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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가 그리는 과거의 흔적에서 태어나는 새로운 권력 : 음악극 《세자전》

동서양을 넘나드는 역사 속에서 나타난 혁명이나 반란으로 시작되는 권력의 교체는 이야기의 단골 소재이다. 서양의 적자 승계, 동양의 적통성(嫡統性)이 온건히 유지되는 순탄한 흐름보다는 이를 거스르며 벌어지는 사건들은 작게는 한 인간의 욕망으로 시작되지만 때로는 정의, 혁명이라는 말로 포장되기도 하며 그 사회를 뒤엎어버리기도 한다.

헨리 8세, 메리 1세, 사도세자와 정조 등 권력에 의해 흩뿌려진 피 위에 세워지는 새로운 권력의 등장이나 실패한 반란을 소재로 이야기들은 드라마, 영화, 공연 등을 통해 우리에게 친숙하다. 세계사 속에서 왕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왕위 계승권을 두고 벌어지는 싸움은 우리가 자주 접하는 소재이기도 하다. 헨리 8세와 그의 자녀들인 에드워드 6세와 메리 1세, 그리고 엘리자베스 1세의 비화들은 영화나 드라마의 단골 소재가 되었고, 특히 헨리 8세의 여섯 명의 아내들의 이야기는 지난해 한국에서도 공연되었던 뮤지컬 《식스》(SIX)를 통해 우리 관객들에게도 친숙하다.


〈영화 《황후화》〉 (출처 : SONY PICTURES CLASSICS)


순리를 거스르는 행위와 그로 인한 결과는 모두의 승리와 행복일 수 없기에 누군가의 패망이기도 하다. 역사는 승자가 가지고 온 변화의 흐름에 집중하고 패자는 역사의 수레바퀴의 희생양으로만 기록할 뿐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미장센을 가진 영상이나 공연의 장면을 통한 시각적 표현이 효과적으로 구현되었을 때 관객의 기억에 강하게 남기 마련이다. 2006년 제작된 장예모 감독의 영화 《황후화》(皇后花)를 본 관객이라면 중양절(重陽節)을 위해 궁궐 바닥을 가득 채웠던 노란 국화들이 왕후에 의해 주도된 둘째 아들 원걸의 반란으로 빨간 피로 물들었던 장면과 피가 가득했던 궁궐 바닥이 빠르게 씻기고 다시 노란 국화가 핀 수천 개의 화분으로 가득 채워지며 반란의 흔적이 하룻밤 만에 깨끗이 지워지는 과정의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음악극 《세자전》〉 (출처 : ㈜인사이트엔터테인먼트)


우리가 배워온 역사 속의 조선의 27명의 왕 중 단 7명의 왕만이 적자로서 왕위를 계승했고, 나머지 20명은 그러지 못했다. 비정상적인 왕위 계승 과정은 왕위 찬탈이나 세자의 죽음 등 다양한 이유가 존재하였는데, 음악극 《세자전》(2020)은 이 중 순리를 거스른 이들에서 시작되는 이야기이다.

이 작품은 정실(왕후)의 몸에서 태어난 적자인 동생 이광을 죽이고 왕의 자리를 차지한 지금의 왕(이홍)이 자신의 다섯 아들 중 세자 경연을 통해 세자를 책봉하겠다는 발표를 하면서 벌어지는 사건이 중심이다. 각기 다른 성향의 다섯 왕자 중 중전의 장자인 안영대군이 세자가 되는 것이 당연한 이치지만, 이를 거스르려 하는 왕의 결정으로 인한 안영대군과 중전의 분노와 진평군이 가지는 희망의 줄다리기 속에서 왕과 중전의 과거의 그늘이 밝혀진다. 세자인 동생을 죽이고 왕좌에 올랐던 지금의 왕은 동생들을 죽이고 왕의 자리를 얻으려 하는 세자를 죽임으로써 자신이 만든 죄의 고리를 끊고 모든 것을 원래의 자리로 돌리고자 하는 듯하다.

