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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진정한 승부란?

진영기


아쉽게도 승부에 세계에서는 누군가는 항상 이기고 누군가는 패배합니다. 때론 승복할 수 없는 일방적인 승부도 있지만, 막상막하의 승부의 승자는 승리의 기쁨과 감동적인 스토리로 남아 사람들에게 기억됩니다. 우리의 삶도 스포츠라는 규칙 안에서 경기 점수로 선수를 평가하듯이 사회라는 법규 안에서 매출, 수익률에 따라 회사를 평가하고 학생들은 시험성적으로 자신의 진로와 적성을 파악하기도 합니다.

이번 담談의 주제인 “승부(勝負): 이김과 짐”을 보며 “우리는 삶 속에서 매번 다른 승부를 겨루며 살아가는 삶이 아닌가?” 생각하였습니다. 달리 이야기하면, 우리의 긴 생애에서 승부라는 것은 눈앞에 보이는 단순한 목표라는 것이지요. 단편적으로 고등학생들은 수능시험, 취준생은 취업, 회사에서는 승진… 살다 보면 넘어야 할 산들이 많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승부로 보고 매번 자신과 싸움을 시작하지요. 때론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것을 이루진 못했지만, 그 순간이 계기가 되어 다시 잘되는 것을 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학문을 중시하던 조선 시대에는 어떠한 승부를 즐겼을까 해서 선조들의 일기를 찾아보던 중 조보양이 쓴 골동록(汨董錄)에서 기억력을 가지고 대결을 벌이는 재미난 이야기를 보게 되었습니다.

김계광(金啓光)과 홍여하(洪汝河)는
모두 어릴 때부터 재주와 학식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품격까지 있었다.
1650년대 어느 날, 홍여하가 우연히 객점(客店)에서 김계광을 만났다.
홍여하는 누구의 두뇌가 더 명석한지 시험을 해 보고 싶었다.
“김공(金公), 자네는 기억력이 매우 뛰어나다지. 책을 한 번 보면 다 외운다고 들었네.”
“하찮은 재주일 뿐이라네.”
홍여하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김계광이 마땅치 않아 보였다.
홍여하는 망설이지 않고 내기를 제안하였다.

둘은 객점 안에서 책을 각자 한 권씩 가지고 두세 식경만에 책 읽기를 마쳤다.

김계광이 의서를 소리 내어 외우기 시작하였고 처음부터 끝까지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유수장창 읊어댔다. 홍여하 역시 소리 내어 외우기 시작하였으나 외우는 과정에 뜨문뜨문 더듬거리기도 하고 잠시 동안 말문이 막히기도 하였다. 이는 홍여하의 완패였다.

끝나자 둘은 승패에 관한 언급은 하지 않고 격식을 차리고서는 헤어졌다.

1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김계광과 홍여하는 우연히 만나 서로 다시 한 번 그 당시의 외웠던 것을 다시 외워 보자 하였지만, 김계광은 그때 외웠던 것을 완전히 잊어버려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고, 홍여하는 10년 전에 읽었던 것을 모조리 외웠다.

이 이야기에서 진정한 승자는 누구일까요? 어떤 관점에서 보는가에 따라서 홍여하의 승리라는 사람도 있고 당연히 김계광의 승리라고 하는 사람도 있을 거라 생각이 듭니다. 홍여하는 패배를 인정하고 다시 도약을 위해 다시 올라왔을 수도 있고 김계광은 일종의 게임이라 생각하고 자신이 기억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 10년 전의 승부는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되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추측하였습니다.


