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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로 본 역사이야기

집콕이 남긴 대과업 성찰기

며칠 전 SNS 친구 되는 분이 올린 사진이다. 보는 순간 웃음이 났다.


출처_티그림


이전에도 본 적이 있지만 ‘사회적 거리 두기 운동’이 한창인 지금 이 사진을 보는 감회는 또 달랐다. 가사의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아내와 그런 아내의 눈치를 보며 ‘가정생활 참 힘드네.’ 생각할 많은 남편들이 떠올라서다.

나도 지난 주 남편과 주방 바닥 걸레질을 놓고 작은 다툼을 했다. 거의 싸우지 않는 우리 부부다 보니, 어머니와 딸들은 걱정보다는 신기함으로, 쉽게 말해 구경난 것처럼 눈이 휘둥그레져서 오가는 대화를 엿듣기에 바빴다. 남편은 내가 이미 아침부터 짜증나 있었다고 하는데, 엄밀히 말해 사실 나의 짜증은 근래 차곡차곡 누적되어 온 것이다.

몇 년 전, 어머니의 두 번에 걸친 골절(1년 간격으로) 이후 가사일은 내게 더욱 무겁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남편과 아이들도 그렇지만, 치아가 약한 데다 거동이 불편해 치과도 가지 못하시는 어머니를 위해 술술 잘 넘어가는 음식을 따로 마련해야 했다. 배달음식은 꿈도 못 꾸고 당연히 진 밥과 국, 단백질과 짭짤한 밑반찬이 조화를 이루도록 신경써야했다. 일주일에 몇 번 요양보호사분이 오시긴 하지만, 남편과 다투었던 그 날은 어머니께서 “당분간 요양보호사를 오지 말도록 하라.”고 지시하신 참이었다. 코로나19로 작가들에게 제공되는 사무실 공간이 아직 열리지 않아 내가 계속 집에서 작업하다보니, 어머니는 마음의 안정을 찾고, 다른 사람은 필요 없다고 하신 것이었다.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건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마음이 무거웠다.

말이 작업이지, 아침에 일하려고 노트북 켜놓고, 세 끼 차려 먹고, 이제 본격적으로 일 좀 해야지 하고 보면 밤이다. 바깥일 줄이고 가능한 집콕하는 두 아이와, 아침 저녁은 집에서 챙겨먹는 남편에 어머니. 게다가 내 먹성은 좀 좋은가. 엥겔계수는 하염없이 올라가는데, 먹고픈 건 많아서 백종원님은 물론이고, 나름 이름난 요리 유튜버들의 영상을 찾아보며 ‘내일은 저걸 해먹어야지’ 결심하며 잠자리에 드는 일과가 반복되다보니, 몸속 지방과 반비례해 마음이 공허해지며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고 와중에 남편에게 청소를 부탁했다가 미적지근한 반응에 부딪히자 폭발해버린 것이다.

물론 결국엔 슬그머니 풀고 여느 때처럼 지내게 되었지만, 근본적으로 이렇게 가족들이 복닥거리며 삼시 세 끼를 해먹기 위해선, 균형적 가사분담이 필수적이란 생각을 다시 한 번 갖게 되었다.

가사일의 많은 부분이 기계화된 오늘날도 이런데, 대체 옛 선인들, 특히 여성들은 어찌 살았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싶지만, 단순히 그렇게 비교하기엔 오늘날과 이전의 사회는 너무나 다르다. 대가족이라는 완충지대, 맞벌이라는 개념 보단 남자든 여자든 몸을 움직여 일하는 것이 당연시됐던 농경사회, 상류층에게 없어선 안 되었던 노비제 등이 다른 점이지만, ‘살림’에 대한 이해 역시 요즘과는 조금 달랐다. 다음의 기록을 보자.