피를 뿌려 얻었던 지난 권력의 흔적 위에 또 다른 피가 뿌려져 새로운 권력이 세워지는 과정을 그리는 《세자전》의 무대는 “마치 강제로 자연의 한복판을 짓이기고 만들어진 인공의 문명처럼.”이라는 작가의 공간 설명에서 시작된다. 무대를 가득 메운 높은 대나무들은 폐허가 된 궁궐에 마구 자라난 듯하지만, 동시에 대나무가 무성하게 자란 공간 안에 어좌를 덩그러니 던져놓은 듯하기도 하다. 데크 위에 비스듬히 망가진 듯 놓인 어좌를 둘러싸고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인물들과 그 어좌에 관심 없이 바깥세상을 바라보며 욕망의 헛됨을 이야기하는 이들의 노래가 마치 대나무 숲에 남아 메아리칠 듯한 느낌이 든다.


〈음악극 《세자전》〉의 무대 연출〉 (출처 : 디자이너 개인 소장)


무대를 디자인하는 과정에서 무대 위의 이미지와 함께 중요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관객에게 보이는 첫인상이다. 사람 대 사람의 관계에서도 첫인상이 중요하듯이 관객이 극장에 들어섰을 때, 배우보다도 먼저 무대를 마주하기 때문에 관객이 공연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며 무대를 바라보는 그 시간에 무대가 관객에게 전달하는 시각적 메시지가 중요하다. 주로 극의 전반적인 분위기에 대한 정보를 담는 경우가 많은데, 《세자전》의 경우 검은 반투명 커튼을 내려 제목을 보여줌과 동시에 상하수 단의 아래쪽 대나무 잎이 푸른 느낌을 만들어 어두운 공간 속에서 새로 자라는 작은 대나무들의 푸르름을 보여준다. 이는 어두운 현실 속에서도 꺾이지 않고 자라고 있는 곧은 대나무가 가지는 가능성을 말한다. 사군자(四君子)의 매난국죽 중에서도 특히 꺾이지 않는 선비의 기개를 의미하는 대나무로 채워진 무대는 언뜻 보기에 대칭인 듯하지만 묘하게 틀어져 있고 중앙의 어좌는 비스듬하며, 그것이 놓인 데크의 앞선도 들쭉날쭉한 계단으로 이루어져 반듯한 듯하지만 어긋나고 삐뚤어진 현실을 보여준다.

무대의 높이는 관객에게 인물의 성격이나 인물 간의 관계 등을 텍스트를 통하지 않고 인지시키는 좋은 방법의 하나다. 무대 단의 높이를 활용하여 변화를 만들어냄으로써 영상에서 카메라의 각도가 만들어내는 효과처럼 시각적 언어를 관객이 무의식중에 느낌으로 받아들이며 인지하도록 한다.

중전은 나약한 왕을 2층 단 위에서 내려다보며 마치 줄이 끊어져 멋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를 하찮게 내려다보는 듯하다. 내 손아귀에 있던 인형이 더는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자 그 인형을 그냥 내버려 두기보다는 직접 버려야 하는 중전의 태도는 2층 단 위에 소리 없이 조용히 나타나 지켜보기를 반복하며 관객들에게 그녀의 성정과 위치를 시각적으로 인지시킨다.


〈경복궁 근정전 내 어좌(御座)〉 (출처 :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자신의 아버지가 한 과거의 선택과 같이 왕의 자리를 위해 자신의 동생마저 죽이는 것을 선택한 안영대군은 극의 마지막에 아버지(왕)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죽음의 길에서 그는 “저승길이 어디냐…늘 가라는 곳으로만 걸었더니…저승길마저 홀로 걷지 못하겠구나….”라고 말하며 자신이 죽인 완덕군과 동진군을 따라 저승길로 떠나간다. 이러한 죽음의 길은 무대 뒤편을 따라 가로로 놓이며, 이는 어좌가 있는 단보다 뒤에서 어좌보다 낮은 높이로 존재한다. 어좌를 향해 무대가 만들고 있는 길이 무대 앞에서 뒤로 가는 세로의 선이며, 이는 어좌를 바라봄으로 상승의 구도를 만들어내지만, 그 이면에 죽음 앞에서는 어떠한 높낮이도 없으며 삶으로 돌아올 수 없음을 상여를 매고 지나가는 장례 행렬이나 죽은 자들의 움직임을 가로로 배치하여 삶과 죽음이 바라보는 방향이 엇갈리도록 한다.

