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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의 이야기, 무대와 만나다

분필로 동그라미를 그릴 권한


〈Peter Paul Rubens 《The judgement of solomon》, 1617년〉


두 어미가 있었다. 한 어미는 얼마 전 아이를 잃었고 한 어미는 얼마 전 아이를 낳았다. 한방에서 자던 그들은 서로 살아있는 아이가 자신의 아이라고 주장하다가 결론을 내지 못하고 솔로몬 왕 앞에 나왔다. 아직 어린 아기의 얼굴로는 어미를 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솔로몬은 아기를 받은 산파를 찾거나 이웃을 찾아 묻는 대신 신에게서 받았다는 그의 지혜를 사용했다.

그의 판결은 이랬다. 아이의 어미를 찾을 방법이 없으니 큰 칼을 가져와 아이를 반으로 갈라 어미라 주장하는 여인에게 반씩 나눠줄 것! 그러자 한 어미는 큰 소리로 솔로몬을 칭송하며 현명한 재판이라고 흡족해하지만, 다른 어미는 울며 쓰러져 차라리 아이를 저 여자에게 줄지언정 죽이지 말아 달라고 통곡한다. 그러자 솔로몬은 아이를 죽이지 말아 달라는 여자가 진짜 아이의 어머니라고 판결하고 아이를 어머니에게 돌려주고 가짜 어미를 엄벌한다.

이 이야기는 솔로몬의 지혜를 증명하는 이야기로, 성경 한 줄 읽지 않은 사람들도 알고 있는 솔로몬의 재판이다. 한편으로는 신이 준 지혜가 얼마나 경이로운 지경인지를 증명하는 사례이기도 하다. 솔로몬이 말년에 그 지혜를 준 신을 배신하고 주색잡기에만 지혜를 쓰는 인간이 되었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신은 그에게 타인의 머리 위에 앉아 판결을 내릴 권력을 직접 쥐여주었고 그는 죽을 때까지 그 권력을 남김없이 써먹었다.


〈2023년 초연된 《회란기》 〉 (출처: 극공작소 마방진)


이 이야기는 다양하게 변주되는데, 중국 원나라 시대의 리 꾸안푸[李潛夫]의 4막짜리 연극 ‘《회란기》’와 《회란기》를 바탕으로 변주한 브레히트의 ‘《코카서스의 백묵원》’이 가장 유명하다. 중국 원작인 《회란기》는 석회로 그린 원 이야기라는 뜻으로, 솔로몬이 송나라에서 환생한 것이 아닌가 싶은, 명판결로 유명한 ‘포청천’ 포증의 판결이 바탕이다. 한국에서는 그동안 《브레히트의 백묵원》은 꽤 자주 공연됐지만, 원작인 《회란기》는 2023년에 처음 공연이 올라갔다. 한글로 썼을 때는 무슨 뜻인지도 알기 어려운 원작의 제목인 회란기를 그대로 가져온 이 공연은 ‘진짜’ 어미가 될 자격에 관해 묻는다.

각색과 연출을 맡은 고선웅은 이전에도 《조씨고아》라는 중국 원작의 연극을 통해 ‘남의 아이 대신 키우는 이야기’를 선보였다. 《조씨고아》가 명예와 충성심 아래 주인의 아이를 살리면서 자신의 아이를 포기하는 ‘충신’인 남성 중심의 서사를 풀어냈다면, 《회란기》는 아이를 향한 사랑에 집중하는 여성적 서사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여성이라면 응당 아이를 지키고 보호해야만 한다는 가부장적인 결론을 당당하고 큰 목소리로 주장한다.


〈연극 《회란기》의 한 장면〉 (출처: 극공작소 마방진)


4막짜리였던 원작은 2막으로 각색됐다. 1막은 몰락한 집안의 딸로 기생이 된 장해당이 부자인 마원회의 두 번째 첩으로 들어가 아들을 낳고 잠시 행복했지만, 아들을 낳지 못한 첫 부인이 위기감을 느껴 남편을 독살하고 아들까지 빼앗으려 장해당을 고문하고 죽이려 든다. 하지만 판관 포청천이 등장하면서 2막은 가장 흥미로운 재판으로 돌입한다. 결국, 주인공 장해당은 극의 하이라이트인 아이 팔 잡아당기기를 통해 ‘진정한’ 모성을 만인에게 증명받고 아이와 재산을 되찾는다.

