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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인의 일기로 보는 그날 (4) ]

어머니의 눈물과 왕의 눈물

이상호

1792년 음력 4월 17일 늦은 오후, 안동 선비 권방權訪은 차마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한참을 서성거려야 했다. 떠나야 하는 길이 한양길인지라 어머니께 고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차마 고하지 못하고 멀찍이 떨어져 어머니 얼굴이라고 보려하고 있는 것이다. 북쪽 창이 열리고 물끄러미 집을 쳐다보고 있는 아들을 이상하게 여긴 어머니의 물음이 없었다면, 그냥 그렇게 한양으로 떠날 참이었다. 권방은 어머니에게 한양을 가야 하는 일의 대강만 말하기로 했다. 영남 사람들이 연명해서 상소를 올리기로 했다는 소식을 전했고, 아들도 지금 그 길을 가야 한다고 말했다. 순간 아직 할 말이 조금 남아 있는데, 어머니는 목이 메여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 사도세자의 아들 ‘이산’이 막 왕이 되었을 때 사도세자의 원통한 사실을 밝히겠다고 나섰던 안동의 유생 이도현과 그 아들 이응원이 억울하게 처형당했던 사실을 기억했던 것이다. 아니 갈 수 없는 길이란 것을 어머니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흘러내리는 눈물을 어찌할 수는 없었다. 영남의 많은 선비들은 이렇게 무거운 걸음을 한양으로 옮겼다.

불과 20여 일 전이었던 음력 3월 25일은 영남 선비들의 축제였다. 영남 선비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영남인재 특별 전형이 도산서원에서 열렸기 때문이다. 대략 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도산서원 마당에 모두 수용할 없어, 분천 건너편에 있는 솔밭에서 과거시험을 치룰 정도였다. 급제한 사람의 수와 상관없이, 영남 선비들은 크게 고무되었다. 경신대출척 이후 10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임금의 따뜻한 시선이 영남에 와 닿았기 때문이다. 정조는 이 시험 한 번으로 영남을 든든한 심정적 우군으로 삼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정조의 이 같은 행보는 기호 노론에게는 참으로 탐탁지 않은 일이었다. 이들의 은근한 위기의식과 언짢은 심정은 음력 4월 1일 유성한의 상소에서 그대로 표출되었다. 정조가 경연을 등한시 하고 있으며, 당시 여러 장군들이 기생과 악사를 동원해 연회를 베푼 일의 책임이 임금에게 있다고 비판했다. 정조는 이 상소에 대해 “한 번 웃어넘길 시골뜨기의 일로 치부하라”는 비답을 내렸지만, 도산별과로 인해 한껏 고무되어 있었던 영남 선비들 입장에서는 그냥 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성균관에서 공부하던 영남의 유생들은 봉화에 있는 삼계서원에 이 사실을 알렸고, 삼계서원은 도회를 열어 어떻게 할지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며칠 되지 않아 풍기향교에서도 이 문제를 정식으로 검토하기에 이르렀고, 영남 선비들은 지금이야 말로 목숨을 걸고라도 상소를 올려야 할 때라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음력 4월 17일, 권방의 한양 행은 이렇게 해서 이루어졌다.

한양에서 상소를 올리기 위한 소청이 설치되었고, 상소문을 완성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연명 상소의 대표인 소두를 선발하는 일에 약간의 우여곡절도 있었지만,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원래 성언집을 소두로 내세웠는데, 현감벼슬을 했던 관료 출신인지라 정치색을 의심받을 수 있다는 여론이 있었다. 중앙 정치와 전혀 관계없는 순수한 유림의 공의公議라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새로 소두를 뽑기로 했고, 이우가 낙점되었다. 연명을 모으고 상소를 완성해 가는 지난한 작업이 계속되었다. 음력 4월 27일, 1만 57명의 연명으로 이루어진 근 100여 미터에 이르는 상소는 이렇게 완성되었다. “발을 싸매고 조령을 넘어 피를 쏟으며 상소를 올립니다”라는 문구로 시작되는 이 상소에는 유성한에 대한 탄핵과 사도세자 신원복권에 대한 내용이 실려 있었다. 이제 상소를 임금에게 전달하는 일만 남았다.

