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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아래 엎드려 읽은 상소문, 그리고 임금의 눈물
1792년 4월 27일, 주상이
희정당(熙政堂)
에 납시어 서쪽을 향하여 단정하게 앉고, 진신과 장보들이 뜰 아래에 차례로 서니 보좌(寶座)와의 거리가 불과 10여 보 밖에 되지 않았다.
전상(殿上)은 시끄럽지 않고 고요하기만 한대 다만 승선 1명, 기주관 2명, 내관 2~3명이 좌우에 고개를 숙이고 엎드려 있었다. 승선이
교지(敎旨)
를 전하여 말하기를 “지난번
이지영(李祉永)
의 상소에는
비답(批答)
을 내리지 않았는데, 그대들은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천리를 와서 충정을 쏟아내니, 나의 뜻을 면전에서 알리지 않을 수 없어 그대 들을 부르게 하였으니 소두는 전(殿)에 올라와 상소문을 읽는 게 좋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우가 서쪽 계단을 따라 올라가서 동쪽을 향하여 꿇어앉아 엎드려 소장을 읽었다. 소장을 반도 읽지 못하여 해가 이미 저물었다.
사알(司謁)
이 여덟 자루 촛불을 전상에 벌여 놓았다. 읽기를 마치자 주상이 한참 동안 마음을 억누르고 진신과 장보들을 각각 몇 명씩 앞으로 나오게 하였다. 승선이 크게 소리 질러 말하기를 “이 일을 잘 아는 진신과 장보 각 2명씩 전에 오르면 된다.”고 하였다. 김한동(金翰東)ㆍ강세륜ㆍ김희택ㆍ이경유가 서쪽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주상이 또 말하기를 “다시 몇 명 더 전(殿)에 올라오너라.”라고 하였다. 김한동(金翰東)이 승선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진신 중에 성언집ㆍ이헌유와 장보 중에 김시찬을 올라가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승선이 또 부르기를 “성언집ㆍ이헌유ㆍ김시찬은 전에 오르시오.”하여, 나아가 엎드렸으나 주상이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옥색(玉色: 임금의 안색)이 몹시 처량하고 슬퍼보였으며 자주 소매를 들어 눈물을 닦았다. 목이 메여 말을 못하다가 한참 만에 장황하게 타이르며 숨김없이 자세하게 말을 다하였는데, 비록 한 집안의 부자 사이라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었다.
소두가 일어났다가 엎드려 대면(對面)을 마치니, 주상이 또 뜰에 있던 여러 진신과 장보들에게 명하여 들어와 전에 올라 비답을 듣게 하였다. 소두가 비답을 받들고 차례로 물러나니, 밤은 이미 사경(四更: 오전 3시~오전 5시) 사점(四點)이었다. 주상의 특명으로 유문(留門: 궁궐 문을 열고 닫는 시각을 유보함)하여 통금을 해제하여 주었다. 진신과 장보들이 서로 손을 잡고 감읍하여 돌아왔다.
개요
배경이야기
원문정보
멀티미디어
관련이야기
출전 :
천휘록(闡揮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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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권방(權訪)
주제 : 분쟁과 조정, 국정운영의 갈등
시기 : 1792-04-27 ~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서울특별시
일기분류 : 분쟁일기
인물 : 정조, 이우
참고자료링크 :
승정원일기
웹진 담談 28호
조선왕조실록
◆ 조선시대 임금앞에서의 상소
4월 유성한(柳星漢)이 상소로서 정조가 경연에는 참여하지 않으면서 여악(女樂:여악사)들이 궁궐정원에까지 들어올 정도로 유흥만 즐기고 있다며 정조를 직접 비판하고 나섰다. 이에 성균관에 머물던 영남출신유생들이 통문을 보내고 이에 영남유생들이 한양으로와 만인소를 올리게 되었다. 상소문을 작성하고 10,057명의 서명을 받아 상소를 하려 하였다. 그러나 상소를 임금에게 올리려면 성균관의 근실이란 허가를 받아야 임금에게 전달되게 되는데 당시 노론에게 장악된 성균관 근무자들은 이 상소를 막게 된다. 당시에 상소를 올리면 아래에서 단계적으로 먼저 내용을 확인한 후에 최종적으로 왕에게 올려졌는데, 집권 인물, 집권당에 의해 그들에게 불리한 상소가 올려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었다.