왕과 중전을 제외하고 마지막에 어좌의 단 위에 오르는 유일한 인물인 진평군은 극 중 유일하게 상승의 움직임을 만들어내는데, 진평군이 세자로 책봉되고 왕은 그 앞에서 스스로 죽음을 택함으로써 반대로 하강의 움직임을 만들어내며 뒤틀린 세계를 자신의 흔적으로 남긴다. 진평군은 그 흔적을 감추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인다. 그로 인해 무대는 주변을 조명의 조도를 낮추고 어좌만을 쓸쓸히 남겨 왕으로 인해 벌어진 사건에 의해 많은 이들을 잃고 자신을 지키는 과정에서 눈이 먼 칠성군과의 춤판으로 마무리된다.


〈음악극 《세자전》〉의 무대 연출〉 (출처 : 디자이너 개인 소장)


무대가 가지는 시각적 텍스트는 무대 위의 배우처럼 대사나 움직임을 통해 말을 하지는 못하지만 다양한 방식으로 관객들과 소통한다. 무대, 조명, 영상 등의 시각적 요소들은 극의 텍스트를 바탕으로 공연마다 시각적 문법을 만들어 극을 연결해 간다. 《세자전》의 텍스트가 가지는 무너진 과거 위에 세워지는 새로운 시작이라는 세계를 보여주는 뒤틀린 무대는 아우를 죽이고 왕이 되었던 이홍과 중전 같은 구세대의 죽음 위에 왕자들의 죽음까지 얹혀 한번 뒤틀어진 순리가 다시 뒤틀림으로 인해 제자리로 온전히 돌아올 수 없음을 보여준다.

무대가 가지는 메시지는 관객들에게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여 창작진이 의도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장치로만 사용되며, 시대성을 가지는 작품들의 경우 관객의 성향이나 역사관 등 다양한 요소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매우 다양한 의미로 재해석 되고 전달될 수 있을 것이다.




집필자 소개

이엄지
큐리에이티브(Cu:reative) 디자인컴퍼니 대표이자 메인 디자이너로 뮤지컬 《사랑의 불시착》, 《미세스 다웃파이어》, 《두교황》, 《곤 투모로우》, 《세자전》 등 대극장과 소극장을 넘나들며 다양한 뮤지컬과 연극의 무대를 디자인해왔다.
“다른 이의 공을 빼앗으려던 감사 심돈, 톡톡히 망신당하다”

김령, 계암일록, 1615-07-11 ~

전 감사 심돈(沈惇). 그는 기생에 빠져 민생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또 1615년 1월에는 동래부사 박경업(朴慶業)과 공을 다투기도 하였다. 이에 관해서는 우스꽝스러운 일화가 전해진다.

일찍이 박경업이 엉뚱한 사람을 잡아 역적 박치의(朴致義)라고 하였다. 이 자를 데리고, 바로 계를 올려 보내느라 영천[榮州]을 지나게 되었는데, 마침 그곳에 있던 심돈이 그 이야기를 듣고는, 사람과 말을 준비한다는 핑계로 그 장계를 정지시켰다. 그리고는 급하게 치계(馳啓)하고, 스스로 자신의 공으로 삼아 말하기를 “신은 성상 앞에서 명을 받은 이후로 역적을 포획하는 것을 일삼아 항상 군현 내를 경계하였더니 지금 바로 동래에서 잡게 되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는 박경업의 공이 자신보다 앞서는 것을 꺼려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박경업이 잡혀가게 되자 심돈이 점차 부끄러움을 느끼고 사직소를 올렸다.

임진왜란 이후 경상도에 감사로 온 자는 거의 20여 명이 되었다. 혹자는 재간이 있으나 청렴하지 않았고, 혹자는 청렴하였으나 재주와 기량이 부족하였다. 형편없는 탐관오리가 있었으며 광포하고 패악한 자도 있었다. 한 고을을 편안하게 다스린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조선시대 지방관의 평가와 승진”

조선시대 지방관의 인사고과는 고려시대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고려시대인 989년(성종 8) 처음 실시해 6품 이하 관리들의 인사에 반영되었고 1018년(현종 9) 연말종합평정제도인 연종도력법(年終都歷法)이 시행되었고, 1105년(예종 즉위년) 지방관 평가제도인 수령전최법(守令殿最法)이 수립되었다. 또, 공민왕 때 근무일수를 기준으로 성적을 평정하는 도숙법(到宿法)이 마련되었고, 공양왕 때 근무월수를 기준으로 성적을 평정하는 개월법(箇月法)이 신설되었다.

