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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송을 통해 본 조선 사회


작년에 발표된 사법연감에 따르면 2022년 법원에 접수된 소송 건수는 616만 7,312건에 달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소송 건수는 해마다 증가하는 추세라 하니 한마디로 우리나라는 ‘소송공화국’이라 할만하다. 그렇다면 과거에는 어떠했을까?

사실 중국이나 조선은 형법 위주로 법률이 규정되어 있어 법의 근간이 백성의 통제에만 있으므로 소송이 적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실제로 유교문화의 영향 속에서 한국인들은 법적인 해결을 불쾌히 여기고, 소송을 기피하는 의식이 문화적 전통이었다는 주장이 일찍부터 대두된 바 있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견해는 어디까지나 조선시대 소송 문서 및 소송 관련 기록에 대한 실증적 분석을 토대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오래된 편견이라 보는 것이 타당하다. 소송 규정과 소송 실태를 통해 조선시대 사람들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중국 소송사회론과 『민장치부책(民狀置簿冊)』



〈후마 스스무[夫馬進]의 『中國訴訟社會史の硏究』〉 (출처: 京都大學學術出版會)


중국사 연구자인 일본 교토[京都] 대학 후마 스스무[夫馬進] 교수는 조선과 같은 시기에 존재했던 명·청 사회가 지금까지의 일반적 상식과 달리 소송이 매우 활발했던 ‘소송사회’였다고 말한다. 소송 억제라는 사대부 관리의 일반적 원칙과 달리 관아에서는 백성들의 소송을 억제하지 않았고, 보통 사람도 소송을 포기할 만큼 관아를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실례로 당시 지방관들이 1년 동안 처리하는 소송문서를 분석한 결과 그 양이 약 1만 건을 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 가운데 원고가 피고를 불러 심리하여 실제 판결을 내린 사건이 10퍼센트를 넘지 않았다고 가정해도, 지방관 한 사람이 1년에 1천 건이라는 어마어마한 소송 사건을 처리했다는 결과가 나온다. 인구가 늘어나고 경제적 분규가 증가하면서 특히 명나라 중기 이후 민간인의 소송 풍조가 만연했다. 다른 조사 결과에 따르면 청나라 가경(嘉慶) 연간(1796~1820)에 안휘성(安徽省) 육안주(六安州) 고을의 지방관이 10개월의 재임 기간 동안 1,360건의 소송 안건을 처리했다고 분석했다.


〈고부군에 제출된 소지와 판결을 요약하여 등사한 『민장치부책』. 1866년 작성되었다.〉 (출처: 디지털 장서각)


아쉽게도 조선시대에는 소송의 유형과 군현에서 처리된 전체 소송 건수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소지(所志)와 등장(等狀) 등 소송문서, 그리고 소송의 전개 과정과 판결 결과를 보여주는 결송입안(決訟立案) 등이 고문서의 형태로 남아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조선후기인 18, 19세기에 올린 것들이며 그 양도 극히 제한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19세기 지방 군현에서 접수된 민장(民狀)과 처리 결과를 요약, 정리한 기록이 민장치부책(民狀置簿冊)의 형태로 전해지고 있어 당시 일부 지역의 민장 접수 상황을 파악할 수 있게 된 것은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지역별로 편차가 존재하기는 했지만, 민장치부책을 통해 19세기에 관아에서 매달 적지 않은 수의 민장을 접수, 처리하고 있었던 실태를 확인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분석 대상 지역은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된 전라도 영암·영광, 경상도의 영천·경산·의령·경상우병영, 충청도의 연기·목천·진천 등 9개 지역이었다. 지역별로 민장 접수에는 차이가 존재했는데, 예컨대 전라도 영광과 경상도 의령의 경우 각각 한 달 평균 수량이 각각 244.8건, 205건에 달할 정도로 관아에 민장이 폭주하였던 데 비해, 충청도 연기와 진천, 경상도의 경산은 각각 61.7건, 71.5건, 58건으로 평균 100건을 넘지 않는 지역으로 분류되었다.

