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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이슈-저자 인터뷰

이상호, 『영남 선비들, 정조를 울리다
-1792년 만인소 운동』

Ⅰ. ‘조선사의 현장으로’ 두 번째 시리즈 『영남 선비들, 정조를 울리다』



〈이상호, 『영남 선비들, 정조를 울리다』〉 (출처: 푸른역사)


Q. ‘조선사의 현장으로’ 두 번째 시리즈 『영남 선비들, 정조를 울리다』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조선사의 현장으로’ 두 번째 주제로 ‘만인소’를 선정하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A. ‘조선사의 현장으로’는 역사적 사건에 대해 가장 높은 배율의 현미경을 가지고 전체 그림을 복원하기 위한 기획입니다. 원래 창작자들을 대상으로 하여 특정 단위 장면을 복원하고 전통 시대가 가지고 있는 본래의 갈등 구조나 의미를 그들의 기록 속에서 톺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용도에서 기획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전체 이야기를 복원할 수 있는 기록자료가 있어야 하고, 그 사건 자체가 창작자나 일반인이 볼 때 의미 있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시리즈의 첫 책으로 4일간의 살인사건을 복원한 『1751년, 안음현 살인사건』을 선택했고, 두 번째 책으로 40일간의 상소 운동 전 과정을 복원하기 위해 이 책을 집필했습니다. 게다가 현재 한국국학진흥원에서 만인소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목록에 등재하기 위한 노력이 진행 중이었기에 여기에 힘을 실어 주려는 의도도 있었습니다.


Q. 선생님께서 『영남 선비들, 정조를 울리다』를 집필하시면서, 특히 어느 부분이 가장 쓰기 힘드셨는지,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세요.


A. 기존의 역사서와 달리 ‘조선사의 현장으로’ 시리즈는 장면이나 사건의 한 단위를 정확하게 복원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단위를 현미경으로 확대하고 보면, 그 안에는 그러한 사건을 만든 문화적 배경도 있고, 정치적 이유도 존재하며, 철학과 사상의 기반 위에서 행동이 만들어지곤 합니다. 게다가 경제적인 이유로 판단을 달리하는 경우도 있고, 지리적인 영향으로 사건 자체가 달라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일반적인 역사 연구는 문화사, 정치사, 사상사, 심지어 사회사나 복식사를 각각 따로 연구하면서 종적(縱的)으로 그 변화와 추이를 추적합니다. 그러나 이 책은 특정 단위 장면을 횡(橫)으로 잘라, 그 사건을 발생하게 만든 문화·사회·정치·경제·교육·철학 등을 종합해서 사안(사건) 자체를 복원해야 했습니다. 물론 이게 성공적이라고 말씀드리기는 어렵지만, 이 때문에 만인소 운동의 기본 스토리 속에 들어 있는 수많은 개별 주제 연구들을 모두 확인해야 했습니다. 예컨대 당시 종이의 가격은 얼마인지, 상소 운동의 경비는 어떻게 마련하고 어떻게 조직을 꾸렸는지, 상소 운동을 위해 한양까지 어떠한 경로로 이동했는지, 소청은 어떻게 꾸리고 회의는 어떻게 했는지 등은 모두 개별 연구를 필요로 하는 주제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상소 운동이라는 하나의 사건 위에서 위와 같은 내용을 종합하여 설명해야 했기 때문에, 기존의 연구 방법과 완전히 다른 방법론을 가지고 접근해야 하는 상황이 매우 힘들었습니다.


Q. 2018년 5월 30일, 한국의 ‘만인의 청원, 만인소’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아시아·태평양지역 기록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만인소를 기록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셨는지, 그리고 당시의 에피소드가 있다면 들려주세요. 특히, 만인소의 길이가 상당히 긴데, 등재할 때 등재 위원회 사람들에게 이 자료를 어떻게 제공했는지도 궁금합니다. 실물을 직접 공개하셨는지, 아니면 영상을 통해 공개하셨는지요?


