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본문 바로가기

백이와 목금

정 진사, 산송에 휘말리다


“신임 사또가 젊어서 좀 걱정이었는데, 일은 잘하는 것 같구만.”

정 진사네 사랑방에는 마을 유지들이 모여 신임 사또에 대한 이야기를 한참 나누는 중이었다.

“아직 혼인도 하지 않았다 하지 않소?”

“헛상투를 올린 총각이란 말인가?”

“재수가 좋았지요. 아무리 과거 급제를 했어도 귀신 소동이 아니었으면 언감생심 사또 자리가 가당키나 했겠나요.”

“사또가 무과 출신이라 일은 잘 처리할지 걱정이오.”

“그래도 이방 말을 들어보니 절차는 잘 알고 있다고 하더이다.”

“송사를 얼마나 잘 처리하는지 보면 알 것인데…”

정 진사가 혀를 찼다. 그 말을 받아서 훈장 양진흥이 입을 열었다.



〈1712년(숙종 38)에 심호(沈鎬)가 저술한 풍수지리서 『육포집(六圃集)』〉 (출처: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산송 소지(所志)가 올라갔지요?”

정 진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소지라 함은 관아에 올리는 소장을 가리키는 말이고, 산송이라 함은 묘지를 가지고 일어난 분쟁을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 문중의 분산(墳山)에 범장(犯葬)을 한 것이 발견되어 묘를 파가라고 했는데 도무지 말을 듣지를 않으니 관아에 고할 수밖에.”

분산이라 함은 묘를 쓰는 산이라는 뜻이고, 범장은 남의 산소 지역에 다른 집안이 묘를 쓴 것을 말한다. 즉 정 진사네 산에 누군가 묘를 썼다는 것이다.

“간이 배 밖에 나왔군요. 대체 어느 집안에서 그런 짓을 한 겁니까?”

양 훈장이 열을 내며 말했다. 정 진사는 혀를 쯧 차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오 선달이 툭 끼어들었다.

“김 생원네야.”

양 훈장이 그 말에 입을 꼭 다물었다. 망허촌에는 두 개의 큰 가문이 있다. 정 진사와 김 생원이 바로 그 두 집의 대표다. 양 훈장의 서당에 정 진사 집 아이는 없지만 김 생원 집 도령은 있으니 입을 다물 수밖에.

“사또가 어찌 처리하는지 한 번 보세.”

정 진사는 곰방대에 불을 붙여 뻑뻑 빨았다. 속이 어지간히 타는 모양이었다.



〈조선시대 족보에는 산도(山圖)가 빈번하게 보인다.
산도는 명당을 바라는 마음을 담아 그린 조상의 묫자리이다.
위는 『함안이씨세보(咸安李氏世譜』에 수록된 함성군(咸城君)의 산도이다.〉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저 무덤이야?”

백이와 목금은 범장했다는 무덤이 궁금해서 찾으러 망허산 기슭으로 나왔다. 망허산 남쪽으로 작은 동산이 하나 있는데, 이곳이 바로 정 진사네 분산이었다.

“응, 저거 맞네. 백호 자리를 차지하는 바람에 아버지가 노발대발했다고 했으니…”

무덤에는 초라한 나무 팻말 하나만 세워져 있었다. 백이가 언문으로 적힌 팻말을 읽어보았다.

“아내 막동의 묘…”

목금이 무덤을 한 바퀴 돌아보고는 말했다.

“허묘(虛墓) 같은데?”

“허묘?”

“가짜 무덤. 실제로는 묻힌 사람이 없는데 이렇게 무덤 모양을 만드는 거야. 이런 걸 치표(置標)라고 부르더라고.”

“가짜 무덤을 왜 만들어?”

“자기네 땅이라고 말할 근거를 삼으려고 그러는 거지. 남들이 빈 땅인 줄 알고 무덤을 덜컥 쓰면 안 되니까.”

백이가 손사래를 쳤다.

“여긴 우리 분산이잖아. 우리 땅인데 왜 남이 치표를 만들어?”

목금이 혀를 찼다.

“그러니까 문제가 되는 거잖아. 보통 나중에 문제가 되도 빠져나가기 쉽게 노비 묘를 만든다고 하더라고. 언문 팻말이 붙어있는 걸 보니까 거의 확실한 거 같은데?”

