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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기록으로 만나는 옛길, 使行路程(5) 심양에서 만난 소현세자와 조선관(朝鮮館)

신춘호

지난 호에서는 사행의 초절(初節)구간인 동팔참(東八站)을 중심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조선 사행에게 있어 동팔참 구간이 한민족의 강역이었음을 상기하는 고토의식의 발현공간이자 산천의 기맥이 상통하는 친근감 있는 공간의 이미지가 있었다면, 이번 호에서 살펴볼 역사의 현장은 많은 조선의 사신들이 ‘병자호란의 상흔과 치욕을 상기하며 비분감(悲憤感)을 토로했던 공간’, 바로 요동지역의 중심도시 심양(瀋陽)입니다. 병자호란 이후 심양을 거쳐 간 조선의 사신들은 반드시 병자호란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게 되는바, 그 현장의 일단을 살펴보겠습니다.

심양으로 향한 조선의 백성들

16세기후반 동북아시아는 격동의 시기였습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17세기 초에 들어서면서 조선은 전통적인 우호관계를 맺어 온 명과 신흥세력인 후금의 사이에서 매우 복잡 미묘한 외교적 상황을 맞게 되었습니다. 1627년 후금은 조선과 정묘호란(兄弟義約)을 맺었고,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대명 공략에 나선 후금은 1636년 국호를 청(淸)이라 고치고, 조선으로 하여금 조공을 바치고 신하의 예를 요구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급변하는 중국의 정세에 어두웠던 조선 조정은 재조지은(再造之恩)과 같은 명분론적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조정의 대립이 극심하였고, 급기야 병자호란(1636)을 초래하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1636년 12월, 청 태종(황태극)이 팔기의 주력인 철기를 비롯하여 10만의 군대를 이끌고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넌 이후, 47일 만인 1월 30일에 인조가 남한산성 서문을 나와 삼전도 수항단에서 청 태종에게 치욕적인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를 행함으로써 전쟁은 종료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전쟁은 패전국의 백성에게는 고난의 시작일 뿐이었습니다. 조선의 왕세자와 세자빈, 왕자, 재신, 관료의 자제 등이 청의 수도인 심양으로 볼모의 길을 떠나야 했으니, 이는 역사상 유래를 찾기 어려운 일입니다.

북릉의 청태종(황태극) 동상과 묘역 북릉의 청태종(황태극) 동상과 묘역 그림1 북릉의 청태종(황태극) 동상과 묘역

강화조약에 의해 볼모가 되어 심양으로 향했던 조선인은 소현세자와 같은 왕공대신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볼모가 되어 심양으로 끌려간 조선의 백성들의 수가 60만 명에 육박했다고 합니다.

“정축년 2월 15일 한강을 건널 때 포로로 잡힌 인구가 무려 50여만 명이나 된다.” <최명길, 『遲川集』(권17제7책2)>
“심양으로 간 사람은 60만 명인데, 몽고군에게 붙잡힌 자는 여기에 포함되지 않으니 얼마나 많은지를 알 수가 있다.” <정약용, 『備禦考』(5권)>
“뒷날 심양에서 속환한 사람이 60만 명이나 되었는데, 몽고군대에서 포로로 잡힌 이는 포함하지 않았으니, 그 수가 얼마나 많았는지 알 수가 없다.” <나만갑, 『南漢日記』(또는 丙子錄)>

위의 기록만 보더라도 당시 청군이 조선 침략과정에서 자행했던 노략질의 실상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소현세자의 행적을 기록한『심양일기(瀋陽日記)』(1637년5월17일)와『심양장계(瀋陽狀啓)』(1637년5월24일)에 따르면, “청측에서 붙잡아온 조선인을 날마다 성 밖에 모아놓고 몸값을 치르고 데려가게 하였는데, 청인들이 요구하는 값이 너무 비싸서 그 가족들이 공적(公的) 속환을 호소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청은 조선인 포로들을 치부책으로 삼았습니다. 청군의 포로가 된 조선의 백성들은 심양의 노예시장에서 청군의 가노(家奴), 농노(農奴) 등으로 팔려 나갔습니다. 여성들의 경우 처첩(妻妾)으로 삼거나 높은 가격으로 매매하였고, 이렇게 팔려간 조선인들은 탈출하여 고향으로 돌아가는 이들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잡혀서 발뒤꿈치를 잘리는 형벌을 당하거나, 체념하고 머물러 살아야 했습니다. 전쟁으로 인한 백성들의 피해는 아이, 노인, 특히 여성들에게 극심하게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병란이후 청에서 속환되어 귀국한 여성들을 환향녀(還鄕女)라고도 하는데, 이들을 대하는 조선 사회의 분위기는 매우 비우호적이어서 많은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노예시장이 형성되었던 남탑(광자사) 과 남탑공원 일대 노예시장이 형성되었던 남탑(광자사) 과 남탑공원 일대 그림2 노예시장이 형성되었던 남탑(광자사) 과 남탑공원 일대