A. 2018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아시아·태평양 지역 목록에 등재되었는데, 당시 등재된 만인소는 조선시대에 있었던 7번의 만인소 운동 가운데 원본이 남아 있는 《1855년 사도세자 추존 만인소》와 《1884년 복제개혁 반대 만인소》입니다. 만인소 상소문 원본은 만 명(혹은 그에 준하는) 이상의 사람들이 연명한 상소이기 때문에 100m에 달하는 독특한 기록유산입니다. 이러한 특이성을 살려 등재를 추진하면서, 동시에 이것이 가진 세계적이고 역사적인 중요성을 어떻게 설명할지가 고민이었습니다. 이것이 지니는 가치가 우리나라에서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세계인들이 동의할 수 있어야 하기 더욱 그러했습니다. 이를 위해 오랜 전문가들과의 토론을 거쳐, 우리는 매우 제한된 공동체이기는 하지만, 그 속에 ‘현대적 개념의 민주주의 이념과 절차’가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점에 착안했습니다. 동아시아의 민주주의 원형을 조선이라는 전근대에서 찾음으로써 그 원형성의 가치가 제도로써 민주주의가 만들어지기 이전부터 중요하게 지켜지고 있다는 사실을 밝혔습니다. 이 부분이 매우 힘들었지만, 덕분에 RSC(등재심사소위원회)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는 실물 공개가 이루어지지 않아도 됩니다. 소장하고 있는 상황과 등재에 대한 권리, 그리고 접근성 및 보존성에 대한 기술 등을 통해 그 진본성과 완전성을 증명하기 때문입니다. 대상의 물리적 크기에 대해서는 등재 신청서에 기술하도록 되어 있어서 텍스트로 기술되었고, 일부 사진 이미지로 상태를 제공하도록 되어 있어서 일부만 사진으로 찍어서 등재 신청서에 첨부했습니다.




Ⅱ. 『영남 선비들, 정조를 울리다』 : 만인소 작성·경과·결과


Q. 임오화변은 조선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 중 하나입니다. 영조와 사도세자의 삶의 경험과 배경을 고려할 때, 그들의 선택과 행동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또한 이 사건이 조선 역사와 후대에 미친 영향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A. 제가 전문 역사 연구자가 아니기 때문에 전후 상황에 대해 역사적 평가를 하는 일은 매우 조심스럽습니다. 특히 임오화변의 경우에는 좀 더 세밀한 연구와 관련 자료들이 필요한데, 이 부분은 여전히 조심스러운 측면이 있습니다. 다만 이 사안은 유학적 명분을 기준으로 판단할 때, 영남 남인 입장에서는 올바름이 무너진 상황으로 인식했습니다. 당연히 이를 바로잡다보면, 기호 노론에게 그 책임을 물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사도세자에 대한 신원이 이루어지면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갔던 기호 노론에게 그 책임을 물어야 하고, 이를 기반으로 유학적 이념에 기반한 올바름을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이러한 생각은 이념의 틀 속에서 영남을 하나로 묶는 계기가 되었고, 이러한 이념은 단순한 이념을 넘어 구체적인 실천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게 만 명 이상이 연명한 상소 운동으로 드러났고, 이러한 에너지는 이후 영남이라는 이념 집단이 촘촘한 네트워크 속에서 강력한 운동을 만드는 원동력으로 작동합니다. 만인소 운동에서 의병운동으로, 그리고 독립운동으로 이어지는 영남의 힘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힘의 발현을 이끌어 낸 사건이 바로 임오화변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된 1792년 영남 만인소 운동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 하고 있습니다.


〈도산서원 전경〉 (출처: 도산서원)


Q. 《1792년 사도세자 신원 만인소》는 약 한 달 열흘간 진행된 조선 최초 만인소 운동이었습니다. 이 만인소 운동은 만 명이 마치 한 사람인 듯 뜻을 모아 보름도 채 되지 않은 기간에 1차 봉입을 끝내고 상소를 올렸습니다. 이렇게 단기간에 만인소를 올릴 수 있었던 영남 남인의 네트워크에 대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A. 많은 기록에서 볼 수 있듯, 조선의 ‘영남 남인’으로 일컬어질 수 있는 선비들은 매우 단단한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경신대출척 이후 영남의 중앙정계 진출이 불가능해지면서, 영남은 지역 공동체를 기반으로 ‘치인(治人)’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이는 혈연과 학연, 그리고 지연까지 하나로 묶여 있는 독특한 구조를 만듭니다. 이러한 그들의 네트워크는 주로 3가지 거점을 중심으로 드러나는데, 서원과 향교, 그리고 지역 향청이 바로 그것입니다.

서원을 통해 남인으로서의 정체성과 학문적 네트워크를 만들고, 지역 향교를 통해 국가가 인정하는 양반으로서의 지위를 공고히 했습니다. 이를 기반으로 지역 사족들의 모임인 향청을 통해 지역 사대부로서의 자기 위치를 확정하고, 지역 사회를 실제 지배하게 되는데요. 이 모두가 네트워크의 핵심 거점이 됩니다. 만인소 운동과 같은 일이 발생하면, 이러한 네트워크가 총동원되어 그 일을 효율적으로 진행합니다. 예컨대 1792년 만인소 운동의 경우 처음 연락을 받은 봉화의 삼계서원에서 만인소 운동에 대한 결의를 하고, 그 사안을 영남 전체의 수문 서원인 도산서원에 보냅니다. 그리고 각 지역 거점 서원들에 통문을 보내면, 그 거점 서원들은 그들과 연결되어 있는 서원을 담당하고, 각 서원에서는 관련 문중과 사람들을 모아 연명을 받아냅니다. 이러한 인적 네트워크는 ‘퇴계학’이라는 이념적 모델과 더불어, 그들이 실제로 움직일 수 있는 단단한 힘을 만들었습니다.


