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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판에 새긴 이름, 편액

청백을 전수받다, 전백당(傳白堂)

모든 수령 도망할 제 거동보소. 인궤(印櫃) 잃고, 과줄 들고, 병부(兵符) 잃고 송편 들고, 탕건 잃고 용수 쓰고, 갓 잃고 소반 쓰고, 칼집 쥐고 오줌 누기, 부서지니 거문고요 깨지나니 북장고라. 본관이 똥을 싸고, 멍석 구멍 생쥐 눈 뜨듯하고, 내아(內衙)로 들어가서,
“어 추워라! 문 들어온다 바람 닫아라! 물 마르다. 목 들여라!”

어사출두에 놀란 관속과 수령들이 허둥대며 도망하는 모습을 박진감 넘치는 자진모리장단에 얹어 희화화한 『춘향가(春香歌)』의 「어사출두」 대목이다. 탐관오리(貪官汚吏) 변 사또 생일 잔치를 난장판으로 만든 어사 이몽룡의 등장은 우리에게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변 사또의 수청(守廳)을 거역하여 죽을 위기에 처한 춘향에게 ‘죽어 마땅하되 내 수청도 거역할까?’라는 어사의 한 마디는 ‘수청 강요’의 부당함을 극명하게 드러내며 절정으로 치닫는다. 이제 이몽룡이 춘향을 향해 ‘어서 얼굴을 들어 나를 보라’ 이 한마디만 하면 모든 오해가 풀리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다.


『열녀춘향수절가(烈女春香守節歌)』 (출처 :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이 이야기의 시작, 그러니까 이팔청춘 이몽룡이 오작교 다리 가의 광한루에 올라, 춘흥을 못 이기고 그네를 타는 춘향을 보고 한눈에 반한 때가 딱 지금 같은 춘삼월이었다. 사랑에 빠지기 좋은 봄, 꽃놀이하러 가기 딱 좋은 오늘은 4월 10일,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일이다.

청렴(淸廉)이란
목자의 본무요, 갖가지 선행의 원천이요, 모든 덕행의 근본이니,
청렴하지 않고서 목자가 될 수는 절대로 없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목민심서(牧民心書)』 「율기육조(律己六條)」의 ‘청심(淸心)’에서 목민관(牧民官)이 위민(爲民)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청렴’해야 한다고 말한다. 청렴하고 올곧은 선비의 전형이자 『춘향전』 이몽룡의 실제 모델인 계서(溪西) 성이성(成以性, 1595~1664), 그의 사랑채 대청에 걸린 전백당(傳白堂)을 바라보며, 청렴과 청백리(淸白吏)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암행어사 출두야!


1647년 11월 8일, 암행어사가 된 성이성은 인조가 하사한 마패[馬牌: 관리나 암행어사 등이 공무로 지방을 갈 때 역마를 징발하는 증표로 쓰던 패]와 유척[鍮尺: 놋쇠로 만든 표준자. 지방 수령이나 암행어사 등이 검시(檢屍)할 때 쓰는 자]을 지니고 남관왕묘에 가서 봉서[封書, 겉봉을 봉한 편지. 암행어사로 임명된 자는 지정된 대문 밖에 나가 봉서를 열어보고 임무를 확인한 뒤 목적지로 향한다.]를 열어보고 하루에 100리 길을 달려 남원에 도착했다.


마패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여기서부터 성이성은 변복(變服)을 했다. 편자만 남은 헌 망건에 다 떨어져 깃만 남은 도포를 입고 뒤축 없는 허름한 버선에 살만 남은 헌 부채를 쥔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걸인이었다.

민심을 살피는 일이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인가. 하루는 성이성이 길가의 집에서 잠을 청하는데 주인이 화를 내며 뺨을 때렸다. 또 어떤 날은 밤에 불이 없어 멍석을 깔고 앉았는데 떠돌이 행상 네 명과 같이 자야 했다. 암행어사는 잠자리뿐 아니라 꼬박꼬박 끼니를 챙길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떠돌이 행상의 도움으로 겨우 허기를 면했다.