‘또한 농사에 수확이 없다고 들었는데 걱정이 되는구나. 그러나 이 때문에 뒷날의 원대한 계획을 늦추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너를 보낸 뒤에 또 하인 잇산이를 보냈으니 모름지기 한결같이 얼굴을 맞대고 타일러서 거두어두도록 하여 오직 조심하여 내년에 살아갈 대책을 강구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또 손이(종)는 말을 몰게 하고, 언석이(종)는 소나 말 중 아무것이나 몰고, 얼음이 얼기 전에 평해(경북 울진)에 가서 소금과 미역을 사오도록 시키는 것이 좋을 듯하다. 나머지 일은 잇산이가 알고 내려간다. 다 일일이 말하지 않겠다.‘

‘전후에 보낸 쇠고기 장볶이는 잘 받아서 조석간에 반찬으로 하니? 왜 한번도 좋은지 어떤지 말이 없니? 무람없다, 무람없어. 난 그게 포첩이나 장조림 따위의 반찬보다 나은 것 같더라. 고추장은 내 손으로 담근 것이다. 맛이 좋은지 어떤지 자세히 말해주면 앞으로도 계속 두 물건을 인편에 보낼지 말지 결정하겠다.’

겨울을 대비해 식재료를 어찌 준비할지 지시하는 첫 번째 편지는 퇴계 이황이 1545년 1월, 아들에게 보낸 것(<정조처럼 소통하라> 2018,사우출판사)이고, 살가운 엄마의 잔소리같은 두 번째 편지는 연암 박지원이 1796년 4월, 서울에 있는 큰 아들에게 보낸 편지 중 한 구절이다. (2005. 5.30. <고추장 작은 단지를 보내니> 돌베개 출판사)

이황과 박지원은 각각, 지적장애가 있는 아내를 대신해, 혹은 아내와 사별하고 직접 살림을 도맡은 경우다. 그런데 이들과는 좀 다른 이가 있다.


정창권, 『정조처럼 소통하라』, 사우출판사, 2018_표지


박지원, 고추장 작은 단지를 보내니, 박희병 역, 돌베게출판사, 2005_표지


조선의 최대 음식백과사전인 ‘정조지’의 저자인 실학자인 서유구. 여기서 ‘정조(鼎俎)’는 솥과 도마를 뜻하는데, 그가 저술한 <임원경제지>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음식에 관한 정보다


임원경제지 (출처_한국학중앙연구원)


서유구 (출처_한국민족문화대백과)


그는 43세에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인 파주 장단에서 농사를 지으며 방대한 살림대백과사전인 임원경제지를 집필했다. 여기 실린 레시피만 1200여개인데 한국, 중국, 일본의 책 245권을 참고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살림 경험을 직접 녹여 넣었다고 하니, 주부이자 학자로서 이보다 완벽할 수 있을까!

할아버지이자 대제학을 지낸 선비였던 서명응 역시 당신의 어머니 밥상에 오를 음식은 직접 요리했다고 한다. 아마도 집안 분위기 자체가,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 같다. 열거한 이들 뿐 아니라 많은 남자들이 집안의 대소사를 챙기고, 재산을 증식하고, 노비를 관리하고, 제사를 받들고, 가족들이 먹을 곡식과 반찬거리를 마련하는 등의 ‘바깥살림’에 성심을 다했다. 자녀, 특히 아들 교육은 전적으로 아버지의 몫이었다.

이번호 주제를 받아들고서, 집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여성의 애환을 다룬 콘텐츠가 뭐가 있을까 싶어 찾아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사극에서 여성은 집안에 존재하긴 하되, 궁중암투나 처첩 갈등이 아니라면, 딱히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물론 미혼인 경우엔 다르다. 로맨스라는 ‘대과업’이 있으니. 집 밖을 나가면 사극의 여성들도 활동범위가 넓어진다. 그러나 역시 집안의 여성들은, 늘 그래왔던 것처럼, 마치 화석이나 붙박이장처럼 그려질 뿐이다.

자녀를 키워보면 안다. 어머니라는 존재가 아이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제발 좀 1/n로 쳐줬으면 좋겠는데 어머니는 항상 1 아니면 0이다. 그런데도 영화나 드라마, 특히 사극 속 어머니는 아들을 낳기 위해, 아들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서만 존재한다. ‘현모양처’란 개념에 대한 반발심인진 모르겠지만 하나같이 성격이 뒤틀렸거나 맹목적이다. 누굴 탓하랴. 나를 비롯한 창작자들이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인 것을.