이 작품의 주제는 장해당의 절규 ‘돈 있고 줄 있는 사람은 간단히 끝내면서, 돈 없고 줄 없는 사람은 모질게도 족쳐대는 세상’에 있다. 사실 모성은 핑계고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었을 것이다. 오늘의 재판이 재판답게 판결 나지 않고 있음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남편을 죽이고도 뻔뻔하기 그지없는 마부인의 행태는 재산과 권력에서 나온다. 돈과 권력에 매수된 증인들은 기도 안 찬 거짓말을 줄줄이 늘어놓는데도 누구 하나 나서서 그 말이 거짓이라고 고하지 않는다. 포청천이 뇌물에 헬렐레 녹는 인물이었다면 장해당도 개작두에 목이 잘렸을 판이다. 포청천이 영민하고 청렴한 인물이었기에 장해당은 자신의 마지막 증명인 모성을 선보일 기회를 얻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A Rose Original Production에서 올린
《The Caucasian Chalk Circle》〉
(출처: YouTube “Rose Theatre”)   더보기


브레히트의 《코카서스의 백묵원》은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 이야기의 시작부터 나치에게서 막 독립한 러시아령 그루지아가 배경이다. 나치를 물리치는데 누가 더 큰 공을 세웠는가를 내세우며 버려진 농지를 누가 차지할 것인지로 싸우는 오른쪽 마을 사람들과 왼쪽 마을 사람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자 마치 순회판사처럼 방랑극단의 가수인 아츠닥이 등장해 오래전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반란이 일어나 영주가 살해되자 아내인 나텔라는 살기 위해 아들을 두고 도망간다. 하녀인 그루셰는 나텔라가 두고 간 아이 미첼을 두고 고민에 빠진다. 살려면 아이를 두고 가야 하는데 그러자니 어린아이가 눈에 밟힌다. 결국, 그루셰는 미첼을 데리고 가면서 온갖 고난을 겪는다. 처음에는 아이를 두고 갈까 데리고 갈까 고민하고, 괜히 데리고 왔다 후회도 하지만 어느새 미첼에게 마음이 기운 그루셰는 아이를 살리기 위해 목숨까지 걸며 자신의 아이로 키우기로 결심한다. 고향까지 도망갔지만, 마을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눈처럼 그루셰를 지켜보고 결국, 그루셰는 곧 죽을 것 같은 농부와 편의상 결혼까지 하면서 아이를 지킨다. 전쟁이 끝나고 영주의 재산을 되찾기 위해 나텔라가 아이를 되찾으려고 나타나고, 그루셰의 진짜 약혼자까지 나타나 어린이로 자란 미첼을 보고 그루셰의 애정이 변한 줄 알고 절망하지만 그루셰의 진심을 알고 그루셰의 편이 되어준다. 하지만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재판관 아츠닥의 행태는 마치 나텔라의 편을 들어주는 것만 같아 아슬아슬하고 아츠닥의 재판관의 지위조차도 간당간당할 즈음, 새로 들어선 정권이 그의 판관으로서의 권위를 인정한다. 그러자 아츠닥은 바닥에 분필로 하얀 동그라미를 그리고 그 안에 아이를 서게 한다. 아이를 먼저 하얀 동그라미 밖으로 당겨가는 쪽이 승자라는 아츠닥의 말에 그루셰는 아이의 팔을 잡지만 도저히 아이를 아프게 할 수가 없어 절망하고 절규한다. 이겨서 꽃바구니 하나 얻은 듯, 우는 아이를 안고 의기양양한 나텔라에게 아츠닥은 아이는 진짜 사랑으로 키운 그루셰의 것이라고 판결하며 보는 모든 사람에게 속 시원한 사이다를 안겨준다. 게다가 덤으로 가짜 결혼도 이혼시켜 준 뒤 아츠닥은 사라지고 남은 사람들은 꽤 행복해진다.



