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양을 넘나드는 역사 속에서 나타난 혁명이나 반란으로 시작되는 권력의 교체는 이야기의 단골 소재이다. 서양의 적자 승계, 동양의 적통성(嫡統性)이 온건히 유지되는 순탄한 흐름보다는 이를 거스르며 벌어지는 사건들은 작게는 한 인간의 욕망으로 시작되지만 때로는 정의, 혁명이라는 말로 포장되기도 하며 그 사회를 뒤엎어버리기도 한다.
헨리 8세, 메리 1세, 사도세자와 정조 등 권력에 의해 흩뿌려진 피 위에 세워지는 새로운 권력의 등장이나 실패한 반란을 소재로 이야기들은 드라마, 영화, 공연 등을 통해 우리에게 친숙하다. 세계사 속에서 왕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왕위 계승권을 두고 벌어지는 싸움은 우리가 자주 접하는 소재이기도 하다. 헨리 8세와 그의 자녀들인 에드워드 6세와 메리 1세, 그리고 엘리자베스 1세의 비화들은 영화나 드라마의 단골 소재가 되었고, 특히 헨리 8세의 여섯 명의 아내들의 이야기는 지난해 한국에서도 공연되었던 뮤지컬 《식스》(SIX)를 통해 우리 관객들에게도 친숙하다.
〈영화 《황후화》〉 (출처 : SONY PICTURES CLASSICS)
순리를 거스르는 행위와 그로 인한 결과는 모두의 승리와 행복일 수 없기에 누군가의 패망이기도 하다. 역사는 승자가 가지고 온 변화의 흐름에 집중하고 패자는 역사의 수레바퀴의 희생양으로만 기록할 뿐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미장센을 가진 영상이나 공연의 장면을 통한 시각적 표현이 효과적으로 구현되었을 때 관객의 기억에 강하게 남기 마련이다. 2006년 제작된 장예모 감독의 영화 《황후화》(皇后花)를 본 관객이라면 중양절(重陽節)을 위해 궁궐 바닥을 가득 채웠던 노란 국화들이 왕후에 의해 주도된 둘째 아들 원걸의 반란으로 빨간 피로 물들었던 장면과 피가 가득했던 궁궐 바닥이 빠르게 씻기고 다시 노란 국화가 핀 수천 개의 화분으로 가득 채워지며 반란의 흔적이 하룻밤 만에 깨끗이 지워지는 과정의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음악극 《세자전》〉 (출처 : ㈜인사이트엔터테인먼트)
우리가 배워온 역사 속의 조선의 27명의 왕 중 단 7명의 왕만이 적자로서 왕위를 계승했고, 나머지 20명은 그러지 못했다. 비정상적인 왕위 계승 과정은 왕위 찬탈이나 세자의 죽음 등 다양한 이유가 존재하였는데, 음악극 《세자전》(2020)은 이 중 순리를 거스른 이들에서 시작되는 이야기이다.
이 작품은 정실(왕후)의 몸에서 태어난 적자인 동생 이광을 죽이고 왕의 자리를 차지한 지금의 왕(이홍)이 자신의 다섯 아들 중 세자 경연을 통해 세자를 책봉하겠다는 발표를 하면서 벌어지는 사건이 중심이다. 각기 다른 성향의 다섯 왕자 중 중전의 장자인 안영대군이 세자가 되는 것이 당연한 이치지만, 이를 거스르려 하는 왕의 결정으로 인한 안영대군과 중전의 분노와 진평군이 가지는 희망의 줄다리기 속에서 왕과 중전의 과거의 그늘이 밝혀진다. 세자인 동생을 죽이고 왕좌에 올랐던 지금의 왕은 동생들을 죽이고 왕의 자리를 얻으려 하는 세자를 죽임으로써 자신이 만든 죄의 고리를 끊고 모든 것을 원래의 자리로 돌리고자 하는 듯하다.
피를 뿌려 얻었던 지난 권력의 흔적 위에 또 다른 피가 뿌려져 새로운 권력이 세워지는 과정을 그리는 《세자전》의 무대는 “마치 강제로 자연의 한복판을 짓이기고 만들어진 인공의 문명처럼.”이라는 작가의 공간 설명에서 시작된다. 무대를 가득 메운 높은 대나무들은 폐허가 된 궁궐에 마구 자라난 듯하지만, 동시에 대나무가 무성하게 자란 공간 안에 어좌를 덩그러니 던져놓은 듯하기도 하다. 데크 위에 비스듬히 망가진 듯 놓인 어좌를 둘러싸고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인물들과 그 어좌에 관심 없이 바깥세상을 바라보며 욕망의 헛됨을 이야기하는 이들의 노래가 마치 대나무 숲에 남아 메아리칠 듯한 느낌이 든다.