“뭐야? 그러니까 우리 집 땅에 김 생원이 자기 노비 이름을 빌려서 무덤을 가짜로 만들어 두고는 자기네 무덤이니까 자기네 땅이라고 우길 거라 이거지?”

“그래, 맞아.”

백이가 성질을 내면서 발을 들어 무덤을 콱 밟았다. 그러자 무덤 안에서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야!”

“아야?”

백이는 화들짝 놀라서 목금의 팔을 꽉 잡았다. 목금은 백이가 하도 팔을 꽉 잡아 미간을 찌푸린 채 무덤을 향해 말했다.

“무덤 안에 누구야? 막동이야?”

무덤 안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아니야.”

“그럼 누구야?”

백이는 목금의 뒤로 숨어서 벌벌 떨다가 모깃소리를 냈다.

“목금아, 자꾸 부르지 마. 무서워.”

“괜찮아. 누군지 좀 보자고.”

“보다니… 그런 거 싫어.”

하지만 목금은 백이를 무시하고 다시 무덤을 향해 말했다.

“그러니까 너 누구야?”

“난 금동이야.”

“너 왜 남의 무덤에 있어?”

“나도 몰라. 아빠가 여기에 묻어줬어.”

“아빠가 누군데?”

“물레방앗간 옆에 살아.”


〈명당을 찾기 위해 사용하는 나경(羅經)〉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물레방앗간 옆에 사는 김 생원네 외거노비 장쇠가 달포 전에 아기를 잃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동네 노비가 죽은 아기를 어디다 묻었는지 관심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장쇠는 여기에 허묘를 만들라는 명을 받고는 묘를 만들면서 자기 아기도 여기에 묻은 것이다. 아마도 김 생원이 이 자리가 명당이라고 해서 그렇게 했을 것이다.

목금이 설명을 해주자 백이가 화를 내며 말했다.

“여긴 네가 있을 곳이 아니야! 여긴 우리 땅이라고! 빨리 나가!”

그러자 금동이는 울기 시작했다.

“나더러 어디로 가라는 거야? 난 죽었다고! 난 죽었어! 아무 데도 못 가!”

처음에는 응애응애 하며 아기 울음처럼 귀엽게도 들렸지만, 점차 거센 바람처럼 소리가 커지면서 음산한 기운이 두 소녀에게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아, 안 되겠다. 일단 도망쳐야겠어.”

목금이 백이의 손을 잡고 후다닥 달려갔다. 산기슭을 벗어나자 금동이의 울음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백이가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로 목금에게 말했다.

“어쩌지? 귀신을 화나게 만들었나봐. 해코지하러 오면 어쩌지?”

“나도 모르겠어. 오늘이 송사 날 맞지? 판결이 나오면 일이 더 커질지도 모르겠어. 우선 우리도 관아로 가보자.”



〈‘조선풍속(朝鮮風俗) 구 재판(舊 裁判)’이라고 기재된 사진〉 (출처: 수원광교박물관)



관아에는 정 진사와 김 생원이 모두 나와 동헌 뜰에 자리를 펴고 앉아 있었다. 젊은 무관 출신의 사또는 대청마루에 앉아 양측의 이야기를 듣는 중이었다.

“…하여 이 산은 저희 정씨 문중의 것임이 이렇게 문건에 의해 증빙되어 있습니다. 대대로 묘지기도 각종 요역(徭役)을 면제 받아왔습니다. 이런 저희 문중의 분산에 무단히 남의 묘를 쓴다는 것은 참으로 천인공노할 처사가 아니겠습니까?”

김 생원이 발끈해서 정 진사의 말을 받았다.

“그 산에는 저희 문중의 토지도 섞여 있음은 이미 고려 시대로부터 전해오는 이 문건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김 생원 옆에 갓을 쓰고 푸른색 도포를 입은 선비가 일어나 동헌 뜰에 좌정하고 있는 호방에게 서류 하나를 제출했다.

“저 사람은 뭐야? 우리 동네에서 본 적이 없는 사람인 것 같은데?”

백이가 목금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물었다.

“외지부(外知部)인 모양이네.”



〈외지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웹툰 『조선변호사』. 동명의 드라마도 제작되었다.〉
(출처: 키다리스튜디오)



“외지부가 뭐야?”

