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기러기(출처: 서울대학교박물관)
“오늘이 배 정승 댁 애기씨가 시집가는 날이 맞습니까?”
정생이 물어보자 아내가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아이구머니나. 그렇네요. 그게 오늘이었군요.”
정생이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어쩐지 아무 준비도 하지 않고 있더라니, 완전히 잊어버린 겝니까?”
“글쎄 말이에요. 이젠 자꾸 깜빡깜빡하네요.”
아내는 대청 밖으로 몸을 기울이며 버들네를 찾았다.
“버들네야, 오늘 배 정승 댁 혼삿날이다.”
“어머나, 마님, 그걸 이제 말씀하시면 어째요?”
버들네가 부엌에서 튀어나왔다. 행주치마에 손을 닦으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방으로 들어와라. 머리부터 만져야겠다.”
버들네가 안방으로 들어가며 부엌에 대고 외쳤다.
“삼월아, 너는 물 좀 끓여서 가져와라.”
정생이 혀를 찼다.
“아직 진시(辰時, 7시~9시) 밖에 아니 되었습니다. 천천히 하세요.”
아내도 혀를 찼다.
“주인마님 하시는 말씀 들었니? 남자란 다 저렇다니까. 삼월이가 물 끓여오면 주인마님 두루마기도 다림질해 놓으라고 전해라.”
혼례는 저녁 무렵에 치러지는 것이라 아직 시간은 차고 넘치는데도 여자들 설레발은 당할 도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정생은 서당 쪽으로 물러났다. 서당에 모여 앉아 학동들 글 읽는 소리가 어쩐지 여름날 개구리 소리처럼 와글와글 들려야 할 텐데, 학동들도 오늘 있을 잔치에 군침들만 넘어가는 모양인지 영 소리가 시원찮았다.
혼쭐을 내줘야겠구나 하고 인상을 단단히 찌푸린 채 신을 벗으려는데, 대문에서 ‘이리 오너라’ 하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이 시간에 찾아왔나 싶어 설렁설렁 걸어가 보니, 배 정승네 손자 배진구가 와 있었다.
“어서 오게.”
“강녕하셨습니까?”
“별일 없네. 영감님도 무고하시고?”
배 정승네라고 부르지만 정승을 지낸 것은 오래전 일이고 허직으로 첨지 벼슬을 받은 것이 다였기 때문에 영감이라 부르는 것이었다.
“덕분에 무탈하십니다.”
사랑채로 배진구를 데려가 앉히고 차를 내오게 했다. 차를 한 번 입에 댄 후에 배진구가 용건을 털어놓았다.
“수모(首母)를 데려오려고 하인에게 견마잡이를 시켜 보냈는데, 퇴짜를 맞고 그냥 돌아왔지 뭡니까? 이거 완전 큰일 났습니다.”
수모란 혼례를 주관하는 여인을 가리키는 말이다. 혼례에 사용할 칠보족두리와 혼례용 의상 준비는 물론, 혼례 절차 전부를 주관하는 역할을 한다. 물론 선대왕(정조)이 칠보족두리와 같은 사치품은 사용하지 못하게 금령을 내린 바 있었지만, 가체(加髢, 머리 장식용 가발)도 올리지 못하는데 혼례식에 화려한 족두리도 사용 못 하는 건 너무 가혹하다 하여 다들 쉬쉬하며 사용했다. 아무튼 수모가 없으면 혼례를 주관할 사람이 없는 셈인지라 엄청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기산풍속도첩》, 〈시집가서 잔 붓는 모양〉
신부 옆에서 혼례를 돕는 여성이 수모(首母)이다.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정생도 혀를 끌끌 차며 입을 떼었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었는가? 미리 말을 해둔 것이 아니었나?”
“당연히 한 달 전에 이미 이야기를 해두었죠. 그런데 갑자기 병판대감 댁에 일이 있어서 못 오겠다고 하지 뭡니까?”
“병판대감 댁에 혼사가 있다는 건가?”
“병판대감 댁 혼사는 아닌 모양이고 일가 중에 혼례를 치르는 곳이 있는 모양입니다. 병판대감 댁 일이라는데 우리가 선약을 했으니 안 된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그래도 그건 너무 무책임하지 않나?”
“그래서 그쪽에서 애기 수모를 보내주긴 했는데, 이건 뭐 아는 게 없는 꼬맹이가 와서 도무지 제대로 되는 게 없습니다.”
“아, 그래도 누가 있긴 있는 거구만?”
배진구가 손사래를 쳤다.
“그게 있으나 마나 한 상황인지라….”
“허허,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인가?”
