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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웹툰 독(獨)선생전



말도둑과 도둑을 죽인 자, 누구의 잘못이 더 큰가? - 현감과 대치한 채 분주하게 소송을 준비하다


1616년 7월 11일, 택룡의 큰 아들 김숙이 ‘말도둑 사건’ 처리 문제로 다시 관아에 들어가 현감을 만났다. 그리고 잡히는 과정에서 막복이 쏜 화살에 상처를 입었던 춘금이가 밤사이 숨을 거두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미 현감은 춘금의 어미와 친족들을 모두 불러 이 사실을 전달하였으며, 관찰사에게 보고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김숙은 일이 간단치 않음을 직감하고 현감을 설득하려 하였으나 그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달리 방도가 없어 이 날은 그냥 돌아와 아버지인 택룡에게 걱정만 늘어놓았다.

다음 날 택룡의 큰 아들은 수심에 찬 채로 다시 현감을 만나러 갔다. 현감은 더 강경하게 나왔다. 활을 쏜 막복을 살인자라고 감옥에 가두고, 이웃의 영천 군수에게 춘금의 검시까지 요청하였으며, 관찰사에게 보고해서 처리하겠다고 하였다.

말도둑 사건은 관심이 없고, 춘금의 죽음을 살인 사건으로 몰아 법적 절차대로 해결하려 했다. 택룡의 큰 아들이 수차례 설득하고 상황을 설명했지만, 현감은 듣지 않았다. 결국 이 날도 합의를 보지 못했다. 택룡과 그의 큰 아들은 다른 대책을 세워야만 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택룡은 말도둑 사건의 경위를 낱낱이 쓴 공초[供草, 죄인 신문 내용을 기록한 문서]와 관찰사에게 쓴 편지를 세복이에게 주어 현감에게로 보냈다. 잠시 뒤 택룡은 관아의 향리가 보낸 편지를 받았는데, 거기에는 관찰사에게 보고하는 일은 현감이 택룡의 큰 아들과 직접 만나 상의한 후에 결정할 것이라고 쓰여 있었다.

택룡은 일단 급한 불은 껐다 싶어 한숨을 놓았다. 그는 큰 아들과 아우가 돌아오면 향후 일을 다시 논의할 참이었다. 그런데 내부공모자였던 운학과 축생의 상전이 두 놈을 풀어주기를 간청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택룡은 또 마음이 급해 우선 말도둑 범죄 추궁이라도 문의하려고 고소장[所志(소지)]를 급하게 작성해서 보냈다. 택룡이 착잡한 마음으로 기다리는데, 저물 무렵 그의 아우가 와서 현감이 화해할 뜻이 있는 것 같다고 말해주었다. 택룡은 다소 안심하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택룡의 큰 아들은 만약을 대비해 관찰사에게 올릴 의송[議送, 백성이 고을 수령에게 패소하고 다시 관찰사에게 올리는 항소]을 작성하려고 향교로 갔다.

준비를 단단히 하기 위해서였다. 택룡은 마음이 복잡하였다. 말도둑질을 한 춘금이 놈 잘못이 더 큰데 자신의 노비인 막복이 놈이 살인죄를 덮어썼으니 억울했다. 잠자리에 누웠지만 쉽게 잠이 올 리 만무했다.

다음 날 택룡은 눈을 뜨자마자 영천에 사는 박진사에게 편지를 써서 이손(李孫)이 편에 보냈다. 박진사에게 영천군수를 만나 검시 진행을 재촉해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시간이 조금 지났을까 택룡의 큰 아들이 향교에서 택룡에게 전갈을 보내왔는데, 관찰사가 그대로 유임[잉임(仍任)]될 것이라는 소식이었다.

