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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의 일기, 한 편의 영화를 만나다 13 곧은 명재상 정탁,
<모두가 왕의 부하들>의 윌리 스탁을 꾸짖다.

하원준

야설(夜雪)
답설야중거(踏雪夜中去)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불수호란행(不須胡亂行) 함부로 걷지 마라.
금일아행적(今日我行蹟)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국은
수작후인정(遂作後人程)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이 글을 읽는 많은 분들께서 이미 아실 수도 있으시겠지만, 백범 김구 선생께서는 1948년 남북협상 길에 38선을 넘으면서 서산대사의 선시인 야설(夜雪)을 읊으셨다고 합니다. 백범 선생께서는 야설(夜雪)의 시구 속에서 자신의 행동에 대의가 사라지는 것을 경계하고, 태도의 엄중함을 결의하는 큰 마음을 찾고자 하셨던 것 같습니다. 저는 지도자로써 곧은 자세를 스스로 잡아야한다는 큰 결심을 하며, 사선을 넘었을 백범 선생을 떠올려보니, 숙연함과 함께 솟구치는 존경심을 애써 감추기 어렵습니다. 더불어 백범 선생의 결의와도 같이, 지금 우리에게 올바른 족적을 보여줘야 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생각해봅니다. 그들은 바로 우리나라를 이끌어가는 고위 공직자들과 국민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은 국회의원을 비롯한 정치인들이겠지요. 그 분들이 국민을 위해 솔선수범하는 자세를 잃지 않기를 진심으로 소망해보며, 이번 <선인의 일기, 한 편의 영화를 만나다>의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이번 호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전장에 나아가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목숨이 경각에 처한 이순신(李舜臣)을 위해 신구차(伸救箚)를 선조에게 올린 정탁의 삶과 영화 <모두가 왕의 부하들>에서 잘못된 권력을 남용하여 탄핵 위기에 처한 주지사 윌리 스탁의 삶을 비교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곧은 명재상 정탁, <모두가 왕의 부하들>의 윌리 스탁을 꾸짖다.

조선 중기의 재상인 정탁(鄭琢, 1526년~1605년)은 본관이 청주이며, 자는 자정(子精). 호는 약포(藥圃)로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는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과 함께 퇴계 이황의 제자이며, 그의 향리인 예천군 예천읍 고평동은 류성룡의 고향인 안동군 풍천면 하회동의 인근이기도 합니다. 퇴계의 곁에서 깊은 학문의 본질과 참된 뜻을 배운 정탁은 정통 성리학 뿐 아니라, 다양한 학문을 섭렵하였고, 팔진육화등법(八陣六花等法)을 깊이 연구한 덕분에 병학분야에서도 식견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는 퇴계 선생으로부터 심오한 학문과 인(仁)의 요체를 바로 배운 탓으로 사생활 등 사소한 문제에 있어서도 언제나 너그러웠다고 합니다.

명재상 정탁 명재상 정탁

또한, 초기 관직 생활 시절부터 퇴계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순전(純全)한 마음을 행동으로 옮겼기에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품성을 지닌 인물로 인식되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처음 문과에 급제한 정탁은 자신의 출중한 능력에 비해 하대 받은 자리라 할 수도 있는 교서관(경서의 인쇄나 교정 등을 맡아보던 곳)의 교리로 임명되었음에도, 맡은 소임을 다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례로 수렴청정으로 그 위세가 하늘을 찌를 듯 당당했던 문정왕후가 불공을 드리기 위해 교서관의 향을 가져오게 했지만, 향실의 숙직을 담당하고 있던 그는 종묘사직의 제사가 아니라면 교서관의 향은 궁외로 내보낼 수 없다는 분명한 이유를 들어 거절하였다고 합니다. 결국, 화가 난 문정왕후는 정탁을 엄하게 다스렸으나, 오히려 그는 이 사건으로 관료가 지녀야 할 곧은 업무 수행 능력을 행동으로 보여주게 되었고, 이후 그를 지켜본 주변인들의 좋은 평판을 바탕으로 여러 관직에 오르게 됩니다. 세 번의 이조판서, 여덟 번의 대사헌에 임명된 것은 그의 인품을 평가하는데 있어서는 당연한 결과일 것입니다. 그만큼 그는 큰 인물이었습니다. 그 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정탁은 선조를 호송하며 약 9개월간의 피난일기인 <피난행록>를 기록하게 됩니다. 선조의 몽진, 왕가의 피난, 관료인사들의 동향, 전쟁의 상황 등을 담담하게 묘사한 <피난행록>에는 아버지를 대신해 나라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왕세자 광해군의 행적도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1597년, 정탁은 그의 일생일대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는 공적을 남기게 됩니다. 바로 한산도에서 한양으로 압송되어 목숨이 경각에 처한 이순신을 변호하는 1298글자의 신구차(伸救箚-목숨을 구하는 것을 아뢰는 상소문)를 올리게 된 것이지요.