성이성이 호남의 이곳저곳을 살피고 있을 때, 호남 열두 읍의 수령들이 크게 잔치를 열고 있었다. 걸인 행색을 한 그가 잔칫상을 바라보며 음식을 청하니 “객이 능히 시를 지을 줄 안다면 이 자리에 종일 있으면서 술과 음식을 마음껏 먹어도 좋지만 그렇지 못하면 속히 돌아감만 못하리라”라고 하였다.

樽中美酒千人血    준중미주는 천인혈이요
술독 안의 아름다운 술은 일천 백성의 피요

盤上佳肴萬姓膏    반상가효는 만성고라
상 위의 아름다운 안주는 일만 백성의 기름이라

燭淚落時民淚落    촉루낙시에 민루락이요
촛불 눈물 떨어질 때 백성의 눈물이 떨어지고

歌聲高處怨聲高    가성고처에 원성고라
노랫소리 높은 곳에 백성의 원성이 높았더라

성이성은 한 장의 종이를 청해 곧 시를 써 주었다. 수령들이 시를 보고 의아해할 때, 서리가 ‘암행어사 출두야’를 외쳤다. 여러 관원이 일시에 모두 흩어졌는데, 이때 봉고파직(封庫罷職) 된 자가 여섯이나 되었다.


마패를 보여주는 암행어사 (출처 : KBS 드라마 《암행어사: 조선비밀수사단》, 2020)

이 시는 『춘향전』에서 이몽룡이 지은 ‘금준미주(金樽美酒)’로 시작하는 시와 몇 글자를 제외하고는 같다. 성이성의 4대손 교와(僑窩) 성섭(成涉, 1718∼1788)은 『교와문고(僑窩文稿)』에 성이성의 암행어사 행적에 대해 기록했다. 이야기 속 이몽룡과 비슷한 성이성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 본다.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진 청백한 삶


부용당(芙蓉堂) 성안의(成安義, 1561~1629)는 성이성이 태어나기 4년 전인 1591년(선조 24) 식년 문과에 급제,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로서 창녕에서 의병을 모집해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1552~1617) 휘하에서 활약했다.


성안의 영정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정유재란(丁酉再亂)이 한창이던 1598년(선조 31), 영남조도사(嶺南調度使)로 안동에 온 성안의는 『부용당일고(芙蓉堂逸稿)』의 「임진왜란시장계(壬辰倭亂時狀啓)」에 명나라 군사들의 군량 충당에 관한 것과 명나라 군사들의 횡포에 관한 것을 구체적으로 기록했다. 그의 빈틈없는 공무 수행을 지켜본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은 “제세(濟世)의 재간이 있다.”라고 찬사를 보냈다.

1607년(선조 40) 2월, 남원 부사(南原府使)가 된 성안의는 아들 성이성을 데리고 남원으로 향했다. 성안의 이전에 부임한 남원 부사들은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이직하거나 파직되어 쫓겨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과 달리 성안의는 남원 부사로 있었던 4년여 동안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이를 기리기 위해 ‘부사 성안의 선정비’를 세웠는데 남원 광한루(廣寒樓)에 남아있다.

열세 살의 성이성은 남원 부사로서 선정을 베푼 아버지를 보며 목민관의 기본 덕목을 보고 배웠을 것이다. 그는 1627년(인조 5) 식년 문과의 병과로 급제, 1635년(인조 13)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홍문관 부수찬(弘文館副修撰)·부교리(副校理)를 거쳐 이듬해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을 지냈다.

1637년(인조 15),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이 된 성이성은 윤방(尹昉)·김류(金瑬)·심기원(沈器遠)·김자점(金自點)의 대신들이 나라를 망치고 불충(不忠)을 저지른다는 소(疏)를 올렸다. 그는 서슴지 않고 직언(直言)하는 사람이었다. 임금 앞에 나아가 “아! 직언하는 선비는 물러나고 아첨하는 사람은 진출하여 충심으로 간하는 길이 막히고 영합하는 것이 풍속이 된다면 전하의 욕망은 이룰 수 있지만, 전하의 나라는 끝내 어떻게 되겠습니까.”라고 하며 자신의 충간(忠諫)을 밝혔다. 직언하는 사람은 외롭다. 바른 소리는 부담스럽고 불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종종 주위의 시기를 받았고, 관직 생활이 순탄치 않았다.