고려시대의 고과법에서는 특히 지방관의 평정업무가 강조, 강화되었다. 그 기준은 이른바 수령5사(守令五事), 즉 농지의 개척, 호구(戶口)의 증식, 부역의 균등, 소송의 신속처리, 도둑의 단속능력 및 업적이었다. 이러한 업무는 이부(吏部)에 소속된 고공사(考功司)에서 주로 관장하였다.

조선시대 1392년(태조 1)에 바로 고과법을 시행하였다. 수령5사에 학교의 진흥과 예속의 보급 두 종목을 추가해 수령칠사(守令七事)로 하였다. 또 새로운 공직자 윤리규범 4조, 즉 덕의(德義)·공정(公正)·청근(淸謹)·근면(勤勉)을 강조해 이들 조항의 실천여부를 점수화하였다. 그 뒤 세종·세조대를 지나면서 고과에 관한 규정들이 제정, 보완되어 『경국대전』에 수록되었다.

『경국대전』에는 고과와 포폄의 두 조항으로 나누어져 있다. 고과는 관리들의 일반근무동향 기록제도와 같은 것으로, 이조의 고공사에서 주관해 기록·관리하였다. 포폄은 정기근무성적 평정제도와 같은 것으로, 경관(京官, 중앙의 여러 부서관리)들은 소속관아의 책임자에 의해서, 지방관들은 관찰사에 의해서 매년 2회씩 정기적으로 행해졌다. 포폄 역시 개별적으로 평가된 성적은 이조에 통보되어 인사에 반영되거나 참고자료로 기록, 보존되었다.

『경국대전』 고과조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근무일수[仕數]와 근태상황을 엄격히 기록, 관리하였다. 이는 당상관을 제외한 모든 관리가 날짜로 계산되는 소정의 임기를 마쳐야 전보[遷官]와 진급[加階]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근무시간도 하절기에는 묘시(卯時)에서 유시(酉時), 동절기에는 진시(辰時)에서 신시(申時)로 규정하였다. 둘째, 업무실적을 점검하였다. 특히, 형조·한성부·개성부·장례원(掌隷院) 등의 사법기관에서는 당하관들의 재판처리건수를 보고하도록 하고, 기준에 미달되는 자는 징계하였다. 셋째, 매년 말에 경관들은 이조에서 실제 근무일수와 기타 사항들을 갖추어 왕에게 보고하고, 지방관들은 관찰사가 수령7사(農桑·學校·詞訟·奸猾·軍政·戶口·賦役)의 실적을 갖추어 왕에게 보고하였다. 넷째, 질병으로 인한 장기결근자(연간 30일 이상)·범법자(특히 왕족이나 공신)·집회불참자 및 근무성적평정에서 하등급을 받은 자, 사소한 죄로 파직된 자 등을 보고, 징계, 기록하고 일정기간에 재임용되지 않도록 하였다. 다섯째, 녹사(錄事)와 서리(書吏)의 근태상황을 점검하고 불량시에 징계하였다. 특히 서리들은 명부를 따로 비치해 관리함으로써 그들의 부정과 횡포를 막게 하였다.

일기에서 보이는 오모의 승진을 위한 부임은 아마도 근무일수를 모두 채우지 못하여 온 것이 아닐까 싶다.

“수령칠사(守令七事)”

수령(守令)은 고려·조선시대 주(州)·부(府)·군(郡)·현(縣)의 각 고을을 맡아 다스리던 지방관의 총칭이다. 군수와 현령(縣令)의 준말로도 부르며 속칭 ‘원님’이라고도 부른다. 왕이 임명하고, 사법권, 군사권, 행정권의 권한을 행사했다.

조선시대의 수령은 부윤(府尹, 종2품)·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 정3품)·목사(牧使, 정3품)·도호부사(都護府使, 종3품)·군수(郡守, 종4품)·현령(縣令, 종5품), 현감(縣監, 종6품) 등이다. 그 품계는 종2품에서 종6품까지에 걸쳐 있었다. 주·부·군·현의 읍격(邑格)과 수령의 품계는 호구·전결(田結)의 많고 적음에 따라 차이가 있었는데, 행정상으로는 모두 관찰사의 관할 밑에 있었다.

