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본문 바로가기


가뭄에 농사를 걱정하다


1599년 4월 4일, 오늘 평강현 관아에서 사람이 와서 아들 윤겸의 편지를 전해주었다. 윤겸은 지금 간성에 있는데, 편지는 지난 20일에 써 보낸 것이었다. 윤겸은 이번에 공무로 영동 지방에 갔다가, 그 길로 금강산에 들어가 금강산 유람을 하고 올 계획이라 하였다.

오늘 오희문은 두 계집종을 시켜 깨밭을 매게 하였다. 요사이 가뭄이 너무 심하여 밤에는 춥고 낮이면 서남풍이 종일 그치지 않고 불어 누른 티끌이 해를 가리고 있었다. 본래 봄 농사에는 비가 너무 오는 것을 경계하고 있는데, 요사이 산골짜기 속 밭곡식들은 오히려 비를 기다리는 형국이었다. 듣자니 경기도의 논에도 아직 종자를 심지 못하고 때를 넘긴 것이 많다고 하던데, 이곳 강원도야 말해서 무얼 하겠는가. 이렇듯 가뭄이 심하니 민생이 극도로 걱정스러웠다.

오희문의 집에서는 집사람이 누에치는 것을 이미 시작하여 석잠이 지났고, 딸들의 누에는 바야흐로 석잠을 자고 아직 일어나지 않았으니 이제부터 날마다 뽕을 따기에 사람과 소가 모두 바쁠 터였다. 조밭은 아직도 풀을 매주지 못했고, 콩밭은 전혀 씨를 뿌리지 않았으며, 팥밭도 다 갈지 못하였다. 이렇게 바쁜 와중에 양식은 이미 다 되었고, 가뭄은 이리 심해지기만 하니, 참담한 심정을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었다.

출전 : 쇄미록(𤨏尾錄)
저자 : 오희문(吳希文)
주제 : 미분류
시기 : 1599-04-04 (윤)
장소 : 강원도 평강군
일기분류 : 전쟁일기
인물 : 오희문

관련자료링크  더보기







집필자 소개

글 그림 | 서은경
서은경
만화가. 1999년 서울문화사 만화잡지공모에 당선되며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그간 지은 책으로 『마음으로 느끼는 조선의 명화』, 『소원을 담은 그림, 민화』, 『만화 천로역정』, 『만화 손양원』 등이 있으며, 『그래서 이런 명화가 생겼대요』, 『초등학생을 위한 핵심정리 한국사』 등에 삽화를 그렸다.
● 제5회 스토리테마파크 창작 콘텐츠 공모전 담임멘토
● 제6회 스토리테마파크 창작 콘텐츠 공모전 전문심사위원
● 제7회 전통 기록문화 활용 대학생 콘텐츠 공모전 면접심사위원
“책을 보는 선비에게도 농사를 돌보는 것은 집안의 급무이다”

남붕, 해주일록,
1932-10-10 ~ 1932-10-13

1932년 10월 10일. 남붕은 아침에 아이 둘에게 공부를 가르쳐 준 후 머슴들을 시켜 똥거름과 재거름 위에 미려에 심을 보리 종자를 쌓아 놓았다. 내일 보리 파종을 하기 위해서였다.

다음날 미려의 논에 보리를 파종했는데, 남붕은 새벽 일과를 마치고, 아침에 아이들을 가르친 후 올해 시전에 관해 논의하는 문제로 종파에 편지를 써서 부치느라 아침에 다소 분주했다. 그리고 백일동 어머님 묘소에 가서 곡하고 돌아와 오후에야 미려의 논에 나가볼 수 있었다.

머슴과 일꾼들이 보리 파종할 땅으로 만들기 위해 땅을 다듬은 후 보리를 파종했는데, 일꾼이 몇 명 안 되어 겨우 일을 마치기도 했지만, 남붕이 가기 전까지 해놓은 일이 온전하지 않아 일이 늦기도 했다. 남붕이 보아하니 새로 흙을 갈아엎어 놓긴 하였으나 주먹만 한 흙덩이가 바둑알처럼 어지럽고 별처럼 깔려서 이 상태로는 보리 종자를 넣을 수 없었다. 남붕은 결국 머슴과 일꾼에게 다시 써레질로 곱게 부시게 하고 그런 뒤에 보리를 파종하게 했다.

남붕은 만약 자신이 이때 나가 보지 않고 거친 땅에 이미 파종을 한 다음에 나갔거나, 머슴에게 맡겨놓고 나가보지 않았다면 이번 보리농사는 허사가 되어 심하게 후회할 뻔 했다고 생각했다. 여름과 가을이 가고 겨울이 왔는데, 남붕은 이제 겨우 한 번 나가서 보리농사를 감독했는데 일이 이와 같았다.