노예시장이 형성되었다던 장소는 현재 남탑공원으로 조성되어 심양 시민들의 휴식처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의 사신들이 심양의 혼하나루를 건너면 가장 먼저 쉬어가는 곳이 남탑 일대입니다. 사신들은 심양성에 입성하기 전에 남탑 일대를 지나가노라면 반드시 당시의 치욕적인 일들을 상기하곤 했다는 기록이 연행록에 남아있고, 그들이 잠시 들러 가던 광자사와 남탑(라마백탑)이 지금도 그 자리에 남아 있어 현장을 찾는 여행자의 마음을 숙연하게 합니다.

요녕성 본계시 조선족 마을 박가보 박명진옹과 만주족 부인 요녕성 본계시 조선족 마을 박가보 박명진옹과 만주족 부인 그림3 요녕성 본계시 조선족 마을 박가보 박명진옹과 만주족 부인

지금도 요동지역 곳곳에는 당시 포로의 삶을 살았던 조선인의 후예들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현재 중국 조선족 사회와 학계에서 중국내 조선인 이주 역사를 17세기, 즉 정묘, 병자호란시기까지로 올려 잡고 있는 배경에는 바로 당시 청나라의 일원으로 남아 살아온 조선인들의 후예들이 있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조선인의 후예임을 상징하는 족보와 성씨, 동성통혼금지 등 조선민족의 문화를 유지하고 살아가는 그 후손의 일단이 요녕, 길림, 하북 지역에 ‘박가보’, ‘박보촌’, ‘김가촌’과 같은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습니다.

소현세자와 심양 조선관(朝鮮館), 조선 조정을 대신하다

전 세계 각국에 주재하면서 자국민 안전을 살피고 자국의 이익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들을 ‘외교관’이라고 부릅니다. 전통 시대에는 사신(使臣)들이 바로 외교관이었고, 국가 외교업무를 수행하였습니다. 청말(淸末) 공식적인 연행사절이 끊기기까지 조선의 사행은 연경을 오가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인 사행의 경우와는 달리 특수한 상황이 발생하였습니다. 바로 병자호란의 강화조약에 의해 조선의 왕세자인 소현세자와 세자빈, 왕자, 재신들의 심양 생활입니다. 이들이 집단으로 거주했던 공관을 ‘심양관’, 또는 ‘세자관’, ‘조선관’이라고 불렀습니다. 근대 시기의 지도에는 ‘고려관’, ‘고립관’이라는 지명으로 전하기도 합니다. 이 글에서는 ‘조선관’으로 통칭해서 부르겠습니다.
심양 조선관은 볼모 자의 생활공간이라는 의미를 넘어서 조선 조정을 대신하여 대청 업무를 수행하는 ‘조선외교대표부’의 위상을 갖게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무시로 조선 사행이 심양을 오갔지만, 심양조선관의 세자를 통해 청조정의 요구전달사항이 이우어지는 정황을 보면 충분히 대표부로서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주요 관청 위치도(성경성도) 그림4 성경의 주요 관청 위치도(성경성도)

