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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말

처음 경험하는 비대면 사회의
집콕과 랜선 문화에서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대하지 않는’이란 뜻을 지닌 ‘비대면非對面’이란 단어가 일상 용어가 되었습니다. 주차요금 정산, 패스트푸드점 주문, 공항과 열차와 전철 탑승권, 금융계좌 개설. 어쩌면 기술 발달 덕분에 우리들은 한참 전부터 비대면 서비스에 익숙해졌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학교가 문을 열기 못한 채 2개월이 지나고 직장 재택 근무가 확대되고, 교회의 온라인 예배와 집회가 진행되고,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만나서 하지 많자는 사회적 거리두기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언제 끝날지 예측할 수 없고 비대면 사회를 이제서야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중입니다.

코로나19와 사회적 거리두기가 바꾸고 놓은 많은 변화들 중에 일상 사회 생활의 소중함에 대한 깨달음은 가장 가슴에 와닿는 말입니다.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거나 최근 후에 밤늦도록 치맥을 함께 하던 회사 동료들, 교실과 복도에서 치고박고 장난치던 학교 친구들, 꽃피는 봄날에 산천을 놀러다니던 연인과 친구, 가족들. 그 많던 일상은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일까요. 봄이 봉쇄된 느낌입니다. 대학과 초중고 교실과 도서관 문들은 굳게 닫혔습니다. 학생들은 어쩌면 평생 코로나19로 인해 학교를 가지 못하던 시절을 평생 기억할 것입니다.

하지만 두고 두고 기억에 남을 또하나의 기억이 있습니다. 비대면 사회와 사회적 거리두기가 만들어낸 2020년 봄의 집콕과 랜선 문화. 통계적으로 부부조차도 하루에 90분 정도 함께 지낸다는데 수면시간을 제외하고도 가족들이 집안에서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이 엄청나게 많아졌습니다.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이런 시간을 경험한 적이 없었습니다. 저희 한국국학진흥원 웹진 담담이 74호에 담은 주제는 ‘조선시대 집콕, 랜선 가정방문’입니다.

‘커피 400번 젓기, 실 4000번 잣기. 달고나 커피도 우리민족이었어’의 커버글에서 강유현 선생님은 고상한 문학적 재능이 발휘된 ‘규방가사’를 통해 거의 매일 단순반복노동이 결부된 강도 높은 사회적 거리두기를 경험해야 했던 조선 여성들의 생활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집 안에 갇혀 넘치는 기세를 주체하지 못하고 커피를 젓고 있는 2020년의 후손들인 우리들. 지금 집 안에 가둔 것은 서로에 대한 배려심이며 시민으로서의 자각이라고 합니다. 랜선을 타고 함께 따로 또 같이 화전놀이를 즐겨볼 수 있는 마음이 샘솟습니다.

‘역병과 사투를 벌인 조선시대 아버지 열전’의 커버글에서 조정미 선생님은 수백년 전 현대의학의 혜택을 받지 못했던 조선시대의 수많은 아버지들의 마음과 수고를 일기류들을 통해 펼쳐 보이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도 수많은 감염병이 많은 사람들을 빠른 속도로 감염시켜서 떼죽음에 이르게 하여 역질, 역병, 돌림병이라고 불리워졌습니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소소한 일상사들이 빠짐없이 기록해놓은 일기류 곳곳에는 담긴 자식의 병을 고치려 애쓰는 부모들의 기록들을 통해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은 감동을 느끼게 해 줍니다.

정용연 화백님은 <누이>에서 태어나 얼마 안 돼 왜란 와중에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은 김광계의 누이동생에 대한 이야기를 작품으로 그려 주셨습니다. 진달래가 지천이던 날 시집간 누이가 일곱해 만에 돌림병인 당역으로 세상을 뜨고, 슬픔에 젖고 스스로 병으로 누웠다고 겨우 누이의 장례식에 가서 마지막 보내는 김광계의 이야기는 시대와 세월을 건너뛰어 작품을 접하는 이들 또한 슬프게 합니다.

홍윤정 작가님은 ‘집콕이 남긴 대과업 성찰기’ 글에서 선인들과 여인들의 생활들을 통해 작가 스스로 겪어내고 있는 집콕 상황에서 겪는 살림의 어려움들을 성찰합니다. 겨울 식재료 준비를 지시하는 퇴계 이황의 편지와 살가운 엄마 잔소리 같은 내용을 반찬과 함께 아들에게 보낸 연암 박지원의 편지 등을 통해 집안 살림에 적극적이었단 조선의 남자들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사극과 드라마에서 드러내지 못한 여성과 남성의 모습을 성찰하며, 요리의 달인으로서 요리를 못하는 아내를 대신해 정성껏 음식을 바치는 고귀하고 높으신 천계의 황자을 다른 중국 드라마 <삼생삼세 십리도화> 이야기를 펼칩니다.