원래 상소를 올리기 위해서는 성균관에서 근실을 해 주어야 했다. 왕에게 올리는 상소에 대한 검토격인 근실을 받지 않으면 상소는 전달될 수 없다. 그러나 성균관 장의 이만수는 미루기만 하고 답을 주지 않았고, 답답한 영남의 선비들은 결국 대궐 문을 직접 두드리기로 했다. 그러나 수문장은 성균관의 근실을 거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문을 열어주지 않았고, 성균관은 기다리라는 답만을 보내왔다. 노론들의 조직적 대응에 이대로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누군가 꾀를 내었다. 영남출신의 관료에게 부탁하여, 지금과 같은 사실을 임금에게 상소로 알려 달라고 했다. 관료는 바로 임금에게 상소를 올릴 수 있는 권한이 있었기 때문이다.

늦은 오후, 결코 열릴 것 같지 않은 궁궐 문이 열렸다. 상소를 접한 정조는 “만인의 뜻이라면 나라의 뜻이다”라고 하면서 직접 상소를 받겠다고 나섰던 것이다. 희정당 앞에 엎드린 영남 유림들에게 정조는 면전에서 상소 내용을 듣겠다고 했다. 영남유림들의 충정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이제 영남 선비 전체의 뜻이 임금에게 전해지게 되었다. 소두인 이우는 희정당 서쪽 계단을 따라 올라가 임금이 있는 동쪽을 향해 꿇어 앉아 상소문을 읽기 시작했다. 비분 강개한 어조를 담아 천천히 읽어 내렸다. 상소문을 읽기 시작할 때 이미 해가 저물기 시작하여, 반도 채 읽기 전에 깜깜해져 버렸다. 여덟 자루의 초에 불이 붙었고, 이우는 침착하게 또박또박 만인의 뜻을 임금에게 전했다.


동궐도의 희정당
동궐도의 희정당

상소의 내용을 모두 읽었다. 여덟 자루의 초가 주위를 낮같이 밝히고 있었지만, 어둠보다 긴 침묵이 한참을 흘렀다. 상소의 내용을 모두 들은 정조는 한참동안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겨우 손을 들어 함께 온 김한동, 강세륜, 김희택, 이경유에게도 전으로 불려 올렸다. 그리고 성언집, 이헌유, 김시찬도 마저 올라오라 청했다. 모두가 전에 올라 임금의 용안을 마주했다.

영남 유림들은 촛불 사이로 처량해 보이는 임금의 용안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눈물이었다. 눈물을 훔치고 또 훔친 탓에 얼굴 전체가 얼룩져 있었다. 임금이기 때문에 겨우 겨우 소리만 감추고 목 놓아 울었던 것이다. 말을 잇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정조의 말은 다정다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종종 소매를 들어 눈물을 닦고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하면 한 참을 쉬면서도, 마치 한 집안의 아버지와 아들처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들의 대화는 날을 넘겨 새벽이 되도록 이어졌고, 만 명이 넘게 연명한 상소 앞에서 정조는 지금까지 참아왔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모두 내어 놓았다.

어머니의 눈물이 아들의 발걸음을 막지 못했던 것처럼, 임금의 눈물이 세상을 바꾸지는 못했다. 눈물과 정치적 역학관계는 별개 문제이기 때문이다. 영남의 유림들은 임금이 아닌 불운하게 아버지를 떠나보낸 안타까운 아들 ‘이산’의 모습을 촉발시켰고, 이로 인해 정조는 꽁꽁 숨겨왔던 아들의 눈물을 들켰다. 눈물 이후에 기다리는 것은 또 다시 정치 현실이고, 정치는 눈물의 의도와는 다른 행동을 요구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눈물이 있어 아들의 한양 행은 더욱 정치적이 되고, 임금의 눈물이 있어서 임금의 정치적 행동은 차라리 인간적이었다. 정치와 사람은 그렇게 연결되어 있고, 눈물은 그 사이를 타고 흐른다.