1645년(인조 23) 3월 18일 성이성은 사은 겸 진하사(謝恩兼進賀使)의 서장관[書狀官: 외국에 보내는 사신 중, 사행을 기록하고 외교 문서의 작성을 맡는 임시 직책]이 되어 인평대군(麟坪大君)을 모시고 연경(燕京)에 다녀오면서 『계서선생일고』의 「연행일기(燕行日記)」을 남겼다.

한창 사행 중이었던 5월 24일, 성이성은 군관·역관들과 함께 흑단령(黑團領)과 흑사모(黑紗帽)를 입고 청에 방물(方物)과 예물의 품목을 적은 단자를 올리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용골타(龍骨打)가 소현세자(昭顯世子)의 부고 소식을 전했다. 이역만리 타지에서 들은 세자의 죽음에 사신 일행은 통곡했다. 병자호란 이후에 떠난 굴욕적인 사행길, 그곳에서 돌아온 성이성의 짐보따리는 단출했다. 침구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의 청심(淸心)은 사신일 때도 빛났다.

성이성은 세 번의 암행어사와 한 번의 진휼어사(賑恤御史)에 임명되어 지방 수령의 잘잘못과 백성의 고통, 어려움을 탐문하고 임금에게 보고하는 직무를 수행했다. 특히 피폐한 민중의 삶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극에 달했고, 임금은 지방 수령의 무능과 비리를 적발하기 위해 빈번히 암행어사를 파견했다. 1655년(효종 6), 진주 목사(晉州牧使)를 한 그 역시 암행어사의 감찰(監察) 대상이었다. 어사 노봉(老峯) 민정중(閔鼎重, 1628~1692)은 조정에 돌아가 그가 목사로서 청렴하고 선정을 베푼다고 보고했다. 이에 임금은 성이성에게 표리[表裏: 옷의 겉감과 안감]를 하사하였다.

「江界淸白仁政銘(강계청백인정명)」

斯文我侯 天性剛明    사문에 우리 수령께서, 천성이 강직하고 밝았네
志存清儉 自奉儉約    청렴에 뜻을 두셨으니, 스스로 검소하셨다네
政平訟理 闔境蘇殘    정사 공평하고 송사 이치에 맞아, 온 고을 어려운 이 살렸네
省刑薄斂 吏民俱安    형벌 줄고 세금 가벼워져, 관리와 백성 모두 편안하네
政平訟理 闔境蘇殘    한 해 다스렸건만, 영원토록 잊을 수 없구나

성이성은 담양 부사, 강계 부사 등 다섯 고을을 다스렸는데, 가는 곳마다 선정을 베풀어 청백인정비가 4곳에 세워졌다. 위의 「강계청백인정명」은 1660년(현종 1), 그가 강계 부사(江界府使)로 있을 때 백성들의 삼세[蔘稅: 산삼, 옹삼, 인삼에 부과한 세금]를 면제하고, 권문세가의 부정한 삼 거래를 막아 백성을 이롭게 한 일에 대한 것이다. 강계 사람들은 그를 ‘관서의 살아있는 부처[關西活佛]라고 칭송했다.

“신하 된 자로서 지켜야 할 도는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 충직으로 임금을 섬기고, 둘째, 자혜로움으로 백성을 대하고, 셋째, 벼슬에는 청백해야 한다. 성이성이 평생 동안 살아오면서 이 세 가지에 능했고, 명예와 지위를 취하는 데는 능하지 못했다.”

이는 성이성의 행장(行狀)이다. 성이성은 1695년(숙종 21) 청백리로 선출되었다. 공직 정신의 표상인 청백리에 이름을 올린 조선시대의 관리는 200명이 조금 넘는다. 청렴결백한 공직 생활은 그만큼 힘든 일이다. 한국국학진흥원은 전 직원을 대상으로 청렴 교육을 한다. 얼마 전, 청탁금지법과 이해충돌방지법에 관한 온라인 교육을 했는데, 나는 바쁘다는 핑계로 흘러들었다. 나는 내가 청렴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부패(腐敗)하지도 않다고 은연중에 생각했다. 과연 그럴까?