“외지부는 소송행정을 잘 모르는 백성을 대신하여 돈을 받고 관련 업무를 하는 사람을 말한다. 외지부가 들쑤셔서 이 난리가 났나 보다. 저 사람들은 어디 재판할 거리 없는지를 뒤져서 송사를 일으키는 게 전문이야. 김 생원 나리도 외지부 말에 혹해서 산송에 나선 모양이다.”

호방이 문서를 사또에게 바쳤다. 사또는 문서를 들춰보다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이건 옛날이야기지, 입지(入旨)라 할 수가 없다.”

백이가 또 목금에게 물었다.

“입지가 뭐야?”

“입지는 관청에서 증명해 주는 거야. 그러니까 토지가 누구 것이다 이런 걸 관청에서 문건으로 증명해 주면 입지라고 할 수 있지.”

“그럼 우리한테 유리한 거겠네?”

김 생원의 외지부가 항의조로 말했다.

“오래전 일이라 갖추어진 문서가 없는 것이오나, 대대로 김씨 문중의 땅으로 세상이 다 아는 것이니 어찌 따로 증빙할 생각을 하였겠습니까? 그리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모은 것이니 사또 나리의 현명한 처분이 있으시기만을 앙망할 뿐이옵니다.”

이에 정 진사도 목소리를 높였다.

“그 산이 저희 문중의 분산이라는 것은 이 고을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옵니다. 이것은 청리(聽理)할 거리도 못 되는 것이오니, 사또 나리의 현명한 처분을 바라옵나이다.”

이번에는 백이가 묻기 전에 목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청리라는 건 관청에서 송사를 듣고 심리하는 것을 말해. 그러니까 진사 나리 말씀은 이건 소송 건도 아니라는 거지.”

“당연하지!”



〈『공언청리(公言聽理)』는 박시순(朴始淳, 1848~1907)이 임실군수에 재직하던 시절
임실군 내 민원 처결 내용을 정리한 책이다.〉
(출처: 디지털 장서각)



백이의 목소리가 좀 컸는지 사또가 두 소녀 쪽을 흘깃 바라보았다. 그 순간 목금과 눈이 마주쳤다. 사또의 입술이 슬며시 올라가는 것처럼 보였다.

“이 문제는 오늘 각 집안에서 제출한 문건을 면밀히 살핀 후 명일 판결토록 하겠다. 명일 오시에 다시들 오도록 하라.”

두 소녀도 사람들 틈에 섞여 물러나는데, 문득 관청의 통인 하나가 달려와 말했다.

“두 소저를 사또께서 잠시 뵙고자 청하니 소인을 따라와 주시지요.”

이리하여 백이와 목금은 얼떨결에 사또의 처소를 방문하게 되었다. 사또는 발을 내려놓고 두 소저를 불러들였다. 목금은 사또의 잘생긴 얼굴을 지척에서 보겠구나 하고 기대했다가 살짝 실망하고 말았다.

“한 분은 구면이지요? 처음 부임했을 때 배씨 자매 일로 도움을 받았습니다.”

목금이 깜짝 놀라 얼굴이 빨개지고 말았다. 그걸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했었다.

“이번 일도 심상치 않은 부분이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무능하여 잘 모르는 것이 많으니 가르침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목금은 망설이다가 결심하고 말했다.

“그러시면 오늘 밤 자정에 무덤 앞에서 뵈었으면 좋겠습니다.”

백이가 놀라서 목금의 팔을 꼬집었다. 미쳤구나라는 신호였다. 목금은 아무 말도 없이 입술만 깨물었다.

자정에 사또는 사령 하나 대동하지 않고 약속대로 무덤 앞에 왔다. 기다리고 있던 목금이 인사를 했다.

“이 무덤은 허묘입니다. 치표로 삼으려고 김 생원 나리가 하인을 시켜 만든 것이죠. 그런데 그 하인은 마침 아기를 잃은 터라 이 무덤에 자기 아이를 묻었습니다. 무덤의 팻말에는 아내라고 되어있지만 사실은 아기의 무덤인 셈입니다.”

사또가 혀를 찼다.

“아니, 어쩌다 아기를 이런 곳에 묻었단 말인가?”