그렇다고 집안 살림에 적극적인 남자를 그렸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살아보지 않은 시대의 일상을 그린다는 것이 어렵긴 하나, 남자라고 왜 날마다 왕을 세우고, 날마다 반역을 하고, 날마다 칼싸움만 해야 하는가 말이다. 역시 결론은 또 창작자들의 반성이다.

여기서 잠깐, 다른 나라 사극 하나를 언급하고 넘어가야겠다. 중국드라마 매니아들 사이에선 꽤 유명한 <삼생삼세 십리도화>라는 2017년 드라마다. 원작 소설이 있고 영화로도 만들어졌으나, 나는 드라마만 보았다. 등장인물들 대부분이 신선이다. 잠시 인간계로 떨어지는 아픔(?)을 겪기도 하는데, 이 모든 것이 더 높은 신선이 되기 위한 과정일 뿐, 말 그대로 주인공들은 신선놀음을 한다. 더구나 남자주인공은 신선 중에서도 가장 고귀한 천계의 황자,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환웅쯤 되려나? 여자주인공은 구미호족의 여제다. 이들이 부부의 연을 맺는데 재미있는 것은, 여주인공의 요리실력이다. 뭐라도 해보려고 하면 부엌에 불을 내서, 온 집을 태워먹는 내공의 소유자다. 이에 반해 고귀하고 높으신 천계의 황자는 요리의 달인이다. 그는 요리 못하는 아내를 대신해 정성껏 요리를 해다 바치고, 그녀가 남기고 떠난 아들을 홀로 헌신적으로 키운다. 신선놀음도 신선한데, 가정생활까지 신선하다.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직접 요리하는 천계의 황자 (출처_중국드라마_삼생삼세 십리도화_2017)


이 드라마 이후로 남자주인공을 맡은 배우 조우정의 인기가 한국에서도 치솟아, 부산국제영화제에까지 방문했다.

벼슬할 때에는 세상에 나가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들에게 베푸는 일에 힘써야 하고 벼슬하지 않을 때에는 힘써 일하며 먹고 살면서 뜻을 기르는 일에 힘써야 한다.

<임원경제지> 서문에 있는 문장처럼, 먹고 사는 것은 가장 중요한 문제다.
내 비록 천계의 황자일지라도 집에 돌아오면 한 가족의 구성원일 뿐. 천계의 황자는 아무나 될 수 없지만, 가정에 조금 더 신경 쓰는 일은 누구라도 할 수 있다. 좁은 집에 바글바글 모여 울고 웃고 싸울지라도, 살이 부딪힐 때마다 짜증이 솟아도, 삼시 세 끼 함께 먹는 내 사람들, 굳이 거리를 유지하지 않아도 되는 그들이 있기에, 오늘도 기를 쓰고 또 요리채널을 뒤져본다.




집필자 소개

홍윤정
홍윤정
1999년에 KBS 시트콤 작가로 데뷔, 드라마와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 중이다.
대표작은 영화 <수상한 그녀>, <반창꼬>, <블랙가스펠>, <최강로맨스> 등이며, <수상한 그녀>로 춘사영화상 각본상을 수상했다.
“아이들을 돌보다가 병이 옮은 부부”