전백당(傳白堂)


포근한 햇살과는 달리 새초롬한 봄바람에 옷깃을 여미게 되는 3월, 봉화군 물야면 가평리를 찾았다. 그곳에는 성안의를 추모하기 위해 지은 춘우재(春雨齋)와 성이성이 살던 계서당(溪西堂) 종택이 있다. 후손들은 ‘봄비가 만물을 고요히 소생시킨다는 의미’의 춘우재에서 후손들을 가르치며 성이성의 청백리 정신을 이어갔다.


춘우재와 춘우재 편액


성안의가 살았던 계서당은 허름한 초가였다. 그러던 것이 그의 장남 성갑하가 충재(沖齋) 권벌(權橃, 1478~1548)의 후손인 권석충(權碩忠)의 딸에게 장가들면서 처가의 도움을 받아 지금 모습의 종택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계서당 측면 대청에 ‘전백당’이 걸려 있다. 성이성의 5세손 전백당(傳白堂) 성언극(成彦極)의 당호이기도 한 전백당은 ‘성이성의 청백(淸白) 정신을 본받고 실천하고자 하는 후손들의 마음’이 담겨 있다.


계서당과 계서당 편액

전백당 편액


무심한 봄바람에 계서당 처마 밑의 풍경이 청아한 소리를 내며 흔들린다. 어쩌면 청렴과 부패는 종이 한 장 차이일지도 모른다. 탐욕의 유혹이 끊임없이 불어와 공직자를 흔든다. 흔들릴 수 있다. 그때마다 나 자신을 경계하며 이성의 눈을 감지 않는다면 맑은 소리가 온 산천에 울려 퍼질 것이다.


계서당 풍경


성이성이 청백리가 된 것은 오로지 그 혼자만이 청렴했기 때문일까? 그의 가족이 부정 청탁을 받았다면 어땠을까, 전백당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정약용은 『목민심서』 「율기육조」의 ‘제가(齊家)’ 편에서 “한 지방을 다스리려는 이는 먼저 제 집안을 잘 단속해야 한다.”라고 했다. 드라마 《안나(ANNA)》의 주인공 이유미는 부정 청탁을 받게 된다. 서울시장 후배인 남편의 시장 당선이 유력해지자 국회의원 사모들이 그녀를 찾아가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말하고 돈을 넣은 가방을 선물한다. 청탁을 처음 받았을 때 잠시 고민하던 주인공은 횟수가 반복되자 쉽게 뇌물을 받는다. 이 드라마를 보며 성이성이 청렴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가족들 모두가 청렴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주인공 이유미가 받은 종이가방 속 돈다발 (출처 : 쿠팡플레이 드라마 《안나》, 2022)




소확횡 대신 투표


‘내로남불’이란 말이 있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뜻이다. 혹 나는 청렴과 관련하여 ‘내로남불’하고 있지는 않나 되짚어 본다. 청렴에 대한 이중잣대가 부정부패를 불러오는 작은 불씨가 아닐까? 사무실의 믹스커피를 마시며 직장인 소확횡, 소소하지만 확실한 횡령을 내가 하고 있지는 않았나 반문했다.

국민권익위원회는 2023년도 국가청렴도(CPI · 부패인식지수) 조사에서 한국이 180국 가운데 32위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전년도보다 순위는 한 계단 하락했으나, 점수는 100점 만점에 63점으로 역대 최고 점수를 유지했다. 70점을 넘어야 ‘사회가 전반적으로 투명한 상태’로 평가하는데 우리가 받은 63점은 ‘절대적인 부패에서 벗어난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국가청렴도를 높이기 위해 개개인의 청렴한 생활과 더불어 국민을 위해 일할 청렴한 공직자를 잘 뽑는 것 또한 중요하다.

가까운 선거구로 투표하러 가는 길, 라디오에서 하이포(HIGH4)와 아이유(IU)의 《봄 사랑 벚꽃 말고》가 흘러나온다. “꽃잎이 피어나 눈 앞에 살랑거려도, 난 다른 얘기가 듣고 싶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가 버릴 봄 사랑 벚꽃 말고, 투표하러 가자는 말.”