“이곳이 명당이라는 소리에 묻은 것도 있겠지만 아기의 장례를 제대로 치르기 힘든 형편이라 그런 것이 더 클 것입니다.”

“서류를 살펴보니 이 땅은 최 진사네 것이 맞다. 그럼 이 무덤은 없애야 할 것인데, 그러면 아기 시체가 나올 것이 아니냐?”

“그래서 사또 나리께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무덤은 헐어내되, 그 밑은 파지 않으시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아기도 영면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또가 생각에 잠겼다. 묘가 있다고 해놓았으니 허묘임을 증명하려면 당연히 땅을 파서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보여야만 했다. 하지만 그러면 아기 시체가 나올 것이 분명했다.

“허허, 이것 참… 그럴 수는 없을 것 같은데…”



〈상장례를 소재로 한 영화 《축제》의 한 장면〉 (출처: 태흥영화㈜)



그때였다. 무덤 위로 희미한 안개 같은 것이 떠올랐다. 순식간에 모습을 갖췄는데, 피눈물을 흘리는 아기 귀신이었다.

“난 싫어! 난 안 떠날 거야! 아빠가 찾아오게 여기 있을 거야!”

사또가 놀라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목금이 혀를 찼다.

“그러지마! 우린 너 도와주려고 온 거야.”

다행히 사또가 기절하지는 않았다. 이미 귀신도 한번 본 적 있는 몸이 아니었던가. 목금이 말했다.

“사또 나리, 외람되지만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바, 방법이 있다고? 어서 아뢰거라.”

“이 무덤의 봉분을 옆으로 옮기는 겁니다. 그러면 나중에 파도 아기 시체는 나올 까닭이 없습니다.”

“아…”

목금이 봉분 뒤에 두었던 삽 두 자루를 가져왔다.

“나더러 흙을 옮기라는 거냐?”

사또가 어이없다는 투로 말했다. 목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귀신이 고을에 해를 끼치는 꼴을 보지 않으려면 이 방법 밖에 없습니다.”

결국 사또와 목금은 밤을 꼬박 새워 봉분을 옆으로 옮겼다.

“다 했구나. 못할 줄 알았다.”

사또가 땀범벅이 된 얼굴로 말했다. 목금도 마찬가지였다. 무덤 자리였던 곳에서 아기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또 나리,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는 이제 이곳에서 조용히 지내겠습니다. 사또 나리가 베푼 은덕은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내 덕이 아니다. 여기 목금 소저의 덕이니라. 이제 영면하거라.”

사또는 흐뭇한 눈길로 목금을 바라보았다. 목금은 갑자기 부끄러워서 땅속으로 꺼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집필자 소개

이문영
이문영
역사, 추리, SF, 판타지를 넘나들며 글쓰기를 하고 있다. 소설 뿐만 아니라 인문서 쪽으로도 출간을 하고 있으며, 청소년 글쓰기 사이트 글틴의 소설게시판지기로도 활동했다. 장르소설 전문 출판사 파란미디어 편집주간으로 있으면서 여전히 활발한 창작활동을 겸하고 있다. 역사추리소설 『신라 탐정 용담』, 어린이 그림책 『색깔을 훔치는 마녀』, 역사동화 『역사 속으로 숑숑』, 어린이 인문서 『그게 정말이야?』, 역사인문서 『만들어진 한국사』를 비롯해서 MMORPG 『무혼』 등 여러 편의 게임 시나리오도 만든 바 있다.
“암자를 둘러싼 소송”

최흥원, 『역중일기』, 1755년 3월 6일

1755년 3월 6일. 요즘 고을에 사는 이평중이 소송에 휘말렸다. 부인사에 기거하는 스님 한 명이 인근에 암자 한 채를 세울 계획이었는데, 이평중이 그 산에 부친의 묘소가 있으므로 암자 건립은 안 된다고 반대한 것이다. 처음엔 사소한 시비 같았는데, 갈등이 전혀 해결되지 않아 결국 소송까지 가게 되었는데, 아무래도 이평중에게 불리한 모양이었다.