다음날에도 파종하는 일로 소란스러워 남붕은 종일토록 공부를 접었다. 독서하는 선비도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것만 고수하면서 전혀 농사를 돌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대개 농사에 힘쓰는 한 가지 절차는 집안의 급무이고, 배우는 자가 세상은 알지 못하면서 오래도록 책만 보는 것은 집안을 보전하는 양책이 아니다.

“비가 오자 모두 도로에서 춤을 추다”

장흥효, 경당일기, 1615-06-13 ~

1615년 6월 13일, 장흥효가 살았을 당시에는 모내기가 보편적인 것은 아니었다. 벼의 파종은 대개 직파(直播)가 일반적이었다. 벼를 논에 직접 뿌리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모내기가 본격적으로 도입되면서 직파를 할 때 물이 필요한 것이 어느 정도 해결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모내기를 하더라도 문제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모내기를 했는데 물이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1615년은 기근이 심하게 이어졌다. 모내기를 해야 하는데 오래도록 가물었기 때문에 모판에 모가 이미 많이 자라 있었지만 모를 논에 옮겨 심지 못했다. 물이 없으니 옮겨 심는 즉시 말라죽는 것은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하늘에서 비가 오기를 기대한 것은 양반과 농민, 노비 할 것 없이 모두 같았다.

그런데 기다리고 기다리던 비가 드디어 내렸다. 논에 비가 적셔 들기도 전에 모든 마을 사람들이 모를 논에 옮겨 심었다. 검은 머리의 어린아이부터 시작하여 흰머리의 나이 든 노인들까지 모두 도로가에 나와 함께 기뻐하며 손뼉을 친 것은 마을의 그 어떤 대소사보다도 기쁜 일이었기 때문이다.

“소를 빌려다 밭을 갈다”

논갈이, 《단원 풍속도첩》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오희문, 쇄미록, 1594-03-16 ~

1594년 3월 16일, 오늘 오희문은 이웃 김대성과 이등귀의 집에서 소를 빌려왔다. 전란이 벌어진 지 2년, 그간 이곳저곳에서 양식을 꾸어다 생활하였지만 전란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미 식구들은 매 끼니를 걱정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비록 눈앞의 위기를 넘길 방법은 아니었지만, 전란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도 모르는 일이었기에 오희문은 밭에 종자를 뿌려 농사를 짓기로 한 것이었다. 이를 위해 이미 지난달부터 태수에게 부탁하여 관의 둔전을 경작할 수 있게 해달라 청하여 허락을 맡아놓은 터였다.

종 두 명을 데리고 가서 소를 몰게 하고, 또 한 종은 삽으로 밭두둑을 꾸미도록 하였다. 그런데 새벽부터 날이 흐리고 비가 뿌려서 일이 영 진척되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날이 좋은 날 하고 싶었으나, 이미 이웃으로부터 소까지 빌려온 마당이라 일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걱정한 것과 달리 저녁까지 비는 내리지 않아 밭을 가는 일은 마칠 수 있었다. 그러나 밭두둑을 고르는 일은 모두 마치지 못하였다. 내일 두둑 고르는 일을 마치고 씨까지 뿌릴 작정이었다.

그런데 관아에서 받아온 종자곡이 거칠고 잡것들이 섞여서 여간 부실한 것이 아니었다. 본래 5말을 빌려 왔는데, 부실한 것들을 제외하고 보니 경우 2말하고 3되 밖에 되지 않았다. 이것으로는 밭에 충분히 종자곡을 심을 수 없는 양이었다. 이리하여 함열현감에게 도움을 밭은 벼 3말을 종자곡으로 쓰고자 했다. 걱정은 이 벼를 종자곡으로 쓰고 나면 당장 식구들의 끼니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막막했던 것이다. 과연 내일 심은 종자곡이 열매를 맺고, 그것을 식구들이 먹을 수 있는 날이 올는지... 그때까지 우리 식구들이 무사히 곤궁함을 넘길 수 있을지... 오희문은 이러한 상념으로 마음이 어지러워졌다.

“비가 오지 않기를 바라다”

권상일, 청대일기, 1745-08-27 ~

1745년 8월 27일, 날씨가 심상치 않다. 8월 초에 있었던 비바람으로 근심과 걱정은 깊어만 갔다. 그 때 불어닥친 비바람은 여느 때와는 달랐다. 바람의 기세가 줄어들 듯하다가도 오히려 더 크게 불어와 벼와 조가 많이 손상을 입었다. 어떤 조처가 필요할 듯싶었다.