1637년 4월, 소현세자 일행이 심양에 도착한 후 조선사행의 객관이던 ‘동관’에 임시로 거처하다가 한 달 후인 5월에 새로 건축한 예부 관할의 ‘조선관’으로 거처를 옮기게 됩니다. 이후 심양 조선관은 1637년~1644년 세자가 영구 귀국하기까지 약 8여 년간 소현세자와 강빈, 봉림대군내외의 숙소 겸 조선의 대청외교에 관한 대리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당시 조선관은 세자시강원을 주축으로 조정의 6조의 체계를 가진 ‘분조’의 개념을 가졌는데요, <심양장계>, <심양일기>등을 살펴보면, 소현세자는 조선관 활동을 통하여 청에 대한 조선정부의 입장을 대리하였고, 강빈은 대명전쟁과 수렵에 종군한 소현세자를 대신하여 조선관의 살림을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소현세자는 심양의 황궁과 각 아문을 오가며 조선정부를 대신한 정치 외교적 사무를 대리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가장 빈번한 업무는 예부의 용골대장군을 통해서 이루어졌고, 전쟁물자 조달과 파병지원 등에 관한 군사문제나 척화신의 심양억류 문제 해결 등을 위해서 형부와 병부의 아문도 자주 오갔을 것입니다.

심양고궁(좌로부터 봉황루, 대정전, 숭정전) 그림5 심양고궁(좌로부터 봉황루, 대정전, 숭정전)

소현세자 일행이 청 황제의 궁에 처음 들어간 것은 심양에 도착한 지 한 달쯤 지난 후의 일입니다. <심양일기>(1637년 윤4월4일조)에 따르면, 용골대가 와서 “세자가 관소로 들어 온 뒤 즉시 만났어야 하나, 조선에서 두역(천연두)가 창궐한다 하여 이에 실행에 옮기지 못했는데 내일은 만나고자 한다.” 라는 황제의 말을 전합니다. 세자는 그 후에도 매월 5일, 15일, 25일 황궁의 제삿날과 주변 국가의 조공 때면, 입궁하여 대접을 받고 진과연(眞瓜宴)과 같은 각종 연회에 초대되기도 하였으며, 진기한 새나 짐승, 꽃이 들어오면 심심풀이로 즐기라고 보내주기도 했습니다. 또한 간간이 청의 대명전쟁 승전 시 황궁 대정전 앞마당에 전리품을 펼쳐놓고 구경을 시키는 모임에 반드시 참여해야 했는데, 청의 무력을 드러내는 무언의 압박을 받고 조선관으로 돌아오는 세자의 발걸음은 무척 무거웠을 겁니다. 그래도 조선관으로 돌아오면 세자빈이 기다리고 아우인 봉림대군 내외와 많은 재신들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조선관은 그나마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기도 했을 겁니다.

심양관도첩 그림6 <심양관도첩> 제3폭, 심관구지도, 1761년, LG연암문고 소장

그렇다면 심양조선관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당시의 모습을 그려놓은 기록이 없다보니 상상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요, 옆의 그림은 화원 이필성이 그린 <심양관구지도>입니다.
<심양관구지도>는 영조의 명으로 1761년 사행 홍계희 일행이 방문하여 그린 것입니다. 현종 탄강(1641년)후 120년 후에야 그려진 것입니다. 당시 그린 심양관은 새롭게 중수한 상태의 모습입니다. 조선관은 세자의 귀국 후 조선 사신들의 찰원(察院, 사행단의 숙소)으로 사용되었는데, 홍계희 일행이 봤던 조선관은 옛 모습을 잃은 중수한 모습의 관소였던 것입니다.《성경통지(盛京通志)에 조선관의 건물배치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대문은 남쪽으로 나 있으며 문간채가 3칸이고, 대문을 들어서면 남향으로 5칸의 정방(正房)이 있어 세자와 대군이 기거했다. 또 그 양편으로 5칸씩 나란히 상방(廂房)이 있어 수행한 조신들이 살림을 맡은 호방(戶房), 외무를 맡은 예방(禮房), 마필(馬匹)을 관장하는 병방(兵房), 조선관의 수선을 도맡은 공방(工房) 등의 업무를 관장하고 있었다.” 라고 그 규모와 제도를 설명하고 있어 참고가 됩니다. 조선관 옆에는 문묘와 취생서원(심양서원)이 있었습니다.

