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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판에 새긴 이름, 편액

두루 평안을 지키고자 했던경류정 (慶流亭)

코로나 사태로 인해 발생된 사회적 거리두기는 직장인과 가정에 예상하지 못한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직장인은 회사와 집만을 오가는 생활로 변화시켰고, 학생들은 학교에 가지 못해 집에서 인터넷을 통해 공부를 하는 현상을 발생시켰다. 코로나바이러스-19로 인해 시행하는 ‘사회적 거리두기’는 사람들과 사회적 관계를 멀어지게 할 수 있지만 가족 구성원들과 자주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고 있다. 5월은 어린이날, 어버이날, 부부의 날이 있는 달로, 가족에 대한 행사가 유난히 많은 가정의 달이다. 가정의 달과 ‘사회적 거리’를 시행하고 있는 시기에 가정이 화목하면 그 복과 경사가 자손에게 미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경류정(慶流亭)을 소개하고자 한다.


600년 동안 대를 이으며 두루 평안하게 살아온 곳, 경류정종택(慶流亭宗宅)


경류정이 자리하고 있는 경류정종택은 안동시 와룡면 주하리에 있다. 진성이씨 종파가 600년 동안 대를 이어 살아온 곳으로, 마을이 두루 평안하다고 하여 우리말로 ‘두루’로도 부른다. 종택의 별당 건물인 경류정은 본래 이연(李演)이 1492년 경류정종택 앞 200미터 떨어진 곳에 건립했다가 그의 손자 이정회가 안동 진성이씨 경류정종택 본채 옆으로 옮겨 놓았다. 금학산 기슭에 자리한 남향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이다. 서쪽은 4칸 마루방이고 동쪽은 뒤쪽의 반침까지 포함하여 2칸통 온돌방이다. 자연석 초석 위에 배흘림이 강한 원주를 세운 집으로 원주에는 배흘림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내부에는 불천위 송안군 이정의 신주를 봉안하고 있다. 앞쪽에 이정이 심었다는 600년 된 뚝향나무(천연기념물 제314호)는 종택의 상징이 되어, 오랜 세월동안 이 가문사람들에게 ‘지조와 절개’라는 교훈을 심어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점에서 선산부사 이정이 이후 후손들에게 이 가문 사람들에게 끼치고 있는 영향은 크고 넓다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정(李禎)이 평안도 영변에서 가져와 경류정종택 마당에 심은 뚝향나무(천연기념물 제314호)


퇴계 이황을 배출한 명문가문,
진성이씨 주촌문중(眞城李氏 周村門中)


진성이씨 주촌문중 종택 전경(국가민속중요문화재 제291호)


경류정 종택 문중은 진성이씨(眞城李氏)의 시조 이석의 후손이다. 이석(李碩)은 대대로 경상도 진보현(지금의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에 살았던 향리로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죽은 뒤 밀직부사로 임명되었으며, 이자수(李子脩)와 이자방(李子芳) 두 아들을 두었다. 이석의 맏아들 이자수는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이 통헌대부판전의시사에 이르렀고, 1363년(공민왕 12) 개경을 침략한 홍건적을 격퇴한 공로로 송안군(松安君)에 봉해졌다. 이후 왜구의 침략을 피해 진보에서 안동 마애로 옮겼다가 만년에 다시 지금의 예안 두루(周村)로 옮기면서 두루마을 입향조가 되었다. 이 시기부터 경류정 종택 문중은 사족으로서의 기반을 확고히 구축함과 동시에 급속한 성장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자수의 손자 이정(李禎)은 뛰어난 무예로 세종 때 북방의 오랑캐를 격퇴하여 변경 지방을 안전하게 보호하는데 적지 않은 기여를 하였다. 당시 건주위 추장 이만주(李萬住)가 변경을 위협하자, 이자수는 영변판관에 발탁되어 부사 조비형(曺備衡)을 도와 약산성(藥山城)을 축조하여 영변에 거진(巨鎭)을 설치하는데 공적을 남겼고, 또 최윤덕(崔潤德)을 따라 모련위(毛憐衛)를 정벌하는 데도 공을 세웠다. 선산부사로 재직할 때는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어 명망을 얻었다. 나아가 여섯 명의 딸을 남백경(南伯庚)·유봉수(柳鳳壽)·정보문(鄭普文)·이주(李疇)·박근손(朴謹孫)·권종(權悰)에게 출가시켜 폭넓은 혼맥을 형성함으로써 가문이 향촌사회에 재지적 기반을 튼튼하게 하는 데도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정은 이우양(李遇陽)·이흥양(李興陽)·이계양(李繼陽, 1424~1488) 세 아들을 두었는데, 첫째 이우양은 무과에 급제하여 안동현감을 역임하였으며, 그대로 예안 두루에 살면서 진성이씨 주촌파를 형성하였고, 그의 후손들 역시 두루를 무대로 가문의 위상을 더욱 공고히 하였다. 둘째 이흥양은 증조부 이자수가 진보에서 처음 이거하였던 안동 마애로 옮겨 진성이씨 망천파를 형성하였다. 막내 이계양은 예안의 온계리에 정착하여 진성이씨 온혜파를 형성하여 재지적 기반을 확대해 나갔고, 그의 손자대에 와서 온계(溫溪) 이해(李瀣, 1496~1550)와 퇴계 이황을 배출함으로써 진성이씨 가문은 조선 최고의 명문으로 발돋움하였다. 한편, 이우양의 증손자 이연(李演)은 자가 호연(浩然), 호는 경류정이며, 부친은 이훈이다.