지역별 편차에도 불구하고 대상 지역 전체를 놓고 보면 한 달 평균 민장 접수 건수는 156건이 조금 넘었다. 이는 한 달 동안 수령이 하루도 쉬지 않는다고 가정해도 하루에 5건 이상의 민장을 처리했어야 했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었다. 호송(好訟), 건송(健訟)의 분위기로 인해 민장 접수 및 처리가 19세기 군현 수령의 중요한 일과였음을 증명한다.




소송에 개방적인 조선왕조


조선시대에 소송이 상당히 일반화되었으며, 백성들은 자신들의 권리 실현을 위해 소송을 적극 이용할 정도로 관아에 소를 제기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음은 앞서 언급한 것과 같다. 그럼, 당시 호송(好訟)의 풍속이 가능했던 이유는 뭘까? 이는 조선왕조의 개방적인 소송제도에서 찾을 수 있다.


〈‘동헌(東軒)’은 지방 고을에서 수령이 공무를 행하던 곳이다. 오른쪽에 ‘관가에서 재판광경’이라고 쓰였다.〉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먼저 휴무일과 같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중앙이든 지방이든 관청 개좌일(開坐日)에는 상시적으로 소장(訴狀)을 제출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비교적 소송이 자유로웠던 명·청 시대의 경우 소장 접수가 가능한 달은 8월 1일부터 이듬해 3월 말까지 1년에 8개월이었으며, 접수일도 3, 8, 13, 18, 23, 28일 등 한 달에 6일만 가능했다. 반면 조선에서는 중국처럼 소장 접수가 가능한 날짜를 따로 정해놓지 않아 언제든 관아에 소장을 제출할 수 있도록 했다.

소장 제출에 특별한 제약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신분이나 성별에 관계없이 누구라도 소송을 할 수 있었다는 점도 소송제도의 큰 특징이다. 이 때문에 노비는 물론 여성들도 소송의 주체로 등장할 수 있었다. 조선후기 문중에 보관하고 있는 고문서를 분석한 서울대 김경숙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분석 대상 전체 소지류(所志類) 7,645건 가운데 여성이 올린 것이 126건 정도 파악되었다.


〈『경국대전』, 「사천」에 기재된 ‘삼도득신(三度得伸)’〉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소송 날짜, 소송장 제출자에 관한 사안과 함께 또 하나 언급해 둘 사실은 상소 제도가 갖추어져 수령의 소송 처리에 불복하는 경우 상급 기관에 재심을 요청할 수 있는 길이 제도적으로 보장되어 있었던 점도 꼽을 수 있다. 『경국대전(經國大典)』 사천조(私賤條)의 ‘삼도득신(三度得伸)’ 규정에서 보듯이 동일 사안으로 합법적으로 세 번까지 소송을 제기할 수 있었다. 또한 『경국대전』 소원조(訴冤條)에서는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당한 지방민이 관찰사를 거쳐 중앙에까지 호소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이는 소원(訴冤) 절차에 관한 것이지만 민사소송에서도 적용될 수 있는 원칙이었다.

요약하면 조선시대의 소송은 제도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개방되었고, 제도적 개방성은 실제 소장 제출 양상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었다. 이를 고려할 때 조선후기 목민서를 비롯한 여러 글에서 관리들이 처리해야 할 소송 건수의 증가를 우려한 것은 단순한 수사(修辭)가 아니라 현실을 그대로 토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속언(俗諺)을 통해 본 원님 재판


조선왕조에서 지방관인 각 고을 수령은 행정권과 사법권을 동시에 행사하였다. 자연히 고을에서 발생하는 각종 소송은 수령이 처리, 판결하였다. 상소제도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고을 수령의 판결이었다. 따라서 관하 백성들은 어떤 수령을 맞이하는가에 촉각을 곤두세우기도 했으며, 수령의 자질과 능력에 따라 일희일비하곤 했다.


