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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뒤흔든 誤報,
200년간 종계변무를 일으키다!

세상에서 가장 듣기 싫은 욕이 무엇일까? 아마도 십중팔구 부모님에 대한 욕을 꼽을 것이다. ‘패드립’, ‘탈룰라’와 같은 신조어는 이러한 사회적 인식을 반영한다. 그런데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을 나의 부모라고 우긴다면 어떻겠는가? 더군다나 그 사람이 부정ㆍ부패를 일삼다 적폐세력으로 내몰린 이라면 어떻겠는가? 지금 생각해도 피가 거꾸로 솟을 것 같은 일이 지금으로부터 600년도 전에 일어났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사건에 휘말린 주인공은 바로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였다. ‘효(孝)’가 지상 최대의 가치였던 시대에 한 나라 최고 지도자의 부모를 뒤바꿔버린 사건이 가짜 뉴스 때문이었다면, 그리고 이 문제가 해결되기까지 무려 200 년의 시간이 걸렸다면 믿어지는가? 뒤바뀐 부모를 되찾기 위한 조선의 싸움을 바로 ‘종계변무(宗系辨誣)’라 한다. 이제부터 그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가짜 뉴스의 시작



사실 이 문제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아니 오히려 매우 복잡한 국제적 사건이었다. 문제를 보다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조금 더 앞으로 돌릴 필요가 있다. 고려의 31대 왕이었던 공민왕(恭愍王, 재위: 1351~1374)이 즉위하였을 당시 중국을 지배하고 있던 것은 몽골이 세운 원(元)나라였다. 하지만 이 당시 원나라는 칭기즈칸이 세계를 호령하던 시절의 몽골이 아니었다. 이미 외부로의 팽창은 제동이 걸렸고, 중국 내부에서는 원에 저항하는 각종 저항 세력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어린 시절 원에서 성장하였던 공민왕은 즉위 후 이러한 국제 정세를 놓치지 않고 적극적인 반원정책(反元政策)을 펴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368년에 중국에서도 주원장(朱元璋, 재위: 1368~1398)이 남경(南京)에서 명(明)나라를 세우고 중국에서 원을 몰아내는데 성공하였다. 그렇게 세상은 새로운 시대를 향해 순조롭게 흘러가는 듯하였다.

고려와 명은 각자의 영역에서, 그리고 때로는 힘을 합쳐 원의 흔적을 지워나갔다. 하지만 모든 것이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었다. 고려에서 ‘반원친명(反元親明)’ 정책을 주도하던 공민왕이 시해당한 것이다. 공민왕의 뒤를 이어 우왕(禑王, 재위: 1374~1388)이 불과 10살의 나이로 즉위하자 모든 실권은 당대의 실력자 이인임(李仁任, ?~1388)에게 돌아갔다. 이인임은 당시 고려에 들어와 있던 명나라의 사신 채빈(蔡斌)이 ‘공민왕 시해사건’과 관련하여 본국에 불리한 보고를 할까 염려하여 사신을 살해하였다. 그리고 북쪽으로 쫓겨나서 중원의 회복을 도모하고 있던 원나라와 다시 동맹을 맺었다.

고려가 공동 전선에서 이탈하고 원나라와 우호적인 분위기를 형성하자 명나라는 고려를 경계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요동에 원나라의 잔여세력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는 고려를 직접적으로 견제할 수단이 없었다. 상황은 1387년에 급변하였다. 요동을 점령하고 있던 나하추[納哈出]가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명에 투항한 것이다. 요동 일대에서 우위를 확보한 명나라는 이듬해 고려를 압박하였다. 즉 원의 영토였던 철령 이북에 명나라 군사기지인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겠다고 통보한 것이다. 고려 측에서는 철령 이북 영토가 본래 고려의 영토였던 것을 원이 강탈한 것이었다며 항변하였지만 명에서는 요지부동이었다. 당시 고려에서는 최영(崔瑩)이 이인임을 몰아내고 최고 권력자로 군림하고 있었다. 백전노장이었던 최영은 명의 압박에 맞불을 놓으며 요동정벌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고려군을 이끌고 있던 이성계는 압록강을 건너기 직전 회군하였고 곧바로 개경을 점령하였다. 그 유명한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이다.


이성계가 나하추와 전투 시 탔다고 전해지는 황운골(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이성계는 정권을 장악하자 우왕을 폐위시키고 창왕과 공양왕을 계속해서 추대하였다. 명의 입장에서는 이성계가 ‘친명’을 내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개입하지 않고 사태를 관망하였다. 한편 이성계 일파가 권력을 잡자 고려 내부에서는 반발 세력이 생겨나기 시작하였고, 급기야 윤이(尹彝)와 이초(李初)라는 인물은 명으로 도망가 이성계를 음해하였다. 그들은 “이성계가 요(瑤)를 공양왕으로 옹립하였는데 요는 종실의 인물이 아니라 이성계의 친척입니다. 공양왕과 이성계가 군사를 움직여 명을 침범하려 준비 중”이라며 가짜 뉴스를 만들어 내었다. 고려 왕실과 이성계를 둘러싼 최초의 거짓 선동이었다.