양 조선관 옛터(추정)와 동관(삼의묘) 터(추정) 그림7 양 조선관 옛터(추정)와 동관(삼의묘) 터(추정)

최신심양지도(1924) 그림8 최신심양지도(1924)

심양 조선관의 위치는 대남문안 동쪽 골목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김창업의 <노가재연행일기>등 연행기록을 참고하면, 조선관의 위치를 가늠해볼 수 있습니다. 아울러, 근대시기 만주국에 의해 제작된 <심양지도>(1907년)와 <최신심양지도>(1924년)에 고려관호동(高麗館胡同), 고립관(高立館:‘까오뤼관’으로 고려관(高麗館)과 발음 동일)의 명칭이 정확히 남아있고, 옛 터에는 지금 심양시공로건설개발총공사와 합불보보유치원 건물이 들어서 있습니다.
조선의 사신이 심양에 도착하면 남변문안에 있는 관제묘에서 잠시 쉬었다가 의관을 정제한 후 문무반열을 지어서 대남문안 조선관으로 들어가 숙박을 하게 됩니다. 물론 소현세자의 영구귀국 후의 일입니다.
소현세자가 조선관에 머물던 시기에 조선 사행은 동관(東館)에 머무르게 됩니다. 남변문밖 해자인 남운하(南運河) 수로를 따라 동북쪽으로 향하면 운하 인근에 숙소가 있었습니다. 사신들은 심양에 도착한 후 세자가 있는 조선관에 들러 인사를 드리지도 못한 채 격리를 당하였습니다. 청 조정은 조선 사행이 세자를 만나는 일을 엄격히 통제하였고, 청 조정의 허락 하에 만날 수 있었습니다. 심양성의 동문 밖에 위치한 동관은 삼의묘(三義廟)가 있던 자리입니다. 지금의 요녕성 암 센터(辽宁省肿瘤医院)자리입니다. 삼의묘는 암센터의 전신 건물 터(그림7)에 있었다고 전합니다. 앞서 제시한 그림4의 <성경성도(盛京城圖)>에도 삼의묘의 위치가 기록되어있습니다. 동관(삼의묘)과 대남문 안의 조선관은 대청외교의 직접적인 공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밖에도 심양에는 소현세자가 대청외교의 실무를 담당했던 예부와 형부의 흔적이 남아있기도 합니다. 아쉬운 점이라면, 비록 옛 흔적이 많이 남아있지는 않지만, 지난했던 우리역사의 한 장면이 스며있는 조선관을 기억할 수 있는 상징물이라도 세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어쩌면 다른 측면에서의 외교력이 필요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심양 예부(좌)와 형부 터(우) 심양 예부(좌)와 형부 터(우) 그림9 심양 예부(좌)와 형부 터(우)

관소무역과 농장경영, 조선관의 궁핍함을 면하게 하다

당시는 명과 청의 전투가 지속되고 있었던 터라 전쟁물자의 조달이 필요했고, 가뭄으로 인한 식량사정이 좋지 않아 조선관에서도 직접 농사를 지어서 생활해야 했습니다. 세자빈 강씨의 주도로 심양 교외에서 경작을 했으며, ‘야판전’이라는 지명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 청의 팔왕(아제격)이 무역을 요구하게 되면서 점차 조선관의 관소무역도 활발해지게 되었습니다.

팔왕(아제격)의 소상(심양 팔왕사)(좌), 조선관 야판전 노과새 일대(우) 팔왕(아제격)의 소상(심양 팔왕사)(좌), 조선관 야판전 노과새 일대(우) 그림10 팔왕(아제격)의 소상(심양 팔왕사)(좌), 조선관 야판전 노과새 일대(우)