〈2017년 국립창극단에서 공연한 창극 《코카서스의 백묵원》〉 (출처: 국립창극단)


17년 국립창극단에서는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정의신이 각색한 《코카서스의 백묵원》을 선보였다. 이야기가 나오게 되는 계기인 두 마을 간의 분쟁을 없애 극중극 형식을 버리고 안의 알맹이만 쏙 빼 와서 전쟁의 참상을 도드라지게 표현한 것도 정의신 다웠다. 게다가 전쟁이 끝났다 해도 고난은 끝나지 않는다. 주인공 그루셰에게는 시종일관 고난만 주어지는 참이라 관객이 지칠 때도 되었건만 악역들이 웃음을 주면서 극의 균형을 잡아간다. 마침내 마지막 대결에서 그루셰와 나텔라가 서로 아이를 가져야 하는 이유에 대해 구구절절 늘어놓는 부분이 이 작품의 하이라이트다. 아이가 바른 판결로 가야 할 곳에 가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드디어 전쟁이 끝났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힙한 판소리를 표방했지만, 주제는 묵직했다.


〈국립창극단 《코카서스의 백묵원》의 소개 영상〉
(출처: YouTube “YTN”)   더보기


억울한 일이 있으면 법이 풀어줄 것이라는 기대를, 최근에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매체에서 드러나는 법은 항상 권력과 돈과 성별에 따라 차등이 진다. 최고 권력자는 죄를 지었다 의심을 받아도 수사 한 번 받지 않으며 호의호식하고 그 눈에 난 사람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재판을 받으며 시달린다. 살인을 해도 성별에 따라 누군가는 창창한 앞날이 있다며 감형을 받고 누군가는 극형을 받는다. 이러한 때, 우리는 아직도 ‘암행어사 출두요!’ 같은 속 시원한 재판을 기다린다. 재판관에게 하얀 백묵을 쥐여준 자는 누구인가? 신은 죽었지만, 권력과 돈은 살아있다. 재판극은 항상 시대를 반영한다. 지금 우리가 재판극에 목마르다면 이유가 있다.




집필자 소개

이수진
뮤지컬 〈지킬앤 하이드〉, 〈그리스〉, 〈넌센스〉, 〈에비타〉 등 번역하고, 뮤지컬 〈신과 함께 가라〉 등을 썼습니다.〈뮤지컬 스토리〉 저자 / 더 뮤지컬 어워드 심사위원 역임 등
“암자를 둘러싼 소송”

최흥원, 『역중일기』, 1755년 3월 6일

1755년 3월 6일. 요즘 고을에 사는 이평중이 소송에 휘말렸다. 부인사에 기거하는 스님 한 명이 인근에 암자 한 채를 세울 계획이었는데, 이평중이 그 산에 부친의 묘소가 있으므로 암자 건립은 안 된다고 반대한 것이다. 처음엔 사소한 시비 같았는데, 갈등이 전혀 해결되지 않아 결국 소송까지 가게 되었는데, 아무래도 이평중에게 불리한 모양이었다.

오늘은 아침 일찍 둔곡 마을에서 편지가 왔다. 암자를 둘러싼 소송을 직접 조사하기 위해서 고을 수령이 오늘 직접 산에 가서 현장을 조사한다고 한다. 최흥원은 오늘 머무는 곳 근처에 새로 정자를 짓는 일을 감독하고 있었는데, 관아의 행차가 실제로 정자가 있는 산을 지나갔다. 결국, 실제 산을 조사한 수령은 부인사 스님의 손을 들어주었다고 한다. 이평중이 자신의 주장을 조리 있게 말하지 못하였으니 한탄스러운 일이었다.

조사를 마친 수령이 돌아가는 길에 다시 정자 짓는 곳을 지나가며 최흥원을 찾았다. 정자 주변의 계곡을 오르내리면서 신기한 경치를 함께 감상하였는데, 수령이 정자 주변의 풍경을 매우 칭찬하였다. 수령이 돌아간 후, 뒤늦게 수령의 조사 사실을 알고 이평중이 최흥원을 찾아왔다. 조금만 일찍 도착했더라면 수령에게 한 번 더 이야기해볼 수 있었을 텐데……. 최흥원은 이평중의 처지가 딱하여 위로의 말을 건넸다.