〈김윤보(金允輔, 1865~1938)의 《형정도첩(刑政圖帖)》에 남아있는 백성이 관아에 소장을 올리는 모습〉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소송을 처리하는 목민관인 수령은 지금의 판사와 마찬가지로 사건의 전후 사정과 법조문을 참고하여 양측이 모두 수긍할 수 있는 엄정한 판결을 내려야 한다. 당연히 한쪽 말만 듣고 현혹되어서는 곤란하다. 하지만 숙련되지 못한 수령들은 갑이 제소해 오면 갑을 두둔하면서 을을 간사한 자로 만들었다가, 다시 을이 제소해 오면 을이 옳다고 하여 앞의 견해를 완전히 뒤집는 등 아침저녁으로 뒤바뀐 판결을 내리곤 했다. 이럴 때 백성들은 원의 판결이 이랬다저랬다 수시로 변덕을 부리는 것을 조롱하여 “익힌 노루 가죽”과 같다고 풍자하였다.

익힌 노루 가죽이란 한자로 ‘숙녹피(熟鹿皮)’라고 쓰는데, 무두질한 사슴 가죽을 말한다. 사슴에서 벗겨낸 가죽을 그대로 방치하면 부패해 버리므로 무두질 또는 제혁(製革)이라 하여 적당한 방법으로 가죽을 손질하는데, 한마디로 가죽을 피혁으로 가공하는 과정이다. 이렇게 무두질한 사슴 가죽은 신축성이 좋아 쉽게 늘였다 줄였다 할 수 있는 것처럼 수령이 주관 없이 자의적으로 판결하는 것을 익힌 노루 가죽과 같다고 비판한 것이다. 이와 유사한 “녹피에 가로왈 자(鹿皮曰字)”라는 속담도 있는데, 무두질한 사슴 가죽에 쓴 왈(曰) 자는 그 가죽을 당기는데 따라 일(日) 자도 되고 왈(曰) 자도 된다는 뜻이다.

무능한 수령을 비꼬는 말로 ‘반실태수(半失太守)’라는 말도 회자되었다. 이는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절반을 잃게 하는 수령’이라는 의미로, 재물을 다투는 소송에서 수령이 사리를 정확히 분별해 시비를 가리기보다 양측에 절반씩 나누어주는 식으로 적당히 판결하는 것을 말한다. 승소해야 당연한 측 입장에서는 수령의 애매한 판결로 생짜로 재물의 절반을 날리게 되는 것이니 억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반실태수는 최하 등급의 수령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명판결 이야기


〈정약용의 『목민심서』〉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사실 조선시대 수령은 관내 고을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송사(訟事)를 처리해야 했으므로 법률 지식이 필수적이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대개 사대부들은 과거 시험과 관련한 문장과 경전 공부에 치중할 뿐 법률 공부에는 소홀했다. 조선의 관직 체계상 이들이 과거에 합격해 6품 벼슬에 오르면 지방의 작은 고을 현감으로 나갈 수 있었는데, 백성들의 민원과 분쟁을 조정하는 능력에 대한 본격적인 시험대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진흙 속에서도 진주는 있는 법. 19세기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곧고 바른 판결을 내린 명판관들의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에 무인년(숙종24, 1698년)에 부임한 동래부사 이세재의 이름이 확인된다.〉
(출처: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숙종 때 동래부사(東萊府使) 이세재(李世載)는 다산이 꼽은 송사를 잘 처리한 수령 중 하나였다. 이세재는 가까운 친족끼리 송사를 벌이는 경우 양쪽을 모두 엄히 처벌해 다시는 골육 간 분쟁으로 풍속을 해치는 일이 없도록 경계했다. 또한 묘지를 둘러싼 송사가 있으면 먼저 묫자리를 봐주어 분란의 원인을 제공한 지관(地官)을 처벌했으며, 금령(禁令)을 어기고 소를 잡는 백성이 있으면 적당히 돈으로 속죄하는 것을 허락지 않고 도둑을 다스리는 엄한 법률로 일벌백계한 것으로 유명했다. 그는 또 부사로 있던 3년간 쇠고기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1827년 2월, 김행교(金行敎)가 안동부사에게 올린 소지(所志).
선영(先塋)을 침범한 이웃 사람의 무덤을 옮겨달라는 내용이다.〉
(출처: 디지털 장서각)