금난수, 성재일기,
1579-02-12~1579-02-23

지난 연말부터 무섭게 번져나간 전염병은 금난수의 집에도 마수를 뻗쳐 집안의 여종들과 금난수의 딸들이 차례로 몸져눕게 되었다. 병을 피해보려고 이리저리 피접을 다니고는 있었지만 사람에서 사람으로 전해지는 병을 피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금난수의 집에서도 여종 두 명이 사망하였고, 금난수의 두 딸도 병세가 나아졌다 나빠졌다를 반복하였다.
남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집에서 가장 먼저 발병한 금난수의 막내아들 금각의 병세는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집안의 아이들 명석(命石)과 연문(連文)도 앓아누운지 이미 이레가 다 되었다. 그러던 중 아이들을 돌보던 금난수의 아내가 몸이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땀을 좀 낸 뒤에는 괜찮아진 것 같았으나 곧 다시 앓아누웠고, 금난수도 연이어 잠자리가 편치 않고 입맛도 없어지더니 결국 함께 앓아눕게 되었다.
거처하기 편하지 않은 재사(齋舍)에서 부부가 함께 앓고 있자, 아들들이 배행하여 금난수의 아내는 가마를 타고, 금난수는 말을 타고 동계서재로 거처를 옮겼다. 서재로 옮긴 뒤 아내는 입맛이 점점 돌아오고 차도가 있었으나, 금난수는 병이 더욱 심해졌다. 그래서 밤에 땀을 좀 흘리고 나니 열이 잠시나마 내린 것 같았다. 하지만 아이들이 걱정되었기 때문에 결국 세 아들들을 서재에서 내보내고 아내와 단 둘이서 병조리를 하기로 하였다. 아이들이 떠나고 나자 전염에 대한 불안감이 줄어들어서인지 조금씩 몸이 회복되는 것이 느껴졌다.

“아내의 병으로 어린 아이를 남에게 맡기다”

최흥원, 역중일기, 1740-03-28~

1740년 3월 28일, 어머니의 환후는 평소와 다름없었으나, 아내의 병이 위독해져서 큰 근심이었다. 올해 들어 갑자기 병이 들더니 하루가 다르게 병세가 악화되어 거의 죽기 직전에 이른 것이다. 갑작스러운 아내의 병으로 최흥원은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오늘은 병든 아내가 최흥원에게, 법흥댁이 젖먹이 아이를 길러주겠다고 하였다고 전하면서 고맙기 그지없다고 하였다. 아마도 아내는 자신이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젖먹이 아이를 키울 방도를 그간 열심히 궁리하였던 것 같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지난밤 최흥원이 꿈을 꾸었는데, 거기에 아버지께서 나오셨다. 아버지는 둘째 제수씨를 부르더니 젖먹이 용장의 이름을 부르면서, 이 아이를 제수씨에게 키우라 명하였던 것이다. 최흥원은 이 꿈을 꾸고도 행여 아내가 다른 생각을 하지 않을까 싶어 꿈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지금 아내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는 너무도 놀랍고 괴이쩍은 생각을 숨길 수 없었다.
아! 아내는 정녕 세상을 버릴 것인가. 그래서 꿈에서 아버지께서 나오셔서 자신의 손주 걱정까지 하신 것인가! 최흥원은 마음이 착잡해져왔다. 병든 아내에게 아이는 걱정하지 말고 어서 몸을 추스르라고 말하고는 조용히 방문을 나섰다.

“아내가 병이 나서 의녀를 부르다”

김광계, 매원일기, 1608-03-26

1608년 3월 26일, 하루도 쉴 수 있는 날이 없을 정도로 바쁜 나날을 지내고 있던 김광계는 바쁜 와중에 오래 전부터 계획했던 서당을 짓기 시작하면서 집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거의 대부분을 아내에게 맡겨놓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아내의 얼굴 색이 좋지 않아 무슨 일이라도 있는지 물어 보았으나 아내는 아무 일도 없다며 집안 일은 걱정하지 말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마음을 놓고 바깥일에만 몰두했었다. 그런데 며칠 전에 드디어 아내가 몸이 아파서 일어나 앉는 것도 힘겨워하기 시작했다. 김광계는 의술에 뛰어난 집안 어른들께 여쭈어 보려고 했으나 아내는 펄쩍 뛰며 손사래를 쳤다. 이날 결국 집사람은 의녀(醫女)를 불러 진맥을 받은 후, 침을 맞고 뜸을 떴다. 소식을 들은 노산 재종조부가 걱정이 되어 찾아 왔다.

