가 각각 다르게 나타나고 있기도 하다.
대체로 지금까지 변해온 것을 살펴보면, 정초에는 차례만, 한식에는 성묘만, 추석에는 차례와 성묘를, 그리고 10월에는 4대 이상의 조상에 대한 묘제가 각각 행해져왔을 것으로 보인다.

관련이야기 소재

종과 말이 없어 새해 성묘를 못하다 테마스토리 이동

1597년 12월 25일, 며칠 후면 새해 명절이다. 본래 내일은 동생 희철이 아들 윤해의 말을 빌려 서울로 가서 성묘를 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윤해의 말을 쓸 수 없게 되어 관아의 말을 빌려 타고자 하였다. 아들 윤겸이 수령이라 말 하나를 빌리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런데 관가에서도 부릴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김언신을 시켜 관아의 심부름을 다녀오도록 시켰다고 한다. 이 김언신이 관아의 말을 가지고 갔는데, 그는 마침 토산에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낭패 중에 낭패였다. 말도 말이지만 데리고 갈 종도 마땅치 않았다. 집에 남자 종이라고는 김담과 춘금 둘이 있는데, 둘 다 얇은 홑옷밖에 가지고 있지 않아서 추위에 먼 길을 다녀오라고 할 수가 없었다. 아마 형편상 올해는 성묘를 드리는 것이 어려울 듯하였다. 말도 없고, 부릴 종도 옷가지를 제대로 갖추지 못하여 성묘를 거르다니, 슬프고 탄식스러운 마음을 이길 수가 없었다. 비록 직접 가보지는 못하지만 일가붙이인 허찬이 서울로 갈 때, 아들 윤겸이 포 반필과 과일 등의 물건을 주어 보내어 제사를 지내도록 할 계획이라 하니 그나마 조금 위로가 되었다. 언제쯤 전란이 끝나 제대로 성묘를 할 수 있을는지... 오희문은 조상들을 볼 면목이 없었다.

종손의 설사병에 미뤄진 차례 테마스토리 이동

조카 정엽(珽燁)이 토하고 설사한지 오래다. 종손이 아프니 추석을 맞아 지내야 할 차례도 지낼 수가 없다. 설상가상으로 노상추의 아들 익엽(翼燁)도 설사를 시작했다. 무슨 병인지 동네 젊은이들 몇몇이 다 같이 설사를 하고 있다. 노상추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직 서늘해지지 않은 날씨에 설사하니 기가 많이 상할 것인데.
하지만 노상추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아들 익엽은 과거시험을 보러 가기 위해 도보로 길을 떠나 시험장이 있는 하동(河東)으로 갔다. 성치 않은 몸으로 먼 길을 가니 마음이 아프다. 사위 류자일(柳自一)도 이번에 과거시험을 본다고 거창(居昌)의 시험장으로 갔다. 아들이든 사위든 성과는 고사하고 몸이나 성했으면 좋을 터이다. 한참을 앓던 정엽은 그래도 차차 나아지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노상추는 추석이 한참 지난 뒤임에도 불구하고 정엽을 이끌고 가묘(家廟)로 가서 늦은 차례를 지냈다. 미룰 수는 있으나 빼먹어서는 안 되지.

조상을 기리며 성묘를 하다 테마스토리 이동

1631년 3월 4일, 김광계(金光繼)는 제사와 성묘를 지내기 위해 셋째 아우 김광악(金光岳)과 함께 능동재사(陵洞齋舍)에 도착해 머물고 있었다. 다음날 뒤늦게 김광악의 맏아들 김장(金䂻)이 능동재사에 도착했다. 김광계는 김광악, 김장과 함께 제사 준비를 마치고는 저물었을 때 함께 제사를 지냈다. 제사를 마친 후 김광계는 아우·조카와 함께 고조할아버지와 아버지를 기리며 선조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3월 6일은 청명(淸明)으로 3월절(三月節)이었다. 예로부터 청명이나 한식은 산소를 돌보기 좋은 날이라 여겨져 김광계는 아우·조카와 함께 광산 김씨 예안파 선대 묘소가 있는 거인(居仁)에 가서 제사를 지냈다. 돌아올 때 이문보(李文甫)와 그의 맏아들 이지원(李之垣)을 잠깐 만나 보았다. 김광계는 거인에 갈 때마다 종종 이문보를 만났는데 이번에도 겸사겸사 만나니 반가웠다.