선조 때 홍혼(洪渾) 또한 성품이 강직한 관리였다. 그가 양주목사 시절에 당시 후궁 김소용(金昭容)이 국왕의 총애를 독차지하게 되자 그 위세를 믿고 그의 조모(祖母)를 양주 경내 타인 소유의 산에 장사지냈다. 한마디로 투장(偸葬)을 한 것이다. 산 주인이 제소하자 홍혼은 망설임 없이 즉시 법에 따라 파내도록 판결하였다. 경기감사가 이를 알고 크게 놀라고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모두 벌벌 떨었다고 한다.

다산은 영조 대의 관리 유정원(柳正源)의 일화도 소개하였다. 유정원은 형조 참의(刑曹參議)가 되어 옥사 처리를 공평하고 너그럽게 하며, 숨긴 것 찾아내기를 귀신같이 하였다. 어느 사노(私奴)가 문서를 변조하여 주인을 배반하고 서로 송사하였는데, 여러 해가 되었어도 결정을 보지 못하였다. 그가 문서를 가져다가 밝은 곳에 걸고 살펴보니 은은하게 고친 자리가 있었다. 물을 떠다 종이를 담그고 덧붙인 곳을 손톱으로 긁으니 고쳐 쓴 먹 흔적이 분명하였다. 이에 엄한 형장을 가해 사실을 밝혀내고 주인에게 돌려주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외에도 『목민심서』에는 전라감사 신응시(申應時), 한성판윤 권엄(權𧟓), 홍산현감 이시현(李時顯), 나주목사 이몽량(李夢亮), 안동부사 김상묵(金尙黙), 광주유수 김사목(金思穆)의 명판결 사례가 실려 있다. 다산은 위세에 굴하지 않고 약자의 편에서 많은 백성을 감화시킨 이들을 모두 훌륭한 목민관의 전형으로 본 것이다. 이는 지금의 법조인들도 새겨야 할 일이다.




집필자 소개

심재우
서울대학교에서 정조 『심리록(審理錄)』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인문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대표 저서로는 『조선후기 국가권력과 범죄 통제』, 『백성의 무게를 견뎌라-법학자 정약용의 삶과 흠흠신서 읽기』, 『조선시대 향촌사회조직과 공동체의 운영원리(공저)』, 『조선후기 법률문화 연구(공저)』 등이 있다.
“암자를 둘러싼 소송”

최흥원, 『역중일기』, 1755년 3월 6일

1755년 3월 6일. 요즘 고을에 사는 이평중이 소송에 휘말렸다. 부인사에 기거하는 스님 한 명이 인근에 암자 한 채를 세울 계획이었는데, 이평중이 그 산에 부친의 묘소가 있으므로 암자 건립은 안 된다고 반대한 것이다. 처음엔 사소한 시비 같았는데, 갈등이 전혀 해결되지 않아 결국 소송까지 가게 되었는데, 아무래도 이평중에게 불리한 모양이었다.

오늘은 아침 일찍 둔곡 마을에서 편지가 왔다. 암자를 둘러싼 소송을 직접 조사하기 위해서 고을 수령이 오늘 직접 산에 가서 현장을 조사한다고 한다. 최흥원은 오늘 머무는 곳 근처에 새로 정자를 짓는 일을 감독하고 있었는데, 관아의 행차가 실제로 정자가 있는 산을 지나갔다. 결국, 실제 산을 조사한 수령은 부인사 스님의 손을 들어주었다고 한다. 이평중이 자신의 주장을 조리 있게 말하지 못하였으니 한탄스러운 일이었다.

조사를 마친 수령이 돌아가는 길에 다시 정자 짓는 곳을 지나가며 최흥원을 찾았다. 정자 주변의 계곡을 오르내리면서 신기한 경치를 함께 감상하였는데, 수령이 정자 주변의 풍경을 매우 칭찬하였다. 수령이 돌아간 후, 뒤늦게 수령의 조사 사실을 알고 이평중이 최흥원을 찾아왔다. 조금만 일찍 도착했더라면 수령에게 한 번 더 이야기해볼 수 있었을 텐데……. 최흥원은 이평중의 처지가 딱하여 위로의 말을 건넸다.