막상막하의 기억력
조보양, 골동록

전 여기서 승부의 다른 모습을 보았습니다. 승부의 시작은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라는 것이지요. 홍여하는 이기고자 하는 열망과 자신의 실력을 테스트하고픈 자신감이 승부의 시작이라는 사실이라는 것이지요. 결과는 홍여하의 완패로 결정이 났지만, 상상하건대 10년 후 대결에서도 잊지 못할 암기를 했다면 김계광의 페이스에 말려서 더듬었거나 긴장해서 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순간의 실수로 혹은 승부에서 페이스 조절을 잘 못 해서 망가지는 경우랄지, 열심히 준비했는데 시험장에서 너무 떨려서 말을 잘 못 하는 경우랄지, 사람들 앞에서 주눅이 든다든지 하는 우리 삶에서 이러한 경우를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2011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더반에서 벌어진 IOC 총회에서 진행된 동계올림픽 유치 경쟁에서 우리나라가 세계 유수의 도시 독일(뮌헨)과 프랑스(안시)를 제치고 아시아로는 두 번째로 동계올림픽을 유치하였습니다. 이 승부는 두 번의 유치 실패의 좌절이 밑거름 되었고 세 번째 도전에서 국가, 선수, 모든 국민이 하나가 되어 세계적으로 위상을 알릴 수 있을 만큼 저력과 자질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인정받은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어렵게 따낸 자격조차 인정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북한 선수단 참가로 인한 개막식 등 퇴장, 남북 아이스하키 단일팀 문제, 평양 올림픽 등의 정치적 공방으로 우리 사회를 갈라놓고 있습니다. 하나가 되어 치러야 할 이번 동계올림픽에 정치권과 미디어가 이념을 나누어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국민들에게 싸움을 부추기는 생각이 듭니다. 전 해외에서 보면 북한의 단일팀 참가로 인한 해외 언론들의 관심이 증폭되고 올림픽의 흥행의 척도인 광고수입에 있어서 많은 매출을 보입니다. 이와 반대로 우리나라는 오히려 선수들에게 피해자 프레임을 이용해 정치적인 색채를 씌워 혼란을 가중시킬 뿐만 아니라. 북한 응원단을 체제 선전의 도구라 호도하는 등 평화를 지향하는 올림픽 정신에 어긋나는 현재 상황이 매우 안타깝습니다.

“올림픽은 생계의 수단이 아니라 즐기기 위해 또는 건강이나 정신수양을 위한 스포츠 활동을 위하여 요구되는 기본적인 신체적·정신적 자질을 키우고, 스포츠를 통해 경쟁자 혹은 동료와의 올바른 경쟁과 상호 협력을 바탕으로 건강하고 평화로운 세계를 건설하는 데 이바지하며, 전 세계에 올림픽 정신을 널리 보급하여 국제친선을 도모하는 데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에 따라 올림픽대회에 참가하는 모든 선수는 국가·인종·종교·성별 등 어떠한 이유로도 차별받지 않고, 정치적 행위를 금지하며, 모든 참가자는 ‘이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참가하는 데 있다.’라는 올림픽 정신을 가장 소중히 지키고 존중하여야 합니다.”

올림픽 정신에서도 잘 드러나듯, 승부라는 것은 이김과 짐으로 나누어지는 이분법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전 세계 사람들이 승부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화합을 하는 자리라는 겁니다. 그러나 사회는 자격을 갖추는 것보다 승리라는 스펙을 쌓고 성공이라는 스토리를 원하는 욕망 앞에서는 패배자들에게 재기에 기회를 찾기 힘든 패배자 낙인을 주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그러다 보니 누군가를 이기고 지는 결과는 매 순간 치열한 경쟁의 삶 속에서 사는 현대인에게 한 사람을 평가하는 사회적 척도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승리를 위해 내 주변의 친구는 동료가 아닌 적으로 간주하고 화합이 아닌 넘어야 할 장애물이랄지 이분법적으로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의문이 듭니다. 이기고자 하는 욕망이 간절하고 커질수록 잘못된 선택과 방향으로 행동이 표출되지 않는가 생각이 듭니다. 그러기에 승부는 승패의 결과에 중점을 맞추기보다는 승부를 가릴 수 있는 자격과 자신감에서 바라보면 어떨지 생각해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2018 동계올림픽은 승부의 장이 펼쳐지는 흥미진진한 선수들의 스토리를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올림픽에 참여하는 우리 선수들은 그러기에 이미 승자라고 생각을 합니다. ‘올림픽 경기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과 컨디션을 유지하고 어떻게 지난 패배를 극복하는가?’가 선수들의 승부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대한민국은 어떠한 승부가 필요한가 생각하기 위해 지난 올림픽을 돌이켜보면, 88년 서울 하계올림픽은 “화합과 전진(Harmony and Progress)”이라는 모토로 우리나라를 하나로 만들었고 그러기에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2018년 지금의 우리의 과제는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 된 열정(Passion Connected)”이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은 모토이자 우리의 승부가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마치 20년 전의 화합과 전진이 하나로 연결되어 남과 북, 동과 서, 보수와 진보의 이념 갈등에서 벗어나 스포츠로 하나가 되어 올림픽 행사를 잘 마무리하자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의 신화를 끌어냈던 우리 선수와 국민들처럼 이번 동계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도록 응원과 관심을 보내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라 생각합니다. 승부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힘든 노력 끝에 출전권을 따낸 대한민국 대표선수들은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세계 정상을 향해 도전하며 대한민국의 놀라움을 보여주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세계인의 승부의 장을 즐기고 승자의 여유와 태도를 보여줄 수 있는 2018 평창 동계올림픽이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작가 소개