Q. 1776년 정조 즉위년에 안동 유생 이도현과 그의 아들 이응원은 ‘사도세자의 억울함을 밝혀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이 상소로 이도현·이응원 부자는 역도로 몰려 처형당했고, 안동은 ‘부’에서 ‘현’으로 강등되었는데요. 정조가 이들에게 사형을 내린 정치적 배경이 있다면 설명 부탁드립니다.


A. 이도현과 이응원 부자의 상소는 정조 즉위년에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잘 아시는 것처럼 정조는 영조의 비호 아래에서 세손으로 있을 때부터 이미 수많은 위기를 겪었고, 여전히 그의 친부가 신원되지 않은 상황에서 정당성에 대한 견제도 많았습니다.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조가 왕위에 올랐을 때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여했던 사람들이 처하게 될 위기의식 역시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당시 권력을 잡고 있었던 기호 노론의 지속적인 견제로 드러났고, 이는 비록 왕좌라 하더라도 왕권이 약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특히 사도세자의 문제는 정조와 기호 노론과의 관계에서 매우 예민한 문제이었고, 이를 알고 있었던 영조 역시 사도세자의 문제를 다루지 않는 선에서 기호 노론과 동행해야 한다는 상황을 주지시켰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아직 왕권이라고도 할 수 없는 즉위년에 사도세자 문제를 직접 건드린 상소가 올라왔으니, 정조로서도 여기에 힘을 실을 수 없는 상황이었겠죠. 이에 반해 기호 노론 입장에서는 여기에 대한 확실한 입장과 힘을 보여주어야 할 필요가 있었고, 이것이 바로 이도현·이응원 부자의 사형과 안동부에 대한 징계로 드러났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Q. 《1792년 사도세자 신원 만인소》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은 사간원 정언 류성한의 상소 내용 때문이었습니다. 류성한의 상소는 영남을 향한 정조의 태도를 겨냥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요, 정조는 류성한의 상소에 대해 ‘진심에서 나왔고 글에 겉치레가 없다’라는 비답을 내렸습니다. 류성한의 상소는 ‘류성한 탄핵’이라는 걷잡을 수 없는 탄핵 상소를 낳았음에도 정조는 류성한을 처벌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했습니다. 이러한 정조의 의중은 무엇이었을까요?


A. 사실 여기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없는 상황이어서, 이 책을 집필하면서도 여전히 쉽지 않은 문제였는데요. 그래서 당시 조정의 상황과 정조의 말들을 종합해서, 정조의 의중을 추론하는 선에서 이야기를 전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실제 당시 류성한에 대한 탄핵의 의지는 정조를 제외하고는 조정 전체의 공론일 정도로 비판의 강도가 강했습니다. 이는 류성한의 흉언과 도를 넘은 상소 내용이 문제가 되었던 건데, 정조는 이를 통해 사안을 좀 더 확대 재생산하기를 바랐던 것으로 보입니다. 즉 모두의 비판 속에서도 류성한을 보호함으로써, 오히려 그를 탄핵하려는 여론을 좀 더 크게 만들고, 나아가 왕의 사적 복수가 아니라 공론을 통해 류성한을 비롯한 기호 노론 전체를 견제하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이 책에서도 1792년 만인소 운동은 정조와 채제공의 기획이었을 것으로 추론했는데요.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정조의 시도는 성공적이었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듯합니다. 실제 만 명이 넘는 선비들의 공론을 통해 사도세자의 신원이 요구되었고, 이를 십분 활용하여 정조는 자신의 왕권을 강화해 나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만인소가 올라간 1792년부터 정조가 사망한 1800년까지 일정 정도 영남이 당파의 이름으로 약진할 수 있는 길이 열리기도 했었죠.


Q. ‘많은 영남의 선비들은 1792년 윤4월, 누군가는 어머니의 눈물을, 또 다른 누군가는 아내의 눈물을, 또 다른 누군가는 아들의 눈물을 뒤로한 채 한양을 향한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어쩌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말이다’라고 프롤로그 마지막 부분에 언급하셨습니다. 이는 이 만인소를 올린다는 것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인데요,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키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지, 앎을 실천으로 옮기려는 의지, 1792년 사도세자 신원 만인소를 이끌어 갈 수 있었던 영남 남인의 철학적 기반, 이들을 움직이게 한 동력은 무엇이었을까요?