“지방 수령과 양반의 기싸움

김광계, 『매원일기』,
1634년 10월 8일~11월 23일

1634년 김광계가 살던 예안 지역은 큰 사업을 앞두고 있었다. 토지의 비옥도와 면적을 조사하는 조선시대의 토지 조사, 양전(量田)이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양전 결과에 따라 납부해야 하는 세금 액수가 크게 달라지기 때문에 양전 사업은 상당히 민감한 문제였고 지방관과 거주민들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기도 쉬웠다.

양전을 앞두고 새로 부임한 예안 현감 남연은 양전 실무를 담당할 사람으로 김광계의 친척 김확을 지명하려 했다. 김확은 김광계와 촌수는 멀어도 자주 왕래하며 친하게 지내던 사이였기에 김광계와 친지들은 크게 걱정한다. 일단 양전 사업과 연관되면 농민 및 지주들과 현감 사이에 끼어 고생하며 비난받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김확은 양전도감 지명을 피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 10월 들어 양전 사업이 실제 실시되는 과정에서 역시 토지 측량 문제로 양전도감 측과 지역민들 사이에 갈등이 생겼다. 김확과 김광계의 형제들은 조정에서 내려 보낸 양전사와 직접 이 문제를 상의하려 시도했다. 특히 김광계의 동생 김광악은 양전 결과에 대해 불만이 컸는지 현감 남연에게 함부로 주사를 부리기까지 했다. 분노한 예안 현감 남연은 김광계의 동생이자 김광악의 형인 김광보를 양전도감으로 임명하고, 이어서 다음 달에는 김확을 좌수로 삼겠다는 임명서 까지 내려 보냈다. 현감은 예안 지역의 유력 가문 출신들을 활용해 양전으로 동요된 분위기를 통제하려 했을 가능성이 높다. 김광계를 비롯한 친지들은 모두 크게 놀라고 근심했다. 김확은 좌수 임명서를 받은 이튿날 직접 예안현 관아로 찾아가 현감에게 애걸하여 임명이 취소되었다. 김광계의 재종숙 김령은 이에 대해 ‘현감은 김확이 굽히고 들어왔다는 데에 기뻐한 것’이라고 썼다. 이렇듯 지방 양반들은 언제나 수령과의 관계를 원만하면서도 균형 있게 유지하는 데에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말도둑과 도둑을 죽인 자, 누구의 잘못이 더 큰가?
- 현감과 대치한 채 분주하게 소송을 준비하다”

김택룡, 『조성당일기』,
1616년 7월 11일~7월 14일

수령(守令)은 고려·조선시대 주(州)·부(府)·군(郡)·현(縣)의 각 고을을 맡아 다스리던 지방관의 총칭이다. 군수와 현령(縣令)의 준말로도 부르며 속칭 ‘원님’이라고도 부른다. 왕이 임명하고, 사법권, 군사권, 행정권의 권한을 행사했다.

조선시대의 수령은 부윤(府尹, 종2품)·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 정3품)·목사(牧使, 정3품)·도호부사(都護府使, 종3품)·군수(郡守, 종4품)·현령(縣令, 종5품), 현감(縣監, 종6품) 등이다. 그 품계는 종2품에서 종6품까지에 걸쳐 있었다.

주·부·군·현의 읍격(邑格)과 수령의 품계는 호구·전결(田結)의 많고 적음에 따라 차이가 있었는데, 행정상으로는 모두 관찰사의 관할 밑에 있었다.

≪경국대전≫에 수록된 수령의 정원은 부윤 4인, 대도호부사 4인, 목사 20인, 도호부사 44인, 군수 82인, 현령 34인, 현감 141인이었다. 후기로 올수록 수령의 정원이 증가하는데, 특히 도호부사의 정원이 늘어났다.