그날


천휘록 <천휘록>

1792년 영남유생들은 1762년에 죽은 사도세자의 죽음에 얽힌 억울함을 고하고 진실을 밝히기 위한 상소, 만인소를 올린다. 천휘록은 영남유생들이 상소를 올리는 과정을 상세하게 담고 있다.

1792년 4월 17일
저물녘에 하상河上에 도착하여 백부와 숙부들을 뵙고, 곧 북촌北村 본가에 가서 담장 밖에서 어머니의 건강을 탐문하고 우두커니 서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어머니께서 북쪽 창문을 열고 한양 가는 일을 상세히 물으셨다. 나는 이 일의 대강을 말씀드리니 어머니께서는 절반도 듣지 않으시고 목이 메여 눈물을 흘리셨다. 이는 어머니께서 모년(某年: 1762년 사도세자가 죽던 해)의 사건에 그 전말을 상세히 아셨다. 때문에 매번 말을 하다가 그 사건이 언급되면 울분 감개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 소식을 들으시자 눈물이 절로 흘러내리신 것이다. 백부께서 이 역변逆變을 들으시고 곧 지팡이를 짚고 조령을 넘어가서 몰래 다사多士의 의론에 가세하려고 따라가려 하셨다. 일가 친족들이 모두 여든을 바라보는 몹시 늙은 연세에 더위가 한창인 철을 당하여 이틀을 하루거리로 달려가야 하는 행차에 반드시 탈이 없을까하는 염려가 있다고 하여 내가 경솔하게 먼저 출발할 수가 없어서 백방으로 말렸다. 백부 역시 다른 사람의 행차가 자신으로 인하여 지체될까 염려하여 마침내 서울 가는 길을 그쳤다.

1792년 4월 27일
(생략) 주상이 희정당熙政堂에 납시어 서쪽을 향하여 단정하게 앉고, 진신과 장보들이 뜰 아래에 차례로 서니 보좌寶座와의 거리가 불과 10여 보 밖에 되지 않았다. 전상殿上은 시끄럽지 않고 고요하기만 한대 다만 승선 1명, 기주관 2명, 내관 2~3명이 좌우에 부복(俯伏: 고개를 숙이고 엎드림)하고 있었다. 승선이 교지敎旨를 전하여 말하기를 “지난번 이지영李祉永의 상소에는 비답批答을 내리지 않았는데, 그대들은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천리를 와서 충정衷情을 쏟아내니, 나의 뜻을 면전에서 알리지 않을 수 없어 그대 들을 부르게 하였으니 소두는 전殿에 올라와 상소문을 읽는 게 좋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우가 서쪽 계단을 따라 올라가서 동쪽을 향하여 꿇어앉아 엎드려 소장을 읽었다. 소장을 반도 읽지 못하여 해가 이미 저물었다. 사알司謁이 여덟 자루 촛불을 전상에 벌여 놓았다. 읽기를 마치자 주상이 한참 동안 마음을 억누르고 진신과 장보들을 각각 몇 명씩 앞으로 나오게 하였다. 승선이 크게 소리 질러 말하기를 “이 일을 잘 아는 진신과 장보 각 2명씩 전에 오르면 된다.”고 하였다. 김한동·강세륜姜世綸·김희택金熙澤·이경유李敬儒가 서계(西階 :서쪽 계단)를 따라 올라갔다. 주상이 또 말하기를 “다시 몇 명 더 전殿에 올라오너라.”라고 하였다. 김한동이 승선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진신 중에 성언집·이헌유李憲儒와 장보 중에 김시찬金是瓚을 올라가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승선이 또 부르기를 “성언집·이헌유·김시찬은 전에 오르시오.”하여, 나아가 엎드렸으나 주상이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옥색(玉色: 임금의 안색)이 몹시 처량하고 슬퍼보였으며 자주 소매를 들어 눈물을 닦았다. 목이 메여 말을 못하다가 한참 만에 장황하게 타이르며 숨김없이 자세하게 말을 다하였는데, 비록 한 집안의 부자 사이라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었다. (생략)