A. 영남학파의 핵심은 영남 유림의 종장이었던 이황의 호를 딴 퇴계학을 기반으로 했죠. 잘 아시는 것처럼, 퇴계 이황은 사화 과정에서 희생된 자신의 형 이해와 그 이전 사림들의 실천성을 기리고 이를 성리학 이론 내에서 설명하려 했습니다. 그들에 대한 메모리얼은 ‘서원 부흥 운동’으로, 그리고 그들의 실천성을 성리학 이론 내에서 설명하는 과정에서 이른바 ‘퇴계학’이라고 하는 ‘마음 공부를 중심으로 한 강한 실천성’을 강조하는 철학을 만들었습니다. 이 때문에 퇴계학은 기존 유학 이론에 비해 유난히 마음 공부를 강조하고, 이것의 발현으로서 강한 실천을 주문한 학문으로 자리매김 했습니다. 따라서 퇴계학의 기본 모토는 머리로 아는 앎이 아니라, 실천으로 드러나는 앎을 강조했습니다. 이와 같은 그의 철학적 입장은 임진왜란을 통해 목숨을 건 의병운동으로 발현되었고, 중앙정계에 진출하지 못하게 된 이후로부터는 요소요소 목숨을 건 청원 운동을 통해 정치를 올바르게 만들려는 시도로 드러나게 됩니다.

만인소 운동은 바로 이러한 퇴계학의 실천 운동이 개인을 넘어 공동체의 집단적 운동으로 드러났음을 보여주는 증표로, 이러한 실천성은 더 이상 청원이 불필요한 시점이 되면 강한 무장 운동으로 발현됩니다. 이러한 점에서 영남에서 일어난 만인소 운동, 의병운동, 그리고 독립운동의 배경에는 이 같은 퇴계학의 실천성이 존재한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Ⅲ. 『영남 선비들, 정조를 울리다』 : 만인소의 의미



〈한국국학진흥원 소장 《1855년 사도세자 추존 만인소》〉 (출처: 한국국학진흥원)


Q. 《1792년 사도세자 신원 만인소》는 세 차례에 걸쳐 상소를 올렸음에도 영남 남인들은 그들이 원하는 바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이 영남 만인소가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A. 실제 만인소 운동이 진행되던 40일간의 기록에서 그들이 원하는 바를 정조가 바로 시행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후 정조가 재위하고 있는 동안, 영남에서 영남의 이름으로 대과 합격이 이루어지고 여기에서 많은 초계문신들이 탄생하기도 했습니다. 더불어 무관들의 경우에도 영남 출신들의 약진이 그 이전과 비교해서 눈에 띌 정도였습니다. 또한 만인소 이후 정조는 이를 기반으로 노론 벽파에 대해 강하게 견제할 수 있는 명분을 가졌고, 실제 이를 실천에 옮기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바로 원하는 바는 얻지 못했다고 해도, 이후 정조의 다양한 정책을 통해 그 효과가 드러났던 것은 사실입니다.

특히 전면적으로 원하는 바를 얻지 못했다고 해도, 이 영남 만인소를 통해 왕에게 직접 청원할 수 있는 매우 구체적인 방법을 가지게 됩니다. 만인소는 그 특성상 정부나 권력자에 대한 비판이 중심을 이룰 수밖에 없고, 이는 상소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의 목숨이 위협받을 수 있는 상황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옳음을 위해 자발적으로 유사한 운동을 만들어 가고, 정부는 이들의 언로를 보장함으로써 비판과 소통 기능이 살아 움직이게 만들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통용되어야 하는 중요한 덕목으로, 만인소 운동은 이와 같은 민주적 가치의 중요성을 표방한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Q. ‘만인의 청원, 만인소’는 ‘자발적 참여를 통한 공론 정치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인소가 힘을 갖기 위해서는 ‘자발적 참여와 절차적 정당성’이라는 두 가지를 만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위해 영남 남인들이 했던 노력은 무엇인가요?


A. 조정의 관점에서 볼 때, 자신들에 대한 비판이 특정 개인이나 특정 이익 집단을 통해 나왔다면, 그 정당성을 인정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를 상징하는 숫자인 ‘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비판과 정책 수정의 요구는 조정에서도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겠죠. 왜냐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는 바를 ‘공론’으로 받아들였던 조선에서, 공론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요구는 그만큼 파급력이 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여 명의 여론이 공론이 되려면, 개개인이 본인의 자발적 판단으로 함께 해야만 의미가 있지, 특정인에 의해 조정되거나 위조된 것이라면 정당성을 인정받기 어렵겠죠. 이 때문에 상소의 핵심은 청원자들의 자발적 참여가 중요하고, 또 자발적으로 참여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일 역시 매우 중요했습니다. 자발적 참여와 그것을 드러내는 방법으로서의 절차적 정당성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이 때문에 만인소 운동에서는 자발적 참여를 확인할 수 있도록 타인이 모방하는 것이 불가능한 자신만의 수결을 반드시 요구하고 있으며, 만인소 운동의 과정에서도 철저하게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 전 과정을 밟아 가는 게 중요했습니다.