택룡은 관찰사에게 보낼 서장(書狀)을 고쳐 써야 하나 싶어 기다리고 있었는데, 관찰사 유임 소식을 전해 듣고는 막복이의 구제를 위해 썼던 편지를 바로 아들에게로 보내주었다. 또 잠시 뒤에는 운학과 축생이 겨우 곤장 30대만 맞고 풀려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택룡은 괘씸하고 분했지만 별 수 없는 일이었다. 택룡은 저녁이 되길 기다렸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간 큰 아들에게 기별해서 관찰사에게 보낼 의송(議送)과 편지를 어떻게 했는지 확인하였다. 택룡의 아들은 아직 준비가 덜 되어 모두 보내지 않았다고 전해왔다.

출전 : 조성당일기(操省堂日記)
저자 : 김택룡(金澤龍)
주제 : 분쟁과 조정, 민관 갈등
시기 : 1616-07-11 ~ 1616-07-14
장소 : 경상북도 안동시
일기분류 : 생활일기
인물 : 김택룡, 김숙, 막복, 춘금, 현감, 영천군수, 운학, 축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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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소개

글 그림 | 서은경
서은경
만화가. 1999년 서울문화사 만화잡지공모에 당선되며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그간 지은 책으로 『마음으로 느끼는 조선의 명화』, 『소원을 담은 그림, 민화』, 『만화 천로역정』, 『만화 손양원』 등이 있으며, 『그래서 이런 명화가 생겼대요』, 『초등학생을 위한 핵심정리 한국사』 등에 삽화를 그렸다.
● 제5회 스토리테마파크 창작 콘텐츠 공모전 담임멘토
● 제6회 스토리테마파크 창작 콘텐츠 공모전 전문심사위원
● 제7회 전통 기록문화 활용 대학생 콘텐츠 공모전 면접심사위원
“암자를 둘러싼 소송”

최흥원, 『역중일기』, 1755년 3월 6일

1755년 3월 6일. 요즘 고을에 사는 이평중이 소송에 휘말렸다. 부인사에 기거하는 스님 한 명이 인근에 암자 한 채를 세울 계획이었는데, 이평중이 그 산에 부친의 묘소가 있으므로 암자 건립은 안 된다고 반대한 것이다. 처음엔 사소한 시비 같았는데, 갈등이 전혀 해결되지 않아 결국 소송까지 가게 되었는데, 아무래도 이평중에게 불리한 모양이었다.

오늘은 아침 일찍 둔곡 마을에서 편지가 왔다. 암자를 둘러싼 소송을 직접 조사하기 위해서 고을 수령이 오늘 직접 산에 가서 현장을 조사한다고 한다. 최흥원은 오늘 머무는 곳 근처에 새로 정자를 짓는 일을 감독하고 있었는데, 관아의 행차가 실제로 정자가 있는 산을 지나갔다. 결국, 실제 산을 조사한 수령은 부인사 스님의 손을 들어주었다고 한다. 이평중이 자신의 주장을 조리 있게 말하지 못하였으니 한탄스러운 일이었다.

조사를 마친 수령이 돌아가는 길에 다시 정자 짓는 곳을 지나가며 최흥원을 찾았다. 정자 주변의 계곡을 오르내리면서 신기한 경치를 함께 감상하였는데, 수령이 정자 주변의 풍경을 매우 칭찬하였다. 수령이 돌아간 후, 뒤늦게 수령의 조사 사실을 알고 이평중이 최흥원을 찾아왔다. 조금만 일찍 도착했더라면 수령에게 한 번 더 이야기해볼 수 있었을 텐데……. 최흥원은 이평중의 처지가 딱하여 위로의 말을 건넸다.

“지방 수령과 양반의 기싸움

김광계, 『매원일기』,
1634년 10월 8일~11월 23일

1634년 김광계가 살던 예안 지역은 큰 사업을 앞두고 있었다. 토지의 비옥도와 면적을 조사하는 조선시대의 토지 조사, 양전(量田)이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양전 결과에 따라 납부해야 하는 세금 액수가 크게 달라지기 때문에 양전 사업은 상당히 민감한 문제였고 지방관과 거주민들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기도 쉬웠다.