심양 조선관에서 이루어진 관소 무역은 명·청간 전쟁수행 중에 전쟁물자의 확보가 다급해진 청의 사정을 잘 대변하고 있습니다. 이미 여러 경로를 통하여 소현세자 일행에게 호감을 보여 온 팔왕(아제격) 및 제왕들의 조선 물품 거래 요구가 점차 확대되었습니다. 조선관에서 청측의 요구로 조선의 물품을 교역할 당시의 상황을『인조실록』(인조23년6월조)에서는 “포로로 잡혀간 조선인들을 모집하여 둔전을 경작하고, 곡식을 쌓아두고 그것으로 진기한 물품과 무역하느라 관소의 문이 마치 시장과 같았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무역 활동은 명·청 전쟁으로 전쟁 물자와 경비를 부담해야하는 조선관의 어려운 사정을 감안한다면 나름대로 경제적인 부담을 완화시켜주는 호재였을 것이고, 어쩌면 이를 넘어서 재부를 쌓을 수 있는 기회로 작용하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심양 조선관에서 야판전을 경작하여 조선관의 생활물품을 조달하였던 사실은 많은 기록에 전합니다만, 필자의 주변에도 이와 연계되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하고 있기에 소개하고자 합니다. 서울 동숭동 대학로 인근의 낙산 중턱에는 작은 채소밭이 꾸어져 있습니다. 일명 ‘홍덕이 밭’(弘德田)입니다. 대학로와 낙산 사이에 있는 동숭동에 본래의 ‘홍덕이 밭’이 있었다고 전해져 왔는데, 수년 전 낙산의 낡은 시민아파트를 헐고 공원화하면서 역사교육의 현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낙산 중턱으로 옮겨 조성한 텃밭입니다. 이 텃밭에 약간의 목화, 배추, 무, 파, 콩 등 야채류 농작물을 경작하고 있습니다. 홍덕이 밭 유래의 시대적 배경이 바로 소현세자를 따라 심양 볼모 생활을 했던 봉림대군(효종)의 추억과 관계됩니다.

 서울 낙산 홍덕이 밭(弘德田)  서울 낙산 홍덕이 밭(弘德田) 그림11 서울 낙산 홍덕이 밭(弘德田)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삼전도에서 항복한 뒤, 효종(당시 봉림대군)이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심양에 있을 때 따라가 모시던 나인(內人) 홍덕(弘德)이라는 여인이 심양에 있으면서 야판전의 채소를 가꾸어 김치를 담가 효종에게 날마다 드렸다. 이후 볼모에서 풀려 본국으로 돌아온 후에도 홍덕이의 김치 맛을 잊을 수가 없었던 효종은 낙산 인근의 채소밭을 홍덕에게 주어 김치를 담가 궁궐에 대게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 3권 동국여지비고 제 2편 한성부편 홍덕전 조 >

나인 홍덕이가 바친 김치 역시 당시 심양 조선관이 야판전을 경작하여 조달했던 배추로 담갔던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효종이 나인 홍덕에게 텃밭을 하사하고 김치를 담가 바치라고 했던 이야기의 이면에는, ‘홍덕이 김치’를 통해 효종 스스로 심양 볼모지의 야판전 김치를 씹으며 보내야했던 당시의 치욕을 상기함으로써 북벌에 대한 의지를 더욱 다지는 방편으로 삼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비록 낙산자락의 작은 텃밭에 불과하지만, 홍덕이 밭은 단순히 ‘효종의 추억의 김치를 대던 곳’이 아닌, ‘효종의 북벌의지를 다지게 하던 곳’으로 의미부여를 다시 해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혹여 낙산을 방문할 기회가 있다면 ‘홍덕이 밭’도 꼭 둘러보시기 권합니다.
소현세자는 당대 조선이 처한 현실을 가장 치열하게 고민하고 대처했던 인물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심양은 후금과 청의 수도였고, 청이 입관한 이후로는 청의 배후 도시로서 의미하는 바가 적지 않았던 공간입니다. 명·청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조선의 왕세자로서 겪었던 볼모 생활의 흔적들이 아직도 심양의 이곳저곳에 지명으로, 옛터로 남아있습니다.
볼모로 잡혀 와 청의 땅에서 살아간 조선인들의 흔적을 살펴보고, 역사의 한 장면을 되살리는 일은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우리의 역사이고 선조의 삶이었기에 기억하고 잊지 말아야 하겠지요.

병자호란 이후 외교 임무를 받고 연경으로 향하던 조선 사신들의 마음도 매우 무거웠을 것입니다. 오랑캐의 나라라 불리던 청이 중원을 장악하고, 소현세자의 귀국과 급서(急逝), 봉림대군의 왕위 계승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격변이 이어졌습니다. 병자호란으로 인한 국난의 극복과 정신적 치유의 과정은 매우 고통스러웠습니다. 당시 사신들은 치욕의 공간 심양으로 들어서면 괜시리 위축되는 심리를 감추려는 듯 오히려 오랑캐에 대한 극도의 분노와 비분감을 시문으로 남기기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심양을 떠난 사행들은 요하를 건너 거칠고 진창 투성이인 이도정(二道井) 일대를 거치면서 산해관(山海關)으로 발길의 방향을 잡아야 했습니다.