‘나무판에 새긴 이름, 편액’은 가정의 달과 ‘사회적 거리’가 만연하는 시기에 가정이 화목하면 그 복과 경사가 자손에게 미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경류정慶流亭을 소개합니다. 경류정은 경상북도 안동시 주하리에 있는 진성이씨 대종택인 경류정 종택 별당에 게시된 편액입니다. 경류정이 자리하는 경류정종택慶流亭宗宅은 안동시 와룡면 주하리에서 진성이씨 종파가 600년 동안 대를 이어 살아온 곳으로 마을이 두루 평안하다고 하여 우리말로 ‘두루’로도 부릅니다. ‘경류’는 『주역』에서 “집안에서 쌓은 것이 선하면 복과 경사가 자손에게 미치고, 쌓은 것이 선하지 못하면 재앙이 후세에 흐른다.家之所積者 善則福慶 及於子孫 所積 不善則災殃 流於後世”라고 한 데에서 취한 것입니다. 가족에 대한 원칙과 신념에 대해 되짚어보게 하는 문장입니다.

이번호의 <스토리이슈>는 조선시대 어머니들의 기록물, 내방가사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는 한국국학진흥원 기록유산센터 김형수 센터장님과 ‘내방가사의 세계문화유산적 가치’ 에 대한 인터뷰를 담았습니다. 내방가사는 상당히 많은 분량이 두루마리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한국 같은 경우는 여성들에 의해 독특한 문학 장르가 만들어질 정도로 여성들의 문자 활용이 활발했습니다. 더군다나 여성들이 집단적으로 문학 장르를 향유했다는 사실 자체는 아주 독특한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방가사의 아시아·태평양,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 가능성과 한계는 무엇인지, 현대인에게 내방가사는 어떤 의미와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5월 5일 어린이날은 입하(立夏)로서 봄은 완전히 퇴색하고 산과 들에는 푸른색이 완연하기 시작하며 개구리 우는 소리가 들립니다. 시골 마당에는 지렁이들이 꿈틀거리고, 밭에는 참외꽃이 피기 시작하고 묘판에는 볍씨의 싹이 터 모가 한창 자라고, 밭에는 보리이삭들이 패기 시작합니다. 예전의 농촌에서는 한창 누에치기에 바쁘고 논밭에는 해충도 많아지고 잡초가 자라서 풀뽑기에 부산해져서 일 년 중에 가장 바쁜 때입니다. 가족이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움직이던 때였을 것입니다.

가정의 달을 맞아 저희 편집위원들의 마음을 모아 연암 박지원의 시詩 <전가田家>를 집콕과 랜선 문화에 지쳐 있을 웹진 담담 독자님들께 배달합니다. 조선의 농가 풍경이 한폭의 그림처럼 펼쳐집니다. 젊은이들은 일하러 모두 나갔는지 노인이 참새를 쫓고 있는 한낮의 한가로운 농가에 갑자기 솔개가 출현하여 닭들이 긴장합니다. 이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냇물을 건너는 젊은 아낙네의 뒤를 따라 발가벗은 아이와 누런 개가 달려가고 있습니다.

翁老守雀坐南陂 늙은 첨지 참새 쫓느라 남녘 둑에 앉았는데
粟拖狗尾黃雀垂 개꼬리 같은 조 이삭에 노랑 참새 매달렸네
長男中男皆出田 큰아들 작은아들 모두 다 들에 나가니
田家盡日晝掩扉 농삿집 진종일 낮에도 문 닫겼네
鳶蹴鷄兒攫不得 솔개가 병아리를 채려다가 빗나가니
群鷄亂啼匏花籬 호박꽃 울타리에 뭇 닭이 꼬꼬댁 거리네
小婦戴棬疑渡溪 젊은 아낙 바구니 이고 시내 건너려다 주춤주춤
赤子黃犬相追隨 꾀복쟁이와 누렁이가 줄지어 뒤따르네