≪경국대전≫에 수록된 수령의 정원은 부윤 4인, 대도호부사 4인, 목사 20인, 도호부사 44인, 군수 82인, 현령 34인, 현감 141인이었다. 후기로 올수록 수령의 정원이 증가하는데, 특히 도호부사의 정원이 늘어났다.

수령에 임용되려면 문과·무과·음과 중 하나를 통과해야 하는데, 상급수령에는 문과가 많고, 연변(沿邊) 군현에는 무과가 많으며, 중소 군현에는 음과가 절대 다수였다.

수령의 임무는 칠사(七事)가 말해 주듯이 권농(勸農)·호구 증식·군정(軍政)·교육 장려·징세 조역(徵稅調役)·소송 간평(訴訟簡平)·풍속 교정이었으며, 수령의 하부 행정 체계로서는 향리와 면리임(面里任)이 있고, 자문 및 보좌 기관으로 유향소(留鄕所, 鄕廳)가 있었다. 또한 감사와 병사(兵使)를 지낸 사람은 그 도의 수령이 될 수 없는 등 여러 가지 제한 규정이 있었다.

수령칠사(守令七事)는 조선시대 수령이 지방을 통치함에 있어서 힘써야 할 일곱 가지 사항이다.

농상성(農桑盛 : 농상을 성하게 함)·호구증(호구를 늘림)·학교흥(學校興 : 학교를 일으킴)·군정수(軍政修 : 군정을 닦음)·부역균(賦役均 : 역의 부과를 균등하게 함)·사송간(詞訟簡 : 소송을 간명하게 함)·간활식(奸猾息 : 교활하고 간사한 버릇을 그치게 함)의 일곱가지로서 ≪경국대전≫ 이전(吏典) 고과조(考課條)에 실려 있다.

고려시대에는 수령오사, 즉 전야벽(田野闢 : 전지를 개척함)·호구증·부역균·사송간·도적식(盜賊息 : 도적을 그치게 함)의 다섯 가지가 있어서 수령 고적(考績)의 법으로 삼았다.

양자를 비교하면 오사의 전야벽·도적식과 칠사의 농상성·간활식은 문자는 달라도 내용은 같으므로 칠사는 오사에 학교흥·군정수를 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수령오사는 조선 초기에 한동안 그대로 사용되어오다가 태종 6년(1406) 12월의 기록에 처음 칠사가 등장하였다.

이 때 칠사를 존심인서(存心仁恕 : 마음은 仁과 恕에 둠)·행기염근(行己廉謹 : 몸소 청렴과 근신을 행함)·봉행조령(奉行條令 : 조칙과 법령을 받들어 행함)·권과농상(勸課農桑 : 농상을 권장해 맡김)·수명학교(修明學校 : 학교를 수리하고 학문 풍토를 밝게 함)·부역균평(賦役均平 : 역의 부과를 균등하고 공정하게 함)·결송명윤(決訟明允 : 소송에 대한 판결은 공명하고 진실되게 함)을 들고 있다.

이 일곱가지 중 권과농상은 ≪경국대전≫에 수록된 수령칠사의 첫째인 농상성, 수명학교는 셋째인 학교흥, 부역균평은 다섯째인 부역균, 결송명윤은 같은 여섯째인 사송간과 문자는 약간 달라도 내용은 같으므로 별로 문제가 없다.

그러나 존심인서·행기염근·봉행조령의 세 가지는 추상적인 표현일 뿐 아니라 내용도 ≪경국대전≫과 아주 다르다. 그리고 수령오사 중 호구증과 도적식이 빠져 있는 것도 이상하다. 태종 때 이러한 칠사지목(七事之目)이 어떤 경로를 밟아 이루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1406년(태종 6) 이후에도 칠사란 말이 실록에 산견(散見)되고 있다. 또 태종 11년(1411) 윤12월의 기사에 보이는 칠최지목(七最之目) 중에 호구증이 나오고 있는 것을 보면, 수령칠사는 고려적인 제도가 조선적인 제도로 전환하는 태종·세종대에 ≪경국대전≫의 내용과 비슷한 원형이 마련되었으리라고 보인다.