오늘은 아침 일찍 둔곡 마을에서 편지가 왔다. 암자를 둘러싼 소송을 직접 조사하기 위해서 고을 수령이 오늘 직접 산에 가서 현장을 조사한다고 한다. 최흥원은 오늘 머무는 곳 근처에 새로 정자를 짓는 일을 감독하고 있었는데, 관아의 행차가 실제로 정자가 있는 산을 지나갔다. 결국, 실제 산을 조사한 수령은 부인사 스님의 손을 들어주었다고 한다. 이평중이 자신의 주장을 조리 있게 말하지 못하였으니 한탄스러운 일이었다.

조사를 마친 수령이 돌아가는 길에 다시 정자 짓는 곳을 지나가며 최흥원을 찾았다. 정자 주변의 계곡을 오르내리면서 신기한 경치를 함께 감상하였는데, 수령이 정자 주변의 풍경을 매우 칭찬하였다. 수령이 돌아간 후, 뒤늦게 수령의 조사 사실을 알고 이평중이 최흥원을 찾아왔다. 조금만 일찍 도착했더라면 수령에게 한 번 더 이야기해볼 수 있었을 텐데……. 최흥원은 이평중의 처지가 딱하여 위로의 말을 건넸다.

“지방 수령과 양반의 기싸움

김광계, 『매원일기』,
1634년 10월 8일~11월 23일

1634년 김광계가 살던 예안 지역은 큰 사업을 앞두고 있었다. 토지의 비옥도와 면적을 조사하는 조선시대의 토지 조사, 양전(量田)이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양전 결과에 따라 납부해야 하는 세금 액수가 크게 달라지기 때문에 양전 사업은 상당히 민감한 문제였고 지방관과 거주민들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기도 쉬웠다.

양전을 앞두고 새로 부임한 예안 현감 남연은 양전 실무를 담당할 사람으로 김광계의 친척 김확을 지명하려 했다. 김확은 김광계와 촌수는 멀어도 자주 왕래하며 친하게 지내던 사이였기에 김광계와 친지들은 크게 걱정한다. 일단 양전 사업과 연관되면 농민 및 지주들과 현감 사이에 끼어 고생하며 비난받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김확은 양전도감 지명을 피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 10월 들어 양전 사업이 실제 실시되는 과정에서 역시 토지 측량 문제로 양전도감 측과 지역민들 사이에 갈등이 생겼다. 김확과 김광계의 형제들은 조정에서 내려 보낸 양전사와 직접 이 문제를 상의하려 시도했다. 특히 김광계의 동생 김광악은 양전 결과에 대해 불만이 컸는지 현감 남연에게 함부로 주사를 부리기까지 했다. 분노한 예안 현감 남연은 김광계의 동생이자 김광악의 형인 김광보를 양전도감으로 임명하고, 이어서 다음 달에는 김확을 좌수로 삼겠다는 임명서 까지 내려 보냈다. 현감은 예안 지역의 유력 가문 출신들을 활용해 양전으로 동요된 분위기를 통제하려 했을 가능성이 높다. 김광계를 비롯한 친지들은 모두 크게 놀라고 근심했다. 김확은 좌수 임명서를 받은 이튿날 직접 예안현 관아로 찾아가 현감에게 애걸하여 임명이 취소되었다. 김광계의 재종숙 김령은 이에 대해 ‘현감은 김확이 굽히고 들어왔다는 데에 기뻐한 것’이라고 썼다. 이렇듯 지방 양반들은 언제나 수령과의 관계를 원만하면서도 균형 있게 유지하는 데에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말도둑과 도둑을 죽인 자, 누구의 잘못이 더 큰가?
- 현감과 대치한 채 분주하게 소송을 준비하다”

김택룡, 『조성당일기』,
1616년 7월 11일~7월 14일

수령(守令)은 고려·조선시대 주(州)·부(府)·군(郡)·현(縣)의 각 고을을 맡아 다스리던 지방관의 총칭이다. 군수와 현령(縣令)의 준말로도 부르며 속칭 ‘원님’이라고도 부른다. 왕이 임명하고, 사법권, 군사권, 행정권의 권한을 행사했다.

조선시대의 수령은 부윤(府尹, 종2품)·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 정3품)·목사(牧使, 정3품)·도호부사(都護府使, 종3품)·군수(郡守, 종4품)·현령(縣令, 종5품), 현감(縣監, 종6품) 등이다. 그 품계는 종2품에서 종6품까지에 걸쳐 있었다.