편집자 소개

공병훈
공병훈
협성대 미디어영상광고학과 교수. 문예커뮤니케이션학회 학회장. 서강대 신문방송학과에서 앱(App) 가치 네트워크의 지식 생태계 모델 연구에 대한 박사논문을 썼다. 주요 연구 분야는 미디어 비즈니스, PR, 지식 생태계이며 저서로는 『광고는 어떻게 세상을 유혹하는가?』, 『4차산업혁명 상식사전』 등이 있다.
“아이들을 돌보다가 병이 옮은 부부”

금난수, 성재일기,
1579-02-12~1579-02-23

지난 연말부터 무섭게 번져나간 전염병은 금난수의 집에도 마수를 뻗쳐 집안의 여종들과 금난수의 딸들이 차례로 몸져눕게 되었다. 병을 피해보려고 이리저리 피접을 다니고는 있었지만 사람에서 사람으로 전해지는 병을 피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금난수의 집에서도 여종 두 명이 사망하였고, 금난수의 두 딸도 병세가 나아졌다 나빠졌다를 반복하였다.
남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집에서 가장 먼저 발병한 금난수의 막내아들 금각의 병세는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집안의 아이들 명석(命石)과 연문(連文)도 앓아누운지 이미 이레가 다 되었다. 그러던 중 아이들을 돌보던 금난수의 아내가 몸이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땀을 좀 낸 뒤에는 괜찮아진 것 같았으나 곧 다시 앓아누웠고, 금난수도 연이어 잠자리가 편치 않고 입맛도 없어지더니 결국 함께 앓아눕게 되었다.
거처하기 편하지 않은 재사(齋舍)에서 부부가 함께 앓고 있자, 아들들이 배행하여 금난수의 아내는 가마를 타고, 금난수는 말을 타고 동계서재로 거처를 옮겼다. 서재로 옮긴 뒤 아내는 입맛이 점점 돌아오고 차도가 있었으나, 금난수는 병이 더욱 심해졌다. 그래서 밤에 땀을 좀 흘리고 나니 열이 잠시나마 내린 것 같았다. 하지만 아이들이 걱정되었기 때문에 결국 세 아들들을 서재에서 내보내고 아내와 단 둘이서 병조리를 하기로 하였다. 아이들이 떠나고 나자 전염에 대한 불안감이 줄어들어서인지 조금씩 몸이 회복되는 것이 느껴졌다.

“아내의 병으로 어린 아이를 남에게 맡기다”

최흥원, 역중일기, 1740-03-28~

1740년 3월 28일, 어머니의 환후는 평소와 다름없었으나, 아내의 병이 위독해져서 큰 근심이었다. 올해 들어 갑자기 병이 들더니 하루가 다르게 병세가 악화되어 거의 죽기 직전에 이른 것이다. 갑작스러운 아내의 병으로 최흥원은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오늘은 병든 아내가 최흥원에게, 법흥댁이 젖먹이 아이를 길러주겠다고 하였다고 전하면서 고맙기 그지없다고 하였다. 아마도 아내는 자신이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젖먹이 아이를 키울 방도를 그간 열심히 궁리하였던 것 같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지난밤 최흥원이 꿈을 꾸었는데, 거기에 아버지께서 나오셨다. 아버지는 둘째 제수씨를 부르더니 젖먹이 용장의 이름을 부르면서, 이 아이를 제수씨에게 키우라 명하였던 것이다. 최흥원은 이 꿈을 꾸고도 행여 아내가 다른 생각을 하지 않을까 싶어 꿈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지금 아내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는 너무도 놀랍고 괴이쩍은 생각을 숨길 수 없었다.
아! 아내는 정녕 세상을 버릴 것인가. 그래서 꿈에서 아버지께서 나오셔서 자신의 손주 걱정까지 하신 것인가! 최흥원은 마음이 착잡해져왔다. 병든 아내에게 아이는 걱정하지 말고 어서 몸을 추스르라고 말하고는 조용히 방문을 나섰다.

“아내가 병이 나서 의녀를 부르다”

김광계, 매원일기, 1608-03-26

1608년 3월 26일, 하루도 쉴 수 있는 날이 없을 정도로 바쁜 나날을 지내고 있던 김광계는 바쁜 와중에 오래 전부터 계획했던 서당을 짓기 시작하면서 집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거의 대부분을 아내에게 맡겨놓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아내의 얼굴 색이 좋지 않아 무슨 일이라도 있는지 물어 보았으나 아내는 아무 일도 없다며 집안 일은 걱정하지 말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마음을 놓고 바깥일에만 몰두했었다. 그런데 며칠 전에 드디어 아내가 몸이 아파서 일어나 앉는 것도 힘겨워하기 시작했다. 김광계는 의술에 뛰어난 집안 어른들께 여쭈어 보려고 했으나 아내는 펄쩍 뛰며 손사래를 쳤다. 이날 결국 집사람은 의녀(醫女)를 불러 진맥을 받은 후, 침을 맞고 뜸을 떴다. 소식을 들은 노산 재종조부가 걱정이 되어 찾아 왔다.