정      리
이복순 (한국국학진흥원)
자      문
권진호 (한국국학진흥원)
참      고
1. 스토리테마파크 (https://story.ugyo.net)더보기
2. 유교넷 (https://www.ugyo.net)더보기
3. 선인의 일상 생활, 일기 (https://diary.ugyo.net)더보기
4. 조선왕조실록 (https://sillok.history.go.kr)더보기
5. 한국고전번역DB (https://db.itkc.or.kr)더보기
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s://encykorea.aks.ac.kr)더보기
7.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s://www.heritage.go.kr)더보기
8. 국립중앙박물관(https://www.museum.go.kr)더보기
9.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문화박물관, 『조선 청백리, 계서 성이성』, 한국국학진흥원, 2014.
10. 설성경 역주, 『춘향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95
11. 이을호, 『현암 이을호 전서 9, 목민심서』, 한국학술정보, 2015.
12. 설성경, 「『춘향전』 연구사로 본 신국문학적 연구의 한 방향 – 원작가와 도령 모델의 문화콘텐츠화를 중심으로-」, 『국학연구론총』 제12집, 2013.
13. 안동 MBC, 『춘향전 탄생의 비밀, 암행어사 성이성』, 유튜브 안동MBC PLUS, 2022.12.18.
14. 안동 MBC, 『권진호의 유교 현판 이야기 – 16편 봉화 계서당과 전백당』, 유튜브 안동MBC NEWS, 2018.02.20.
15. 김경필 기자, 「한국 국가청렴도 세계 32위… OECD 국가 중 22위」 조선일보, 2024. 1. 30.
“다른 이의 공을 빼앗으려던 감사 심돈, 톡톡히 망신당하다”

김령, 계암일록, 1615-07-11 ~

전 감사 심돈(沈惇). 그는 기생에 빠져 민생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또 1615년 1월에는 동래부사 박경업(朴慶業)과 공을 다투기도 하였다. 이에 관해서는 우스꽝스러운 일화가 전해진다.

일찍이 박경업이 엉뚱한 사람을 잡아 역적 박치의(朴致義)라고 하였다. 이 자를 데리고, 바로 계를 올려 보내느라 영천[榮州]을 지나게 되었는데, 마침 그곳에 있던 심돈이 그 이야기를 듣고는, 사람과 말을 준비한다는 핑계로 그 장계를 정지시켰다. 그리고는 급하게 치계(馳啓)하고, 스스로 자신의 공으로 삼아 말하기를 “신은 성상 앞에서 명을 받은 이후로 역적을 포획하는 것을 일삼아 항상 군현 내를 경계하였더니 지금 바로 동래에서 잡게 되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는 박경업의 공이 자신보다 앞서는 것을 꺼려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박경업이 잡혀가게 되자 심돈이 점차 부끄러움을 느끼고 사직소를 올렸다.

임진왜란 이후 경상도에 감사로 온 자는 거의 20여 명이 되었다. 혹자는 재간이 있으나 청렴하지 않았고, 혹자는 청렴하였으나 재주와 기량이 부족하였다. 형편없는 탐관오리가 있었으며 광포하고 패악한 자도 있었다. 한 고을을 편안하게 다스린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조선시대 지방관의 평가와 승진”

조선시대 지방관의 인사고과는 고려시대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고려시대인 989년(성종 8) 처음 실시해 6품 이하 관리들의 인사에 반영되었고 1018년(현종 9) 연말종합평정제도인 연종도력법(年終都歷法)이 시행되었고, 1105년(예종 즉위년) 지방관 평가제도인 수령전최법(守令殿最法)이 수립되었다. 또, 공민왕 때 근무일수를 기준으로 성적을 평정하는 도숙법(到宿法)이 마련되었고, 공양왕 때 근무월수를 기준으로 성적을 평정하는 개월법(箇月法)이 신설되었다.