정조 16년 윤사월 26일 성균관 장의 이동수를 비롯해 장의들은 미루기만하고 답을 주지 않아 하루해를 그냥 보내게 되었고 다음날 윤사월 27일 유생들은 만인소를 봉함을 한 다음 붉은천으로 싸고서 직접들고 궐로 들어가려 했으나 역시 노론이었던 수문장이 문을 열어주지 않아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 이들은 법망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게 되는데 당시 일반 유생이 아닌 현직에 있는 벼슬아치들은 직접 임금에게 단독 상소를 올릴 수 있었기 때문에 당시 교리에 있었던 벼슬아치를 통해 만인소가 있다는 사실을 상소문으로 직접 임금에게 전달하게 된다.
이 상소를 접한 정조는 만인의 뜻이라면 나라의 뜻이라며 근실을 거치지 않고 직접 임금에게 올리게 하라는 어명을 하달하게 되고 어명에 의해 비로서 만인소는 정조에게 전해지게 된다. 정조는 교지를 통해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천리를 와서 충정을 쏟아내니, 나의 뜻을 면전에서 알리지 않을 수 없어 그대 들을 부르게 하였으니 소두는 전(殿)에 올라와 상소문을 읽는 게 좋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정조는 직접 상소문을 쓴 선비들을 마주대하고 상소를 읽도록 하였다. 소두인 이우는 정조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로 상소문을 읽어 내려갔다. 이 상소문이 반도 읽기 전에 해가져 촛불 8개가 밝혀지고 이튿날 아침에야 정조와의 면담은 끝이 났다. 정조는 이때 안색이 몹시 처량하고 슬퍼보였으며 자주 소매를 들어 눈물을 닦았다.
그러나 만인소를 접한 정조였지만 당시 노론의 거대한 힘앞에서 어쩔 도리가 없던 관계로 유성한을 처단하지도 사도세자를 신원시키지도 못하였다.
◆
원문 이미지
◆ 원문 번역
4월 27일
이른 아침에 소장을 봉함하였다. 상소문에 이름을 적은 사람은 모두 10,057명 이었다. 상소문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경상도 유학 이우李㙖등은 발을 싸매고 조령을 넘어 피를 쏟으며 소장을 올립니다. 확실한 처결로 화란禍亂의 뿌리를 영원히 뽑아서 의리를 밝히고 윤리와 강령을 세우시기를 바랍니다.” 진초辰初에 상소문을 받들고 대궐에 이르러 돈화문敦化門 밖에다 소장을 넣은 상자를 안치安置하였다. 소두가 따로 자리 하나를 마련하고, 유생 26명이 차례로 대궐에 엎드렸다. 진신 11명이 공조의 직방直房에 들어가 쉬고 있었다. 소두가 일의 대강 줄거리를 수문장守門將에게 보이고, 그로 하여금 받들고 들어가 임금에게 바치게 하였다. 수문장이 근래에 금령禁令이 더욱 엄격하여 사학邪學 및 강화도江華島에 관계되는 일은 임금께 봉납 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소두가 말하기를 “이 상소는 그런 얘기들이 아닙니다. 요즈음 의리가 꽉 막혀 깜깜하고 흉역凶逆이 이어지니 우리들이 징계하고 성토할 일로 천리를 올라왔습니다. 이 상소는 일각도 지체할 수가 없이 속히 올려야 합니다.”라고 하니 수문장이 말하기를 “성균관에서 ‘근실謹悉’이란 허가가 있었습니까?” 소두가 말하기를, “오늘의 이 거사擧事는 비록 유소儒疏라고는 하나 진신들과 합동으로 상소를 올리므로 ‘근실’이라는 문자의 유무에 상관이 없습니다. 또 여러 차례 태학에 통문을 넣었지만 태학에서 끝내 허락을 하지 않았습니다. 1만 명이 연명聯名을 했으니 어찌 ‘근실’을 받지 않았다는 데에 구애되어 상주문을 올릴 수 없단 말이오.”하였다. 수문장이 온갖 방법으로 저지하고 막아서 유생들이 일제히 엄하게 꾸짖었으나 끝내 봉납하지를 못하였다. 진신들이 마침내 승정원에 말을 전하여 그들로 하여금 봉납하게 하였으나 승정원 역시 수문장의 말과 같았다. 교리校理 김한동金翰東·전 지평持平 성언집成彦檝·남필석南必錫·강세응姜世鷹·강세륜姜世綸등이 마침내 짧은 소장을 지어 봉장封章하는 본 뜻 및 태학에서 근실을 허락하지 않는 것과 승정원에서 이에 근거하여 저지하는 이유 등을 간단히 적어 승정원에 올렸다. 그러나 승정원에서 또 진신들의 연명 상소는 근래에 조금(朝禁: 조정에서 내린 금지)이 있다고 구실로 삼아 도로 반송하였다. 