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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이슈

한국국학진흥원 기록유산센터 김형수 센터장 인터뷰
내방가사의 세계문화유산적 가치

코로나 사태로 학생들은 학교에 가지 못하고, 외식이나 회식 등을 자제하는 사회 분위기가 강해지면서, 어머니들의 역할과 아우성이 동시에 커지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어머니들의 기록물, 내방가사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는 한국국학진흥원 기록유산센터의 김형수 센터장과의 인터뷰를 담았습니다.


한국국학진흥원 기록유산센터 김형수 센터장


Q 2019 내방가사 국제학술대회의 추진 배경과 성과에 대해 말씀해 주신다면...


현대에는 모든 국민들이 의무교육을 받게 되면서, 여성들도 교육을 받는 것이 당연해졌습니다. 하지만 전근대 사회에서 여성에게 교육을 한 것은 가정 외에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성들의 문자 해독력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한국 같은 경우는 여성들에 의해 독특한 문학 장르가 만들어질 정도로 여성들의 문자 활용이 활발했습니다. 더군다나 여성들이 집단적으로 문학 장르를 향유했다는 사실 자체는 아주 독특한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방가사가 가지는 중요성을 우리가 이야기할 수 있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세계기록유산으로서 내방가사의 가능성을 탐색하고자 2019년 국제학술대회를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내방가사는 상당히 많은 분량이 두루마리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길게는 7~8미터로 아주 긴 문학 양식입니다. 동아시아쪽에서는 근래까지 두루마리본의 형태로 남아 있습니다. 내방가사의 독특한 것이 기록유산과 더불어 영창이라고 하는 노래 부르는 것이 있습니다. 영창은 대부분 소멸된 상태이고, 대부분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내방가사는 기록 형태가 두루마리본이고, 이 형식 자체가 기록유산적 가치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여성들에 의한 집단 문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작년 국제학술대회의 성과였다고 봅니다.


Q 해외에도 이와 같은 사례가 있나요?


여성 문학은 많습니다. 안네 프랑크의 일기라던지, 일본의 경우에도 고대부터 여성들의 일기가 있습니다. 하지만 아주 특출난 개인의 독자적인 재능에 의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내방가사는 그 형태와 주제가 반복되면서 근대 사회까지 내려왔다는 점이 굉장히 독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지속적으로 유지가 되면서 다른 작가들에 의해서 새로운 내용으로 창작이 되기도 하고, 그 형태 자체가 하나의 중요한 기록유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Q 내방가사의 아시아·태평양,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 가능성과 한계는 무엇일까요?


세계유산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 인류 역사에서 지워지면 곤란한 한 역사나 문화의 한 장면을 보여주는 것이라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기록을 남기기에 아주 열세했던 사람들의 기록은 가장 높게 평가를 받습니다. 대부분 근현대 사회에서 남자보다 여자들의 문맹률이 높습니다.

내방가사의 경우 조선시대에 여성들이 문자를 익히고, 그것을 문학적으로 풀어낼 만한 성숙한 역량을 가진 분들이 많았다는 사례이기도 합니다. 기록유산으로서의 가치가 상당하다는 것이지요. 여성들의 집단 창작 문학이라는 측면과 더불어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간 과정에서 여성들의 세계와 시대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자료이고, 여성들의 삶의 공간이 확장되어 가는 것을 보여주는 측면에서 아주 중요한 기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한계라고 본다면, 작자가 밝혀지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집단적으로 기록되고 전승되었기 때문에 기록 자체에 누가 어떤 방식으로 변형에 기여했는지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내방가사_출처_전통과 기록_옛문서생활사박물관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 부분은 작자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름은 아니지만, ‘오천댁’이나 ‘상주댁’처럼 시댁의 명칭을 가지고 작품 활동을 했다는 점에서 완전히 무명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작가들 뿐만 아니라, 문학의 한 줄기를 가지고 지속적으로 변용을 가져오는 것들은 주목할 만 가치가 있습니다. 남성작가들이 가사를 창작하면, 여성들은 그것을 수용해서 자기화하는 지점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북청가가 그렇습니다. 남성 작가가 지었고, 여성들이 기록과 영창을 하면서 문학적인 변화를 주게 됩니다. 남성 화자가 남성적인 시각에서 전개를 했다면, 거기에 대한 여성적인 관점의 반박을 하고 새로운 형태가 나타납니다.