“지방 수령과 양반의 기싸움

김광계, 『매원일기』,
1634년 10월 8일~11월 23일

1634년 김광계가 살던 예안 지역은 큰 사업을 앞두고 있었다. 토지의 비옥도와 면적을 조사하는 조선시대의 토지 조사, 양전(量田)이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양전 결과에 따라 납부해야 하는 세금 액수가 크게 달라지기 때문에 양전 사업은 상당히 민감한 문제였고 지방관과 거주민들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기도 쉬웠다.

양전을 앞두고 새로 부임한 예안 현감 남연은 양전 실무를 담당할 사람으로 김광계의 친척 김확을 지명하려 했다. 김확은 김광계와 촌수는 멀어도 자주 왕래하며 친하게 지내던 사이였기에 김광계와 친지들은 크게 걱정한다. 일단 양전 사업과 연관되면 농민 및 지주들과 현감 사이에 끼어 고생하며 비난받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김확은 양전도감 지명을 피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 10월 들어 양전 사업이 실제 실시되는 과정에서 역시 토지 측량 문제로 양전도감 측과 지역민들 사이에 갈등이 생겼다. 김확과 김광계의 형제들은 조정에서 내려 보낸 양전사와 직접 이 문제를 상의하려 시도했다. 특히 김광계의 동생 김광악은 양전 결과에 대해 불만이 컸는지 현감 남연에게 함부로 주사를 부리기까지 했다. 분노한 예안 현감 남연은 김광계의 동생이자 김광악의 형인 김광보를 양전도감으로 임명하고, 이어서 다음 달에는 김확을 좌수로 삼겠다는 임명서 까지 내려 보냈다. 현감은 예안 지역의 유력 가문 출신들을 활용해 양전으로 동요된 분위기를 통제하려 했을 가능성이 높다. 김광계를 비롯한 친지들은 모두 크게 놀라고 근심했다. 김확은 좌수 임명서를 받은 이튿날 직접 예안현 관아로 찾아가 현감에게 애걸하여 임명이 취소되었다. 김광계의 재종숙 김령은 이에 대해 ‘현감은 김확이 굽히고 들어왔다는 데에 기뻐한 것’이라고 썼다. 이렇듯 지방 양반들은 언제나 수령과의 관계를 원만하면서도 균형 있게 유지하는 데에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말도둑과 도둑을 죽인 자, 누구의 잘못이 더 큰가?
- 현감과 대치한 채 분주하게 소송을 준비하다”

김택룡, 『조성당일기』,
1616년 7월 11일~7월 14일

수령(守令)은 고려·조선시대 주(州)·부(府)·군(郡)·현(縣)의 각 고을을 맡아 다스리던 지방관의 총칭이다. 군수와 현령(縣令)의 준말로도 부르며 속칭 ‘원님’이라고도 부른다. 왕이 임명하고, 사법권, 군사권, 행정권의 권한을 행사했다.

조선시대의 수령은 부윤(府尹, 종2품)·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 정3품)·목사(牧使, 정3품)·도호부사(都護府使, 종3품)·군수(郡守, 종4품)·현령(縣令, 종5품), 현감(縣監, 종6품) 등이다. 그 품계는 종2품에서 종6품까지에 걸쳐 있었다.

주·부·군·현의 읍격(邑格)과 수령의 품계는 호구·전결(田結)의 많고 적음에 따라 차이가 있었는데, 행정상으로는 모두 관찰사의 관할 밑에 있었다.

≪경국대전≫에 수록된 수령의 정원은 부윤 4인, 대도호부사 4인, 목사 20인, 도호부사 44인, 군수 82인, 현령 34인, 현감 141인이었다. 후기로 올수록 수령의 정원이 증가하는데, 특히 도호부사의 정원이 늘어났다.