양전을 앞두고 새로 부임한 예안 현감 남연은 양전 실무를 담당할 사람으로 김광계의 친척 김확을 지명하려 했다. 김확은 김광계와 촌수는 멀어도 자주 왕래하며 친하게 지내던 사이였기에 김광계와 친지들은 크게 걱정한다. 일단 양전 사업과 연관되면 농민 및 지주들과 현감 사이에 끼어 고생하며 비난받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김확은 양전도감 지명을 피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 10월 들어 양전 사업이 실제 실시되는 과정에서 역시 토지 측량 문제로 양전도감 측과 지역민들 사이에 갈등이 생겼다. 김확과 김광계의 형제들은 조정에서 내려 보낸 양전사와 직접 이 문제를 상의하려 시도했다. 특히 김광계의 동생 김광악은 양전 결과에 대해 불만이 컸는지 현감 남연에게 함부로 주사를 부리기까지 했다. 분노한 예안 현감 남연은 김광계의 동생이자 김광악의 형인 김광보를 양전도감으로 임명하고, 이어서 다음 달에는 김확을 좌수로 삼겠다는 임명서 까지 내려 보냈다. 현감은 예안 지역의 유력 가문 출신들을 활용해 양전으로 동요된 분위기를 통제하려 했을 가능성이 높다. 김광계를 비롯한 친지들은 모두 크게 놀라고 근심했다. 김확은 좌수 임명서를 받은 이튿날 직접 예안현 관아로 찾아가 현감에게 애걸하여 임명이 취소되었다. 김광계의 재종숙 김령은 이에 대해 ‘현감은 김확이 굽히고 들어왔다는 데에 기뻐한 것’이라고 썼다. 이렇듯 지방 양반들은 언제나 수령과의 관계를 원만하면서도 균형 있게 유지하는 데에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말도둑과 도둑을 죽인 자, 누구의 잘못이 더 큰가?
- 현감과 대치한 채 분주하게 소송을 준비하다”

김택룡, 『조성당일기』,
1616년 7월 11일~7월 14일

수령(守令)은 고려·조선시대 주(州)·부(府)·군(郡)·현(縣)의 각 고을을 맡아 다스리던 지방관의 총칭이다. 군수와 현령(縣令)의 준말로도 부르며 속칭 ‘원님’이라고도 부른다. 왕이 임명하고, 사법권, 군사권, 행정권의 권한을 행사했다.

조선시대의 수령은 부윤(府尹, 종2품)·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 정3품)·목사(牧使, 정3품)·도호부사(都護府使, 종3품)·군수(郡守, 종4품)·현령(縣令, 종5품), 현감(縣監, 종6품) 등이다. 그 품계는 종2품에서 종6품까지에 걸쳐 있었다.

주·부·군·현의 읍격(邑格)과 수령의 품계는 호구·전결(田結)의 많고 적음에 따라 차이가 있었는데, 행정상으로는 모두 관찰사의 관할 밑에 있었다.

≪경국대전≫에 수록된 수령의 정원은 부윤 4인, 대도호부사 4인, 목사 20인, 도호부사 44인, 군수 82인, 현령 34인, 현감 141인이었다. 후기로 올수록 수령의 정원이 증가하는데, 특히 도호부사의 정원이 늘어났다.

수령에 임용되려면 문과·무과·음과 중 하나를 통과해야 하는데, 상급수령에는 문과가 많고, 연변(沿邊) 군현에는 무과가 많으며, 중소 군현에는 음과가 절대 다수였다.

수령의 임무는 칠사(七事)가 말해 주듯이 권농(勸農)·호구 증식·군정(軍政)·교육 장려·징세 조역(徵稅調役)·소송 간평(訴訟簡平)·풍속 교정이었으며, 수령의 하부 행정 체계로서는 향리와 면리임(面里任)이 있고, 자문 및 보좌 기관으로 유향소(留鄕所, 鄕廳)가 있었다. 또한 감사와 병사(兵使)를 지낸 사람은 그 도의 수령이 될 수 없는 등 여러 가지 제한 규정이 있었다.

