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임 사또가 젊어서 좀 걱정이었는데, 일은 잘하는 것 같구만.”
정 진사네 사랑방에는 마을 유지들이 모여 신임 사또에 대한 이야기를 한참 나누는 중이었다.
“아직 혼인도 하지 않았다 하지 않소?”
“헛상투를 올린 총각이란 말인가?”
“재수가 좋았지요. 아무리 과거 급제를 했어도 귀신 소동이 아니었으면 언감생심 사또 자리가 가당키나 했겠나요.”
“사또가 무과 출신이라 일은 잘 처리할지 걱정이오.”
“그래도 이방 말을 들어보니 절차는 잘 알고 있다고 하더이다.”
“송사를 얼마나 잘 처리하는지 보면 알 것인데…”
정 진사가 혀를 찼다. 그 말을 받아서 훈장 양진흥이 입을 열었다.
〈1712년(숙종 38)에 심호(沈鎬)가 저술한 풍수지리서 『육포집(六圃集)』〉 (출처: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산송 소지(所志)가 올라갔지요?”
정 진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소지라 함은 관아에 올리는 소장을 가리키는 말이고, 산송이라 함은 묘지를 가지고 일어난 분쟁을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 문중의 분산(墳山)에 범장(犯葬)을 한 것이 발견되어 묘를 파가라고 했는데 도무지 말을 듣지를 않으니 관아에 고할 수밖에.”
분산이라 함은 묘를 쓰는 산이라는 뜻이고, 범장은 남의 산소 지역에 다른 집안이 묘를 쓴 것을 말한다. 즉 정 진사네 산에 누군가 묘를 썼다는 것이다.
“간이 배 밖에 나왔군요. 대체 어느 집안에서 그런 짓을 한 겁니까?”
양 훈장이 열을 내며 말했다. 정 진사는 혀를 쯧 차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오 선달이 툭 끼어들었다.
“김 생원네야.”
양 훈장이 그 말에 입을 꼭 다물었다. 망허촌에는 두 개의 큰 가문이 있다. 정 진사와 김 생원이 바로 그 두 집의 대표다. 양 훈장의 서당에 정 진사 집 아이는 없지만 김 생원 집 도령은 있으니 입을 다물 수밖에.
“사또가 어찌 처리하는지 한 번 보세.”
정 진사는 곰방대에 불을 붙여 뻑뻑 빨았다. 속이 어지간히 타는 모양이었다.
〈조선시대 족보에는 산도(山圖)가 빈번하게 보인다.
산도는 명당을 바라는 마음을 담아 그린 조상의 묫자리이다.
위는 『함안이씨세보(咸安李氏世譜』에 수록된 함성군(咸城君)의 산도이다.〉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저 무덤이야?”
백이와 목금은 범장했다는 무덤이 궁금해서 찾으러 망허산 기슭으로 나왔다. 망허산 남쪽으로 작은 동산이 하나 있는데, 이곳이 바로 정 진사네 분산이었다.
“응, 저거 맞네. 백호 자리를 차지하는 바람에 아버지가 노발대발했다고 했으니…”
무덤에는 초라한 나무 팻말 하나만 세워져 있었다. 백이가 언문으로 적힌 팻말을 읽어보았다.
“아내 막동의 묘…”
목금이 무덤을 한 바퀴 돌아보고는 말했다.
“허묘(虛墓) 같은데?”
“허묘?”
“가짜 무덤. 실제로는 묻힌 사람이 없는데 이렇게 무덤 모양을 만드는 거야. 이런 걸 치표(置標)라고 부르더라고.”
“가짜 무덤을 왜 만들어?”
“자기네 땅이라고 말할 근거를 삼으려고 그러는 거지. 남들이 빈 땅인 줄 알고 무덤을 덜컥 쓰면 안 되니까.”
백이가 손사래를 쳤다.
“여긴 우리 분산이잖아. 우리 땅인데 왜 남이 치표를 만들어?”
목금이 혀를 찼다.
“그러니까 문제가 되는 거잖아. 보통 나중에 문제가 되도 빠져나가기 쉽게 노비 묘를 만든다고 하더라고. 언문 팻말이 붙어있는 걸 보니까 거의 확실한 거 같은데?”
“뭐야? 그러니까 우리 집 땅에 김 생원이 자기 노비 이름을 빌려서 무덤을 가짜로 만들어 두고는 자기네 무덤이니까 자기네 땅이라고 우길 거라 이거지?”
“그래, 맞아.”
백이가 성질을 내면서 발을 들어 무덤을 콱 밟았다. 그러자 무덤 안에서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야!”
“아야?”
백이는 화들짝 놀라서 목금의 팔을 꽉 잡았다. 목금은 백이가 하도 팔을 꽉 잡아 미간을 찌푸린 채 무덤을 향해 말했다.
“무덤 안에 누구야? 막동이야?”
무덤 안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아니야.”
“그럼 누구야?”
백이는 목금의 뒤로 숨어서 벌벌 떨다가 모깃소리를 냈다.
“목금아, 자꾸 부르지 마. 무서워.”