집안에서 쌓은 것이 선하면 복과 경사가 따라온다


경류정은 경상북도 안동시 주하리에 있는 진성이씨 대종택인 경류정 종택 별당에 게시된 편액이다.


경류정(慶流亭) / 진성이씨 경류정종택(眞城李氏 慶流亭宗宅) / 63.3×123.3×8.3 / 해서(楷書) / 퇴계 이황 친필


‘경류’는 『주역』, 『곤괘문언坤卦文言』에 “선을 쌓은 집안에는 남은 경사가 있고, 불선을 쌓는 집안에는 반드시 남는 재앙이 있다.[積善之家, 必有餘慶, 積不善之家, 必有餘殃]”라고 한 데에서 취하였다. 한편, 퇴계 이황은 ‘경류’의 의미를 「제경류정(題慶流亭)」이란 시를 통해 밝히고 있다. 다음은 「제경류정」 3수 가운데 첫 번째 시이다.

선을 쌓이면 원래 복과 경사 불어나는 법 善積由來福慶滋
몇 대 전한 인후함이 온 집안에 넘쳐나네 幾傳仁厚衍宗支
그대에게 권하느니 문호를 더욱 힘써 지켜 勸君更勉持門戶
위씨 집안처럼 화수회가 해마다 이어지리라 花樹韋家歲歲追

퇴계는 이 시를 통해 선이 쌓이면 복과 경사가 넘쳐 문호를 정성껏 지켜주기를 당부하는 동시에, 당나라 위씨(韋氏) 가족들이 꽃나무 아래에서 종친 간 화목을 다지려고 행한 전통적 가풍을 인용하여 위씨 집안처럼 종친 간 화목을 다지는 화수회를 해마다 이어나가기를 희망하였다. 경류정에는 퇴계가 쓴 편액과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1682)이 쓴 편액 두 개가 걸려 있다.


경류정(慶流亭) / 진성이씨 경류정종택(眞城李氏 慶流亭宗宅) / 42.2×85.3×5.8 / 전서(篆書) / 미수 허목 친필


종가가 연명하려면 부호(富豪)가 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로 인해 돈이면 최고라는 황금만능주의가 팽배해져, 부모님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집에 있는 시간이 부족하여 자식들에게 소홀해지고, 자식들은 더 좋은 직장을 가지기 위해 학업에 집중을 하고 있는 세상이다. 그러기 때문에 부모 자식 간에 인간적 유대감이 예전만큼 두텁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경류정 편액을 통해 진성 이씨의 내력과 원칙과 신념을 바탕으로 600년 동안 한 곳에 살며 대를 이어 왔음을 알 수 있었다. 이는 곧 부모는 조상을 섬기는 마음과 자기 스스로를 항상 단속하고 모범을 보이려는 마음을 가지려 애쓰고, 자식은 그러한 것을 보고 배우며 살아 왔음에 가능한 것으로 생각된다. 부모와 자식간의 사이가 멀어져 가는 오늘, 경류정을 통해 나의 가족에 대한 원칙과 신념에 대해 되짚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   권진호 (한국국학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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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광현 (한국국학진흥원)