수령칠사(守令七事)는 조선시대 수령이 지방을 통치함에 있어서 힘써야 할 일곱 가지 사항이다.

농상성(農桑盛 : 농상을 성하게 함)·호구증(호구를 늘림)·학교흥(學校興 : 학교를 일으킴)·군정수(軍政修 : 군정을 닦음)·부역균(賦役均 : 역의 부과를 균등하게 함)·사송간(詞訟簡 : 소송을 간명하게 함)·간활식(奸猾息 : 교활하고 간사한 버릇을 그치게 함)의 일곱가지로서 ≪경국대전≫ 이전(吏典) 고과조(考課條)에 실려 있다.

고려시대에는 수령오사, 즉 전야벽(田野闢 : 전지를 개척함)·호구증·부역균·사송간·도적식(盜賊息 : 도적을 그치게 함)의 다섯 가지가 있어서 수령 고적(考績)의 법으로 삼았다.

양자를 비교하면 오사의 전야벽·도적식과 칠사의 농상성·간활식은 문자는 달라도 내용은 같으므로 칠사는 오사에 학교흥·군정수를 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수령오사는 조선 초기에 한동안 그대로 사용되어오다가 태종 6년(1406) 12월의 기록에 처음 칠사가 등장하였다.

이 때 칠사를 존심인서(存心仁恕 : 마음은 仁과 恕에 둠)·행기염근(行己廉謹 : 몸소 청렴과 근신을 행함)·봉행조령(奉行條令 : 조칙과 법령을 받들어 행함)·권과농상(勸課農桑 : 농상을 권장해 맡김)·수명학교(修明學校 : 학교를 수리하고 학문 풍토를 밝게 함)·부역균평(賦役均平 : 역의 부과를 균등하고 공정하게 함)·결송명윤(決訟明允 : 소송에 대한 판결은 공명하고 진실되게 함)을 들고 있다.

이 일곱가지 중 권과농상은 ≪경국대전≫에 수록된 수령칠사의 첫째인 농상성, 수명학교는 셋째인 학교흥, 부역균평은 다섯째인 부역균, 결송명윤은 같은 여섯째인 사송간과 문자는 약간 달라도 내용은 같으므로 별로 문제가 없다.

그러나 존심인서·행기염근·봉행조령의 세 가지는 추상적인 표현일 뿐 아니라 내용도 ≪경국대전≫과 아주 다르다. 그리고 수령오사 중 호구증과 도적식이 빠져 있는 것도 이상하다. 태종 때 이러한 칠사지목(七事之目)이 어떤 경로를 밟아 이루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1406년(태종 6) 이후에도 칠사란 말이 실록에 산견(散見)되고 있다. 또 태종 11년(1411) 윤12월의 기사에 보이는 칠최지목(七最之目) 중에 호구증이 나오고 있는 것을 보면, 수령칠사는 고려적인 제도가 조선적인 제도로 전환하는 태종·세종대에 ≪경국대전≫의 내용과 비슷한 원형이 마련되었으리라고 보인다.

그러다가 ≪경국대전≫과 똑같은 수령칠사가 실록에 처음 나오는 것은 훨씬 뒤인 성종 14년(1483) 9월의 기사이다. 즉 성종이 평택현감 변징원(卞澄源)을 인견하고 수령칠사를 물었을 때 그는 서슴지 않고 농상성·학교흥·사송간·간활식·군정수·호구증·부역균의 일곱가지를 암송하고 있다.

그러므로 ≪경국대전≫에 보이는 수령칠사는 태종과 세종대에 그 기틀이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위의 ≪성종실록≫에 보이는 수령칠사와 같이 간결하게 다듬어진 것은 ≪경국대전≫ 편찬 때로 보인다.