Q 조선시대 랩 배틀(Rap Battle) 같습니다.


네, 이는 내방가사 형식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한 분이 쭉 영창을 하고, 그걸 받아 다른 사람이 영창을 합니다. 상호 주고받는 형태이기 때문에, 처음 한 포맷을 만들었다고 끝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이어받아 영창을 하면서 논리를 공박하고, 재창작하는 형태입니다. 화전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창하는 작자가 있다면, 그것을 받아 대꾸로 연결해주는 그런 형식들이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누가 기록을 했다고 하지만, 그 집단 내부에서 공동 창작된 것으로 보아야 하고, 명확하게 작가를 특정하기 곤란한 점이 있습니다. 근래에 내방가사를 창작하는 사례들도 있습니다.


Q 최근의 내방가사 창작은 작가주의로 볼 수 있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원래 내방가사의 주고받는 영창의 문화 속에서 집단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 시대의 의식을 알아보기는 어려운 형태로, 문학적 작가주의로 보아야겠습니다. 내방가사는 한국 여성 의식의 변화를 보여준 자료로서도 가치가 큽니다. 남편이나 자식들을 따라 망명이나 독립운동, 한국 전쟁 등을 겪으면서 한 여성의 입장에서 그 시대와 삶을 바라보는 기록들이 존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측면에서는 ‘여성의 시각으로 본 한국 근현대사’가 될 수 있습니다.


Q 현대인에게 내방가사는 어떤 의미와 가치가 있을까요?


내방가사는 한글로 되어 있습니다. 한글이 창제되고 여성들이 훨씬 더 한글을 많이 썼습니다. 한글은 읽기 쉽기 때문에 대부분 가정 안에서 배웁니다. 여성들에 의해 한글로 제문들이 많이 지어집니다. 또한 그 시대 사회가 재미있는 점이 여성들도 편지를 많이 주고받습니다. 사돈댁끼리 편지를 주고받은 기록들이 남아 있습니다. 조선시대 18세기 말, 19세기 즈음, 여성들이 책을 많이 보고, 심청전 같은 경우 필사도 많이 합니다. 채제공 번암집에 보면 서울 시내 여성들이 책을 너무 많이 빌려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비녀를 뽑아 주고 책을 빌려보기도 할 정도로 문자해독력이 뛰어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서울은 소설이 많은 것 같은데 영남 지방은 가사가 많습니다. 영남 지역에서는 내방가사를 베끼게 됩니다. 그것을 필사해서 돌려보고, 외우고, 영창하고, 재창작되고, 다시 재필사하고...... 그런 형태가 일반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는 민족언어를 발전시키는 데 여성들의 기여가 상당히 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언어의 발전 특히, 민족 언어인 한글의 발전에는 여성들이 큰 공헌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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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을 돌보다가 병이 옮은 부부”