Q. 상소를 통해 언로(言路)를 보장하고, 공적 비판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조선시대의 정치는 공론 정치라 불립니다. 조선시대의 공론과 오늘날의 여론과 어떤 점이 다른가요?


A. 큰 틀에서 보면, 의미상 큰 차이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공동체 대부분이 옳다고 생각하는 게 여론이라면, 조선시대에는 이를 공론으로 불렀으니까요. 다만 공론은 유학적 이론에 기반해서 단순하게 ‘대다수 사람들의 생각’을 넘어, 유학적 이념을 수양하는 사람들 대다수가 옳다고 여기는 생각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공론은 ‘유학적 신념을 가진 선비들 대다수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을 의미하며, 유교 기반의 사회에서 공론은 ‘올바른 생각’이라는 의미가 더 강하다고 생각됩니다. 이 때문에 율곡 이이는 ‘공론에 따르는 것을 국시(國是)라고 한다’라는 말을 남겼는데, 여기에서 우리는 공론의 의미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Ⅳ. 이후의 계획



〈이상호, 『1751년, 안음현 살인사건』〉 (출처: 푸른역사)


Q. 선생님의 글, 특히 『1751년, 안음현 살인사건』과 『영남 선비들, 정조를 울리다』는 마치 팩추얼 드라마 한 편을 보는 듯한 몰입감을 줍니다. 특정 사건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묘사하여 독자들이 그 시대 속으로 빠져들게 합니다. 프롤로그에서 ‘1792년 음력 윤4월 17일, 하회를 감싸고 도는 강물 위로 뉘엿뉘엿 넘어가는 햇살이 마지막 빛을 내뿜고 있었다.’라는 문장은 역사서에 대한 경계를 허물고, 역사적 지식이 없는 일반독자들도 쉽게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게 합니다. 특히 ‘어머니의 눈물’이라는 제목으로 시작하는 프롤로그 첫 문장을 쓸 때 선생님의 기분과 감정이 궁금합니다. 혹 구성 단계에서 이와 다른 프롤로그 내용이 있는지 작가 노트가 궁금합니다.


A. 일단 제가 역사학자가 아니라서, 일반 역사서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기준이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다만 좋은 글은 처음에는 독자를 사로잡는 힘이 있어야 하고, 이를 기반으로 전체 이야기를 끌어가는 힘이 있어야 하며, 다 읽었을 때 전달되는 분명한 메시지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전문 학자들을 대상으로 쓴 책이 아니기 때문에, 일반인의 관점에서 어떻게 접근해야 이렇듯 관심 없는 이야기라도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까를 고민했던 게 사실입니다. 첫 프롤로그는 그렇게 집필되었는데, 그러면서도 당시 만인소를 올리기 위해 출발하는 그 비장함도 함께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게으른 탓에 특별한 작가 노트를 작성하지는 않습니다.


Q. 『1751년, 안음현 살인사건』과 『영남 선비들, 정조를 울리다』에 이은 ‘조선사의 현장으로’ 세 번째 책이 궁금합니다. 구상하고 있는 주제가 있는지요.


A. 사실 이 부분에 대한 고민이 좀 많습니다. 여전히 이러한 류의 글쓰기가 의미가 있는지, 그리고 이와 같은 방법론으로 역사 이야기에 접근하는 게 옳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러한 글쓰기는 익숙하지 않는 주제의 논문 10여 편 이상 쓰는 노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학문적 글쓰기에 익숙한 저에게는 여전히 쉽지 않은 과제이기는 합니다. 다만, 누군가는 연구자와 콘텐츠 제작자 사이를 좀 더 가깝게 이어줄 수 있는 글쓰기를 해야 한다는 필요성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고, 또 애초부터 그렇게 기획된 책이어서 좀 더 고민하면서 다음 주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한국국학진흥원에서 제공하고 있는 《스토리테마파크》의 내용이 모든 주제 선택의 기준이 되고 있는데, 여기에서 주로 많이 다루었던 주제가 다음에 책으로 집필될 가능성이 높을 것 같습니다. 예컨대 번암 채제공 선생의 문집 발간 과정이나, 투장 사건, 세곡선 난파 사건 등은 주제 의식도 분명하면서 조선시대 일상을 다양하게 보여줄 수 있는 내용들이 아닌가 싶어서 준비하고 있습니다.