그러다가 ≪경국대전≫과 똑같은 수령칠사가 실록에 처음 나오는 것은 훨씬 뒤인 성종 14년(1483) 9월의 기사이다. 즉 성종이 평택현감 변징원(卞澄源)을 인견하고 수령칠사를 물었을 때 그는 서슴지 않고 농상성·학교흥·사송간·간활식·군정수·호구증·부역균의 일곱가지를 암송하고 있다.

그러므로 ≪경국대전≫에 보이는 수령칠사는 태종과 세종대에 그 기틀이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위의 ≪성종실록≫에 보이는 수령칠사와 같이 간결하게 다듬어진 것은 ≪경국대전≫ 편찬 때로 보인다.

수령칠사는 그 뒤 조선 중·후기에도 그대로 지켜져 왔던 것으로 보인다. 1737년(영조 13) 인재의 선택을 하교하면서 목민관의 역할에서 수령칠사의 중요성을 예시하고 있다. 이후 1793년(정조 17)에도 수령칠사에 대한 기록이 보인 것으로 보아 이 시기까지도 지켜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권문해, 굶주린 백성을 위해 동분서주”

권문해, 초간일기,
1590-01-01 ~ 1590-02-02

1590년 1월 6일, 굶주린 백성들이 늘어갔다. 권문해는 굶주린 마을 사람들을 도울 방도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 했다. 그리고 결국 직접 백성들을 찾아다니며 곡식을 나누어 구휼하기 시작했다. 대구 달성지역의 하빈(河濱)의 동면, 북면, 서면의 각 마을로 향하여 분진(分賑)하였다. 아침부터 시작된 구휼은 밤이 깊어가도록 이어졌다. 권문해는 밤이 깊어지자 관아로 돌아오지 못하고 윤효언(尹孝彦)의 집을 찾았다. 다음날도 분진은 계속되었다. 하빈현의 동면과 북면 서면에 이어 남면의 구휼이 시작되었다. 남면의 사람들도 굶주린 이들이 마을의 정자 앞에서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오전부터 시작한 분진은 오후 1시 되어서 끝이 났다. 이어 신서촌(身西村) 성당리(聖堂里)로 향하였다. 1월 6일부터 시작된 구휼은 사흘간 계속되었다. 1월 9일, 마지막으로 임암현(立岩縣), 내역리(內驛里), 검정리(檢丁里), 해안현(解顔縣)의 동촌리, 상향리, 서부리의 마을까지 모두 분진을 하였다.

사흘간 계속되는 분진이지만 여전히 굶주린 백성들이 이어졌다. 권문해는 한 달이 지난 2월 2일에도 읍내의 마을을 순회하며 백성들에게 쌀과 소금, 간장을 나누어 주었다.

“담배피우며 시강하다가 귀양 간 시관”

담배를 피우며 강연하는 시관 노상추, 노상추일기, 1792-02-18

학례강(學禮講) 시관이 귀양을 갔다. 시강을 할 때 생도들 앞에서 몸을 비스듬히 하고 앉아 관을 비뚤게 쓰고 담배까지 피웠으며 잡스러운 농담도 툭툭 던져댔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왕의 귀에도 들어갔다. 왕은 한심해하며 시관 모두를 먼 지방으로 귀양을 보내게 하였다. 또 이런 풍조를 알면서도 감찰해내지 못한 감찰, 사관, 승문원·성균관·교서관의 여러 관원들도 잡아들여 신문하며 혼을 냈다. 당연히 이들 기관의 책임자인 대사성도 불려가 곤욕을 치렀다. 성균관의 재임(齋任)과 동재(東齋)·서재(西齋)의 반수(班首) 역시 모두 그 직무를 정지시켰고, 공무를 집행한 관리들도 추고 당했다. 미리 경계하지 못하고 왕의 귀에 들어 갈까봐 쉬쉬하며 서로 입을 다물고 있었던 죄 때문이었다. 이런 한심스러운 일이 있었음을 노상추는 조보를 읽고 알았다. 마침 생원시가 있는 날이었는데, 아마도 더욱 엄정한 분위기에서 치러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벌벌 떨면서 시험을 보겠구먼! 하며 노상추는 담뱃대에 불을 붙여 일부러 비뚜름하게 물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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