스토리테마파크 참고 스토리

작가소개

이상호
이상호
경상북도 상주에서 태어나, 계명대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같은 대학에서 한국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국학진흥원의 책임연구위원으로 재직 중이며, 전통문화의 현대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 어머니의 눈물어린 배웅 - 사도세자의 죽음에 얽힌 억울함을 고하러 한양으로 향하다 ”

권방(權訪), 천휘록(闡揮錄),
1792-04-17
1792년 4월 17일, 정오쯤 부친이 곧바로 봉서(鳳栖)로 오셨는데 아우 석조가 모시고 왔다. 즉시 백부의 편지를 보시고는 사건의 단서를 대충 아시고 다른 별 말씀이 없으셨다. 오후에 내가 부친을 모시고 집으로 돌아오고, 동생 석조는 다시 문소로 향하였다. 표종(表從: 외종)인 신면조(申冕朝)·봉조(鳳朝) 형제가 나의 행사(行事)를 듣고 편지를 보내 고무하여 힘쓰게 하였다. 저물녘에 하상(河上)에 도착하여 백부와 숙부들을 뵙고, 곧 북촌(北村) 본가에 가서 담장 밖에서 어머니의 건강을 탐문하고 우두커니 서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어머니께서 북쪽 창문을 열고 한양 가는 일을 상세히 물으셨다. 나는 이 일의 대강을 말씀드리니 어머니께서는 절반도 듣지 않으시고 목이 메여 눈물을 흘리셨다. 이는 어머니께서 모년(某年: 1762년 사도세자가 죽던 해)의 사건에 그 전말을 상세히 아셨다. 때문에 매번 말을 하다가 그 사건이 언급되면 울분 감개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 소식을 들으시자 눈물이 절로 흘러내리신 것이다.

“ 발을 싸매고 문경새재를 넘어, 피를 쏟으며 올립니다 - 만 명의 상소문을 올리다 ”

권방(權訪), 천휘록(闡揮錄),
1792-04-27
1792년 4월 27일, 상소문을 작성한 사람들이 이른 아침에 모여 소장을 봉함하였다. 상소문에 이름을 적은 사람은 모두 10,057명 이었다. 상소문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경상도 유학 이우(李㙖) 등은 발을 싸매고 조령을 넘어 피를 쏟으며 소장을 올립니다. 확실한 처결로 화란(禍亂)의 뿌리를 영원히 뽑아서 의리를 밝히고 윤리와 강령을 세우시기를 바랍니다.”

“ 촛불 아래 엎드려 읽은 상소문, 그리고 임금의 눈물 ”