명재상 정탁 명재상 정탁

이때, 정탁은 선조의 체면을 최대한 살리면서도 전쟁의 국면을 바꾸기 위해 꼭 살려야만 했던 이순신의 목숨을 건지기 위해 노련한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지요. 신구차에 그러한 수완이 잘 기록되어있습니다. 잠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의정 정탁은 엎드려 아룁니다. 이모(李某)는 몸소 큰 죄를 지어 죄명조차 무겁건마는 성상(聖上)께서는 얼른 극형을 내리시지 않으시고 문초하시다가 그 뒤에야 엄격히 추궁하도록 허락하시니, 이는 다만 감옥 일을 다스리는 체모와 순서만으로 그러심이 아니라, 실상은 성상께서 인(仁)을 베푸시는 한 가닥 생각으로 기어이 그 진상을 밝힘으로써 혹시나 살릴 수 있는 길을 찾으시고자 바라심에서 하심이라, 성상의 호생(好生)하시는 뜻이 자못 죄를 짓고 죽을 자리에 놓인 자에게까지 미치시므로 신은 이에 감격함을 이길 길이 없습니다.
(중략)
이제 이모는 사형을 받을 중죄를 지었으므로 죄명조차 극히 엄중함은 진실로 성상의 말씀과 같습니다. 이모도 또한 공론이 지극히 엄중하고 형벌 또한 무서워 생명을 보전할 가망이 없는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비옵건대 은혜로운 하명으로써 문초를 덜어 주셔서 그로 하여금 공로를 세워 스스로 보람 있게 하시면, 성상의 은혜를 천지부모와 같이 받들어 목숨을 걸고 갚으려는 마음이 반드시 저 명실 장군만 못지않을 것입니다.

이처럼 정탁은 신구차의 시작 부분과 끝 부분에 선조의 분노를 진심으로 이해한다는 마음을 담았고, 이를 통해 절대 권력자인 선조를 달래려 애썼던 것입니다. 이에 이순신을 처형하라는 전교를 내렸던 선조는 72세의 원로대신 정탁의 다독이는 호소를 내치지 못하고, 이순신을 복권하게 되지요. 결국, 이순신을 발탁한 사람이 류성룡이었다면, 죽음 직전에 놓인 이순신을 살려낸 사람은 정탁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후,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 이순신은 하옥 28일 만에 풀려나게 되고, 백의종군하여 명량해전을 큰 승리로 이끌게 되는 것입니다.

정리해보자면, 국가의 위기 앞에서 정탁은 무엇이 가장 중요한 대의이고, 실리인지, 그리고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는 길인지를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학문 속에 담긴 의미를 직접 실천으로 옮긴 인물이며, 도덕성과 능력을 지닌 인재를 등용하는데 있어서 최고의 전문가였습니다. 정탁이야말로 오늘날, 관료들과 정치인들에게 필요한 새로운 인재등용과 구국제민의 뜻을 일깨워주는 예천 용문면 버들판의 명재상이었던 것이지요. 2015년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인물이 바로 정탁 같은 인물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정탁과 달리, 로버트 로센 감독의 1949년 영화 <모두가 왕의 부하들>에 등장하는 윌리 스탁은 어떤 사람일까요? 결과부터 이야기하자면, 그는 정의로웠던 초심을 잃고 타락하고, 불의와 부조리의 삶을 살다가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한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먼저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영화의 줄거리를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모두가 왕의 부하들 모두가 왕의 부하들