〈음악극 《세자전》〉의 무대 연출〉 (출처 : 디자이너 개인 소장)
무대를 디자인하는 과정에서 무대 위의 이미지와 함께 중요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관객에게 보이는 첫인상이다. 사람 대 사람의 관계에서도 첫인상이 중요하듯이 관객이 극장에 들어섰을 때, 배우보다도 먼저 무대를 마주하기 때문에 관객이 공연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며 무대를 바라보는 그 시간에 무대가 관객에게 전달하는 시각적 메시지가 중요하다. 주로 극의 전반적인 분위기에 대한 정보를 담는 경우가 많은데, 《세자전》의 경우 검은 반투명 커튼을 내려 제목을 보여줌과 동시에 상하수 단의 아래쪽 대나무 잎이 푸른 느낌을 만들어 어두운 공간 속에서 새로 자라는 작은 대나무들의 푸르름을 보여준다. 이는 어두운 현실 속에서도 꺾이지 않고 자라고 있는 곧은 대나무가 가지는 가능성을 말한다. 사군자(四君子)의 매난국죽 중에서도 특히 꺾이지 않는 선비의 기개를 의미하는 대나무로 채워진 무대는 언뜻 보기에 대칭인 듯하지만 묘하게 틀어져 있고 중앙의 어좌는 비스듬하며, 그것이 놓인 데크의 앞선도 들쭉날쭉한 계단으로 이루어져 반듯한 듯하지만 어긋나고 삐뚤어진 현실을 보여준다.
무대의 높이는 관객에게 인물의 성격이나 인물 간의 관계 등을 텍스트를 통하지 않고 인지시키는 좋은 방법의 하나다. 무대 단의 높이를 활용하여 변화를 만들어냄으로써 영상에서 카메라의 각도가 만들어내는 효과처럼 시각적 언어를 관객이 무의식중에 느낌으로 받아들이며 인지하도록 한다.
중전은 나약한 왕을 2층 단 위에서 내려다보며 마치 줄이 끊어져 멋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를 하찮게 내려다보는 듯하다. 내 손아귀에 있던 인형이 더는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자 그 인형을 그냥 내버려 두기보다는 직접 버려야 하는 중전의 태도는 2층 단 위에 소리 없이 조용히 나타나 지켜보기를 반복하며 관객들에게 그녀의 성정과 위치를 시각적으로 인지시킨다.
〈경복궁 근정전 내 어좌(御座)〉 (출처 :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자신의 아버지가 한 과거의 선택과 같이 왕의 자리를 위해 자신의 동생마저 죽이는 것을 선택한 안영대군은 극의 마지막에 아버지(왕)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죽음의 길에서 그는 “저승길이 어디냐…늘 가라는 곳으로만 걸었더니…저승길마저 홀로 걷지 못하겠구나….”라고 말하며 자신이 죽인 완덕군과 동진군을 따라 저승길로 떠나간다. 이러한 죽음의 길은 무대 뒤편을 따라 가로로 놓이며, 이는 어좌가 있는 단보다 뒤에서 어좌보다 낮은 높이로 존재한다. 어좌를 향해 무대가 만들고 있는 길이 무대 앞에서 뒤로 가는 세로의 선이며, 이는 어좌를 바라봄으로 상승의 구도를 만들어내지만, 그 이면에 죽음 앞에서는 어떠한 높낮이도 없으며 삶으로 돌아올 수 없음을 상여를 매고 지나가는 장례 행렬이나 죽은 자들의 움직임을 가로로 배치하여 삶과 죽음이 바라보는 방향이 엇갈리도록 한다.
왕과 중전을 제외하고 마지막에 어좌의 단 위에 오르는 유일한 인물인 진평군은 극 중 유일하게 상승의 움직임을 만들어내는데, 진평군이 세자로 책봉되고 왕은 그 앞에서 스스로 죽음을 택함으로써 반대로 하강의 움직임을 만들어내며 뒤틀린 세계를 자신의 흔적으로 남긴다. 진평군은 그 흔적을 감추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인다. 그로 인해 무대는 주변을 조명의 조도를 낮추고 어좌만을 쓸쓸히 남겨 왕으로 인해 벌어진 사건에 의해 많은 이들을 잃고 자신을 지키는 과정에서 눈이 먼 칠성군과의 춤판으로 마무리된다.
〈음악극 《세자전》〉의 무대 연출〉 (출처 : 디자이너 개인 소장)
무대가 가지는 시각적 텍스트는 무대 위의 배우처럼 대사나 움직임을 통해 말을 하지는 못하지만 다양한 방식으로 관객들과 소통한다. 무대, 조명, 영상 등의 시각적 요소들은 극의 텍스트를 바탕으로 공연마다 시각적 문법을 만들어 극을 연결해 간다. 《세자전》의 텍스트가 가지는 무너진 과거 위에 세워지는 새로운 시작이라는 세계를 보여주는 뒤틀린 무대는 아우를 죽이고 왕이 되었던 이홍과 중전 같은 구세대의 죽음 위에 왕자들의 죽음까지 얹혀 한번 뒤틀어진 순리가 다시 뒤틀림으로 인해 제자리로 온전히 돌아올 수 없음을 보여준다.
무대가 가지는 메시지는 관객들에게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여 창작진이 의도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장치로만 사용되며, 시대성을 가지는 작품들의 경우 관객의 성향이나 역사관 등 다양한 요소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매우 다양한 의미로 재해석 되고 전달될 수 있을 것이다.
시기 |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 장소 | 출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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