수령에 임용되려면 문과·무과·음과 중 하나를 통과해야 하는데, 상급수령에는 문과가 많고, 연변(沿邊) 군현에는 무과가 많으며, 중소 군현에는 음과가 절대 다수였다.

수령의 임무는 칠사(七事)가 말해 주듯이 권농(勸農)·호구 증식·군정(軍政)·교육 장려·징세 조역(徵稅調役)·소송 간평(訴訟簡平)·풍속 교정이었으며, 수령의 하부 행정 체계로서는 향리와 면리임(面里任)이 있고, 자문 및 보좌 기관으로 유향소(留鄕所, 鄕廳)가 있었다. 또한 감사와 병사(兵使)를 지낸 사람은 그 도의 수령이 될 수 없는 등 여러 가지 제한 규정이 있었다.

수령칠사(守令七事)는 조선시대 수령이 지방을 통치함에 있어서 힘써야 할 일곱 가지 사항이다.

농상성(農桑盛 : 농상을 성하게 함)·호구증(호구를 늘림)·학교흥(學校興 : 학교를 일으킴)·군정수(軍政修 : 군정을 닦음)·부역균(賦役均 : 역의 부과를 균등하게 함)·사송간(詞訟簡 : 소송을 간명하게 함)·간활식(奸猾息 : 교활하고 간사한 버릇을 그치게 함)의 일곱가지로서 ≪경국대전≫ 이전(吏典) 고과조(考課條)에 실려 있다.

고려시대에는 수령오사, 즉 전야벽(田野闢 : 전지를 개척함)·호구증·부역균·사송간·도적식(盜賊息 : 도적을 그치게 함)의 다섯 가지가 있어서 수령 고적(考績)의 법으로 삼았다.

양자를 비교하면 오사의 전야벽·도적식과 칠사의 농상성·간활식은 문자는 달라도 내용은 같으므로 칠사는 오사에 학교흥·군정수를 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수령오사는 조선 초기에 한동안 그대로 사용되어오다가 태종 6년(1406) 12월의 기록에 처음 칠사가 등장하였다.

이 때 칠사를 존심인서(存心仁恕 : 마음은 仁과 恕에 둠)·행기염근(行己廉謹 : 몸소 청렴과 근신을 행함)·봉행조령(奉行條令 : 조칙과 법령을 받들어 행함)·권과농상(勸課農桑 : 농상을 권장해 맡김)·수명학교(修明學校 : 학교를 수리하고 학문 풍토를 밝게 함)·부역균평(賦役均平 : 역의 부과를 균등하고 공정하게 함)·결송명윤(決訟明允 : 소송에 대한 판결은 공명하고 진실되게 함)을 들고 있다.

이 일곱가지 중 권과농상은 ≪경국대전≫에 수록된 수령칠사의 첫째인 농상성, 수명학교는 셋째인 학교흥, 부역균평은 다섯째인 부역균, 결송명윤은 같은 여섯째인 사송간과 문자는 약간 달라도 내용은 같으므로 별로 문제가 없다.

그러나 존심인서·행기염근·봉행조령의 세 가지는 추상적인 표현일 뿐 아니라 내용도 ≪경국대전≫과 아주 다르다. 그리고 수령오사 중 호구증과 도적식이 빠져 있는 것도 이상하다. 태종 때 이러한 칠사지목(七事之目)이 어떤 경로를 밟아 이루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1406년(태종 6) 이후에도 칠사란 말이 실록에 산견(散見)되고 있다. 또 태종 11년(1411) 윤12월의 기사에 보이는 칠최지목(七最之目) 중에 호구증이 나오고 있는 것을 보면, 수령칠사는 고려적인 제도가 조선적인 제도로 전환하는 태종·세종대에 ≪경국대전≫의 내용과 비슷한 원형이 마련되었으리라고 보인다.

그러다가 ≪경국대전≫과 똑같은 수령칠사가 실록에 처음 나오는 것은 훨씬 뒤인 성종 14년(1483) 9월의 기사이다. 즉 성종이 평택현감 변징원(卞澄源)을 인견하고 수령칠사를 물었을 때 그는 서슴지 않고 농상성·학교흥·사송간·간활식·군정수·호구증·부역균의 일곱가지를 암송하고 있다.