속은 것인가, 이용한 것인가.



조선은 곧 고려를 가리킨다. 이인임과 그의 아들 이성계가 홍무 6년(1373)부터 홍무 28년(1395)까지 왕씨 성의 고려 왕 4명을 죽였다.

- 『황명조훈(皇明祖訓)』 中 -


잠시 몇 년 후의 상황을 살펴보자. 위의 인용문은 명을 건국한 주원장, 즉 홍무제(洪武帝)가 1395년에 남긴 『황명조훈(皇明祖訓)』의 일부분이다. 『황명조훈』은 “조상이 남긴 가르침”이라는 뜻으로, 홍무제가 후대 황제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법도를 문자로 남긴 것이다. 그런데 조선과 관련한 부분을 살펴보면 이성계가 이인임의 아들로 명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고려의 마지막 4명의 왕을 시해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앞서 윤이와 이초의 가짜 뉴스 역시 이성계의 가계도를 조작하여 홍무제를 자극하려 하였지만 『황명조훈』에 기재된 것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렇다면 윤이와 이초의 거짓 진술로부터 『황명조훈』이 완성되는 5년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런 상황이 벌어진 것일까?

윤이와 이초가 처음 홍무제를 찾아갔을 때 홍무제는 그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오히려 윤이와 이초를 곧바로 귀양보내고 그들의 발언을 고려에 전달하여 관련자들을 색출하게 하였다. 홍무제의 이러한 판단은 매우 합리적인 것이었다. 즉 요동 정벌을 반대하고 위화도회군을 단행하였던 이성계가 명을 공격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종합해보면, 1390년 당시 홍무제는 윤이와 이초의 가짜 뉴스를 전혀 신뢰하지 않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국보 제317호 조선태조어진(출처: 문화재청)



이성계와 홍무제의 우호적인 분위기는 조선 건국 이후에도 당분간 이어졌다. 이성계는 1392년 음력 7월 17일 왕위에 등극하자마자 곧바로 다음날 명에 사신을 보내어 즉위 승인을 요청하였다. 또 11월에는 다시 명에 사신을 보내어 새로운 국호를 정해주길 부탁하였다. 이처럼 이성계는 명의 권위를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사대(事大)의 의사를 분명히 표현하였다. 명의 입장에서도 친명정책을 표방하는 이성계의 집권을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이성계의 역성혁명을 인정하고 조선이라는 국호를 정해주었다. 그야말로 평화무드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는 태풍 전의 고요였을 뿐이었다. 본래 의심 많은 성격의 홍무제는 조선에 대해서도 항시 경계하고 있었다. 특히 홍무제가 걱정한 것은 조선이 요동 지역의 여진족과 결탁하는 것이었다. 앞서 명은 1387년 나하추를 제압하여 요동 지역에서 우위를 점하였지만, 그 후 국내 사정으로 인하여 완벽한 지배권을 확립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요동 지역은 여전히 공백 상태로 남아 있었고, 그곳에 거주하고 있던 여진족들은 언제든지 명의 통제에서 벗어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런 와중에 조선이 새로 개국하고 안정을 찾아가자 홍무제는 조선과 여진족의 결탁이 두렵기 시작하였다.

결국 홍무제는 1393년 5월 사신을 보내어 “조선이 여진인을 유인하여 편입시키고, 요동 지역에서 첩보활동을 벌이고 있다.”며 강하게 압박하였다. 명과 마찰을 일으킬 생각이 추호도 없었던 조선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꼴이었다. 당연히도 명에 해명하고자 하였지만, 조선의 사신은 요동에서 입국조차 거부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요동 지역에서는 이성계를 빙자한 세력들이 계속해서 문제를 일으켰고 명은 이성계의 아들이 직접 명나라로 넘어와서 해명할 것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명나라로 가는 바닷길(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이렇게 조선과 명의 갈등이 한창 진행 중이었던 1394년 4월, 명에서는 사신을 보내어 조선의 산천에 제사를 올렸다. 명에 조공을 바치긴 하였지만 조선은 엄연히 독립된 국가였다. 그럼에도 명에서 사신을 보내 굳이 조선의 산천에 제사를 올린 까닭은 힘의 우위를 보여주기 위한 일종의 퍼포먼스였다. 그런데 더욱 문제가 되었던 것은 제사 행위보다 제문의 내용이었다. 즉 제문의 내용 중에 “옛날 고려의 신하 이인임의 아들 이성계가 사람을 보내 요동을 정탐하고 변방의 장수들을 유인하였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명나라에 대한 불손한 행위야 이전부터 의심하고 있던 일이니 그럴 수 있다 쳐도 한 나라 국왕의 가계를 뒤바꾸어 버린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왜 하필 ‘이인임’을 이성계의 아버지로 지목했을까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물론 두 사람의 성이 모두 이(李)씨였기 때문에 오해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고려와 조선에 대해 항상 경계하고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던 홍무제가 이러한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을 가능성은 적다. 오히려 이인임은 홍무제에 의해 의도적으로 소환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즉 앞서도 설명하였지만 이인임은 우왕 즉위 직후 명나라의 사신을 죽이고 원나라와 결탁한 대표적인 친원세력이다. 홍무제는 조선 건국 이후 요동 지역에서 갈등을 야기하는 이성계에게 ‘친원세력’ 이인임의 이미지를 덧씌워 문제아로 낙인을 찍어버린 것이다.