“아이들을 돌보다가 병이 옮은 부부”

금난수, 성재일기,
1579-02-12~1579-02-23

지난 연말부터 무섭게 번져나간 전염병은 금난수의 집에도 마수를 뻗쳐 집안의 여종들과 금난수의 딸들이 차례로 몸져눕게 되었다. 병을 피해보려고 이리저리 피접을 다니고는 있었지만 사람에서 사람으로 전해지는 병을 피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금난수의 집에서도 여종 두 명이 사망하였고, 금난수의 두 딸도 병세가 나아졌다 나빠졌다를 반복하였다.
남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집에서 가장 먼저 발병한 금난수의 막내아들 금각의 병세는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집안의 아이들 명석(命石)과 연문(連文)도 앓아누운지 이미 이레가 다 되었다. 그러던 중 아이들을 돌보던 금난수의 아내가 몸이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땀을 좀 낸 뒤에는 괜찮아진 것 같았으나 곧 다시 앓아누웠고, 금난수도 연이어 잠자리가 편치 않고 입맛도 없어지더니 결국 함께 앓아눕게 되었다.
거처하기 편하지 않은 재사(齋舍)에서 부부가 함께 앓고 있자, 아들들이 배행하여 금난수의 아내는 가마를 타고, 금난수는 말을 타고 동계서재로 거처를 옮겼다. 서재로 옮긴 뒤 아내는 입맛이 점점 돌아오고 차도가 있었으나, 금난수는 병이 더욱 심해졌다. 그래서 밤에 땀을 좀 흘리고 나니 열이 잠시나마 내린 것 같았다. 하지만 아이들이 걱정되었기 때문에 결국 세 아들들을 서재에서 내보내고 아내와 단 둘이서 병조리를 하기로 하였다. 아이들이 떠나고 나자 전염에 대한 불안감이 줄어들어서인지 조금씩 몸이 회복되는 것이 느껴졌다.

“아내의 병으로 어린 아이를 남에게 맡기다”

최흥원, 역중일기, 1740-03-28~

1740년 3월 28일, 어머니의 환후는 평소와 다름없었으나, 아내의 병이 위독해져서 큰 근심이었다. 올해 들어 갑자기 병이 들더니 하루가 다르게 병세가 악화되어 거의 죽기 직전에 이른 것이다. 갑작스러운 아내의 병으로 최흥원은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오늘은 병든 아내가 최흥원에게, 법흥댁이 젖먹이 아이를 길러주겠다고 하였다고 전하면서 고맙기 그지없다고 하였다. 아마도 아내는 자신이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젖먹이 아이를 키울 방도를 그간 열심히 궁리하였던 것 같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지난밤 최흥원이 꿈을 꾸었는데, 거기에 아버지께서 나오셨다. 아버지는 둘째 제수씨를 부르더니 젖먹이 용장의 이름을 부르면서, 이 아이를 제수씨에게 키우라 명하였던 것이다. 최흥원은 이 꿈을 꾸고도 행여 아내가 다른 생각을 하지 않을까 싶어 꿈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지금 아내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는 너무도 놀랍고 괴이쩍은 생각을 숨길 수 없었다.
아! 아내는 정녕 세상을 버릴 것인가. 그래서 꿈에서 아버지께서 나오셔서 자신의 손주 걱정까지 하신 것인가! 최흥원은 마음이 착잡해져왔다. 병든 아내에게 아이는 걱정하지 말고 어서 몸을 추스르라고 말하고는 조용히 방문을 나섰다.

“아내가 병이 나서 의녀를 부르다”

김광계, 매원일기, 1608-03-26

1608년 3월 26일, 하루도 쉴 수 있는 날이 없을 정도로 바쁜 나날을 지내고 있던 김광계는 바쁜 와중에 오래 전부터 계획했던 서당을 짓기 시작하면서 집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거의 대부분을 아내에게 맡겨놓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아내의 얼굴 색이 좋지 않아 무슨 일이라도 있는지 물어 보았으나 아내는 아무 일도 없다며 집안 일은 걱정하지 말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마음을 놓고 바깥일에만 몰두했었다. 그런데 며칠 전에 드디어 아내가 몸이 아파서 일어나 앉는 것도 힘겨워하기 시작했다. 김광계는 의술에 뛰어난 집안 어른들께 여쭈어 보려고 했으나 아내는 펄쩍 뛰며 손사래를 쳤다. 이날 결국 집사람은 의녀(醫女)를 불러 진맥을 받은 후, 침을 맞고 뜸을 떴다. 소식을 들은 노산 재종조부가 걱정이 되어 찾아 왔다.