정생이 물었다. 정생의 질문은, 그러니까 여긴 왜 왔느냐는 질문인 셈이었다.
“이 댁의 여종이 혼례 경험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좀 도와주시면 안 될까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누구 말인가? 버들네?”
“아, 제가 이름은 잘 모릅니다만….”
“가만있어 보게.”
정생은 마당쇠를 불렀다. 마당쇠의 아내가 버들네였기 때문이다.
“마당쇠야, 네 처가 혼례 경험이 좀 있다는데 사실이냐?”
마당쇠가 얼른 대답했다.
“아, 그렇습니다. 저희 부부가 예전에 한양에 있었을 때 수모 집에서 새경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좀 쳐다본 가락이 있습니다.”
“그렇구만. 그렇긴 한데, 지금 버들네는 내 처의 단장을 도와주고 있을 텐데….”
정생이 조금 난처한 기색을 보였더니 배진구가 바로 술병을 하나 꺼냈다.
“훈장 어르신, 이게 청나라 가흥에서 담근 소흥주라는 것인데, 한 번 맛보여 드릴까 해서 가져왔습니다.”
정생이 꿀꺽 침을 삼켰다.
“소흥주라 하면 춘추시대에 월왕 구천이 오나라를 정벌할 때 받아서 군사들의 사기를 올렸다는 술 아닌가? 그 귀한 술이 어떻게 여기까지 왔나?”
“지난번 사행길에 저희 당숙 어르신이 서장관으로 북경을 다녀왔습니다. 그때 몇 병 구하여 가져왔는데 아버님이 잘 보관하고 있다가 훈장 어르신께 인사로 드리라고 하셔서 가져왔습니다.”
정생은 속으로, ‘일이 잘 안 풀리니까 내놓은 것이고, 한 번에 수락했으면 안 내놓았겠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귀한 술까지 내놓으며 부탁하니 더 이상 안 된다고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내는 물론 펄쩍 뛰었지만, 결국 잘 달래서 버들네를 배 정승 댁에 보낼 수 있었다. 배진구는 같이 한잔하자는 말에 바빠서 같이 가보아야 한다고 버들네를 데리고 떠나버렸다.
술병을 앞에 두고 있자니, 또 안 마셔볼 수가 없었다.
장진주(將進酒), 배막정(杯莫停), 여군가일곡(與君歌一曲).
술잔을 권하노니 거절치 말라. 그대들을 위해서 한 곡조 읊으리니.
이태백의 〈장진주〉를 읊조리며 소흥주를 홀짝 마셨다. 취기가 돌자 이젠 한시보다 익숙한 시조가 흘러나왔다.
한 잔 먹세그려. 또 한 잔 먹세그려.
꽃 꺾어 산(算) 놓고, 무진무진 먹세그려.
〈이태백 신선도〉(출처: 국립민속박물관)
“일어나시게, 이제 도착하였네.”
도착하다니? 어디 여행이라도 갔단 말인가? 정생은 숙취 때문인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뱃멀미도 이제 끝이네. 드디어 가락국에 도착했네.”
가락국이라니,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신보(申輔), 정신 차려. 저기 가락국 왕이 보낸 사신이 곧 도착할 판이니 위의(威儀)를 갖춰야지.”
그러자 정생 입에서 자연스럽게 말이 튀어나왔다.
“조광(趙匡), 걱정하지 말게. 내 할 일은 알고 있으니까.”
정생은 말을 해 놓고도 믿기지 않는 눈치였다. 저 사람 이름을 어찌 아는 건지?
조광이 가리킨 쪽을 보니 작은 배가 하나 정생 일행이 탄 붉은 돛을 단 큰 배로 다가오는 중이었다. 배에 있던 한 사내가 큰 소리로 말했다.
“저는 가락국의 수로왕이 보낸 사신 유천간(留天干)입니다. 왕후가 되실 분을 모시고자 하니, 저를 따라 왕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정생은 어찌할 바를 몰라 우물쭈물했다. 분명히 사랑채에서 소흥주를 마시던 중이었는데. 그때 비단옷을 입고 있는 소년이 앞으로 썩 나섰다.
“나는 너희들과 모르는 사이인데, 무엇을 믿고 함부로 너희를 따라가겠느냐?”