고려시대의 고과법에서는 특히 지방관의 평정업무가 강조, 강화되었다. 그 기준은 이른바 수령5사(守令五事), 즉 농지의 개척, 호구(戶口)의 증식, 부역의 균등, 소송의 신속처리, 도둑의 단속능력 및 업적이었다. 이러한 업무는 이부(吏部)에 소속된 고공사(考功司)에서 주로 관장하였다.

조선시대 1392년(태조 1)에 바로 고과법을 시행하였다. 수령5사에 학교의 진흥과 예속의 보급 두 종목을 추가해 수령칠사(守令七事)로 하였다. 또 새로운 공직자 윤리규범 4조, 즉 덕의(德義)·공정(公正)·청근(淸謹)·근면(勤勉)을 강조해 이들 조항의 실천여부를 점수화하였다. 그 뒤 세종·세조대를 지나면서 고과에 관한 규정들이 제정, 보완되어 『경국대전』에 수록되었다.

『경국대전』에는 고과와 포폄의 두 조항으로 나누어져 있다. 고과는 관리들의 일반근무동향 기록제도와 같은 것으로, 이조의 고공사에서 주관해 기록·관리하였다. 포폄은 정기근무성적 평정제도와 같은 것으로, 경관(京官, 중앙의 여러 부서관리)들은 소속관아의 책임자에 의해서, 지방관들은 관찰사에 의해서 매년 2회씩 정기적으로 행해졌다. 포폄 역시 개별적으로 평가된 성적은 이조에 통보되어 인사에 반영되거나 참고자료로 기록, 보존되었다.

『경국대전』 고과조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근무일수[仕數]와 근태상황을 엄격히 기록, 관리하였다. 이는 당상관을 제외한 모든 관리가 날짜로 계산되는 소정의 임기를 마쳐야 전보[遷官]와 진급[加階]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근무시간도 하절기에는 묘시(卯時)에서 유시(酉時), 동절기에는 진시(辰時)에서 신시(申時)로 규정하였다. 둘째, 업무실적을 점검하였다. 특히, 형조·한성부·개성부·장례원(掌隷院) 등의 사법기관에서는 당하관들의 재판처리건수를 보고하도록 하고, 기준에 미달되는 자는 징계하였다. 셋째, 매년 말에 경관들은 이조에서 실제 근무일수와 기타 사항들을 갖추어 왕에게 보고하고, 지방관들은 관찰사가 수령7사(農桑·學校·詞訟·奸猾·軍政·戶口·賦役)의 실적을 갖추어 왕에게 보고하였다. 넷째, 질병으로 인한 장기결근자(연간 30일 이상)·범법자(특히 왕족이나 공신)·집회불참자 및 근무성적평정에서 하등급을 받은 자, 사소한 죄로 파직된 자 등을 보고, 징계, 기록하고 일정기간에 재임용되지 않도록 하였다. 다섯째, 녹사(錄事)와 서리(書吏)의 근태상황을 점검하고 불량시에 징계하였다. 특히 서리들은 명부를 따로 비치해 관리함으로써 그들의 부정과 횡포를 막게 하였다.

일기에서 보이는 오모의 승진을 위한 부임은 아마도 근무일수를 모두 채우지 못하여 온 것이 아닐까 싶다.

“수령칠사(守令七事)”

수령(守令)은 고려·조선시대 주(州)·부(府)·군(郡)·현(縣)의 각 고을을 맡아 다스리던 지방관의 총칭이다. 군수와 현령(縣令)의 준말로도 부르며 속칭 ‘원님’이라고도 부른다. 왕이 임명하고, 사법권, 군사권, 행정권의 권한을 행사했다.

조선시대의 수령은 부윤(府尹, 종2품)·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 정3품)·목사(牧使, 정3품)·도호부사(都護府使, 종3품)·군수(郡守, 종4품)·현령(縣令, 종5품), 현감(縣監, 종6품) 등이다. 그 품계는 종2품에서 종6품까지에 걸쳐 있었다. 주·부·군·현의 읍격(邑格)과 수령의 품계는 호구·전결(田結)의 많고 적음에 따라 차이가 있었는데, 행정상으로는 모두 관찰사의 관할 밑에 있었다.