다음날 3월 7일 김광계는 아우·조카들과 함께 명암동(鳴巖洞)에 가서 성묘하였다. 김광계는 돌아가신 조부모를 떠올리자 슬퍼졌다. 조부모가 돌아가신지 한참 되었지만 그 아픔은 여전해 먹먹한 가슴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3월 8일 김광계는 집에서 푹 쉬며 제사를 지내고 성묘를 다니며 피로해진 몸을 회복시켰다.

단오를 맞아 시사를 지내고 성묘를 하다 테마스토리 이동

1631년 5월 1일, 비가 내렸다가 금세 갰다. 김광계(金光繼)는 오늘 비가 적게 와서 내일 산소에 가는 일정에 별 문제가 없을 것 같아 안심했으나 한편으로는 오래도록 가물다가 온 비이기에 금세 갠 것이 아쉬웠다. 5월 2일 김광계는 단오를 며칠 앞두고 아우·조카들과 함께 선대 묘소가 있는 거인(居仁) 산소에 가서 성묘하였다. 김광계는 지나는 길에 재종숙 김령(金坽)을 뵙고, 재종질 김확(金確)을 만나 보았다. 다음날 5월 4일 김광계는 할아버지 산소가 있는 지례(知禮) 산소에 가서 묘사를 지냈다. 올해 5월 5일 단오날은 무인일이었는데, 민간의 금기 때문에 제사를 지낼 수 없었다. 그래서 김광계는 다음날 시사(時祀)를 지냈다. 김광계의 아우·조카들이 제사를 지낼 준비를 도왔다. 동네 친지들은 모두 연고가 있어서 참석하지 않았다. 오후에 김광계는 남여(南旀)에서 온 매부 박회무(朴檜茂) 형과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로 미룬 제사의 역할 분담, 사돈의 몫까지 필요하다 테마스토리 이동

1623년 3월 5일, 돌림병 덕에 지내지 못한 한식제(寒食祭)양정당(養正堂)에 가서 지내기로 한 날이었다. 이번 제사는 하동댁(河東宅)이 준비할 차례였다. 아홉 사람이 참석한 가운데, 오후에 지방을 써서 제사를 지냈다.
또 다른 절제(節祭)가 이 날 겹쳤기 때문에, 김령은 자신이 양정당에 가있는 동안 아들 요형에게 집에서 절제를 지내도록 하였다. 김령은 한식제를 지내고 음복 후에 집으로 돌아왔다. 이미 밤이 되었다.
이날 배소(拜掃)가공(加供)하는 것은 온계(溫溪)의 이댁(李宅)과 임지경(任之敬)의 차례였는데, 서로 미루고 하지 않았다. 심지어 가공을 빠뜨리기까지 하였는데, 김령은 이러한 상황이 매우 못마땅하였다.

아내의 산소에서 절구를 읊다 테마스토리 이동

1740년 11월 4일, 맑은 날씨였다. 최흥원은 최근 며칠간 안동의 하회마을을 들렀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얼마 전 동짓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성묘를 하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던 최흥원은 집으로 가는 길에 성묘를 하고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오늘은 신녕 고을에서 아침 일찍 밥을 먹은 뒤에 동행하던 정여휘와 헤어졌다. 이후 능성 길을 따라 백안 마을에 당도하여 말먹이를 먹였다. 이윽고 광동의 선산에 이르러 조상들의 묘에 성묘하였다. 조상들의 묘를 살핀 이후 최흥원은 옆에 있는 아내의 묘로 발길을 옮겼다.
올해 만든 산소에는 아직 풀들이 자라지 않아 듬성듬성 붉은 흙이 보이고 있었다. 아내의 산소를 마주하자, 지난날의 추억이 떠올라 감정을 주체하기가 어려워졌다. 눈시울을 붉히던 최흥원은 아내의 묘소 옆에 걸터 앉아 절구 한 수를 지었다.

묵은 손이 집에 돌아오는 날 舊客歸家日
기쁘게 맞아줄 이 하나 줄었네 欣迎少一人
새 무덤에 올라 한바탕 곡을 하니 新墳來一哭
옛날의 정신을 마주 본 듯하네 如見舊精神

한참을 시간을 보내며 아내와의 추억을 생각하던 최흥원은 어스름한 저녁에 이르러서야 집에 도착하였다. 어머니의 환후가 그동안 더해지지 않아 다행이었다. 최흥원은 아내의 묘소에서 떠올리던 추억을 생각하며, 오랜만에 집에서 잠자리에 들었다.