주·부·군·현의 읍격(邑格)과 수령의 품계는 호구·전결(田結)의 많고 적음에 따라 차이가 있었는데, 행정상으로는 모두 관찰사의 관할 밑에 있었다.

≪경국대전≫에 수록된 수령의 정원은 부윤 4인, 대도호부사 4인, 목사 20인, 도호부사 44인, 군수 82인, 현령 34인, 현감 141인이었다. 후기로 올수록 수령의 정원이 증가하는데, 특히 도호부사의 정원이 늘어났다.

수령에 임용되려면 문과·무과·음과 중 하나를 통과해야 하는데, 상급수령에는 문과가 많고, 연변(沿邊) 군현에는 무과가 많으며, 중소 군현에는 음과가 절대 다수였다.

수령의 임무는 칠사(七事)가 말해 주듯이 권농(勸農)·호구 증식·군정(軍政)·교육 장려·징세 조역(徵稅調役)·소송 간평(訴訟簡平)·풍속 교정이었으며, 수령의 하부 행정 체계로서는 향리와 면리임(面里任)이 있고, 자문 및 보좌 기관으로 유향소(留鄕所, 鄕廳)가 있었다. 또한 감사와 병사(兵使)를 지낸 사람은 그 도의 수령이 될 수 없는 등 여러 가지 제한 규정이 있었다.

수령칠사(守令七事)는 조선시대 수령이 지방을 통치함에 있어서 힘써야 할 일곱 가지 사항이다.

농상성(農桑盛 : 농상을 성하게 함)·호구증(호구를 늘림)·학교흥(學校興 : 학교를 일으킴)·군정수(軍政修 : 군정을 닦음)·부역균(賦役均 : 역의 부과를 균등하게 함)·사송간(詞訟簡 : 소송을 간명하게 함)·간활식(奸猾息 : 교활하고 간사한 버릇을 그치게 함)의 일곱가지로서 ≪경국대전≫ 이전(吏典) 고과조(考課條)에 실려 있다.

고려시대에는 수령오사, 즉 전야벽(田野闢 : 전지를 개척함)·호구증·부역균·사송간·도적식(盜賊息 : 도적을 그치게 함)의 다섯 가지가 있어서 수령 고적(考績)의 법으로 삼았다.

양자를 비교하면 오사의 전야벽·도적식과 칠사의 농상성·간활식은 문자는 달라도 내용은 같으므로 칠사는 오사에 학교흥·군정수를 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수령오사는 조선 초기에 한동안 그대로 사용되어오다가 태종 6년(1406) 12월의 기록에 처음 칠사가 등장하였다.

이 때 칠사를 존심인서(存心仁恕 : 마음은 仁과 恕에 둠)·행기염근(行己廉謹 : 몸소 청렴과 근신을 행함)·봉행조령(奉行條令 : 조칙과 법령을 받들어 행함)·권과농상(勸課農桑 : 농상을 권장해 맡김)·수명학교(修明學校 : 학교를 수리하고 학문 풍토를 밝게 함)·부역균평(賦役均平 : 역의 부과를 균등하고 공정하게 함)·결송명윤(決訟明允 : 소송에 대한 판결은 공명하고 진실되게 함)을 들고 있다.

이 일곱가지 중 권과농상은 ≪경국대전≫에 수록된 수령칠사의 첫째인 농상성, 수명학교는 셋째인 학교흥, 부역균평은 다섯째인 부역균, 결송명윤은 같은 여섯째인 사송간과 문자는 약간 달라도 내용은 같으므로 별로 문제가 없다.

그러나 존심인서·행기염근·봉행조령의 세 가지는 추상적인 표현일 뿐 아니라 내용도 ≪경국대전≫과 아주 다르다. 그리고 수령오사 중 호구증과 도적식이 빠져 있는 것도 이상하다. 태종 때 이러한 칠사지목(七事之目)이 어떤 경로를 밟아 이루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1406년(태종 6) 이후에도 칠사란 말이 실록에 산견(散見)되고 있다. 또 태종 11년(1411) 윤12월의 기사에 보이는 칠최지목(七最之目) 중에 호구증이 나오고 있는 것을 보면, 수령칠사는 고려적인 제도가 조선적인 제도로 전환하는 태종·세종대에 ≪경국대전≫의 내용과 비슷한 원형이 마련되었으리라고 보인다.