“이시명에게 시집간 누이가 당홍역에 걸려서 죽다”

김광계, 매원일기,
1614-09-01~1614-10-16

1614년 9월 1일, 김광계는 인동에서 열린 과거 시험에 낙방하고 안음 형과 같이 예안으로 돌아가는 길에 또 일직(一直)에 사는 류실 누이 집에 들러 자고 가기로 했다.
누이가 차려준 저녁상을 받아 맛있게 먹은 후에 과거 시험장에서 벌어진 이야기며, 오산서원을 구경한 이야기, 그리고 천생산성에 올라 사방을 내려다 본 이야기 등등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몇 년 전 갑자기 매형이 돌아가신 후로 적적하고 무료하게 지내는 누이에게 세상 이야기를 전해 주고 싶어서 더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렇게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하인이 달려 들어와 영해(寧海) 누이의 부고를 전해 주었다.
김광계는 너무 놀라서 믿을 수가 없었다. 다시 종을 불러 물어보니 지난 달 27일에 당홍역에 걸려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고 하였다. 김광계는 류실 누이와 생질녀를 붙들고 목을 놓아 통곡하였다. 김광계는 어린 누이가 가여워서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태어나 얼마 안 되어 왜란 와중에 두 부모를 모두 잃고 부모님의 얼굴도 기억하지 못한 채 자란 누이였다. 그래도 심성이 착하고 유순해 손윗누이들과 오빠들의 귀여움을 많이 받다가 이시명(李時明)에게 시집을 갔는데, 시집간 지 7년 만에 어린 자식을 둘을 남겨 두고 갑자기 세상을 떠났으니 그 눈을 어찌 감았을까. 누이 얼굴이 떠올라 김광계는 오장(五臟)을 도려내는 것 같았다. 잠을 잘 수 없었다.
눈도 붙이지 못했지만 그대로 있을 수가 없어 김광계는 깊은 달밤에 류실 누이의 집에서 나와 새벽에 집에 도착했다. 집에 들어가니 아내도 잠을 못 이루고 있었다. 김광계는 아내를 보자마자 또 다시 통곡하였다. 아내는 이미 영해 누이의 부고를 들었고, 마을에도 전염병이 돌아 집에 계시는 할머니와 아픈 아우를 침락서당으로 피접을 보내 놓았다고 했다. 김광계가 돌아 왔다는 소식을 듣고 아침부터 노산 재종조부가 와서 조문을 왔다. 다음날 아침에는 판사 재종숙이 와서 조문하고, 밥을 먹은 뒤에 여희·덕회 형, 그리고 김참 아재가 와서 조문하였다.
9월 4일 아침에 성복(成服)을 하였다. 노산 재종조부와 몇몇 사람들이 보러 왔다. 다음날 둘째 아우 이도(以道)가 부고를 듣고 예천(醴泉)에서 왔는데, 이들은 당장 영해에 갈 수가 없었다. 마을에도 전염병이 돌아 모두 조심스러웠고, 피접을 나가 있는 아픈 아우와 할머니에게 큰 일이 날까봐 마을을 떠날 수도 없었다. 제천 할아버지도 이질에 걸려 모두 염려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김광계도 몸이 매우 아팠지만, 아픈 몸을 이끌고 문병을 다니거나 사람들을 만나야 했다.
24일에도 영해(寧海)로 길을 나서려고 하였으나 병이 낫질 않아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나마 26일이 되어 피접 나가셨던 할머니가 집으로 돌아 오셨는데, 김광계는 이제야 할머니께 영해(寧海) 누이의 부고를 말씀드렸다.
영해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선 것은 10월 15일이었다. 다음날 저녁이 되서야 누이의 집에 당도하였는데, 조문객은 이미 아무도 없고, 빈소에 들어가니 붉은 만장과 혼백상자만 놓인 채 촛불이 깜빡이고 있을 뿐이었다. 쓸쓸한 모습에 김광계는 설움이 더욱 북받쳐 목을 놓아 통곡하였다. 매부인 이회숙(李晦叔)과도 서로 부여잡고 통곡을 하였다. 어린 남매를 보니 슬픔이 한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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