부득이 김한동 혼자 이름으로 다시 써서 올렸다. 조금 있다가 원리가 나와서 부르기를 “소두는 누구입니까?” 하므로 소두가 일어섰다. 원리가 간단한 내용 및 원소(原䟽: 소장 원고)를 임금에게 봉납하였다. 조금 있다가 또 원리가 나와서 말하기를, “소두는 승정원에 들어와 소장을 읽으십시오.” 하였다. 소두가 들어 간지 조금 후에 원리가 또 부르기를, “모든 유생과 모든 진신들은 함께 입시할 일로 명이 내려졌습니다.”라고 하여 모든 유생들이 단정하게 공수拱手를 하고 조용조용 걸어서 돈화문 동쪽 협문으로 들어갔다. 숙장문肅章門을 거쳐 협양문(恊陽門: 창덕궁 안에 있음. 협양문 안이 선정전宣政殿임)에 이르니, 승선承宣과 기주記注가 모두 북쪽으로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소장은 승선의 앞에 있었다. 전 승선이 “소장疏章을 지은 사람이 누구요” 하고 묻자 소두가 모든 사람의 성명을 각각 말하였다. 승선이 또 말하기를, “진신들은 왜 들어오지 않습니까? 원리가 나가서 재촉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여 원리가 나가 재촉하니 진신들이 모두 차례대로 들어왔다. 승선이 그 길로 소장을 받들고 먼저 들어가고 진신과 장보章甫들이 차례대로 따라 들어갔다. 주상이 희정당熙政堂에 납시어 서쪽을 향하여 단정하게 앉고, 진신과 장보들이 뜰 아래에 차례로 서니 보좌寶座와의 거리가 불과 10여 보 밖에 되지 않았다. 전상殿上은 시끄럽지 않고 고요하기만 한대 다만 승선 1명, 기주관 2명, 내관 2~3명이 좌우에 부복(俯伏: 고개를 숙이고 엎드림)하고 있었다. 승선이 교지敎旨를 전하여 말하기를 “지난번 이지영李祉永의 상소에는 비답批答을 내리지 않았는데, 그대들은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천리를 와서 충정衷情을 쏟아내니, 나의 뜻을 면전에서 알리지 않을 수 없어 그대 들을 부르게 하였으니 소두는 전殿에 올라와 상소문을 읽는 게 좋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우가 서쪽 계단을 따라 올라가서 동쪽을 향하여 꿇어앉아 엎드려 소장을 읽었다. 소장을 반도 읽지 못하여 해가 이미 저물었다. 사알司謁이 여덟 자루 촛불을 전상에 벌여 놓았다. 읽기를 마치자 주상이 한참 동안 마음을 억누르고 진신과 장보들을 각각 몇 명씩 앞으로 나오게 하였다. 승선이 크게 소리 질러 말하기를 “이 일을 잘 아는 진신과 장보 각 2명씩 전에 오르면 된다.”고 하였다. 김한동·강세륜姜世綸·김희택金熙澤·이경유李敬儒가 서계(西階 :서쪽 계단)를 따라 올라갔다. 주상이 또 말하기를 “다시 몇 명 더 전殿에 올라오너라.”라고 하였다. 김한동이 승선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진신 중에 성언집·이헌유李憲儒와 장보 중에 김시찬金是瓚을 올라가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승선이 또 부르기를 “성언집·이헌유·김시찬은 전에 오르시오.”하여, 나아가 엎드렸으나 주상이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옥색(玉色: 임금의 안색)이 몹시 처량하고 슬퍼보였으며 자주 소매를 들어 눈물을 닦았다. 목이 메여 말을 못하다가 한참 만에 장황하게 타이르며 숨김없이 자세하게 말을 다하였는데, 비록 한 집안의 부자 사이라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었다. 소두가 일어났다가 엎드려 대면對面을 마치니, 주상이 또 뜰에 있던 여러 진신과 장보들에게 명하여 들어와 전에 올라 비답을 듣게 하였다. 소두가 비답을 받들고 차례로 물러나니, 밤은 이미 사경(四更: 오전 3시~오전 5시) 사점四點이었다. 주상의 특명으로 유문(留門: 궁궐 문을 열고 닫는 시각을 유보함)하여 통금을 해제하여 주었다. 진신과 장보들이 서로 손을 잡고 감읍하여 돌아왔다. 홍락문洪樂文·이존덕李存德이 문안인사를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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