수령칠사는 그 뒤 조선 중·후기에도 그대로 지켜져 왔던 것으로 보인다. 1737년(영조 13) 인재의 선택을 하교하면서 목민관의 역할에서 수령칠사의 중요성을 예시하고 있다. 이후 1793년(정조 17)에도 수령칠사에 대한 기록이 보인 것으로 보아 이 시기까지도 지켜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김씨와 권씨의 400년 묵은 자리싸움”

노상추, 『노상추일기』,
1791년 5월 12일

오랜만에 고향에서 올라온 편지에는 안동에서 있었던 큰일이 적혀 있었다. 안동에는 세 명의 태사를 모시는 사당인 태사묘(太師廟)가 있다. 이 태사묘를 둘러싼 분쟁이 발생한 것이다. 김선평(金宣平), 권행(權幸), 장정필(張貞弼)이 태사묘에 모셔진 안동 출신의 태사인데, 고려 초 견훤의 난이 있을 때 공을 세운 일이 있어서 고려 태조가 이들 중 권행에게 권씨를 하사했다고 전해진다.

사당 안에는 좌측에 김 태사, 가운데에 권 태사, 오른쪽에 장 태사의 위패가 모셔져 있었다. 옛날에는 예를 행할 때 가운데가 가장 상석이어서 제사를 지낼 때 권 태사를 주향으로 삼아 가운데에 술을 두고 축문을 읽곤 했다. 그런데 조선이 세워진 지 약 300년이 지난 시점에 김상헌(金尙憲)이 말하기를, 예로부터 가장 상석으로 치는 곳은 동쪽이니만큼 김 태사가 마땅히 주향이 되어야 한다고 한 것이었다. 김상헌은 김 태사의 후손이었기에 이러한 주장을 한 것이다. 권씨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권씨와 김씨가 서로 소장을 올리니, 결국 선대왕인 영조대에 이르기까지 결판이 나지를 않았다. 거의 100여 년 가까이 끌어온 소송이었다. 선대왕은 결국 제사를 지낼 때 권 태사와 김 태사 양쪽에 동시에 술을 올리도록 명하였다.

그런데 다시 몇십 년이 지난 지금 다시 김씨가 책자 하나를 만들어서 김 태사가 주향이 됨이 마땅하다는 취지를 널리 알렸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권씨는 반발하여 이에 맞서는 책자를 만들었는데, 이 책자 이름을 변무록(辨誣錄)이라 하였다. 두 성 사람들은 당색을 상관하지 않고 자신의 성씨에 따라 마구 헐뜯고 싸웠다. 노상추는 두 성씨의 오랜 다툼을 듣고 별일이 다 있다며 헛웃음을 웃었다. 어차피 세도 있는 두 성씨의 일이다. 앞으로 어떻게 되든 노상추 자신처럼 세력 없는 사람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무뢰배를 대동한 서원 사림, 향교를 점거하고 향교측 사림과 대치하다”

미상, 『무경일록』, 1798년 1월 13일

1798년 1월 13일, 주계서원(周溪書院)과 서간서원(西磵書院)의 사림들이 무뢰배와 새로이 향안에 오른 자들을 몰고 와 교임이 없는 틈을 타서 안동향교 안으로 몰려 들어갔다.

성균관에서 작성한 통문(通文)을 찾아내려 하였는데, 이는 곧 서울에 사는 유생 김직행(金直行)이 성균관에 보낸 통문이었다. 그리고는 향교직원에게 벌목을 시행하는가 하면, 하인을 마구 때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문을 걸어 잠그고 향교직원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이보다 먼저 1795년 성균관에서 보낸 통문이 안동 향교에 도착하였다.