그런데 권상일이 있던 경상도 상주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이번 풍수해로 인하여 산골짜기와 냇가는 전부 논과 밭이 유실되었다고 한다. 큰 밭의 경우에는 조금 나은 듯싶지만, 그래도 추수는 거의 기대할 것이 없을 지경이라고 했다. 그런데 오히려 천수답은 곡식이 잘 익었다고 한다. 천수답은 하천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하천 범람으로 인한 피해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용여(龍如)가 보내온 편지에도 그러한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8도 전국이 모두 큰 흉작을 볼 것이라는 소식이었다. 장맛비는 상주만이 아니라 서울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7월 말에는 정부 주재로 기청제(祈晴祭)를 여러 차례 지냈다고 한다. 그래서 용여도 기청제 제관에 차출되어 사흘 밤을 북문의 임시 막사에서 노숙을 해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 날씨는 상주나 서울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이웃 할머니의 밭을 차경하다”

농가집성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오희문, 쇄미록, 1598-06-18 ~

1598년 6월 18일, 오희문 집 근처에 노인이 혼자 살고 있었다. 농사철이면 마을 사람들이 손을 도와 매해 농사를 짓고 있었는데, 올해부터는 그마저도 힘이 든지 전혀 파종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리하여 사람을 시켜 할머니에게 물으니, 올해는 농사가 힘들 것 같다고 말하며 밭을 그냥 묵혀둘 계획이라고 하였다.

오희문은 집에 식구는 많고 항상 경작할 땅이 없어 걱정이었는데, 이 기회에 할머니의 밭을 빌려다 경작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이리하여 할머니에게 의사를 타진하니, 흔쾌히 허락하였다. 밭을 빌리는 대가로 포목 반 필을 주었다.

집의 종들을 시켜 보리씨앗 2두를 마련하고는 파종을 위해 밭을 갈기 시작하였다. 오늘 한 번 갈아놓고, 이후 풀이 썩기를 기다렸다가 두어번 더 갈고 나면 보리를 뿌릴 계획이었다. 다만 밭이 좋지 않아서 여러 번 갈아도 파종하기에 적당하지 않다고 하니 다소 낭패스러웠다. 그러나 밭이 오희문 집 바로 앞에 있으니, 이것만 하여도 상당한 장점이었다. 오희문은 밭이 조금 더 좋은 땅이었으면 하였으나, 그것 또한 과욕인 듯하여 가까운 것으로 만족하자고 스스로 생각하였다.

“늘 손을 봐야 하는 논밭의 경계 두렁”

지금도 토지의 경계에 대해서는 매우 정확한 측량을 하고 있지만, 전근대 사회에서도 농지의 경계는 국가에서 관여하며 매우 중요시 여겼다. 전근대 사회에서는 쌀이나 곡식으로 세금을 거둬들였기 때문에 논과 밭의 경계는 납부하거나 징수해야 할 세금의 양과 직결되었다. 정확한 측량을 위해 국가에서는 양전제도를 이용하여 농지를 조사·측량했다. 고려 시대에도 여러 차례 시행되었던 양전제도는 소유권을 국가차원에서 확인하는 계기도 되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중세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토지를 매개로 농민을 지배하기 위한 기초 작업이었다. 즉, 양전은 중세사회의 토지제도 위에서 그 토지를 운영하기 위한 첫 작업이었으며 토지제도를 전제로 한 전정(田政)의 가장 기초적이고 중요한 문제였다. 양전을 통하여 전국의 결총(結總)이 확정되면, 그에 따라 각 지방의 전결세액이 확정되고 토지마다 배정해 징수하였다. 이렇게 중요한 토지의 경계, 특히 논과 밭의 경계는 늘 개인 간 분쟁의 원인이 되곤 했다. 논과 밭의 경계는 보통 흙을 모아서 만든 두렁이 그 역할을 한다. 두렁은 논이나 밭의 경계이자 논에서는 물을 가두어 놓는 역할도 한다. 또한 지나다니는 길로도 이용된다. 그러나 이 두렁의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점 허물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모내기 전에는 물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두렁 바르기를 하여 논두렁을 유지한다. 밭의 경계도 두렁을 만들어 놓기도 하고, 제주도처럼 돌담을 쌓는 곳도 있다. 두렁은 늘 살피고 부지런히 손질을 해야만 하는 토지의 경계이다. 재종숙 김호도 김광계가 평소에 밭의 경계를 세세히 살피지 않고 있다고 생각해서 화를 낸 것이다. 두렁은 늘 살피지 않으면 금세 무너지기 때문이다.

닫기
닫기
관련목록
시기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장소 출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