진영기 감독
진영기
뉴욕시립대학교에서 영화제작 공부를 했다. 2015년 귀국 이후 매체와 장르를 넘나들며 다양한 실험과 도전을 즐기고 있다. 대표작으로 영화 , 등이 있다. 영화 등 다수의 작품이 2015년 칸트영화제와 몬트리올 영화제, 2014년도 시티비젼 영화제 등에서 수상 및 상영 되었다.
“위기의 조선을 구할 최고의 궁사를 찾아라! - 정예병사를 얻기 위해 활쏘기 과거시험을 열다”


정탁, 피난행록,
1592-08-26 ~ 1592-08-27
1592년 8월 26일,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 이시언(李時言)과 서흥부사(瑞興府使) 남억(南嶷)으로부터 8월 23일 왜적들이 황해남도 용천(龍川)에서 황해북도 봉산(鳳山)으로 많은 수가 왔다는 상황보고가 잇달아 평안남도 성천의 분조(分朝)로 올라왔다. 이 지역은 평양과 가까운 곳이라 이 소식은 곧 평양에 왜적이 증원된다는 것이었다.
다음 날 8월 27일 평양의 적들을 정찰해 보니 병력이 증대된 흔적이 보였다. 또 시기는 이미 가을로 들고 비는 적게 와 강동(江東)의 여울들을 얕아지기 시작하였다. 이런 여울들에 장수를 정하여 방비하도록 하려 하였으나, 여울은 많고 군사들은 적었다. 또한 동궁(광해군)을 시위하는 일 역시 소홀히 할 수 없었다. 동궁과 신하들은 왜적들에게 밀릴 땐 밀리더라도 싸워 보고서나 밀리고자 하였다.
이에 분조의 신하들은 병사들을 더 뽑아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평안남도에서 징집한 병력들은 신하들의 눈에 군량만 축내는 나약한 군졸로 보였다. 신하들은 활을 잘 쏘는 정예의 병사들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모름지기 활을 잘 쏘는 정예의 병사들을 얻어야 공격도 하고 방어도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분조의 신하들은 이러한 병사들을 뽑는 방법은 과거(科擧) 밖에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과거의 과목과 방법은 활쏘기 단 하나였다. 활쏘기만 하여 가장 화살을 잘 쏜 사람은 직부전시(直赴殿試)하고, 그 다음 잘 쏜 사람들은 직부회시(直赴會試)하고, 그 다음 잘 쏜 사람들에게는 금군(禁軍)으로 제수하면 장정들이 팔을 걷어 올리고 찾아 올 것이다.
신하들은 행재소에 이러한 사실을 아뢰고 선조의 비답을 기다렸다.

“여러 장교들과 함께 교외로 나가 활쏘기 대회를 열어 시상하였다”


조재호, 영영일기, 1751-07-03 ~
1751년 7월 3일, 대구 경상감영에 도착하자마자 여러 가지 공무에 시달리던 조재호는 잠시 시간을 내어 대구읍성 밖에 있는 관덕당(觀德堂)으로 향하였다. 활쏘기라면 감영 내에 있는 제승당에서도 가능할 텐데 일부러 성 밖으로 나간 것이다. 여러 장교들로 하여금 과녁에 활을 쏘게 하여 우등한 사람을 뽑아서 차등을 두어 상을 주었다. 어디가든 인사를 드리러 오는 관리들이 있어서 판관(判官)과 영장(營將)이 문안하였다. 한가롭게 공무를 내팽개칠 수도 없는 법이니 공사소지도 결재하고. 황혼 무렵에야 돌아왔다.

“배를 타고 한산도 제승당에 가서 활쏘기를 하다”


조재호, 영영일기, 1751-09-20 ~
1751년 9월 20일, 맑음. 조재호는 통영(統營)에서 하룻밤을 묵은 후, 해가 뜰 무렵 전선(戰船)을 타고 한산도(閑山島) 제승당(制勝堂)에 가서 노닐면서 둘러보고 활쏘기를 하였다. 조재호 경상감사가 한산도에서 충무공의 자취는 남해 충렬사에서 떠올린 것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노량은 충무공이 순국한 자리이지만, 한산도는 한산대첩의 대승을 거둔 승리의 자리이다. 충무공의 자취가 어린 곳에서 활쏘기를 하며 호연지기를 함양하였다. 오후에 숙소로 돌아왔다. 통영(統營) 통제사(統制使)가 와서 알현하여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다.