Q. ‘조선사의 현장으로’ 시리즈는 주로 어떤 독자층을 대상으로 기획되었나요? 또한, 독자들이 이 책을 통해 어떤 점을 얻어가길 기대하시나요?


A. 원래 ‘조선사의 현장으로’으로는 전문가를 위한 책이 아니라, 창작자들을 대상으로 기획된 책입니다. 창작자 입장에서 특정 단위 사건에 대해 머릿속 그림을 그릴 수 있을 때까지 복원해서 보여주자는 게 이 시리즈의 기획 의도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의도치 않게 방법론적으로 미시사 연구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고, 자료 접근 및 내용 기술에 있어서도 다른 책들과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조선시대 특정 사건들에 대해 그 시대의 배경과 문제의식 속에서 왜 그렇게 사건이 전개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전후 사정을 이해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창작자 입장에서는 이와 같은 기본 스토리 위에 자신이 생각하는 새로운 갈등이나 배경, 인물 등을 통해 좀 더 재미있는 스토리를 창작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Q. 선생님께서는 2023년 9월 11일부터 11월 21일까지 방송된 안동 MBC 라디오 드라마 《만인의 꿈》에 자문을 진행하셨는데요. 역사 자문을 하시면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을까요? 또한, 만인소 운동을 영화나 드라마 혹은 뮤지컬과 연극, 다큐멘터리, 소설 중 어느 장르로 표현하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시나요?


A. 라디오 드라마는 안동 MBC의 트레이드마크로 자리잡을 정도고, 《만인소》가 벌써 5번째 라디오 드라마이기 때문에 극화나 연출의 수준도 높아진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매우 수준 높은 드라마가 제작되었는데요. 처음에 이 내용을 자문하면서, 드라마의 특성상 여성 주인공에 대한 요구가 있었는데, 거기에 전혀 부응할 수 없었던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이를 극화했던 작가는 아예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는 드라마를 만들어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양성평등의 시대에 조선시대 남성 중심의 기록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 지에 대한 많은 고민을 안겨 주었던 에피소드였습니다.

만인소 운동을 다루기 적절한 창작 장르에 대해서는 크게 생각해 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각 장르별로 표현되는 방식도 다르고 접근하는 방식도 달라서, 만인소 운동을 대상으로 창작하는 사람들이라면 각자의 장르 전문가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가장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은 있습니다. 다만 매우 짧은 기록이기 때문에 호흡이 긴 드라마로서는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있어서, 좀 더 극적인 갈등을 추가한다면 영화 소재로서는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좀 더 창작력이 있는 분이 소설과 같은 장르로 만들어도 좋구요. 다큐멘터리의 경우는 어떤 관점에서 접근하는가의 문제이지, 제작의 적절성은 문제되지 않을 듯합니다.





이복순 (한국국학진흥원)
“집터의 길흉을 점치다”

점괘패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최흥원, 역중일기, 1764-02-14

1764년 2월 14일. 맑은 날이었다. 어머니는 환후가 심해지지 않았으나, 최근 들어 부쩍 음식 드시기를 싫어하시니, 애가 타고 두려운 마음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어제는 송도관이 최흥원을 찾아왔는데, 이 사람은 평소 점을 잘 치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오늘 아침에는 송도관이 최흥원을 위하여 집터의 길흉을 점쳤는데, 관괘에서 비괘로 바뀌는 점괘를 얻었다. 이 점괘는 대단히 불길한 것으로, 그간 집안에 많았던 좋지 않은 일이 집터로 인해 일어난 것 같았다. 최흥원은 집터가 매우 불길하다는 말을 듣고는 거처를 옮겨야 하나 하는 고민까지 생기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동구에 있는 새 집터에 대한 점도 쳐 보았는데, 이 터에는 복괘가 진괘로 바뀌는 점괘였다. 꽤 길한 점괘라고 할 수 있었다. 본래 이곳에는 항진이가 새로 집을 지어 거처할 계획이었는데, 집터가 좋다고 하니 정말 다행이었다. 항진이는 얼마 전 진사시에도 합격하였는데, 아마 집터의 좋은 기운을 받으면 대과에도 급제할지 모를 일이었다.

