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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간의 정이야 끝이 없지만, 운명을 어쩌랴 - 아들이 끝내 숨을 거두다
1616년 10월 24일, 복이(福伊)가 산양(山陽)에서 돌아와서 김택룡은 그 곳에 사는 아들 김적의 편지를 받을 수 있었다. 아들의 병은 차도가 없지만 음식은 조금 먹는다고 하며, 또 그 집에 사위를 맞이하는 날짜를 아직 잡지 못하였다고 한다.

11월 13일, 금복이가 이틀 전 11일에 산양에서 김택룡이 있는 곳으로 왔다. 오면서 아들 김적의 편지를 가져다 주었는데, 편지에 의하면 적의 병은 여전히 차도가 없다고 하며 손녀의 혼사도 아직 확실히 결정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또 과일을 함께 보내왔다. 아들 김적의 노비 임인(印金)은 이자로 받는 곡식을 독촉하는 문제로 김택룡이 있는 곳에 온지 이미 오래되었다. 지금 둘 다 함께 돌아가길래 김택룡은 아들 김적에게 답장 편지를 보냈다.

12월 4일, 김택룡의 큰 아들 김숙이 제 동생 김적의 질병을 살펴보고자 산양으로 갔다. 가서 기별하길, 김적이 여위고 뼈만 남아 질병과 싸울 수 없을 정도라고 하였다. 또 혼자 일어나지도 못해 억지로 일으켜 세워야 한다고 하였다. 김택룡은 아들이 딱해서 뭐라고 말할 수조차 없는 심정이었기에 편지는 생략하고 다만 작은 종이에 병에 대해 간단히 묻는 내용만 써서 보냈다.

12월 17일, 김택룡의 셋째 아들 김각이 인금이를 데리고 산양으로 갔다. 김택룡은 아들 김적에게 편지를 쓰려다 그만두고 단지 김각을 통해 말로만 소식을 전하도록 했다. 그리고 속으로
‘이래저래 심난한 일만 가득하고 즐거운 일은 하나도 없으니, 편지에 쓸 말이 뭐가 있겠는가?’
라고 생각하였다. 얼마 지나서 김택룡은 아들의 병이 위중하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또 생각하였다.
‘부자간의 정이야 끝이 없지만 어쩌겠는가? 운명인 것을...’

그리고 1617년 1월 28일, 이 날 김택룡은 아침에 책방의 작은 대청에서 아들 김적을 위해 상복을 입었다. 그리고 생질 정득 · 조카 김형 · 아들 대평 · 손자 중길 · 덕응(德應)도 상복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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