수령에 임용되려면 문과·무과·음과 중 하나를 통과해야 하는데, 상급수령에는 문과가 많고, 연변(沿邊) 군현에는 무과가 많으며, 중소 군현에는 음과가 절대 다수였다.

수령의 임무는 칠사(七事)가 말해 주듯이 권농(勸農)·호구 증식·군정(軍政)·교육 장려·징세 조역(徵稅調役)·소송 간평(訴訟簡平)·풍속 교정이었으며, 수령의 하부 행정 체계로서는 향리와 면리임(面里任)이 있고, 자문 및 보좌 기관으로 유향소(留鄕所, 鄕廳)가 있었다. 또한 감사와 병사(兵使)를 지낸 사람은 그 도의 수령이 될 수 없는 등 여러 가지 제한 규정이 있었다.

수령칠사(守令七事)는 조선시대 수령이 지방을 통치함에 있어서 힘써야 할 일곱 가지 사항이다.

농상성(農桑盛 : 농상을 성하게 함)·호구증(호구를 늘림)·학교흥(學校興 : 학교를 일으킴)·군정수(軍政修 : 군정을 닦음)·부역균(賦役均 : 역의 부과를 균등하게 함)·사송간(詞訟簡 : 소송을 간명하게 함)·간활식(奸猾息 : 교활하고 간사한 버릇을 그치게 함)의 일곱가지로서 ≪경국대전≫ 이전(吏典) 고과조(考課條)에 실려 있다.

고려시대에는 수령오사, 즉 전야벽(田野闢 : 전지를 개척함)·호구증·부역균·사송간·도적식(盜賊息 : 도적을 그치게 함)의 다섯 가지가 있어서 수령 고적(考績)의 법으로 삼았다.

양자를 비교하면 오사의 전야벽·도적식과 칠사의 농상성·간활식은 문자는 달라도 내용은 같으므로 칠사는 오사에 학교흥·군정수를 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수령오사는 조선 초기에 한동안 그대로 사용되어오다가 태종 6년(1406) 12월의 기록에 처음 칠사가 등장하였다.

이 때 칠사를 존심인서(存心仁恕 : 마음은 仁과 恕에 둠)·행기염근(行己廉謹 : 몸소 청렴과 근신을 행함)·봉행조령(奉行條令 : 조칙과 법령을 받들어 행함)·권과농상(勸課農桑 : 농상을 권장해 맡김)·수명학교(修明學校 : 학교를 수리하고 학문 풍토를 밝게 함)·부역균평(賦役均平 : 역의 부과를 균등하고 공정하게 함)·결송명윤(決訟明允 : 소송에 대한 판결은 공명하고 진실되게 함)을 들고 있다.

이 일곱가지 중 권과농상은 ≪경국대전≫에 수록된 수령칠사의 첫째인 농상성, 수명학교는 셋째인 학교흥, 부역균평은 다섯째인 부역균, 결송명윤은 같은 여섯째인 사송간과 문자는 약간 달라도 내용은 같으므로 별로 문제가 없다.

그러나 존심인서·행기염근·봉행조령의 세 가지는 추상적인 표현일 뿐 아니라 내용도 ≪경국대전≫과 아주 다르다. 그리고 수령오사 중 호구증과 도적식이 빠져 있는 것도 이상하다. 태종 때 이러한 칠사지목(七事之目)이 어떤 경로를 밟아 이루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1406년(태종 6) 이후에도 칠사란 말이 실록에 산견(散見)되고 있다. 또 태종 11년(1411) 윤12월의 기사에 보이는 칠최지목(七最之目) 중에 호구증이 나오고 있는 것을 보면, 수령칠사는 고려적인 제도가 조선적인 제도로 전환하는 태종·세종대에 ≪경국대전≫의 내용과 비슷한 원형이 마련되었으리라고 보인다.

그러다가 ≪경국대전≫과 똑같은 수령칠사가 실록에 처음 나오는 것은 훨씬 뒤인 성종 14년(1483) 9월의 기사이다. 즉 성종이 평택현감 변징원(卞澄源)을 인견하고 수령칠사를 물었을 때 그는 서슴지 않고 농상성·학교흥·사송간·간활식·군정수·호구증·부역균의 일곱가지를 암송하고 있다.