≪경국대전≫에 수록된 수령의 정원은 부윤 4인, 대도호부사 4인, 목사 20인, 도호부사 44인, 군수 82인, 현령 34인, 현감 141인이었다. 후기로 올수록 수령의 정원이 증가하는데, 특히 도호부사의 정원이 늘어났다.

수령에 임용되려면 문과·무과·음과 중 하나를 통과해야 하는데, 상급수령에는 문과가 많고, 연변(沿邊) 군현에는 무과가 많으며, 중소 군현에는 음과가 절대 다수였다.

수령의 임무는 칠사(七事)가 말해 주듯이 권농(勸農)·호구 증식·군정(軍政)·교육 장려·징세 조역(徵稅調役)·소송 간평(訴訟簡平)·풍속 교정이었으며, 수령의 하부 행정 체계로서는 향리와 면리임(面里任)이 있고, 자문 및 보좌 기관으로 유향소(留鄕所, 鄕廳)가 있었다. 또한 감사와 병사(兵使)를 지낸 사람은 그 도의 수령이 될 수 없는 등 여러 가지 제한 규정이 있었다.

수령칠사(守令七事)는 조선시대 수령이 지방을 통치함에 있어서 힘써야 할 일곱 가지 사항이다.

농상성(農桑盛 : 농상을 성하게 함)·호구증(호구를 늘림)·학교흥(學校興 : 학교를 일으킴)·군정수(軍政修 : 군정을 닦음)·부역균(賦役均 : 역의 부과를 균등하게 함)·사송간(詞訟簡 : 소송을 간명하게 함)·간활식(奸猾息 : 교활하고 간사한 버릇을 그치게 함)의 일곱가지로서 ≪경국대전≫ 이전(吏典) 고과조(考課條)에 실려 있다.

고려시대에는 수령오사, 즉 전야벽(田野闢 : 전지를 개척함)·호구증·부역균·사송간·도적식(盜賊息 : 도적을 그치게 함)의 다섯 가지가 있어서 수령 고적(考績)의 법으로 삼았다.

양자를 비교하면 오사의 전야벽·도적식과 칠사의 농상성·간활식은 문자는 달라도 내용은 같으므로 칠사는 오사에 학교흥·군정수를 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수령오사는 조선 초기에 한동안 그대로 사용되어오다가 태종 6년(1406) 12월의 기록에 처음 칠사가 등장하였다.

이 때 칠사를 존심인서(存心仁恕 : 마음은 仁과 恕에 둠)·행기염근(行己廉謹 : 몸소 청렴과 근신을 행함)·봉행조령(奉行條令 : 조칙과 법령을 받들어 행함)·권과농상(勸課農桑 : 농상을 권장해 맡김)·수명학교(修明學校 : 학교를 수리하고 학문 풍토를 밝게 함)·부역균평(賦役均平 : 역의 부과를 균등하고 공정하게 함)·결송명윤(決訟明允 : 소송에 대한 판결은 공명하고 진실되게 함)을 들고 있다.

이 일곱가지 중 권과농상은 ≪경국대전≫에 수록된 수령칠사의 첫째인 농상성, 수명학교는 셋째인 학교흥, 부역균평은 다섯째인 부역균, 결송명윤은 같은 여섯째인 사송간과 문자는 약간 달라도 내용은 같으므로 별로 문제가 없다.

그러나 존심인서·행기염근·봉행조령의 세 가지는 추상적인 표현일 뿐 아니라 내용도 ≪경국대전≫과 아주 다르다. 그리고 수령오사 중 호구증과 도적식이 빠져 있는 것도 이상하다. 태종 때 이러한 칠사지목(七事之目)이 어떤 경로를 밟아 이루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1406년(태종 6) 이후에도 칠사란 말이 실록에 산견(散見)되고 있다. 또 태종 11년(1411) 윤12월의 기사에 보이는 칠최지목(七最之目) 중에 호구증이 나오고 있는 것을 보면, 수령칠사는 고려적인 제도가 조선적인 제도로 전환하는 태종·세종대에 ≪경국대전≫의 내용과 비슷한 원형이 마련되었으리라고 보인다.