평범하지만 정직하게 살려고 애쓰는 재무관 윌리 스탁(Willie Stark: 브로데릭 크로포드 분)은 부패한 마을의 관리들에 맞서 정직한 정치를 하기 위해 정치계에 발을 들여놓습니다. 그리고 명문가의 계부를 둔 신문사 기자 잭 버든(Jack Burden: 존 아일랜드 분)은 편집부장의 명령을 받고 윌리를 취재하다가 정의롭고 열성적인 그의 의지를 확인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와 친분이 깊어지게 되지요. 주지사 선거에 나간 윌리는 학교 건립과 관련하여 관리들의 부정한 행위가 있었음을 마을 사람들에게 알리려 하지만 결국 선거에서는 패배하고 맙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 소방훈련 과정에서 학교가 무너져 어린 아이들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고, 이 사고를 계기로 마을 사람들은 뒤늦게 윌리의 말이 사실임을 알게 되고, 그를 신뢰하게 됩니다. 그리고 윌리 스탁은 마을 사람들의 지지를 얻어 다음 주지사 선거에 압도적은 차이로 당선되지요.

모두가 왕의 부하들 모두가 왕의 부하들 모두가 왕의 부하들 모두가 왕의 부하들

하지만, 선거에 맛을 들였던 윌리 스탁은 그때부터 부적절한 돈으로 선거를 치르게 되고, 이는 곧 부메랑으로 윌리에게 악영향을 전해줍니다. 윌리는 악으로부터 선이 발생한다는 궤변을 바탕으로 타락하고, 부조리한 사람으로 전락해갑니다. 그에게 정의는 사라지고, 자리를 영원히 지키고 싶은 마음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그는 많은 공약들을 내세우며 그것을 이루기 위해 더러운 정계와 결탁하고 물들어갑니다.

모두가 왕의 부하들 모두가 왕의 부하들

그 후 윌리는 잭이 어린 시절부터 흠모하던 앤(Anne Stanton: 조안느 드루 분)과 불륜의 관계로까지 발전하게 되고, 여러 가지 부당한 방법을 이용하여 정치 공약들을 실행합니다. 주변 사람들은 윌리의 이런 모습에 실망하고 그를 외면하기 시작합니다. 그런 가운데 아들 톰(Tom Stark: 존 데렉 분)이 음주운전으로 사고를 내어 결국 동승했던 여자 친구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윌리는 여자 친구의 아버지를 매수하려다, 이에 실패하자 부하에게 사주하여 그를 살해하고 암매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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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사건은 발각되고 윌리는 정치 생명의 위기를 맞게 됩니다. 그는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약점을 찾으려고 혈안이 됩니다. 결국 잭이 존경하는 판사(Judge Stanton: 레이몬드 그린리프 분)의 과거를 들추어내고, 이로 인해 코너에 몰린 판사는 끝내 자살을 하고 맙니다. 비정할 대로 비정해진 윌리는 앤마저 버리고 청문회에서도 당당하게 승리합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앤의 오빠는 동생을 농락하고, 자신마저 병원 건립을 이유로 이용한 윌리 스탁을 암살하고, 경호원의 총탄에 숨지게 됩니다.

모두가 왕의 부하들 모두가 왕의 부하들

윌리 스탁은 죽음의 순간에도 잭에게 뇌까리며 항변합니다. ‘세상을 거머쥘 수 있었다고...’ 그렇게 윌리 스탁의 반성 없는 죽음을 남긴 채, 영화는 씁쓸하게 끝납니다.