그러다가 ≪경국대전≫과 똑같은 수령칠사가 실록에 처음 나오는 것은 훨씬 뒤인 성종 14년(1483) 9월의 기사이다. 즉 성종이 평택현감 변징원(卞澄源)을 인견하고 수령칠사를 물었을 때 그는 서슴지 않고 농상성·학교흥·사송간·간활식·군정수·호구증·부역균의 일곱가지를 암송하고 있다.

그러므로 ≪경국대전≫에 보이는 수령칠사는 태종과 세종대에 그 기틀이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위의 ≪성종실록≫에 보이는 수령칠사와 같이 간결하게 다듬어진 것은 ≪경국대전≫ 편찬 때로 보인다.

수령칠사는 그 뒤 조선 중·후기에도 그대로 지켜져 왔던 것으로 보인다. 1737년(영조 13) 인재의 선택을 하교하면서 목민관의 역할에서 수령칠사의 중요성을 예시하고 있다. 이후 1793년(정조 17)에도 수령칠사에 대한 기록이 보인 것으로 보아 이 시기까지도 지켜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김씨와 권씨의 400년 묵은 자리싸움”

노상추, 『노상추일기』,
1791년 5월 12일

오랜만에 고향에서 올라온 편지에는 안동에서 있었던 큰일이 적혀 있었다. 안동에는 세 명의 태사를 모시는 사당인 태사묘(太師廟)가 있다. 이 태사묘를 둘러싼 분쟁이 발생한 것이다. 김선평(金宣平), 권행(權幸), 장정필(張貞弼)이 태사묘에 모셔진 안동 출신의 태사인데, 고려 초 견훤의 난이 있을 때 공을 세운 일이 있어서 고려 태조가 이들 중 권행에게 권씨를 하사했다고 전해진다.

사당 안에는 좌측에 김 태사, 가운데에 권 태사, 오른쪽에 장 태사의 위패가 모셔져 있었다. 옛날에는 예를 행할 때 가운데가 가장 상석이어서 제사를 지낼 때 권 태사를 주향으로 삼아 가운데에 술을 두고 축문을 읽곤 했다. 그런데 조선이 세워진 지 약 300년이 지난 시점에 김상헌(金尙憲)이 말하기를, 예로부터 가장 상석으로 치는 곳은 동쪽이니만큼 김 태사가 마땅히 주향이 되어야 한다고 한 것이었다. 김상헌은 김 태사의 후손이었기에 이러한 주장을 한 것이다. 권씨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권씨와 김씨가 서로 소장을 올리니, 결국 선대왕인 영조대에 이르기까지 결판이 나지를 않았다. 거의 100여 년 가까이 끌어온 소송이었다. 선대왕은 결국 제사를 지낼 때 권 태사와 김 태사 양쪽에 동시에 술을 올리도록 명하였다.

그런데 다시 몇십 년이 지난 지금 다시 김씨가 책자 하나를 만들어서 김 태사가 주향이 됨이 마땅하다는 취지를 널리 알렸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권씨는 반발하여 이에 맞서는 책자를 만들었는데, 이 책자 이름을 변무록(辨誣錄)이라 하였다. 두 성 사람들은 당색을 상관하지 않고 자신의 성씨에 따라 마구 헐뜯고 싸웠다. 노상추는 두 성씨의 오랜 다툼을 듣고 별일이 다 있다며 헛웃음을 웃었다. 어차피 세도 있는 두 성씨의 일이다. 앞으로 어떻게 되든 노상추 자신처럼 세력 없는 사람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무뢰배를 대동한 서원 사림, 향교를 점거하고 향교측 사림과 대치하다”

미상, 『무경일록』, 1798년 1월 13일

1798년 1월 13일, 주계서원(周溪書院)과 서간서원(西磵書院)의 사림들이 무뢰배와 새로이 향안에 오른 자들을 몰고 와 교임이 없는 틈을 타서 안동향교 안으로 몰려 들어갔다.

성균관에서 작성한 통문(通文)을 찾아내려 하였는데, 이는 곧 서울에 사는 유생 김직행(金直行)이 성균관에 보낸 통문이었다. 그리고는 향교직원에게 벌목을 시행하는가 하면, 하인을 마구 때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문을 걸어 잠그고 향교직원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이보다 먼저 1795년 성균관에서 보낸 통문이 안동 향교에 도착하였다.