“이시명에게 시집간 누이가 당홍역에 걸려서 죽다”

김광계, 매원일기,
1614-09-01~1614-10-16

1614년 9월 1일, 김광계는 인동에서 열린 과거 시험에 낙방하고 안음 형과 같이 예안으로 돌아가는 길에 또 일직(一直)에 사는 류실 누이 집에 들러 자고 가기로 했다.
누이가 차려준 저녁상을 받아 맛있게 먹은 후에 과거 시험장에서 벌어진 이야기며, 오산서원을 구경한 이야기, 그리고 천생산성에 올라 사방을 내려다 본 이야기 등등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몇 년 전 갑자기 매형이 돌아가신 후로 적적하고 무료하게 지내는 누이에게 세상 이야기를 전해 주고 싶어서 더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렇게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하인이 달려 들어와 영해(寧海) 누이의 부고를 전해 주었다.
김광계는 너무 놀라서 믿을 수가 없었다. 다시 종을 불러 물어보니 지난 달 27일에 당홍역에 걸려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고 하였다. 김광계는 류실 누이와 생질녀를 붙들고 목을 놓아 통곡하였다. 김광계는 어린 누이가 가여워서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태어나 얼마 안 되어 왜란 와중에 두 부모를 모두 잃고 부모님의 얼굴도 기억하지 못한 채 자란 누이였다. 그래도 심성이 착하고 유순해 손윗누이들과 오빠들의 귀여움을 많이 받다가 이시명(李時明)에게 시집을 갔는데, 시집간 지 7년 만에 어린 자식을 둘을 남겨 두고 갑자기 세상을 떠났으니 그 눈을 어찌 감았을까. 누이 얼굴이 떠올라 김광계는 오장(五臟)을 도려내는 것 같았다. 잠을 잘 수 없었다.
눈도 붙이지 못했지만 그대로 있을 수가 없어 김광계는 깊은 달밤에 류실 누이의 집에서 나와 새벽에 집에 도착했다. 집에 들어가니 아내도 잠을 못 이루고 있었다. 김광계는 아내를 보자마자 또 다시 통곡하였다. 아내는 이미 영해 누이의 부고를 들었고, 마을에도 전염병이 돌아 집에 계시는 할머니와 아픈 아우를 침락서당으로 피접을 보내 놓았다고 했다. 김광계가 돌아 왔다는 소식을 듣고 아침부터 노산 재종조부가 와서 조문을 왔다. 다음날 아침에는 판사 재종숙이 와서 조문하고, 밥을 먹은 뒤에 여희·덕회 형, 그리고 김참 아재가 와서 조문하였다.
9월 4일 아침에 성복(成服)을 하였다. 노산 재종조부와 몇몇 사람들이 보러 왔다. 다음날 둘째 아우 이도(以道)가 부고를 듣고 예천(醴泉)에서 왔는데, 이들은 당장 영해에 갈 수가 없었다. 마을에도 전염병이 돌아 모두 조심스러웠고, 피접을 나가 있는 아픈 아우와 할머니에게 큰 일이 날까봐 마을을 떠날 수도 없었다. 제천 할아버지도 이질에 걸려 모두 염려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김광계도 몸이 매우 아팠지만, 아픈 몸을 이끌고 문병을 다니거나 사람들을 만나야 했다.
24일에도 영해(寧海)로 길을 나서려고 하였으나 병이 낫질 않아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나마 26일이 되어 피접 나가셨던 할머니가 집으로 돌아 오셨는데, 김광계는 이제야 할머니께 영해(寧海) 누이의 부고를 말씀드렸다.
영해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선 것은 10월 15일이었다. 다음날 저녁이 되서야 누이의 집에 당도하였는데, 조문객은 이미 아무도 없고, 빈소에 들어가니 붉은 만장과 혼백상자만 놓인 채 촛불이 깜빡이고 있을 뿐이었다. 쓸쓸한 모습에 김광계는 설움이 더욱 북받쳐 목을 놓아 통곡하였다. 매부인 이회숙(李晦叔)과도 서로 부여잡고 통곡을 하였다. 어린 남매를 보니 슬픔이 한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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