그러다가 ≪경국대전≫과 똑같은 수령칠사가 실록에 처음 나오는 것은 훨씬 뒤인 성종 14년(1483) 9월의 기사이다. 즉 성종이 평택현감 변징원(卞澄源)을 인견하고 수령칠사를 물었을 때 그는 서슴지 않고 농상성·학교흥·사송간·간활식·군정수·호구증·부역균의 일곱가지를 암송하고 있다.

그러므로 ≪경국대전≫에 보이는 수령칠사는 태종과 세종대에 그 기틀이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위의 ≪성종실록≫에 보이는 수령칠사와 같이 간결하게 다듬어진 것은 ≪경국대전≫ 편찬 때로 보인다.

수령칠사는 그 뒤 조선 중·후기에도 그대로 지켜져 왔던 것으로 보인다. 1737년(영조 13) 인재의 선택을 하교하면서 목민관의 역할에서 수령칠사의 중요성을 예시하고 있다. 이후 1793년(정조 17)에도 수령칠사에 대한 기록이 보인 것으로 보아 이 시기까지도 지켜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권문해, 굶주린 백성을 위해 동분서주”

권문해, 초간일기,
1590-01-01 ~ 1590-02-02

1590년 1월 6일, 굶주린 백성들이 늘어갔다. 권문해는 굶주린 마을 사람들을 도울 방도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 했다. 그리고 결국 직접 백성들을 찾아다니며 곡식을 나누어 구휼하기 시작했다. 대구 달성지역의 하빈(河濱)의 동면, 북면, 서면의 각 마을로 향하여 분진(分賑)하였다. 아침부터 시작된 구휼은 밤이 깊어가도록 이어졌다. 권문해는 밤이 깊어지자 관아로 돌아오지 못하고 윤효언(尹孝彦)의 집을 찾았다. 다음날도 분진은 계속되었다. 하빈현의 동면과 북면 서면에 이어 남면의 구휼이 시작되었다. 남면의 사람들도 굶주린 이들이 마을의 정자 앞에서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오전부터 시작한 분진은 오후 1시 되어서 끝이 났다. 이어 신서촌(身西村) 성당리(聖堂里)로 향하였다. 1월 6일부터 시작된 구휼은 사흘간 계속되었다. 1월 9일, 마지막으로 임암현(立岩縣), 내역리(內驛里), 검정리(檢丁里), 해안현(解顔縣)의 동촌리, 상향리, 서부리의 마을까지 모두 분진을 하였다.

사흘간 계속되는 분진이지만 여전히 굶주린 백성들이 이어졌다. 권문해는 한 달이 지난 2월 2일에도 읍내의 마을을 순회하며 백성들에게 쌀과 소금, 간장을 나누어 주었다.

“담배피우며 시강하다가 귀양 간 시관”

담배를 피우며 강연하는 시관 노상추, 노상추일기, 1792-02-18

학례강(學禮講) 시관이 귀양을 갔다. 시강을 할 때 생도들 앞에서 몸을 비스듬히 하고 앉아 관을 비뚤게 쓰고 담배까지 피웠으며 잡스러운 농담도 툭툭 던져댔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왕의 귀에도 들어갔다. 왕은 한심해하며 시관 모두를 먼 지방으로 귀양을 보내게 하였다. 또 이런 풍조를 알면서도 감찰해내지 못한 감찰, 사관, 승문원·성균관·교서관의 여러 관원들도 잡아들여 신문하며 혼을 냈다. 당연히 이들 기관의 책임자인 대사성도 불려가 곤욕을 치렀다. 성균관의 재임(齋任)과 동재(東齋)·서재(西齋)의 반수(班首) 역시 모두 그 직무를 정지시켰고, 공무를 집행한 관리들도 추고 당했다. 미리 경계하지 못하고 왕의 귀에 들어 갈까봐 쉬쉬하며 서로 입을 다물고 있었던 죄 때문이었다. 이런 한심스러운 일이 있었음을 노상추는 조보를 읽고 알았다. 마침 생원시가 있는 날이었는데, 아마도 더욱 엄정한 분위기에서 치러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벌벌 떨면서 시험을 보겠구먼! 하며 노상추는 담뱃대에 불을 붙여 일부러 비뚜름하게 물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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