그러므로 ≪경국대전≫에 보이는 수령칠사는 태종과 세종대에 그 기틀이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위의 ≪성종실록≫에 보이는 수령칠사와 같이 간결하게 다듬어진 것은 ≪경국대전≫ 편찬 때로 보인다.

수령칠사는 그 뒤 조선 중·후기에도 그대로 지켜져 왔던 것으로 보인다. 1737년(영조 13) 인재의 선택을 하교하면서 목민관의 역할에서 수령칠사의 중요성을 예시하고 있다. 이후 1793년(정조 17)에도 수령칠사에 대한 기록이 보인 것으로 보아 이 시기까지도 지켜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김씨와 권씨의 400년 묵은 자리싸움”

노상추, 『노상추일기』,
1791년 5월 12일

오랜만에 고향에서 올라온 편지에는 안동에서 있었던 큰일이 적혀 있었다. 안동에는 세 명의 태사를 모시는 사당인 태사묘(太師廟)가 있다. 이 태사묘를 둘러싼 분쟁이 발생한 것이다. 김선평(金宣平), 권행(權幸), 장정필(張貞弼)이 태사묘에 모셔진 안동 출신의 태사인데, 고려 초 견훤의 난이 있을 때 공을 세운 일이 있어서 고려 태조가 이들 중 권행에게 권씨를 하사했다고 전해진다.

사당 안에는 좌측에 김 태사, 가운데에 권 태사, 오른쪽에 장 태사의 위패가 모셔져 있었다. 옛날에는 예를 행할 때 가운데가 가장 상석이어서 제사를 지낼 때 권 태사를 주향으로 삼아 가운데에 술을 두고 축문을 읽곤 했다. 그런데 조선이 세워진 지 약 300년이 지난 시점에 김상헌(金尙憲)이 말하기를, 예로부터 가장 상석으로 치는 곳은 동쪽이니만큼 김 태사가 마땅히 주향이 되어야 한다고 한 것이었다. 김상헌은 김 태사의 후손이었기에 이러한 주장을 한 것이다. 권씨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권씨와 김씨가 서로 소장을 올리니, 결국 선대왕인 영조대에 이르기까지 결판이 나지를 않았다. 거의 100여 년 가까이 끌어온 소송이었다. 선대왕은 결국 제사를 지낼 때 권 태사와 김 태사 양쪽에 동시에 술을 올리도록 명하였다.

그런데 다시 몇십 년이 지난 지금 다시 김씨가 책자 하나를 만들어서 김 태사가 주향이 됨이 마땅하다는 취지를 널리 알렸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권씨는 반발하여 이에 맞서는 책자를 만들었는데, 이 책자 이름을 변무록(辨誣錄)이라 하였다. 두 성 사람들은 당색을 상관하지 않고 자신의 성씨에 따라 마구 헐뜯고 싸웠다. 노상추는 두 성씨의 오랜 다툼을 듣고 별일이 다 있다며 헛웃음을 웃었다. 어차피 세도 있는 두 성씨의 일이다. 앞으로 어떻게 되든 노상추 자신처럼 세력 없는 사람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무뢰배를 대동한 서원 사림, 향교를 점거하고 향교측 사림과 대치하다”

미상, 『무경일록』, 1798년 1월 13일

1798년 1월 13일, 주계서원(周溪書院)과 서간서원(西磵書院)의 사림들이 무뢰배와 새로이 향안에 오른 자들을 몰고 와 교임이 없는 틈을 타서 안동향교 안으로 몰려 들어갔다.

성균관에서 작성한 통문(通文)을 찾아내려 하였는데, 이는 곧 서울에 사는 유생 김직행(金直行)이 성균관에 보낸 통문이었다. 그리고는 향교직원에게 벌목을 시행하는가 하면, 하인을 마구 때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문을 걸어 잠그고 향교직원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이보다 먼저 1795년 성균관에서 보낸 통문이 안동 향교에 도착하였다.

