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겨울 화제작 중 하나가 영화 《파묘》였습니다. 파묘(破墓)는 ‘옮기거나 고쳐 묻기 위하여 무덤을 파내는 것’입니다. 대체로 ‘묫자리가 좋지 않기’ 때문에 파묘를 하게 되는데, ‘좋지 않다’에는 자연지리적 혹은 환경적으로 안 좋다는 뜻도 있지만 ‘무속적으로는 망자의 혼이 안식을 취하지 못해 그 후손에게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난다’는 뜻도 있습니다. 좋은 자리를 골랐는데도 좋지 않게 되었다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일어난 주변 지형지물의 변화나 첩장(疊葬)이나 투장(偸葬) 때문일 수 있다고 합니다. 영화에서는, 파묘의 과정에 따라 이런 이야기들이 진행되다가 마침내 어떤 진실이 드러나는 내용을 흥미진진하게 그렸습니다.
최진경 선생님은 「죽은 자의 안식처, 산 자의 소원 상자」에서, 영화 《파묘》의 주된 공간이 되는 묘지를 ‘죽은 자의 안식을 핑계로 현재의 우리가 잘살기를 희구하는 강한 욕망을 담고 있는 공간’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잘살고 싶은 욕망으로 산 자가 살아가는 곳뿐만 아니라 죽은 자가 안식하는 공간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그곳을 ‘길지(吉地)’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길지는 한정되어 있기에 이를 차지하기 위한 갖가지 다툼이 일어나고, 결국에 이 다툼은 재판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18세기 초에 일어났던 박효랑 사건과 같이, 투장(偸葬)에서 비롯된 산송(山訟)에 재판관의 정실이 개입하며 산송을 처리하던 법정극은 생사가 걸린 복수극으로 치닫게 됩니다. 이렇게 ‘길지는 목숨을 걸고 싸워 쟁취해야 하는’ 대상이 되니, 길지의 영향으로 잘 살 수 있다는 말이 무엇일지 의문이 듭니다.
남의 땅이나 묫자리에 몰래 묘를 쓰는 투장을 하게 되면 땅 주인과 묘 주인 사이에 부동산 점유권과 소유권 문제로 다툼이 일어나는데, 이는 현대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소송에서도 종종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문영 작가님의 「정 진사, 산송에 휘말리다」에서는 조선시대 산송 풍경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백이와 목금이 사는 고을에 부임한 사또는 억울하게 죽은 자매의 사건을 해결하자마자 정 진사와 김 생원 사이에 벌어진 산송을 처리하게 되었습니다. 정 진사 문중 땅에 범장(犯葬)을 한 김 생원은 동헌에서의 재판에 외지부(外知部)까지 내세워 묘 주인임을 판결받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백이와 목금의 활약으로 사또는 재판장 너머에 있는 진실을 보고 현명한 판결을 내리게 됩니다.
정 진사와 김 생원의 산송을 보고 있으니, 조선 사회라는 맥락에서의 소송이 궁금해집니다. 심재우 교수님은 「소송을 통해 본 조선 사회」에서, 조선에서는 ‘호송(好訟)’의 분위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는 상시 소장을 제출할 수 있고, 상급 기관에 재심을 청할 수 있으며 합법적으로 같은 사건으로 3번의 소송을 할 수 있는 등 개방적인 제도를 조선에서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는 군현(郡縣)에 접수 처리된 민장(民狀)과 처리결과를 요약 정리한 『민장치부책(民狀置簿冊)』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 기록에 의하면, 관아에서는 평균 하루 5건을 상회하는 민장을 접수하고 처리했다고 하니, 이 일이 수령의 중요한 일과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수령은 소송에서 재판관 역할을 하는데, 수령의 청렴과 능력에 따라 재판 결과에 대한 희비가 엇갈리기도 하였습니다. 수령의 재판 능력에 대해서는 중앙의 감찰도 있었겠지만, 수령의 재판을 ‘익힌 노루 가죽’이라 하거나 무능한 재판관을 ‘반실태수(半失太守)’라고 하는 백성들의 평가도 있었습니다. 또 지식인들의 평가도 있었는데, 다산은 『목민심서』에 ‘재판에서 위세에 굴복하지 않고 약자의 편에서 많은 백성을 감화’시킨 재판관을 명판관으로 꼽았습니다. 다산이 꼽은 명판관들은 백이와 목금의 고을 사또처럼 재판장 너머에 있는 진실을 봤던 이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반실태수’는 ‘재물을 다투는 소송에서 시비를 가리기보다는 양측에 절반씩 나누어 주는 식으로 적당히 판결하여, 절반을 잃게 만드는 수령’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반으로 나누는 판결로 오히려 진실을 찾아낸 재판도 있습니다. 솔로몬의 재판! 이수진 작가님은 「분필로 동그라미를 그릴 권한」에서, 솔로몬의 재판을 변주한 다양한 작품 중 연극 《회란기》와 창극 《코카서스의 백묵원》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두 작품 모두 주인공이 선의를 베풀었는데도 재판장에 서게 되고 수용할 수 없는 판결을 받는 험난한 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여정은 ‘재판이 재판답게 판결되지 않고 있음’을 말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한편 말도 안 되는 판결은 사실, 재판장 너머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진 포증과 아츠닥이 진실을 소환하기 위해 내린 판결이었습니다.
서은경 작가님의 「독선생전 5화. 칠석에 내리는 비」에서는 재판장 너머의 진실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의 독선생을 만납니다. 마주하게 된 사건은 단순한 절도 사건이지만, 그 너머에는 노비들의 부당한 삶이 있었다는 독선생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작품 속의 독선생, 포증, 아츠닥 등을 만나면서,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보이는 것 너머의 진실을 바라볼 수 있는 이를 재판관으로 기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동그라미를 그릴 수 있는 권한’은 바로 그런 이에게 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복순 선생님은 「송사를 없게 하라, 사무당(使無堂)」에서, 관아 동헌의 편액 “사무당(使無堂)”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동헌은 수령이 업무를 보는 공간이자 재판을 하는 공간입니다. 동헌의 중심에 걸린 편액 “사무당(使無堂)”은, 수령의 재판이 불편부당하지 않고, 어떤 권력이나 뇌물, 정실에도 영향받지 않는다는 선언이자 그래야 한다는 당위이기도 합니다. 사무당의 편액에서 칼과 저울을 들고 눈을 가린 여신 디케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 여신의 눈이 법정 너머에 있는 진실을 봐주기를 바랍니다.
창작물 중에서 법정물은 대중의 관심을 많이 받습니다. 여기에는 사람의 생사, 곧 죽고 사는 문제가 있고 그 생사의 문제와 결부되는 ‘잘 살고 싶다’는 욕망이 있어서이기 때문일 겁니다. 그 ‘잘 살고 싶다’가 나만의 부귀영달이라는 욕망이 아니라, 사람과 함께 사람답게 잘 살고 싶다는 욕망일 수는 없는 것일까요?
시기 |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 장소 | 출전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