소년인 줄 알았더니 목소리를 들으니 여자였다. 비단 바지를 입고 있어서 남자인 줄 알았던 것이다. 정생은 그때서야 자신이 가야국 수로왕과 허황옥이 만난 때에 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어떻게 다시 돌아갈 수 있는지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김해 수로왕비릉(金海 首露王妃陵)(출처: 문화재청)
수로왕은 유천간의 전언을 듣고 산 아래에 장막을 쳐서 배를 타고 온 장래 왕비의 거처를 임시로 만들었다. 정생은 이 임시거처가 허황옥의 집 같은 것이라는 점을 눈치 챘다. 조선의 혼례 풍속은 신랑이 신부의 집으로 가 혼례를 치르게 되어 중국의 친영(親迎, 신랑이 신부를 자기 집으로 데려가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신랑이 신부의 집에 와 전안례(奠鴈禮, 신랑이 보낸 기러기를 상에 올리고 절하는 것), 교배(交拜, 신랑, 신부가 맞절하는 것), 합근(合巹, 신랑, 신부가 잔을 주고받는 것)을 한 뒤에 첫날밤을 보낸다. 며칠간 신부의 집에 머물렀던 신랑이 신부와 함께 시가에 인사를 가는 것을 신행(新行)이라고 한다. 신행 후에 다시 신부는 자기 집으로 돌아와 머물게 된다. 시댁에 들어가는 시기는 형편에 따라 각기 다르다.
《기산풍속도첩》, 〈전안하는 모양〉(출처: 국립민속박물관)
사흘째 되는 날 수로왕은 허왕후와 함께 궁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수로왕이 정생을 따로 오라고 명했다.
“자네는 이곳 사람이 아닌데 어찌 여기에 있는가?”
수로왕의 날카로운 눈매에 정생은 당황하고 말았다.
“아, 네? 저….”
“이것을 마시게. 혜초(蕙草)로 만든 술이야.”
“네?”
정생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수로왕이 내린 술을 마셨다. 단 한 잔에 정신을 잃고 말았다.
“일어나세요. 웬 낮술을 이렇게 드셔가지고….”
아내가 정생을 조심스레 흔들고 있었다.
“어? 아니, 저, 전하…. 송구하옵니다.”
정생이 머리를 조아리며 왜 하는지도 모르는 사죄를 올렸다. 아내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낮잠도 참 달게 주무신 모양입니다.”
“아….”
그제서야 정신이 돌아온 정생이 머리를 흔들었다. 정생이 겸연쩍게 아내에게 물었다.
“그래, 저, 저기 버들네는 배 정승 댁으로 갔지요?”
“벌써 갔지요. 덕분에 삼월이가 머리 손질을 해서 엉망이지 뭐예요. 참 일이 이상하게 되어서.”
“그게 다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따르지 않아서 생기는 일이요. 신부가 첫날 바로 신랑을 따라 친영(親迎)을 하면 이런 번거로운 일이 없을 것을.”
신행(新行, 신랑이 신부를 데리고 신랑 집으로 가는 절차)
(출처: 한국국학진흥원_조선의 가례)
“무슨 말씀을 그리하세요. 여자 혼자 난생처음 보는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이면 신혼생활이 즐겁기나 하겠어요? 차차 얼굴을 익히는 게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좋은 전통이에요.”
“허허, 성현의 말씀을 아녀자의 좁은 소견으로 그렇게 함부로 말하면 아니 되는 것이오.”
아내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 성현의 말씀이 소중화(小中華)의 조선에서 지켜지지 않는 것은 뭣 때문이겠어요? 신부 집이 딸 하나를 지원해주지 못하는 허름한 집이면 몰라도 그렇지 않다면야 뭣 때문에 서로 힘든 생활을 하게 만들겠어요? 중국은 중국대로 방식이 있는 것이고, 우리 조선은 조선대로 방식이 있는 것이죠.”
“허허, 갈수록 큰일 날 소리만 하는군요.”
“큰일 날 게 뭐 있어요? 현아도 외할아버지 집에서 네 살 때까지 있었는데 그거 다 잊은 건 아니죠?”
“흠, 흠, 그걸 잊었을 리가 있겠어요.”
“그동안에 공부도 많이 했잖아요. 과거는 결국 안 됐지만, 그래도 그 공부로 서당은 열 수 있었죠.”
정생이 뜨끔해서 얼른 말했다.
“하, 하긴 허왕후도 아유타국에서 금은보화를 잔뜩 가지고 왔죠. 친정이 없어도 대신할 만큼 재물이 있었으니….”
“갑자기 허왕후라니, 누굴 말씀하시는 거예요?”
“아까 내가 가락국에 갔다가….”
정생이 아무 생각 없이 꿈 이야기를 꺼냈다가 아내가 뜨악한 얼굴로 돌아보자 말꼬리를 말았다.
“어흠, 거, 이바구만 하다가 늦겠소이다. 어서 갑시다.”
정생이 재게 발을 놀렸다. 아내가 배시시 웃으며 치맛단을 말아 쥐고 총총걸음으로 그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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