그러므로 ≪경국대전≫에 보이는 수령칠사는 태종과 세종대에 그 기틀이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위의 ≪성종실록≫에 보이는 수령칠사와 같이 간결하게 다듬어진 것은 ≪경국대전≫ 편찬 때로 보인다.

수령칠사는 그 뒤 조선 중·후기에도 그대로 지켜져 왔던 것으로 보인다. 1737년(영조 13) 인재의 선택을 하교하면서 목민관의 역할에서 수령칠사의 중요성을 예시하고 있다. 이후 1793년(정조 17)에도 수령칠사에 대한 기록이 보인 것으로 보아 이 시기까지도 지켜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김씨와 권씨의 400년 묵은 자리싸움”

노상추, 『노상추일기』,
1791년 5월 12일

오랜만에 고향에서 올라온 편지에는 안동에서 있었던 큰일이 적혀 있었다. 안동에는 세 명의 태사를 모시는 사당인 태사묘(太師廟)가 있다. 이 태사묘를 둘러싼 분쟁이 발생한 것이다. 김선평(金宣平), 권행(權幸), 장정필(張貞弼)이 태사묘에 모셔진 안동 출신의 태사인데, 고려 초 견훤의 난이 있을 때 공을 세운 일이 있어서 고려 태조가 이들 중 권행에게 권씨를 하사했다고 전해진다.

사당 안에는 좌측에 김 태사, 가운데에 권 태사, 오른쪽에 장 태사의 위패가 모셔져 있었다. 옛날에는 예를 행할 때 가운데가 가장 상석이어서 제사를 지낼 때 권 태사를 주향으로 삼아 가운데에 술을 두고 축문을 읽곤 했다. 그런데 조선이 세워진 지 약 300년이 지난 시점에 김상헌(金尙憲)이 말하기를, 예로부터 가장 상석으로 치는 곳은 동쪽이니만큼 김 태사가 마땅히 주향이 되어야 한다고 한 것이었다. 김상헌은 김 태사의 후손이었기에 이러한 주장을 한 것이다. 권씨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권씨와 김씨가 서로 소장을 올리니, 결국 선대왕인 영조대에 이르기까지 결판이 나지를 않았다. 거의 100여 년 가까이 끌어온 소송이었다. 선대왕은 결국 제사를 지낼 때 권 태사와 김 태사 양쪽에 동시에 술을 올리도록 명하였다.

그런데 다시 몇십 년이 지난 지금 다시 김씨가 책자 하나를 만들어서 김 태사가 주향이 됨이 마땅하다는 취지를 널리 알렸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권씨는 반발하여 이에 맞서는 책자를 만들었는데, 이 책자 이름을 변무록(辨誣錄)이라 하였다. 두 성 사람들은 당색을 상관하지 않고 자신의 성씨에 따라 마구 헐뜯고 싸웠다. 노상추는 두 성씨의 오랜 다툼을 듣고 별일이 다 있다며 헛웃음을 웃었다. 어차피 세도 있는 두 성씨의 일이다. 앞으로 어떻게 되든 노상추 자신처럼 세력 없는 사람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무뢰배를 대동한 서원 사림, 향교를 점거하고 향교측 사림과 대치하다”

미상, 『무경일록』, 1798년 1월 13일

1798년 1월 13일, 주계서원(周溪書院)과 서간서원(西磵書院)의 사림들이 무뢰배와 새로이 향안에 오른 자들을 몰고 와 교임이 없는 틈을 타서 안동향교 안으로 몰려 들어갔다.

성균관에서 작성한 통문(通文)을 찾아내려 하였는데, 이는 곧 서울에 사는 유생 김직행(金直行)이 성균관에 보낸 통문이었다. 그리고는 향교직원에게 벌목을 시행하는가 하면, 하인을 마구 때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문을 걸어 잠그고 향교직원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이보다 먼저 1795년 성균관에서 보낸 통문이 안동 향교에 도착하였다.