통문 내용 중에는 단지 안동부의 8개 서원만 쓰여 있었고, 삼계·주계·물계·도연·서간 등 5개 서원은 애초에 통문을 알리라는 내용이 없었다. 때문에 통문은 이름이 거명된 8개 서원에만 알리고 주계와 서간서원 등은 통문을 돌리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로 향교를 점거한 것이다. 이후 향교측 사림 20여 인이 달려갔으나 향교 문을 걸어 잠그고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그래서 향교 밖에서 집회를 하고 부사에게 알렸으나 부사가 문을 열라고 회유하여도 끝내 문을 열지 않았다. 각각 주장하는 바는 입장차이가 있지만 이는 안동 향교의 주도권을 둘러싼 안동의 남인과 노론 사이에 갈등이 빚어낸 사건이다.

“살인으로 이어진 동전 던지기 놀이”

노상추, 『노상추일기』,
1794년 2월 26일~3월 12일

산창(山倉), 대관창(大館倉), 남창(南倉)을 돌며 환곡을 나눠주고 있을 때였다. 파발꾼이 헐레벌떡 달려와 중군(中軍)의 고목(告目)을 노상추에게 바쳤다. 고목에는 “어제 본창(本倉)에서 환곡을 나눠줄 때 북면(北面) 송정리(松亭里)의 아동 김세황(金世况)과 읍내의 향교 남자종 장삼득(張三得)의 아들 장천항(張天恒)이 함께 동전 던지기 놀이를 하다가 서로 싸웠다고 합니다. 그때 장천항이 기왓장 돌로 김세황을 때렸습니다. 김세황은 한나절이 지난 신시(오후 3~5시)에 죽었습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경악한 노상추는 바로 검안소로 나아갔다. 김세황의 시신을 직접 조사하니, 얼굴 전체에 특별한 상처는 없으나 머리 살갗과 귓바퀴 근처 뺨에 오목하게 함몰된 부분이 있었다. 상처의 길이는 손가락이 두 개 들어갈 정도였고, 넓이는 손가락 하나가 들어갈 정도였다. 노상추는 법의학서인 『무원록(無冤錄)』을 뒤져 비슷한 상처의 모양을 찾아보았다. 책에는 구타를 당해서 즉시 죽었을 때 이런 상처 구멍이 난다고 적혀 있었다.

노상추가 검시를 끝내고 관아로 돌아오자 죽은 김세황의 부모가 공초를 올렸다. 기타 여러 사람에게도 이와 관련한 공초를 받았는데, 김세황을 때려서 죽게 한 범인은 장천항이라고 증언한 것이 모두 일치했다. 노상추는 이를 참고하여 옥안(獄案)을 작성하고 파발로 이웃 고을인 창성부(昌城府)로 보내 창성부사의 복검(覆檢)을 요청했다.

다음날 오후에 창성부사가 삭주부로 와서 복검을 하였다. 전례대로 두 부사는 만나지 않고 말만 전하였다. 그런데 하인을 32명이나 거느리고 온 창성부사가 거만하게 구는 꼴이 같잖았다. 하지만 어쨌든 이번 옥사는 함께 처리해야 하긴 했으니, 싫어도 싫은 티를 다 낼 수는 없었다. 그저 요즘 새기고 있는, 화내면 더 곤란해진다는 뜻인 ‘분사난(憤思難)’이라는 글자만을 떠올리며 참아보았다.

노상추는 복검 결과까지 종합하여 옥안을 작성하여 상부에 보고하였다. 보름 만에 돌아온 처분 내용은, “이 옥사만큼 잔인한 것이 없지만 처형할 나이에 차지 않았으니 1등을 감해 차율(次律)을 적용해서 장(杖) 1백으로 죄를 결정하여 희천군(熙川郡)에서 3천 리 떨어진 곳에 정배하라.”라는 것이었다. 범인인 장천항은 아직 성년이 되지 않은 터라 처벌을 1등 감하였다고는 하지만, 과연 장 1백 대를 버틸 수 있을지, 그리고 장을 맞은 몸으로 3천 리나 유배 가면서 살아남을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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