통문 내용 중에는 단지 안동부의 8개 서원만 쓰여 있었고, 삼계·주계·물계·도연·서간 등 5개 서원은 애초에 통문을 알리라는 내용이 없었다. 때문에 통문은 이름이 거명된 8개 서원에만 알리고 주계와 서간서원 등은 통문을 돌리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로 향교를 점거한 것이다. 이후 향교측 사림 20여 인이 달려갔으나 향교 문을 걸어 잠그고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그래서 향교 밖에서 집회를 하고 부사에게 알렸으나 부사가 문을 열라고 회유하여도 끝내 문을 열지 않았다. 각각 주장하는 바는 입장차이가 있지만 이는 안동 향교의 주도권을 둘러싼 안동의 남인과 노론 사이에 갈등이 빚어낸 사건이다.

“살인으로 이어진 동전 던지기 놀이”

노상추, 『노상추일기』,
1794년 2월 26일~3월 12일

산창(山倉), 대관창(大館倉), 남창(南倉)을 돌며 환곡을 나눠주고 있을 때였다. 파발꾼이 헐레벌떡 달려와 중군(中軍)의 고목(告目)을 노상추에게 바쳤다. 고목에는 “어제 본창(本倉)에서 환곡을 나눠줄 때 북면(北面) 송정리(松亭里)의 아동 김세황(金世况)과 읍내의 향교 남자종 장삼득(張三得)의 아들 장천항(張天恒)이 함께 동전 던지기 놀이를 하다가 서로 싸웠다고 합니다. 그때 장천항이 기왓장 돌로 김세황을 때렸습니다. 김세황은 한나절이 지난 신시(오후 3~5시)에 죽었습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경악한 노상추는 바로 검안소로 나아갔다. 김세황의 시신을 직접 조사하니, 얼굴 전체에 특별한 상처는 없으나 머리 살갗과 귓바퀴 근처 뺨에 오목하게 함몰된 부분이 있었다. 상처의 길이는 손가락이 두 개 들어갈 정도였고, 넓이는 손가락 하나가 들어갈 정도였다. 노상추는 법의학서인 『무원록(無冤錄)』을 뒤져 비슷한 상처의 모양을 찾아보았다. 책에는 구타를 당해서 즉시 죽었을 때 이런 상처 구멍이 난다고 적혀 있었다.

노상추가 검시를 끝내고 관아로 돌아오자 죽은 김세황의 부모가 공초를 올렸다. 기타 여러 사람에게도 이와 관련한 공초를 받았는데, 김세황을 때려서 죽게 한 범인은 장천항이라고 증언한 것이 모두 일치했다. 노상추는 이를 참고하여 옥안(獄案)을 작성하고 파발로 이웃 고을인 창성부(昌城府)로 보내 창성부사의 복검(覆檢)을 요청했다.

다음날 오후에 창성부사가 삭주부로 와서 복검을 하였다. 전례대로 두 부사는 만나지 않고 말만 전하였다. 그런데 하인을 32명이나 거느리고 온 창성부사가 거만하게 구는 꼴이 같잖았다. 하지만 어쨌든 이번 옥사는 함께 처리해야 하긴 했으니, 싫어도 싫은 티를 다 낼 수는 없었다. 그저 요즘 새기고 있는, 화내면 더 곤란해진다는 뜻인 ‘분사난(憤思難)’이라는 글자만을 떠올리며 참아보았다.

노상추는 복검 결과까지 종합하여 옥안을 작성하여 상부에 보고하였다. 보름 만에 돌아온 처분 내용은, “이 옥사만큼 잔인한 것이 없지만 처형할 나이에 차지 않았으니 1등을 감해 차율(次律)을 적용해서 장(杖) 1백으로 죄를 결정하여 희천군(熙川郡)에서 3천 리 떨어진 곳에 정배하라.”라는 것이었다. 범인인 장천항은 아직 성년이 되지 않은 터라 처벌을 1등 감하였다고는 하지만, 과연 장 1백 대를 버틸 수 있을지, 그리고 장을 맞은 몸으로 3천 리나 유배 가면서 살아남을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닫기
닫기
관련목록
시기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장소 출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