친구 윤식을 만나보다 테마스토리 이동

1711년 8월 16일. 오늘 엄경수는 옛 친구 윤식을 만났다. 윤식의 선산도 엄경수 집안과 같이 장단 지역에 있었는데, 마침 윤식도 성묘를 왔다가 엄경수가 이곳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만나기 위해 달려온 것이다. 어찌나 급히 왔던지 아직 아침밥도 먹기 전인데 도착하였다. 두 친구는 웃으며 안부를 묻고는, 같이 아침 밥상을 받았다. 그리곤 종일 함께 밀린 이야기를 나누며 저녁 무렵까지 함께 있었다.
이 윤식이란 친구는 스물다섯 나이에 과거에 합격하였는데, 글을 잘 지어 깨우쳐 주는 바가 많았다. 사람됨이 단아하고 자상하여 매우 사랑스러운 성격이었다. 교하현감을 지내다가 파직되어 집으로 돌아간 후 약 일 년간을 관직에 제수되지 못하였다. 근래 노론이니 소론이니 하는 당론이 날로 심해져서 못나고 어리석고 무식한 자들을 모두 사헌부나 사간원 같은 요직에 앉히고, 윤식과 같은 훌륭한 사람들은 이력이 부족하다고 핑계를 대며 관직을 제수하지도 않으니 참으로 딱한 노릇이었다.
엄경수는 울분에 차서 이런 마음을 윤식에게 표현하였다. 세도가 땅에 떨어졌다고 한탄하니, 윤식은 가만히 웃으며 엄경수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참으로 훌륭한 성품이라 할 만하였다.

종에게 민망한 엄경수 테마스토리 이동

1710년 8월 8일. 엄경수는 장단현에 있는 아버지의 산소로 성묘 가는 길이었다. 파주를 지나 강을 건너고 이제 조금만 가면 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곳이었다. 강을 건너자마자 길을 물으니 길 가던 사람이 산 쪽을 가리키며 ‘이쪽으로 향하면 도념리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또 등 뒤로 한 길을 가리키며 ‘이 길로 향하면 세곡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야기를 들은 엄경수는 산 쪽으로 향하자고 했는데, 종 하나가 반대하고 나섰다. 산길이 지름길인 듯하나 그 사실은 알 수가 없으니 우선 평지로 가자는 것이었다. 그러자 엄경수는 엄격한 표정을 지으며 산 쪽으로 가라고 종용하였다.
산길은 무척 험하였다. 위험한 벼랑을 지나고 덤불진 풀 구덩이를 뚫고 가야 했다. 길은 끝이 없는데, 벌써 산속의 해는 지려고 하였다. 그때 한 늙은이가 소를 끌고 지나가기에 도념촌이 얼마나 먼지, 이 길로 가면 되는지를 물어보았다. 그러자 늙은이가 탄식하며 말하기를 “평지 갈림길에서 멀지 않은데 어째서 둘러오고 치우친 곳으로 들어왔습니까. 앞길에 가득 찬 가시밭길을 어떻게 뚫고 가시겠소?”라고 대답하였다. 그리곤 한쪽 봉우리를 알려주며 저곳을 지나면 고갯길이 있는데, 그 길을 따라 산에서 내려가면 도념촌으로 가는 길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부터 종은 불평 섞인 말을 자주 내뱉었다. 평소 같으면 불호령을 내리겠으나, 엄경수는 그럴 수가 없었다. 종의 말을 들었더라면 이 고생을 하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심지어 엄경수는 산길을 헤쳐 가면서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종에게는 한마디도 고통스럽다는 뜻을 내비치지 않았다. 아! 앞서서 종의 말을 들었더라면……. 엄경수는 황혼 무렵에야 아버지의 묘소에 당도하여 후회의 한숨을 내쉬었다.