“이시명에게 시집간 누이가 당홍역에 걸려서 죽다”

김광계, 매원일기,
1614-09-01~1614-10-16

1614년 9월 1일, 김광계는 인동에서 열린 과거 시험에 낙방하고 안음 형과 같이 예안으로 돌아가는 길에 또 일직(一直)에 사는 류실 누이 집에 들러 자고 가기로 했다.
누이가 차려준 저녁상을 받아 맛있게 먹은 후에 과거 시험장에서 벌어진 이야기며, 오산서원을 구경한 이야기, 그리고 천생산성에 올라 사방을 내려다 본 이야기 등등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몇 년 전 갑자기 매형이 돌아가신 후로 적적하고 무료하게 지내는 누이에게 세상 이야기를 전해 주고 싶어서 더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렇게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하인이 달려 들어와 영해(寧海) 누이의 부고를 전해 주었다.
김광계는 너무 놀라서 믿을 수가 없었다. 다시 종을 불러 물어보니 지난 달 27일에 당홍역에 걸려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고 하였다. 김광계는 류실 누이와 생질녀를 붙들고 목을 놓아 통곡하였다. 김광계는 어린 누이가 가여워서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태어나 얼마 안 되어 왜란 와중에 두 부모를 모두 잃고 부모님의 얼굴도 기억하지 못한 채 자란 누이였다. 그래도 심성이 착하고 유순해 손윗누이들과 오빠들의 귀여움을 많이 받다가 이시명(李時明)에게 시집을 갔는데, 시집간 지 7년 만에 어린 자식을 둘을 남겨 두고 갑자기 세상을 떠났으니 그 눈을 어찌 감았을까. 누이 얼굴이 떠올라 김광계는 오장(五臟)을 도려내는 것 같았다. 잠을 잘 수 없었다.
눈도 붙이지 못했지만 그대로 있을 수가 없어 김광계는 깊은 달밤에 류실 누이의 집에서 나와 새벽에 집에 도착했다. 집에 들어가니 아내도 잠을 못 이루고 있었다. 김광계는 아내를 보자마자 또 다시 통곡하였다. 아내는 이미 영해 누이의 부고를 들었고, 마을에도 전염병이 돌아 집에 계시는 할머니와 아픈 아우를 침락서당으로 피접을 보내 놓았다고 했다. 김광계가 돌아 왔다는 소식을 듣고 아침부터 노산 재종조부가 와서 조문을 왔다. 다음날 아침에는 판사 재종숙이 와서 조문하고, 밥을 먹은 뒤에 여희·덕회 형, 그리고 김참 아재가 와서 조문하였다.
9월 4일 아침에 성복(成服)을 하였다. 노산 재종조부와 몇몇 사람들이 보러 왔다. 다음날 둘째 아우 이도(以道)가 부고를 듣고 예천(醴泉)에서 왔는데, 이들은 당장 영해에 갈 수가 없었다. 마을에도 전염병이 돌아 모두 조심스러웠고, 피접을 나가 있는 아픈 아우와 할머니에게 큰 일이 날까봐 마을을 떠날 수도 없었다. 제천 할아버지도 이질에 걸려 모두 염려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김광계도 몸이 매우 아팠지만, 아픈 몸을 이끌고 문병을 다니거나 사람들을 만나야 했다.
24일에도 영해(寧海)로 길을 나서려고 하였으나 병이 낫질 않아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나마 26일이 되어 피접 나가셨던 할머니가 집으로 돌아 오셨는데, 김광계는 이제야 할머니께 영해(寧海) 누이의 부고를 말씀드렸다.
영해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선 것은 10월 15일이었다. 다음날 저녁이 되서야 누이의 집에 당도하였는데, 조문객은 이미 아무도 없고, 빈소에 들어가니 붉은 만장과 혼백상자만 놓인 채 촛불이 깜빡이고 있을 뿐이었다. 쓸쓸한 모습에 김광계는 설움이 더욱 북받쳐 목을 놓아 통곡하였다. 매부인 이회숙(李晦叔)과도 서로 부여잡고 통곡을 하였다. 어린 남매를 보니 슬픔이 한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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