아내의 묘도 불길하다고 하여 이장을 하였는데, 이제 집터마저 기운이 좋지 않다고 하니 최흥원은 어찌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아내, 형제, 아들……. 귀중한 혈육들이 이 집에서 몇 명이나 죽어 나갔는지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하고 싶은 생각이었다. 그러나 큰일을 쉽게 결정할 수는 없는 법이고, 그럴만한 경제적인 여유도 없었다. 최흥원은 송도원의 점괘를 앞에 두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과거를 꿰뚫어보는 맹인 점술가 ‘김여추’”

점괘표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권문해, 초간일기, 1594-03-09

1584년 3월, 권문해는 추운 겨울을 지나 어서 봄을 만나고 싶었다. 그러나 3월 9일, 바라본 소백산에는 겨울처럼 눈이 내려온 산이 다 하얗게 되었다. 더욱이 연일 서리가 내려 초목의 싹이 대부분 시들어 죽어가는 걸 보니 마음까지도 메마르는 듯하였다. 그러던 중 예천군 성주 류세무와 경상북도 선산부백(善山府伯) 류덕수(柳德粹)가 경상북도 의성군의 대곡사(大谷寺)에 만나기를 청하였다.

3월 14일, 권문해는 집을 나서 대곡사로 향했고 그곳에서 3일을 머무르며 류세무와 류덕수와 이야기를 나누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3월 15일, 이야기 중 경상북도 선산군의 부백 류덕수에게 자신의 고을에 맹인 점쟁이 김여추(金汝秋)에 대해서 듣게 된다. 앞을 못 보는 맹인이지만 그 누굴 만나도 그가 살아온 과거를 귀신같이 맞춘다는 것이다. 권문해와 류세무는 명경수(明鏡數) 김여추의 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김여추의 이야기를 한참 듣던 류세무는 율시 한 수를 쓰는데,

화와 복은 다 이미 정해진 것 禍福皆前定
꽃 피고 시드는 것은 각기 때가 있다네 榮枯各有時
정원의 꽃은 일찍 떨어져 버리지만 花落園中早
산골짝 옆 소나무는 오래도록 산다네 松生澗畔遲
현묘한 이치 원래 수가 있는 것이니 玄機元有數
조물주가 어찌 사사로움을 용납하리오 造物豈容私
모름지기 반계(磻溪) 늙은이를 알아야 할거니 須識磻溪叟
끝내 임금의 스승이 되었네 終爲帝者師

대곡사에 모인 권문해와 류세무, 류덕수는 앞 못 보는 맹인 점쟁이 이야기를 통해 세상의 이치를 논하는 이야기로 밤새는 줄 몰랐다.

“자신의 수명을 점쳤던 점괘가 생각나다”

『점괘』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오희문, 쇄미록, 미상

1593년 3월, 해가 바뀌자마자 100여 일을 앓았던 오희문은 최근에야 밥을 먹고, 지팡이에 의지하여 운신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사이 사람들 사이에서는 오희문이 병으로 죽었단 소문도 돌았고, 이로 인해 아들에게는 위문편지가 날아오기도 하였다. 병이 너무나 심하여 오희문 스스로도 이제 곧 죽는구나 생각했던 순간들이 많았는데, 이제 이렇게 다시 살 수 있게 되니 감회가 새로웠다.

문득 15년 전의 일이 생각났다. 그때 오희문은 양지현 농촌에 머물고 있었는데, 죽산에 사는 맹인 김자순이란 자가 점을 잘 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리하여 그를 불러다가 자신의 운명을 점치게 하였는데, 그때 김자순이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나이 54세, 그러니까 임진년에 큰 횡액이 있고, 이것을 지나면 70살 넘게 살 수 있다” 그때 오희문은 재미 삼아 친 점이라 특별히 신뢰하지 않고 있었는데, 과연 임진년에 난리가 터져 거의 죽을 뻔하게 되었다. 비록 몸의 병은 해를 넘겨 생겼지만, 김자순이란 자가 이야기한 점괘와 신기하게 맞아떨어진 것이 아닌가! 오희문은 새삼 점쟁이 맹인의 신통함에 감탄하였다.

“딸이 죽은 지 백일이 되어 굿을 하다”

오희문, 쇄미록, 1597-05-11

1597년 5월 11일, 오늘은 딸 단아가 죽은지 백일이 되는 날이다. 집사람이 무당을 불러다 놓고, 이웃집에 자리를 차리고는 징과 북을 치면서 굿을 하였다. 아마 딸의 원혼을 달래려고 하는 모양이지만, 한갓 미신인 것을 어찌하겠는가. 오희문은 그것이 허사인줄을 알면서도 애통한 마음과 부인의 마음을 헤아려 그대로 허락하고 말았다. 어쩌면 저 굿은 딸아이가 아니라 집사람을 위한 것이리라.