권방(權訪), 천휘록(闡揮錄),
1792-04-27
1792년 4월 27일, 주상이 희정당(熙政堂)에 납시어 서쪽을 향하여 단정하게 앉고, 진신과 장보들이 뜰 아래에 차례로 서니 보좌(寶座)와의 거리가 불과 10여 보 밖에 되지 않았다. 전상(殿上)은 시끄럽지 않고 고요하기만 한대 다만 승선 1명, 기주관 2명, 내관 2~3명이 좌우에 고개를 숙이고 엎드려 있었다. 승선이 교지(敎旨)를 전하여 말하기를 “지난번 이지영(李祉永)의 상소에는 비답(批答)을 내리지 않았는데, 그대들은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천리를 와서 충정을 쏟아내니, 나의 뜻을 면전에서 알리지 않을 수 없어 그대 들을 부르게 하였으니 소두는 전(殿)에 올라와 상소문을 읽는 게 좋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우가 서쪽 계단을 따라 올라가서 동쪽을 향하여 꿇어앉아 엎드려 소장을 읽었다. 소장을 반도 읽지 못하여 해가 이미 저물었다. 사알(司謁)이 여덟 자루 촛불을 전상에 벌여 놓았다. 읽기를 마치자 주상이 한참 동안 마음을 억누르고 진신과 장보들을 각각 몇 명씩 앞으로 나오게 하였다. 승선이 크게 소리 질러 말하기를 “이 일을 잘 아는 진신과 장보 각 2명씩 전에 오르면 된다.”고 하였다. 김한동(金翰東)·강세륜·김희택·이경유가 서쪽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주상이 또 말하기를 “다시 몇 명 더 전(殿)에 올라오너라.”라고 하였다. 김한동(金翰東)이 승선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진신 중에 성언집·이헌유와 장보 중에 김시찬을 올라가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승선이 또 부르기를 “성언집·이헌유·김시찬은 전에 오르시오.”하여, 나아가 엎드렸으나 주상이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옥색(玉色: 임금의 안색)이 몹시 처량하고 슬퍼보였으며 자주 소매를 들어 눈물을 닦았다. 목이 메여 말을 못하다가 한참 만에 장황하게 타이르며 숨김없이 자세하게 말을 다하였는데, 비록 한 집안의 부자 사이라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었다. 소두가 일어났다가 엎드려 대면(對面)을 마치니, 주상이 또 뜰에 있던 여러 진신과 장보들에게 명하여 들어와 전에 올라 비답을 듣게 하였다. 소두가 비답을 받들고 차례로 물러나니, 밤은 이미 사경(四更: 오전 3시~오전 5시) 사점(四點)이었다. 주상의 특명으로 유문(留門: 궁궐 문을 열고 닫는 시각을 유보함)하여 통금을 해제하여 주었다. 진신과 장보들이 서로 손을 잡고 감읍하여 돌아왔다.

“ 성균관생들의 동맹 휴학 - 만인소에 확인 도장을 찍어주지 않은 죄를 물어라! ”

권방(權訪), 천휘록(闡揮錄),
1792-04-29
1792년 4월 29일, 듣건대 밖에 있는 유생 이존덕(李存德) 등이 태학에 통문을 보냈는데, 내용이 엄정(嚴正)하였다 한다.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여러 군자께서는 이미 태학에 거처하면서 변괴가 연이어 일어남을 보고서도 어찌 태연히 예사로 여겨 묵묵히 한 마디 말도 없어야 되겠습니까? 만약 우리들의 말을 옳다고 여기신다면 회답을 주시고, 그르다고 여기신다면 이를 잘 헤아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리하여 서재생(西齋生)들이 함께 권당(捲堂)을 행사하였다. 성균관장 김방행(金方行)이 들어와서 그들의 의사(意思)을 수렴하여 주상에게 주청하였다.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전 교리 김한동(金翰東)의 상소는, 태학에서 ‘근실’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를 여러 방면으로 핑계를 대어 의리를 회색(晦塞: 꽉 막혀 깜깜함)시켰다고 하였고 재유(齋儒) 최홍진이 성균관에 보낸 단자와 밖에 있는 이존덕의 통문은 호역완토(護逆緩討: 반역자를 옹호하고, 응징을 느슨하게 함)의 이름으로 몰아붙이니, 염치와 의리로 보건데, 얼굴을 들고 식당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고 하였다. 주상이 사알(司謁)을 시켜 구전으로 하교하기를 “반역자를 성토하는 일을 누가 감히 소홀하게 하겠는가마는, 혹 장의(掌議)이 선출되지 못함으로 인하여 그런 것은 아닌가? 아니면 혹 지방유생들이 격식있는 관례를 알지 못하여 그런 것은 아닌가? 다른 유생들이 마땅히 권하여 식당에 들어오도록 해야 할 일이지만 일이 커지면 대응하기가 몹시 어려우니 권하여 들어오라는 뜻을 대사성에게 전하라.” 하였다. 서재생들이 마침내 저녘식당에 들어가 그날 장의 및 두 반수(班首)인 이동수(李東洙) -이 성토와 징계를 듣고 왜 ‘근실’해 주지 않았는가?-, 맹현대(孟賢大) -의도적이지는 않았지만 불행히도 근실을 해주지 않은 죄에 해당- 의 벌을 의논하였다.