모두가 왕의 부하들 모두가 왕의 부하들

윌리 스탁을 통해 우리는 정치개혁을 꿈꾸었지만, 권력의 획득 이후, 정작 자신의 개혁을 이루지 못한 위선자를 적나라하게 목격하게 됩니다. 권력은 달콤한 사과이나, 그 사과를 따게 되면 탐욕의 뱀에게 물리게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윌리 스탁은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스스로 뱀에게 물리는 꼴이 되어버리지요. 정치영화는 보통 시련 속에서도 정의를 잃지 않는 인물을 다루거나, 탐욕과 권력의 종말을 보여주는 비극적인 인물을 다루기도 합니다. 이전에 한 번 소개를 했던 프랑크 카프라 감독의 <미스터 스미스, 워싱턴 가다>가 전자에 해당되는 영화라면, <모두가 왕의 부하들>은 후자에 해당되는 영화라 할 수 있습니다. <모두가 왕의 부하들>의 주인공 윌리 스탁은 미국의 정치인이며, 루이지애나 주의 주지사인 휴이 피어스 롱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캐릭터로 알려져 있습니다. 휴이 피어스 롱은 프랭크린 D. 루즈벨트의 뒤를 이을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떠올랐지만, 1936면 루이지애나 주 의회 건물에서 암살당했다고 합니다. 급진적이고 진보주의자였던 휴이 피어스 롱의 모토가 바로 <모든 사람이 왕(Every Man a King)>이었습니다. 그런 롱의 모토를 뒤집은 것이 바로 <모두가 왕의 부하들(All the King's Men)>이었던 것이지요.

영화 속에서 윌리 스탁은 자신을 뽑아준 모든 사람을 '왕의 부하'로 만듭니다. 자신이 만든 왕국을 지키고자 시민들에게 각종 선심성 선물을 안겨줍니다. 대책 없이 건설된 도로와 다리들, 그리고, 각종 비리와 이권 쟁탈로 얼룩진 병원 건설까지...

모두가 왕의 부하들 모두가 왕의 부하들

윌리 스탁은 그가 주지사가 될 수 있었던 비극적인 학교 붕괴 사고의 원인과 다를 바 없는 일을 서슴지 않으며 시민들의 눈을 멀게 합니다. 아니, 이전의 어떤 정치인보다 더 혹독하게 시민들을 부하로 만들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그리고 그의 곁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윌리 스탁의 행동을 막지 못하며, 막으려 들지 않습니다. 권력자의 눈치나 보며, 자리보전만을 일삼는 사람들의 모습은 전혀 남의 이야기가 아닌 듯합니다.

저는 조선의 정탁이 루이지애나 주지사 윌리 스탁의 곁에 있었다면, 윌리 스탁을 크게 꾸짖었을 것이라 확신해봅니다. 아마도 그는 신구차에서 선조를 달래는 글과 달리 단도처럼 날카롭게 윌리 스탁의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드러냈을 것입니다. 저는 정탁의 삶을 살펴보며 그렇게 믿게 되었습니다. 위정자의 바른 길을 알고 있던 정탁의 호통을 마지막으로 <선인의 일기, 한편의 영화를 만나다>의 이번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모두가 왕의 부하들

“이보게! 윌리! 정신 차리고 내 말 잘 듣기 바라네! 처음부터 악을 끝까지 행하는 자보다 더 악한 자는 선에서 출발하여 악으로 끝나는 자일세! 바로 자네, 윌리 스탁이 그런 사람이야! 처음부터 탐욕과 위선과 부정을 지닌 정치인에게 시민들은 어떤 것도 기대하지 않지. 하지만, 자네처럼 빈곤한 시민의 고통을 내심 이해했던 자가 뱀 같은 권력을 획득한 이후, 끝없이 변질되어가는 것은 큰 실망과 낙담, 그리고 씻을 수 없는 역사의 후퇴만을 이끌어내지! 자네는 부와 권력이 얼마나 허무하고 덧없음을 스스로 반성하고 깨닫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어! 그런 두려움이 자네를 스스로 타락시킨 것이야! 지금이라도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권력의 가면을 벗고, 루이지애나의 흙먼지를 얼굴에 뒤집어쓰게! 자네를 믿고 따랐던 가난한 농부의 발걸음에서 휘날리는 먼지를 말이야! 그것만이 자네에게 영광을 안겨 줄 것이니...”

작가소개

하원준
하원준
서울예술대학교와 추계예술대학원을 졸업했으며, 현재 영화시나리오 작가, 영화감독, 그리고 대학에서 겸임교원으로 활동 중이다.
주요 작품으로는 <두사부일체> <그녀를 모르면 간첩> <뜨거운 안녕> <렛미 아웃>
<들개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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