“괜찮아. 누군지 좀 보자고.”
“보다니… 그런 거 싫어.”
하지만 목금은 백이를 무시하고 다시 무덤을 향해 말했다.
“그러니까 너 누구야?”
“난 금동이야.”
“너 왜 남의 무덤에 있어?”
“나도 몰라. 아빠가 여기에 묻어줬어.”
“아빠가 누군데?”
“물레방앗간 옆에 살아.”
〈명당을 찾기 위해 사용하는 나경(羅經)〉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물레방앗간 옆에 사는 김 생원네 외거노비 장쇠가 달포 전에 아기를 잃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동네 노비가 죽은 아기를 어디다 묻었는지 관심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장쇠는 여기에 허묘를 만들라는 명을 받고는 묘를 만들면서 자기 아기도 여기에 묻은 것이다. 아마도 김 생원이 이 자리가 명당이라고 해서 그렇게 했을 것이다.
목금이 설명을 해주자 백이가 화를 내며 말했다.
“여긴 네가 있을 곳이 아니야! 여긴 우리 땅이라고! 빨리 나가!”
그러자 금동이는 울기 시작했다.
“나더러 어디로 가라는 거야? 난 죽었다고! 난 죽었어! 아무 데도 못 가!”
처음에는 응애응애 하며 아기 울음처럼 귀엽게도 들렸지만, 점차 거센 바람처럼 소리가 커지면서 음산한 기운이 두 소녀에게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아, 안 되겠다. 일단 도망쳐야겠어.”
목금이 백이의 손을 잡고 후다닥 달려갔다. 산기슭을 벗어나자 금동이의 울음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백이가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로 목금에게 말했다.
“어쩌지? 귀신을 화나게 만들었나봐. 해코지하러 오면 어쩌지?”
“나도 모르겠어. 오늘이 송사 날 맞지? 판결이 나오면 일이 더 커질지도 모르겠어. 우선 우리도 관아로 가보자.”
〈‘조선풍속(朝鮮風俗) 구 재판(舊 裁判)’이라고 기재된 사진〉 (출처: 수원광교박물관)
관아에는 정 진사와 김 생원이 모두 나와 동헌 뜰에 자리를 펴고 앉아 있었다. 젊은 무관 출신의 사또는 대청마루에 앉아 양측의 이야기를 듣는 중이었다.
“…하여 이 산은 저희 정씨 문중의 것임이 이렇게 문건에 의해 증빙되어 있습니다. 대대로 묘지기도 각종 요역(徭役)을 면제 받아왔습니다. 이런 저희 문중의 분산에 무단히 남의 묘를 쓴다는 것은 참으로 천인공노할 처사가 아니겠습니까?”
김 생원이 발끈해서 정 진사의 말을 받았다.
“그 산에는 저희 문중의 토지도 섞여 있음은 이미 고려 시대로부터 전해오는 이 문건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김 생원 옆에 갓을 쓰고 푸른색 도포를 입은 선비가 일어나 동헌 뜰에 좌정하고 있는 호방에게 서류 하나를 제출했다.
“저 사람은 뭐야? 우리 동네에서 본 적이 없는 사람인 것 같은데?”
백이가 목금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물었다.
“외지부(外知部)인 모양이네.”
〈외지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웹툰 『조선변호사』. 동명의 드라마도 제작되었다.〉
(출처: 키다리스튜디오)
“외지부가 뭐야?”
“외지부는 소송행정을 잘 모르는 백성을 대신하여 돈을 받고 관련 업무를 하는 사람을 말한다. 외지부가 들쑤셔서 이 난리가 났나 보다. 저 사람들은 어디 재판할 거리 없는지를 뒤져서 송사를 일으키는 게 전문이야. 김 생원 나리도 외지부 말에 혹해서 산송에 나선 모양이다.”
호방이 문서를 사또에게 바쳤다. 사또는 문서를 들춰보다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이건 옛날이야기지, 입지(入旨)라 할 수가 없다.”
백이가 또 목금에게 물었다.
“입지가 뭐야?”
“입지는 관청에서 증명해 주는 거야. 그러니까 토지가 누구 것이다 이런 걸 관청에서 문건으로 증명해 주면 입지라고 할 수 있지.”
“그럼 우리한테 유리한 거겠네?”
김 생원의 외지부가 항의조로 말했다.
“오래전 일이라 갖추어진 문서가 없는 것이오나, 대대로 김씨 문중의 땅으로 세상이 다 아는 것이니 어찌 따로 증빙할 생각을 하였겠습니까? 그리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모은 것이니 사또 나리의 현명한 처분이 있으시기만을 앙망할 뿐이옵니다.”
이에 정 진사도 목소리를 높였다.
“그 산이 저희 문중의 분산이라는 것은 이 고을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옵니다. 이것은 청리(聽理)할 거리도 못 되는 것이오니, 사또 나리의 현명한 처분을 바라옵나이다.”
이번에는 백이가 묻기 전에 목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청리라는 건 관청에서 송사를 듣고 심리하는 것을 말해. 그러니까 진사 나리 말씀은 이건 소송 건도 아니라는 거지.”