“단오(端午)날에 씨름을 구경하다”


양경우, 역진연해군현잉입두류상쌍계신흥기행록, 1618-05-05 ~
1618년 5월 5일, 양경우(梁慶遇)는 이날 잠자리에서 일어나 식사를 한 후 길을 나서려고 하였다. 그런데 흥양(고흥의 옛 이름)의 수령인 박유귀(朴惟僮)가 와서 출발을 늦춰달라고 했다. 박유귀는 무관 출신의 수령이기는 하나 공부를 나름 하였던 사람이라 말이 통해서 예전부터 친하던 사이였다. 그가 말하길 “오늘은 오월 오일로 명절(단오(端午))입니다. 저희 고을에 비록 자랑할 만한 맛있는 음식은 없지만 어찌 공에게 하루 대접할 음식을 걱정할 정도겠습니까.”라고 했다. 양경우는 하루 더 머물기로 하였다.

문 밖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보니 사람들이 웃고 떠들고 있었다. 박유귀가 하인에게 문을 열라고 하였다. 그러니 고을 백성 백여 명이 마당으로 들어왔다. 박유귀가 자초지종을 설명해주었다. “이 고을에서는 단오 때 각저희(角觗戲 : 씨름)를 합니다. 그렇게 해온 전통이 오래되었습니다. 우리 고을을 방문한 손님께 보여드리기 위해 이렇게 자리를 마련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막상막하의 기억력”


조보양, 골동록, 미상
김계광(金啓光)과 홍여하(洪汝河)는 같이 영남에 사는 사람이었다. 단순히 알고 지내는 사람이 아니라 시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서로 학문적 경쟁을 하는 벗 사이였다. 두 사람은 모두 어릴 때부터 재주와 학식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품격까지 있었다.

김계광은 안동에 살았고, 홍여하는 문경에 살았다. 1650년대 어느 날, 홍여하가 우연히 객점(客店)에서 김계광을 만났다. 서로가 서로를 잘 알고 있었지만, 홍여하는 실질적으로 누구의 두뇌가 더 명석한지 시험을 해 보고 싶었다. 그런 홍여하가 김계광에게 말하였다.
“김공(金公), 자네는 기억력이 매우 뛰어나다지. 책을 한 번 보면 다 외운다고 들었네.”
김계광이 대답했다.
“하찮은 재주일 뿐이라네.”
홍여하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김계광이 마땅치 않아 보였다. 홍여하는 망설이지 않고 내기를 제안하였다.
“그렇다면 우리 당장 여기에서 겨루어 보는 것이 어떤가?”
“좋지.”
김계광이 대답하였다.

“누운 신선과 나는 신선 중 누가 나은가를 논란하다”


권상일, 청대일기,
1719-07-22 ~ 1719-07-24
1727년 가을, 유경시는 양양부사에 제수되었다. 서울에서 양양 임지로 가는 동안 유경시는 금강산을 들러보기로 하였다. 어려서는 안동 땅에서 나고 자라 멀리 가볼 기회가 없었고, 성년이 되어서는 관직 생활에 바빠 여가가 없어 가보지 못했던 곳이었다. 비장 신척과 더불어 금강산을 유람하고 양양으로 들어가기로 약속하였다. 낙산에 들러 비를 만나 하루를 묵으면서 날이 개기를 기다렸는데, 마침 다음날 비가 그쳐 금강산에 올랐다.
금강산 와선대(臥仙臺)에 오르니 개울 위에 평평한 바위가 마치 자리를 깔아놓은 듯 하였다. 그보다 조금 위에는 비선대(飛仙臺)라고 부르는 곳이 있었다. 계곡 위에는 돌이 있는데, 아주 깨끗한 돌들이지만 매우 위험해 보였다. 그 자리에 술자리를 벌리고 신척과 더불어 대화를 나누었다. 술기운에 절구도 하나 지어 읊었다.

閒臥黃堂是臥仙(한와황당시와선) 황당에 한가로이 누우면 와선 되고
如飛乘馹是飛仙(여비승일시비선) 말을 타고 날아가면 비선되느니
臺名偶符(대명우부) 누대 이름 우연히 부합하여서
同遊客子是飛仙(동유객자시비선) 나그네 예서 노니 비선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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