통문 내용 중에는 단지 안동부의 8개 서원만 쓰여 있었고, 삼계·주계·물계·도연·서간 등 5개 서원은 애초에 통문을 알리라는 내용이 없었다. 때문에 통문은 이름이 거명된 8개 서원에만 알리고 주계와 서간서원 등은 통문을 돌리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로 향교를 점거한 것이다. 이후 향교측 사림 20여 인이 달려갔으나 향교 문을 걸어 잠그고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그래서 향교 밖에서 집회를 하고 부사에게 알렸으나 부사가 문을 열라고 회유하여도 끝내 문을 열지 않았다. 각각 주장하는 바는 입장차이가 있지만 이는 안동 향교의 주도권을 둘러싼 안동의 남인과 노론 사이에 갈등이 빚어낸 사건이다.

“살인으로 이어진 동전 던지기 놀이”

노상추, 『노상추일기』,
1794년 2월 26일~3월 12일

산창(山倉), 대관창(大館倉), 남창(南倉)을 돌며 환곡을 나눠주고 있을 때였다. 파발꾼이 헐레벌떡 달려와 중군(中軍)의 고목(告目)을 노상추에게 바쳤다. 고목에는 “어제 본창(本倉)에서 환곡을 나눠줄 때 북면(北面) 송정리(松亭里)의 아동 김세황(金世况)과 읍내의 향교 남자종 장삼득(張三得)의 아들 장천항(張天恒)이 함께 동전 던지기 놀이를 하다가 서로 싸웠다고 합니다. 그때 장천항이 기왓장 돌로 김세황을 때렸습니다. 김세황은 한나절이 지난 신시(오후 3~5시)에 죽었습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경악한 노상추는 바로 검안소로 나아갔다. 김세황의 시신을 직접 조사하니, 얼굴 전체에 특별한 상처는 없으나 머리 살갗과 귓바퀴 근처 뺨에 오목하게 함몰된 부분이 있었다. 상처의 길이는 손가락이 두 개 들어갈 정도였고, 넓이는 손가락 하나가 들어갈 정도였다. 노상추는 법의학서인 『무원록(無冤錄)』을 뒤져 비슷한 상처의 모양을 찾아보았다. 책에는 구타를 당해서 즉시 죽었을 때 이런 상처 구멍이 난다고 적혀 있었다.

노상추가 검시를 끝내고 관아로 돌아오자 죽은 김세황의 부모가 공초를 올렸다. 기타 여러 사람에게도 이와 관련한 공초를 받았는데, 김세황을 때려서 죽게 한 범인은 장천항이라고 증언한 것이 모두 일치했다. 노상추는 이를 참고하여 옥안(獄案)을 작성하고 파발로 이웃 고을인 창성부(昌城府)로 보내 창성부사의 복검(覆檢)을 요청했다.

다음날 오후에 창성부사가 삭주부로 와서 복검을 하였다. 전례대로 두 부사는 만나지 않고 말만 전하였다. 그런데 하인을 32명이나 거느리고 온 창성부사가 거만하게 구는 꼴이 같잖았다. 하지만 어쨌든 이번 옥사는 함께 처리해야 하긴 했으니, 싫어도 싫은 티를 다 낼 수는 없었다. 그저 요즘 새기고 있는, 화내면 더 곤란해진다는 뜻인 ‘분사난(憤思難)’이라는 글자만을 떠올리며 참아보았다.

노상추는 복검 결과까지 종합하여 옥안을 작성하여 상부에 보고하였다. 보름 만에 돌아온 처분 내용은, “이 옥사만큼 잔인한 것이 없지만 처형할 나이에 차지 않았으니 1등을 감해 차율(次律)을 적용해서 장(杖) 1백으로 죄를 결정하여 희천군(熙川郡)에서 3천 리 떨어진 곳에 정배하라.”라는 것이었다. 범인인 장천항은 아직 성년이 되지 않은 터라 처벌을 1등 감하였다고는 하지만, 과연 장 1백 대를 버틸 수 있을지, 그리고 장을 맞은 몸으로 3천 리나 유배 가면서 살아남을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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