금난수, 성재일기,
1579-02-12~1579-02-23

지난 연말부터 무섭게 번져나간 전염병은 금난수의 집에도 마수를 뻗쳐 집안의 여종들과 금난수의 딸들이 차례로 몸져눕게 되었다. 병을 피해보려고 이리저리 피접을 다니고는 있었지만 사람에서 사람으로 전해지는 병을 피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금난수의 집에서도 여종 두 명이 사망하였고, 금난수의 두 딸도 병세가 나아졌다 나빠졌다를 반복하였다.
남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집에서 가장 먼저 발병한 금난수의 막내아들 금각의 병세는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집안의 아이들 명석(命石)과 연문(連文)도 앓아누운지 이미 이레가 다 되었다. 그러던 중 아이들을 돌보던 금난수의 아내가 몸이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땀을 좀 낸 뒤에는 괜찮아진 것 같았으나 곧 다시 앓아누웠고, 금난수도 연이어 잠자리가 편치 않고 입맛도 없어지더니 결국 함께 앓아눕게 되었다.
거처하기 편하지 않은 재사(齋舍)에서 부부가 함께 앓고 있자, 아들들이 배행하여 금난수의 아내는 가마를 타고, 금난수는 말을 타고 동계서재로 거처를 옮겼다. 서재로 옮긴 뒤 아내는 입맛이 점점 돌아오고 차도가 있었으나, 금난수는 병이 더욱 심해졌다. 그래서 밤에 땀을 좀 흘리고 나니 열이 잠시나마 내린 것 같았다. 하지만 아이들이 걱정되었기 때문에 결국 세 아들들을 서재에서 내보내고 아내와 단 둘이서 병조리를 하기로 하였다. 아이들이 떠나고 나자 전염에 대한 불안감이 줄어들어서인지 조금씩 몸이 회복되는 것이 느껴졌다.

“아내의 병으로 어린 아이를 남에게 맡기다”

최흥원, 역중일기, 1740-03-28~

1740년 3월 28일, 어머니의 환후는 평소와 다름없었으나, 아내의 병이 위독해져서 큰 근심이었다. 올해 들어 갑자기 병이 들더니 하루가 다르게 병세가 악화되어 거의 죽기 직전에 이른 것이다. 갑작스러운 아내의 병으로 최흥원은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오늘은 병든 아내가 최흥원에게, 법흥댁이 젖먹이 아이를 길러주겠다고 하였다고 전하면서 고맙기 그지없다고 하였다. 아마도 아내는 자신이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젖먹이 아이를 키울 방도를 그간 열심히 궁리하였던 것 같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지난밤 최흥원이 꿈을 꾸었는데, 거기에 아버지께서 나오셨다. 아버지는 둘째 제수씨를 부르더니 젖먹이 용장의 이름을 부르면서, 이 아이를 제수씨에게 키우라 명하였던 것이다. 최흥원은 이 꿈을 꾸고도 행여 아내가 다른 생각을 하지 않을까 싶어 꿈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지금 아내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는 너무도 놀랍고 괴이쩍은 생각을 숨길 수 없었다.
아! 아내는 정녕 세상을 버릴 것인가. 그래서 꿈에서 아버지께서 나오셔서 자신의 손주 걱정까지 하신 것인가! 최흥원은 마음이 착잡해져왔다. 병든 아내에게 아이는 걱정하지 말고 어서 몸을 추스르라고 말하고는 조용히 방문을 나섰다.

“아내가 병이 나서 의녀를 부르다”

김광계, 매원일기, 1608-03-26

1608년 3월 26일, 하루도 쉴 수 있는 날이 없을 정도로 바쁜 나날을 지내고 있던 김광계는 바쁜 와중에 오래 전부터 계획했던 서당을 짓기 시작하면서 집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거의 대부분을 아내에게 맡겨놓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아내의 얼굴 색이 좋지 않아 무슨 일이라도 있는지 물어 보았으나 아내는 아무 일도 없다며 집안 일은 걱정하지 말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마음을 놓고 바깥일에만 몰두했었다. 그런데 며칠 전에 드디어 아내가 몸이 아파서 일어나 앉는 것도 힘겨워하기 시작했다. 김광계는 의술에 뛰어난 집안 어른들께 여쭈어 보려고 했으나 아내는 펄쩍 뛰며 손사래를 쳤다. 이날 결국 집사람은 의녀(醫女)를 불러 진맥을 받은 후, 침을 맞고 뜸을 떴다. 소식을 들은 노산 재종조부가 걱정이 되어 찾아 왔다.