장단으로 성묫길을 나서다 테마스토리 이동

1710년 8월 8일. 바람이 불고 추워서 오싹오싹한 날씨였다. 며칠 후면 추석이라 엄경수는 장단의 아버지 묘소로 성묫길을 나섰다. 말 한 필과 두 하인 응선과 어둔이 길동무였다.
길을 나서 모화관에 당도하니 한창 무과 시험이 펼쳐지고 있었다. 보통 주상께서 무예를 열람하는 관무재는 창덕궁 후원에서 시행되는 것이지만, 각 군문의 모든 장수와 사졸들의 수가 매우 많고, 기예마다 시험하여 재주 있는 사람을 뽑는 것을 일일이 주상께서는 직접 열람하시기가 어려웠다. 그리하여 관원들을 이곳에 보내어 재주를 시험하고 사람을 뽑으라 명하셨다고 한다.
모화관을 지나 교하 고을에 당도하였다. 현감인 윤식을 만나 구석진 곳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졌다. 윤사고가 말하길, 임진강 상류 진목정 주변에 살 만한 터가 있다고 하면서, 엄경수 더러 가는 길에 들러 지세가 어떠한지 살펴봐달라고 부탁하였다. 이야기를 나눈 후 헤어져 다시 길을 나서니 저물녘이 되어서 벽제역 주막에 당도하였다.
당도한 주막집은 수재를 막 겪고 난 이후라 막아줄 가림막이 없어 휑했다. 바람이 많고 밤기운이 오싹오싹한 날씨여서 견디기가 어려웠다. 주막집 주인에게 자리를 청하여 겨우 둘레를 막아 가리고 따뜻한 기운을 빌어 잠이 어설피 들었다. 그러나 자는 도중 여러 차례 깨어나서 잠자리가 편치 않았다. 결국 엄경수는 날이 밝기를 뜬눈으로 기다렸다가 새벽부터 서둘러 길을 나섰다. 역시 집만큼 편안한 곳은 없기 마련이었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그리움 테마스토리 이동

얼마만의 고향땅인가. 관직에 매여 있느라 동생이 죽었어도 올 수가 없었다. 노상추는 외조부모의 묘에 성묘하고 여러 친지를 만나 인사했다. 청련암(靑蓮庵)에 들어가자 동생 노상근의 아들 기엽(箕燁)이 노상추를 맞았다. 두 사람은 함께 성묘하러 가기로 약속했었다. 노상추는 몇 줄의 제문을 급히 쓰고, 기엽은 닭과 과일, 술을 챙겼다. 노상추는 동생의 묘 앞에서 곡하고 술을 올렸다. 만사가 끝났으니 슬퍼한들 어쩌겠는가.
청련암에서 밤을 보낸 노상추는 아침에 다시 노상근의 묘를 찾았다. 찬찬히 둘러보니 묘소 근처의 소나무가 너무 많아서 베어내야 할 것 같았다. 이대로 두면 소나무 뿌리가 묘를 상하게 할 것이다. 묘 주위를 둘러보던 노상추의 시선이 말없이 묘 앞에 선 조카의 모습에 머물렀다. 아우의 모습은 사라졌고, 남겨진 고아의 모습이 차마 말할 수 없이 애잔하다. 노상추는 기엽과 함께 아우의 집 체악당(棣樂堂)으로 돌아왔다. 집에도 아우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뜰 앞의 화초에는 아우가 직접 심은 자취가 남아 있었다. 언젠가 형제가 함께 즐기자며 운치 있게 꾸민 뜰에 한 사람만 앉아 있으니, 즐기자는 ‘악(樂)’이란 한 글자가 허망하게 되었다.
조카를 데려다주고 노상추는 자신의 집 서산와(西山窩)로 돌아왔다. 형제가 위 아랫집에 함께 살자며 체악당과 딱 붙여 지은 집이다. 멀리 동쪽 봉우리를 바라보니, 마치 아우와 함께 있는 듯했다. 노상추는 그만 큰 소리로 통곡하고 말았다. 몸의 절반이 끊어지는 듯한 아픔이며 종신토록 사라지지 않을 슬픔이다.
며칠간 서산와에서 홀로 생활하다 보니 아우의 부재가 절절히 느껴진다. 뜰에 가득한 화초는 붉은 꽃과 푸른 잎이 서로 어우러졌고, 이것들을 기른 아우의 손길이 마치 어제 일인 양 뚜렷이 느껴진다. 하지만 같이 즐기지 못함에 그만 슬픈 마음만 가득해진다. 슬픔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고 서울 집에서 아우의 부고를 들었던 날과 다름이 없다. 곡을 해도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없으니 눈물만 절로 잔에 가득 떨어진다. 만일 아우가 올해까지 살았더라면 훈련원 주부가 되었을 것인데, 조물주가 시기하여 수명이 여기에서 그치게 되었다. 옛말에 선한 사람은 복을 받아 장수한다던데 그 말은 다 헛말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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