“당연하지!”
〈『공언청리(公言聽理)』는 박시순(朴始淳, 1848~1907)이 임실군수에 재직하던 시절
임실군 내 민원 처결 내용을 정리한 책이다.〉
(출처: 디지털 장서각)
백이의 목소리가 좀 컸는지 사또가 두 소녀 쪽을 흘깃 바라보았다. 그 순간 목금과 눈이 마주쳤다. 사또의 입술이 슬며시 올라가는 것처럼 보였다.
“이 문제는 오늘 각 집안에서 제출한 문건을 면밀히 살핀 후 명일 판결토록 하겠다. 명일 오시에 다시들 오도록 하라.”
두 소녀도 사람들 틈에 섞여 물러나는데, 문득 관청의 통인 하나가 달려와 말했다.
“두 소저를 사또께서 잠시 뵙고자 청하니 소인을 따라와 주시지요.”
이리하여 백이와 목금은 얼떨결에 사또의 처소를 방문하게 되었다. 사또는 발을 내려놓고 두 소저를 불러들였다. 목금은 사또의 잘생긴 얼굴을 지척에서 보겠구나 하고 기대했다가 살짝 실망하고 말았다.
“한 분은 구면이지요? 처음 부임했을 때 배씨 자매 일로 도움을 받았습니다.”
목금이 깜짝 놀라 얼굴이 빨개지고 말았다. 그걸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했었다.
“이번 일도 심상치 않은 부분이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무능하여 잘 모르는 것이 많으니 가르침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목금은 망설이다가 결심하고 말했다.
“그러시면 오늘 밤 자정에 무덤 앞에서 뵈었으면 좋겠습니다.”
백이가 놀라서 목금의 팔을 꼬집었다. 미쳤구나라는 신호였다. 목금은 아무 말도 없이 입술만 깨물었다.
자정에 사또는 사령 하나 대동하지 않고 약속대로 무덤 앞에 왔다. 기다리고 있던 목금이 인사를 했다.
“이 무덤은 허묘입니다. 치표로 삼으려고 김 생원 나리가 하인을 시켜 만든 것이죠. 그런데 그 하인은 마침 아기를 잃은 터라 이 무덤에 자기 아이를 묻었습니다. 무덤의 팻말에는 아내라고 되어있지만 사실은 아기의 무덤인 셈입니다.”
사또가 혀를 찼다.
“아니, 어쩌다 아기를 이런 곳에 묻었단 말인가?”
“이곳이 명당이라는 소리에 묻은 것도 있겠지만 아기의 장례를 제대로 치르기 힘든 형편이라 그런 것이 더 클 것입니다.”
“서류를 살펴보니 이 땅은 최 진사네 것이 맞다. 그럼 이 무덤은 없애야 할 것인데, 그러면 아기 시체가 나올 것이 아니냐?”
“그래서 사또 나리께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무덤은 헐어내되, 그 밑은 파지 않으시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아기도 영면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또가 생각에 잠겼다. 묘가 있다고 해놓았으니 허묘임을 증명하려면 당연히 땅을 파서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보여야만 했다. 하지만 그러면 아기 시체가 나올 것이 분명했다.
“허허, 이것 참… 그럴 수는 없을 것 같은데…”
〈상장례를 소재로 한 영화 《축제》의 한 장면〉 (출처: 태흥영화㈜)
그때였다. 무덤 위로 희미한 안개 같은 것이 떠올랐다. 순식간에 모습을 갖췄는데, 피눈물을 흘리는 아기 귀신이었다.
“난 싫어! 난 안 떠날 거야! 아빠가 찾아오게 여기 있을 거야!”
사또가 놀라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목금이 혀를 찼다.
“그러지마! 우린 너 도와주려고 온 거야.”
다행히 사또가 기절하지는 않았다. 이미 귀신도 한번 본 적 있는 몸이 아니었던가. 목금이 말했다.
“사또 나리, 외람되지만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바, 방법이 있다고? 어서 아뢰거라.”
“이 무덤의 봉분을 옆으로 옮기는 겁니다. 그러면 나중에 파도 아기 시체는 나올 까닭이 없습니다.”
“아…”
목금이 봉분 뒤에 두었던 삽 두 자루를 가져왔다.
“나더러 흙을 옮기라는 거냐?”
사또가 어이없다는 투로 말했다. 목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귀신이 고을에 해를 끼치는 꼴을 보지 않으려면 이 방법 밖에 없습니다.”
결국 사또와 목금은 밤을 꼬박 새워 봉분을 옆으로 옮겼다.
“다 했구나. 못할 줄 알았다.”
사또가 땀범벅이 된 얼굴로 말했다. 목금도 마찬가지였다. 무덤 자리였던 곳에서 아기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또 나리,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는 이제 이곳에서 조용히 지내겠습니다. 사또 나리가 베푼 은덕은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내 덕이 아니다. 여기 목금 소저의 덕이니라. 이제 영면하거라.”
사또는 흐뭇한 눈길로 목금을 바라보았다. 목금은 갑자기 부끄러워서 땅속으로 꺼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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