“이시명에게 시집간 누이가 당홍역에 걸려서 죽다”

김광계, 매원일기,
1614-09-01~1614-10-16

1614년 9월 1일, 김광계는 인동에서 열린 과거 시험에 낙방하고 안음 형과 같이 예안으로 돌아가는 길에 또 일직(一直)에 사는 류실 누이 집에 들러 자고 가기로 했다.
누이가 차려준 저녁상을 받아 맛있게 먹은 후에 과거 시험장에서 벌어진 이야기며, 오산서원을 구경한 이야기, 그리고 천생산성에 올라 사방을 내려다 본 이야기 등등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몇 년 전 갑자기 매형이 돌아가신 후로 적적하고 무료하게 지내는 누이에게 세상 이야기를 전해 주고 싶어서 더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렇게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하인이 달려 들어와 영해(寧海) 누이의 부고를 전해 주었다.
김광계는 너무 놀라서 믿을 수가 없었다. 다시 종을 불러 물어보니 지난 달 27일에 당홍역에 걸려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고 하였다. 김광계는 류실 누이와 생질녀를 붙들고 목을 놓아 통곡하였다. 김광계는 어린 누이가 가여워서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태어나 얼마 안 되어 왜란 와중에 두 부모를 모두 잃고 부모님의 얼굴도 기억하지 못한 채 자란 누이였다. 그래도 심성이 착하고 유순해 손윗누이들과 오빠들의 귀여움을 많이 받다가 이시명(李時明)에게 시집을 갔는데, 시집간 지 7년 만에 어린 자식을 둘을 남겨 두고 갑자기 세상을 떠났으니 그 눈을 어찌 감았을까. 누이 얼굴이 떠올라 김광계는 오장(五臟)을 도려내는 것 같았다. 잠을 잘 수 없었다.
눈도 붙이지 못했지만 그대로 있을 수가 없어 김광계는 깊은 달밤에 류실 누이의 집에서 나와 새벽에 집에 도착했다. 집에 들어가니 아내도 잠을 못 이루고 있었다. 김광계는 아내를 보자마자 또 다시 통곡하였다. 아내는 이미 영해 누이의 부고를 들었고, 마을에도 전염병이 돌아 집에 계시는 할머니와 아픈 아우를 침락서당으로 피접을 보내 놓았다고 했다. 김광계가 돌아 왔다는 소식을 듣고 아침부터 노산 재종조부가 와서 조문을 왔다. 다음날 아침에는 판사 재종숙이 와서 조문하고, 밥을 먹은 뒤에 여희·덕회 형, 그리고 김참 아재가 와서 조문하였다.
9월 4일 아침에 성복(成服)을 하였다. 노산 재종조부와 몇몇 사람들이 보러 왔다. 다음날 둘째 아우 이도(以道)가 부고를 듣고 예천(醴泉)에서 왔는데, 이들은 당장 영해에 갈 수가 없었다. 마을에도 전염병이 돌아 모두 조심스러웠고, 피접을 나가 있는 아픈 아우와 할머니에게 큰 일이 날까봐 마을을 떠날 수도 없었다. 제천 할아버지도 이질에 걸려 모두 염려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김광계도 몸이 매우 아팠지만, 아픈 몸을 이끌고 문병을 다니거나 사람들을 만나야 했다.
24일에도 영해(寧海)로 길을 나서려고 하였으나 병이 낫질 않아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나마 26일이 되어 피접 나가셨던 할머니가 집으로 돌아 오셨는데, 김광계는 이제야 할머니께 영해(寧海) 누이의 부고를 말씀드렸다.
영해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선 것은 10월 15일이었다. 다음날 저녁이 되서야 누이의 집에 당도하였는데, 조문객은 이미 아무도 없고, 빈소에 들어가니 붉은 만장과 혼백상자만 놓인 채 촛불이 깜빡이고 있을 뿐이었다. 쓸쓸한 모습에 김광계는 설움이 더욱 북받쳐 목을 놓아 통곡하였다. 매부인 이회숙(李晦叔)과도 서로 부여잡고 통곡을 하였다. 어린 남매를 보니 슬픔이 한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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