통문 내용 중에는 단지 안동부의 8개 서원만 쓰여 있었고, 삼계·주계·물계·도연·서간 등 5개 서원은 애초에 통문을 알리라는 내용이 없었다. 때문에 통문은 이름이 거명된 8개 서원에만 알리고 주계와 서간서원 등은 통문을 돌리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로 향교를 점거한 것이다. 이후 향교측 사림 20여 인이 달려갔으나 향교 문을 걸어 잠그고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그래서 향교 밖에서 집회를 하고 부사에게 알렸으나 부사가 문을 열라고 회유하여도 끝내 문을 열지 않았다. 각각 주장하는 바는 입장차이가 있지만 이는 안동 향교의 주도권을 둘러싼 안동의 남인과 노론 사이에 갈등이 빚어낸 사건이다.

“살인으로 이어진 동전 던지기 놀이”

노상추, 『노상추일기』,
1794년 2월 26일~3월 12일

산창(山倉), 대관창(大館倉), 남창(南倉)을 돌며 환곡을 나눠주고 있을 때였다. 파발꾼이 헐레벌떡 달려와 중군(中軍)의 고목(告目)을 노상추에게 바쳤다. 고목에는 “어제 본창(本倉)에서 환곡을 나눠줄 때 북면(北面) 송정리(松亭里)의 아동 김세황(金世况)과 읍내의 향교 남자종 장삼득(張三得)의 아들 장천항(張天恒)이 함께 동전 던지기 놀이를 하다가 서로 싸웠다고 합니다. 그때 장천항이 기왓장 돌로 김세황을 때렸습니다. 김세황은 한나절이 지난 신시(오후 3~5시)에 죽었습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경악한 노상추는 바로 검안소로 나아갔다. 김세황의 시신을 직접 조사하니, 얼굴 전체에 특별한 상처는 없으나 머리 살갗과 귓바퀴 근처 뺨에 오목하게 함몰된 부분이 있었다. 상처의 길이는 손가락이 두 개 들어갈 정도였고, 넓이는 손가락 하나가 들어갈 정도였다. 노상추는 법의학서인 『무원록(無冤錄)』을 뒤져 비슷한 상처의 모양을 찾아보았다. 책에는 구타를 당해서 즉시 죽었을 때 이런 상처 구멍이 난다고 적혀 있었다.

노상추가 검시를 끝내고 관아로 돌아오자 죽은 김세황의 부모가 공초를 올렸다. 기타 여러 사람에게도 이와 관련한 공초를 받았는데, 김세황을 때려서 죽게 한 범인은 장천항이라고 증언한 것이 모두 일치했다. 노상추는 이를 참고하여 옥안(獄案)을 작성하고 파발로 이웃 고을인 창성부(昌城府)로 보내 창성부사의 복검(覆檢)을 요청했다.

다음날 오후에 창성부사가 삭주부로 와서 복검을 하였다. 전례대로 두 부사는 만나지 않고 말만 전하였다. 그런데 하인을 32명이나 거느리고 온 창성부사가 거만하게 구는 꼴이 같잖았다. 하지만 어쨌든 이번 옥사는 함께 처리해야 하긴 했으니, 싫어도 싫은 티를 다 낼 수는 없었다. 그저 요즘 새기고 있는, 화내면 더 곤란해진다는 뜻인 ‘분사난(憤思難)’이라는 글자만을 떠올리며 참아보았다.

노상추는 복검 결과까지 종합하여 옥안을 작성하여 상부에 보고하였다. 보름 만에 돌아온 처분 내용은, “이 옥사만큼 잔인한 것이 없지만 처형할 나이에 차지 않았으니 1등을 감해 차율(次律)을 적용해서 장(杖) 1백으로 죄를 결정하여 희천군(熙川郡)에서 3천 리 떨어진 곳에 정배하라.”라는 것이었다. 범인인 장천항은 아직 성년이 되지 않은 터라 처벌을 1등 감하였다고는 하지만, 과연 장 1백 대를 버틸 수 있을지, 그리고 장을 맞은 몸으로 3천 리나 유배 가면서 살아남을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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