“ 이제 그만 고향으로 돌아가 학업에 전념하시오 - 3차 상소를 준비하던 유생들에게 내린 임금의 하교 ”

권방(權訪), 천휘록(闡揮錄),
1792-05-16
1792년 5월 16일 소청에 모여 소록을 등사하였다. 막 칙교를 받았을 때는 비록 도리에 구애되어 상소하는 일을 잠시 멈추었지만 다사들의 체류가 재일(齋日)이 지나면 충심으로 호소하는데 지나지 않으니 22일 후에 다시 세 번째 상소를 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한편으로는 소초(䟽草)를 작성하고 한편으로는 소록을 작성하였다. 19일 소록 작성을 다 마쳤다. 모두 11,365명이다. 20일 소초가 완성되었다. 소두 권 감찰·김시찬이 각각 한 본씩을 작성하였으나 봉사대부가 지은 것이 가장 적절하여 사론이 반드시 이것을 사용하려고 하였다. 장로들의 소견(所見)이 일치하지 않아 더하고 뺀 것이 많아서 다른 곳에 물어보고 다시 다른 조목을 넣었다. 21일 이 날은 곧 우리 경모궁(景慕宮)[사도세자]의 제삿날이다. 우리 성상(聖上)의 그립고 애통한 마음 어찌 다함이 있겠으며 우리들이 두렵고 피가 끓는 것은 과연 어떠하겠는가? 제사를 마친 뒤에 즉시 상소를 하려고 하였으나 첫째는 차마 못하겠고 둘째는 감히 못하겠으니 우선 다음 날을 기다려보기로 하였다. 22일 주상이 김한동(金翰東)을 불러 하교하기를 “지금은 의리가 분명하게 결판이 났으니 영남 유생들은 더 체류할 필요가 없다. 아까 경연에서 좌의정이 주청한 바가 있었다. 물러나가 좌의정을 보고 상세히 물어서 영남 유생에게 전달을 하라. 일전에 체류 식량을 받지는 않았지만 지금 회량(回糧)을 주면 반드시 감히 받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또 들으니 유생들이 물러나 학업을 닦으라는 비답을 듣고자한다고 하니 모름지기 비답을 내리는 법식에 의하여 말로 하교를 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하였다. ...... 중론이 마침내 상소를 정지하자는 의논을 주장하였다. 그 중에 불충에 죽더라도 남쪽으로 돌아갈 뜻이 없는 자는 다만 2~3명뿐이었다. 그러나 일이 이미 이에 이르렀으니 다시 무엇을 하겠는가? 아! 애통하구나. 우리들이 천리를 와서 일만 명이 한목소리로 30년간 꽉 막혀서 감히 말하지 못한 일을 말하는 것이 과연 얼마나 큰 의리이며 큰 행사인데 다만 우리의 정성이 부족하고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 끝내 유시무종(有始無終: 시작은 있으나 결과가 없음)의 탄식으로 돌아가니 애석함을 이길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 성상이 꾹 참고 있는 본 뜻은 중천에 뜬 태양같이 밝으니 우리영남의 모든 유생들의 윤리는 죽더라도 거의 눈을 감을 것이다. 이날 서울인사로서 문안인사를 온 자가 매우 많았으나 다 힘없이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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