1394년 6월, 조선에서는 명과의 갈등을 해결하고 종계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태조 이성계의 아들이자 당대 최고의 실력자였던 이방원(李芳遠)을 파견하였다. 이는 명의 요구를 수락함과 동시에 종계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었다. 실제로 이방원의 사행 이후 조선과 명 사이의 외교관계는 다소 호전되었다. 물론 이후에도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당시의 문제에 관해서만큼은 일단락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종계문제, 즉 이성계의 가계를 뒤바꾼 행위에 대해서는 그 어떠한 조정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앞서 살펴보았던 것과 같이 이성계가 이인임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황명조훈』에 그대로 기재되었고, 이는 명의 법전이었던 『대명회전(大明會典)』에도 실리게 되었다. ‘이성계가 자신의 친척을 공양왕으로 세워 명에 대적하려 한다.’는 윤이와 이초의 거짓 발언은 홍무제에 의해 ‘친원파 이인임의 아들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고 명에 지속적으로 문제를 일으킨다.’는 내용으로 둔갑해버린 것이다.


이용당한 조선, 그럼에도 지킬 수밖에 없었던 효(孝)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  더보기



조선에서 당시에 종계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들지 않은 것은 일회적 문제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즉 조선에서는 홍무제가 『황명조훈』을 통해 이성계의 가계 문제를 성문화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의 믿음은 산산조각이 났다. 이미 홍무제와 이성계가 모두 세상을 떠난 시점이었던 1402년(태종 2), 명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던 조온(趙溫)은 『황명조훈』에 이성계가 이인임의 후손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바로 그 시점부터 종계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조선의 기나긴 싸움이 시작되었다


『대명회전』 이성계의 종계에 관한 기사(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  더보기



그 지난한 과정을 모두 살펴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결론만 이야기하자면 조선 측의 지속적인 수정 요청으로 인해 1584년(선조 17) 『대명회전』의 서술이 수정되었다. 그리고 1589년 수정이 완료된 『대명회전』 전질을 받아오면서 200년을 끌어온 종계문제는 마침내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그 실상을 살펴보면 조선 측에 여러모로 아쉬울 수밖에 없는 결과였다. 왜냐하면 “이인임과 그의 아들 이성계”라는 구절은 삭제되지 않았고, 단지 조선 측의 해명이 그 밑에 부기되어 있는 형태였기 때문이다.

종계문제의 해결이 이토록 오래 걸린 이유는 홍무제가 이를 『황명조훈』의 형태로 성문화시켰기 때문이다. 즉 명 황제의 입장에서는 조선 측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순간 홍무제가 남긴 『황명조훈』을 수정하는 불효를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조선의 요구를 수용할 수 없었고, 결국에는 『황명조훈』의 서술을 그대로 남겨두고 조선의 해명을 실어주는 형태로 절충안을 제시한 것이다.

어쨌든 200년의 시간을 소비하여 종계문제는 해결이 되었다. 그 200년 동안 조선에서는 지속적으로 사신을 보내어 종계문제가 윤이와 이초의 거짓된 진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명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다시 생각해보자. 이 문제는 정말 윤이와 이초로부터 시작된 것일까? 정말 두 사람의 거짓말에 조선과 명이 200년 동안 놀아난 것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윤이와 이초의 진술 중 어디에도 이성계가 이인임의 아들이라는 말은 없었다. 오히려 그 말은 윤이와 이초의 진술에서 힌트를 얻은 홍무제가 새롭게 각색해낸 것이었다. 그렇다면 조선에서는 그 사실을 몰랐을까? 아니, 조선도 분명 알았을 것이다. 다만 명에 대놓고 홍무제가 잘못한 것이니 수정해달라고 요구할 수 없었고, 그렇기 때문에 윤이와 이초의 핑계를 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조선은 알면서도 200년간 납작 엎드려 외교적 주도권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효(孝)’라는 가치를 지켜낼 수 있었다.




집필자 소개

이명제
동국대학교에서 17세기 한ㆍ중 관계사 전공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병원 의학역사문화원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대표 저서 및 논문으로는 『달콤 살벌한 한ㆍ중 관계사』(공저), 「17세기 청ㆍ조선 관계 연구」, 「강희 연간 淸使의 사행 기록과 조선 인식의 양상」 등이 있다. 한ㆍ중 관계 연구를 통해 조선시대를 새롭게 이해해보고자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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