무당이 한창 북과 징을 울려대며 푸닥거리를 하니, 옆에서 집 사람 역시 무당의 말을 듣고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통곡하였다. 그것을 바라보는 오희문 역시 애통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미신인줄이야 알지만, 무당이 딸아이의 목소리를 흉내내는 대목에서는 콧등이 시큰거려 도저히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오희문 딸의 백일 기일이란 이야기를 듣고는 이 고을의 품관과 교생 등 15명 남짓 사람들이 술자리를 베풀고는 오희문과 아들 윤겸을 초청하여 위로의 자리를 가졌다. 비록 오희문은 얼마 전에 난 입병 때문에 술을 마실수가 없었으나, 그들의 호의는 무척 감사하였다. 이곳은 사람들의 품성도 순박한데, 음식도 사람들을 닮아서 모두 담백한 맛이었다. 이런 순박한 맛이야말로 선현들이 말한 후하고 아름다운 풍속이 아니었겠는가. 위로해 준 사람들은 모두 술에 취하여 저마다 시끄럽게 떠들고, 노래도 하고, 춤을 추기도 하였다. 맨 정신의 오희문은 자리에 앉아 살아있던 시절 딸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미신인줄 알면서도 기도를 올리다”

오희문, 쇄미록, 1597-01-16

1597년 1월 16일, 딸 단아의 증세가 날로 심각해져갔다. 지난 해 10월부터 병을 앓기 시작하더니, 해가 넘기고도 병세가 잦아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오래도록 누워있고 씻지를 못하니 온 몸에 이가 끓고 피부병마저 앓게 되어 그 형상이 참혹하였다. 약을 써도 듣지를 않으니 답답한 노릇이었다. 단아의 병으로 피난 길에 오른지 한 달이 되었건만 아직 충청도 아산 고을에 머물러 있었다.

어떤 사람이 지나가는 말로 가르쳐주기를, 병자의 생기복덕일을 가려서 글 아는 중을 불러가지고 쌀 3되로 밥을 지어 세 그릇에 담고, 정화수 한 그릇에 백지 한 장으로 깃대 5개를 만들어 세운 이후, 징을 치고 경을 외우면서 빌면 자못 효험이 있다고 한다. 오희문은 듣는 순간 그것이 허망한 일인 줄은 알았지만, 딸아이의 병이 어떻게 해도 효험이 없자 이거라도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이리하여 사람을 시켜 중을 불러다가 물었더니, 다행히 내일이 딸 단아의 생기일이라고 한다. 이에 들은 대로 준비해서 그 암자로 보내어 내일 새벽에 기도를 올리도록 하였다. 그리고 종 개질지를 시켜서 짐을 가지고 가도록 하고 아울러 등유 반종지도 함께 보냈다.

중의 이름은 인천이란 자였는데, 호남 출신의 중으로 이 암자에 머물고 있으면서, 이러한 기도로 일을 삼는다 하였다. 오희문은 영 믿음이 가지 않았으나,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기도가 효험이 있기를 빌었다.

“몇 자 되는 뱀을 때려죽이다”

오희문, 쇄미록, 1596-06-16

1596년 6월 16일, 오늘은 종일 음산하게 비가 내렸다. 말더듬이 계집종과 개금이, 그리고 품삭일꾼 두 명으로 하여금 어제 끝내지 못한 김매기를 시켰는데, 역시 오늘도 끝내지 못하였다. 밤에 창 앞에 누워 있는데, 처마 끝에서 잠자던 새들이 놀라 지저귀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이상한 생각에 올려다보니 뱀이 새집을 찾으며 처마에 걸려 있었다. 깜짝 놀란 오희문은 종 덕노를 시켜서 갈고리로 뱀을 걸어 내려서 때려죽였다.

뱀이 오희문 집에 나타난 것은 오늘이 처음이 아니었다. 지난 10일경 그날도 비가 내리는 날이었는데, 처마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 창문을 올려다보니 처마 끝에 뱀이 걸려 있었다. 그 뱀은 길이가 무려 몇 자나 되고 검붉은 반점 무늬가 있는 것으로 보아 독사가 분명하였다. 새집을 찾아서 새끼를 잡아먹기 위해서 지붕에 올라갔던 것이다. 만일 잡아 죽이지 않으면 필경 사람을 해칠 뻔했으므로, 뱀을 잡은 것을 다행스럽게 여겼던 터였다.

그런데 오늘 잡은 뱀을 보니 얼룩진 무늬가 먼젓번 죽였던 뱀과 똑같은 것이었다. 독이 있는 뱀이 이와 같이 자주 출몰하니 매우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며칠 사이에 이와 같은 큰 뱀을 두 마리나 잡아 죽였으니, 혹 집안에 이상한 변고가 생기는 것은 아닌지.... 오희문은 마음에 꺼림칙한 생각이 들어 고개를 가로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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