연행의 초-중-종절 구분(여지도-의주북경사행로/서울대 규장각 소장) 그림12 연행의 초-중-종절 구분(여지도-의주북경사행로/서울대 규장각 소장)

연행의 중절(中節)구간에 해당하는 심양~산해관 일대는 명·청간 전투가 가장 치열하게 전개되던 곳이었습니다. 명·청 전투에 참전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에 대한 사연과 명조의 붕괴에 대한 기억 때문에 이 지역을 통과하던 사행들은 심리전(心理戰)이 지속되던 공간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행을 힘들게 한 것은 행역삼고(行役三苦), 즉 노정의 세 가지 괴로움(새벽의 안개, 낮의 먼지, 저녁 바람)이었습니다. 조·청 외교를 담당했던 사신들이 겪어야 했던 그 지난했던 전장의 기억과 여정의 고단한 흔적들은 다음 회에서 소개하겠습니다.

작가소개

신춘호 작가
신춘호
한중연행노정답사연구회 대표로 활동하며 역사공간에 대한 영상기록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국내외에서 ‘연행노정 기록사진전’을 진행하였고, TV다큐멘터리 ‘열하일기, 길 위의 향연’(4편)을 제작(촬영·공동연출)하였다. 저서는 <오래된 기억의 옛길, 연행노정> 등이 있다.
“명나라 장수와 왜장의 휴전 조약 - 조선은 없었다”

약포집 정탁 <피난행록>, 1592-09-02
1592년 9월 2일, 도원수(都元帥) 김명원(金命元)과 순찰사(巡察使) 이원익(李元翼)이 중앙으로 올린 긴급 보고에 “명나라 장수와 왜장이 서로 맹약을 맺어 서로의 사이에 10리를 한계로 표지를 세우고 이 표지를 넘어서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왜인들은 곡식을 베어가지 못한다”고도 하였다.

“그대 나라의 경계가 여기에 있다는 근거는 무엇인가”

백두산정계비 홍세태 <백두산기>, 1712-04-29
백두산은 북방 뭇 산의 으뜸으로서, 청나라가 이곳에서 흥기하였다. 우리 북쪽 변경에서 300여 리 떨어져 있으며, 중국 사람들은 이 산을 장백산이라 하고, 우리는 백두산이라고 일컫는다. 두 나라가 산 위의 두 강으로써 경계를 삼고 있는데, 땅이 매우 거칠고 멀어서 상세히 알지 못한다.

“왕세자를 찾아온 외교문서 작성의 달인 한석봉, 왕에게 보내지다”

탁청정(濯淸亭) 편액 – 서사자(書寫者) 한호(韓濩) 정탁 <피난행록>, 1592-08-14
1592년 8월 14일 사포(司圃) 한호(韓濩, 한석봉)가 평안남도 성천(成川)에 있는 분조(分朝)를 찾아왔다. 다음 날인 15일 외교문서를 작성해야 할 행재소(行在所)의 일이 급하다고 여겨 곧장 의주 행재소로 한호를 보내었다.

“심양의 객관에 갇힌지 여러 해,
북경행 임무에 하늘이 아득하다”

심양관구지도 세자시강원 <심양일기>, 1644-07-10
1644년 7월 10일, 전임 정승 최명길(崔鳴吉)이 소현세자(昭顯世子)께 감사의 글을 올린데 대해 소현세자께서 "올린 글을 보니 내가 매우 부끄럽소. 안심하고 사양하지 마시오. 그대가 나라를 위해 애쓰지 않은 것이 아니오. 이미 지나간 일은 생각할 필요가 없소. 또한 오늘날의 세상을 생각하면 차라리 죽은 듯이 꼼짝하지 않고 싶소. 외로이 심양의 객관에 갇혀 여러 해를 지냈는데, 또 북경으로 가야 하니 하늘이 아득한 것처럼 내 마음도 슬프구료. 그대들이 우리나라 조선으로 돌아가서 나를 귀국시켜줄 방법을 마련하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쁘겠소."라고 답하였다.
유배지 심양을 떠나 북경으로 가야 하는 인질의 애달픈 심정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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